17화
그 다음 주 월요일.
테렌스는 오전 아홉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부터 채플을 찾았다. 하품을 찍찍 해대는 레이븐을 이끌고.
후문으로 들어가기 직전, 그는 창밖에 쪼그려 앉은 발레리를 발견했다.
“로빈슨? 수업 안 들어가고 뭐 하는 거지?”
“아, 오늘은 되게 일찍 오셨네요. 아직 출근 시간 5분 남았으니까 좀 봐주세요.”
“그거 새 아닌가?”
“네, 새 맞아요.”
초록빛을 띠는 작은 새가, 발레리의 손바닥에 얹힌 빵 부스러기를 콕콕 쪼아먹고 있었다.
새의 한쪽 날개에는 작은 천 조각이 감겨있었다.
“다친 것 같은데.”
“네, 출근하려는데 갑자기 복도 창문에 부딪히더라고요. 나와 보니까 쓰러져 있었어요.”
“그래서 치료해 준 건가?”
“그럴 능력은 없고요. 응급처치만 했어요.”
테렌스는 가까이 다가와 새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천에 감긴 날개의 각도가 살짝 뒤로 꺾여있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한동안 날지 못할 듯했다.
그는 뒤에 멀뚱히 서 있던 레이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레이븐, 동물에게도 치유 마법이 걸리나?”
“하암, 글쎄요, 새한테는 안 해봤는데요.”
레이븐은 하품하는 입을 손으로 가리지도 않고 답했다.
“한번 시도해 봐.”
“…저 치유 전공 아닙니다. 뼈 부러진 건 못 붙여요.”
레이븐은 그의 지시에 떨떠름해 하면서도 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그가 다가와서 주문을 걸자, 지팡이 끝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흘러나와 새의 몸을 휘감았다.
마력 때문에 몸이 잠시 두둥실 떠오른 새는 눈을 끔뻑이며 어리둥절했다.
은은한 빛 속에서, 꺾여있던 새의 날개가 서서히 제 각도로 돌아왔다.
새는 회복을 직감한 듯 푸득푸득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러자 날개에 감긴 천이 스륵 풀렸다.
발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와! 마법사님,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그러게요, 이게 되네요.”
레이븐도 스스로의 성과를 신기해하고 있었다.
몸을 회복한 새는 포르르 날아 발레리의 어깨 위에 앉더니, 그녀의 얼굴을 보며 조잘조잘 이야기하듯 지저귀었다.
발레리는 짹짹거리는 새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콧잔등을 장난스럽게 찡그리며.
“아하하, 고맙다는 거지? 그럼 나중에 반짝이는 거 하나 물어와.”
새는 그녀의 어깨 위에서 통통거리다가 그녀의 머리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 엉덩이를 이리저리 뒤흔들며 춤을 추는 것 같더니….
뿌지직, 걸쭉한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도망치듯 푸드덕 날아가 버렸다. 저 하늘 위로 멀리멀리.
“저 지금 정수리가 축축한데…. 쟤 은혜를 원수로 갚은 거 맞죠?”
발레리가 죽상으로 말했다. 머리에 허여멀건 한 새똥을 얹은 채.
“푸하하하핫.”
레이븐이 폭소를 터뜨렸다.
풉.
곁에 선 테렌스의 입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야이! 너 두고 봐 진짜! 다음에 보면 얄짤없을 줄 알아! 나 참새구이도 먹는 사람이라고!”
발레리는 새가 날아간 쪽으로 삿대질을 하며 일갈했다.
그녀는 한참을 씩씩대더니 후원 한가운데 있는 작은 분수대로 달려갔다.
왜 저러지 싶었는데, 그녀는 분수대에 머리를 푹 담그고 벅벅 감았다.
흐르는 물에 이물질을 전부 씻어낸 발레리는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두 남자에게 다가왔다.
“어휴, 아침부터 이게 무슨 봉변이래. 그럼 이제 들어가실까요?”
발레리는 머쓱하게 웃으며 후문 쪽을 가리켰다. 이제 정말 석실로 출근할 시간이었다.
테렌스는 웃음기를 꾹 누르며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머리는 좀 닦고 가지. 어깨가 다 젖는데.”
“아 네, 고맙습니다….”
그가 건넨 세 번째 손수건을, 발레리는 얼떨떨하게 받아들었다.
테렌스는 그녀의 뒤를 따라 채플로 들어갔다.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손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툭툭 털어내는 동작도 참 절도가 있었다. 괜히 또 웃음이 났다.
볼수록 흥미로운 인간상이었다. 시간을 들여 탐구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
켄드릭은 근무 도중 채플 후문으로 불려왔다.
물론 테렌스의 명이었다.
저번에 본 면접 결과를 알려주려는 것 같긴 한데…. 부르더라도 왜 굳이 채플로 오라는 걸까.
얼마 전 발레리의 방에서 한잔했다가 꾸중을 들은 탓인지, 이곳에서 황태자를 또 마주하기가 왠지 껄끄러웠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일찍 왔군.”
켄드릭은 황태자의 얼굴이 왠지 평소보다 많이 굳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래도 표정이랄 게 없는 사람이었지만, 평소보다 더 찬바람이 불었다.
어떻게든 어색한 분위기를 깨야 할 것 같아서, 켄드릭은 아무 말이나 꺼내기로 했다.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뭐지.”
“전하께선 저희 가문 검술을 잘 아시는 것 같던데, 그 배경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어릴 적 패트릭 경에게서 검술을 배웠다. 잠깐이었지만.”
패트릭은 켄드릭의 첫째 형이었다.
10년 전 와이어 숲을 수색하다 실종된 인물. 한때 제국 최고의 검사로 이름을 날렸었다.
켄드릭은 당시 가문에 닥쳤던 비극을 다시 떠올리고는 잠깐 말을 잃었다.
“…아, 그러셨군요.”
“따라오겠나? 앞으로 자네가 배치될 곳으로 안내하려 한다.”
둘의 대화 분위기를 지켜보던 레이븐은 이들 사이에서 모종의 긴장감을 감지했다.
채플 안에 들어선 세 남자는 대화 한마디 없이 길고 긴 나선형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켄드릭은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마력석 광산 경비대로 발령 날 줄 알았는데. 대체 왜 이렇게 지하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는 걸까.
그렇게 다다른 석실 문 앞은 문지기 서른 명이 지키고 있었다. 기사 스무 명, 마법사 열 명이었다.
켄드릭은 귀한 인력인 마법사들이 왜 이런 공간에 몰려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마법사들과 함께 일해도 괜찮냐는 질문이 이래서 나온 건가?’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는 켄드릭을 보며 테렌스는 강하게 당부했다.
“모두 기밀임을 명심해야 한다. 경이 어디서 일하는지, 누구와 일하는지, 무엇을 보는지. 전부다.”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켄드릭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 시각 석실 내부.
땅따먹기를 8단계까지 모두 정복한 프리다는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다. 발레리는 그런 황녀를 향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발레리, 나 이제 정말 잘하죠? 오늘은 한 번도 금 안 밟았어요.”
“네, 이렇게 땅따먹기를 빨리 배우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정말요?”
“그럼요! 발이 너무 빨라서 눈에 안 보일 지경이에요.”
발레리가 살짝 입에 발린 칭찬을 하자, 프리다는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싱그럽게 웃었다.
그래, 이 얼굴 보는 맛에 칭찬하는 거지.
발레리는 황녀의 사랑스러운 표정에 또다시 넋을 잃고 헤죽거렸다.
쿵쿵.
평소와는 조금 다른 묵직한 문소리였다.
“음? 또 오빠인가?”
프리다가 종을 울려 철문의 개방을 허했다.
석실 철문이 평소보다 크게 삐걱대며 천천히 열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행차하셨구먼, 발레리는 전혀 반갑지 않은 기색으로 벌어진 철문 틈새를 응시했다.
“…으억?!”
그녀가 뜨악하며 아래턱을 쿵 떨어뜨렸다. 귀신이라도 본 듯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발레리의 이상한 반응에 프리다도 물음표를 띄우며 같은 쪽을 바라보았다.
테렌스와 레이븐에 이어 처음 보는 남자가 석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발레리는 양손으로 눈을 비비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우 씨, 내가 헛것을 보나.”
프리다는 처음 보는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황궁 근위기사 복장인데…. 발레리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남자는 얼이 빠진 채 발레리만 끔뻑끔뻑 쳐다보고 있었다.
발레리만 줄기차게 응시하던 켄드릭은, 그녀의 곁에 선 백금발 여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프리다의 사파이어빛 벽안과, 켄드릭의 에메랄드빛 녹안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맞닿았다.
초면인 남녀의 첫 눈 맞춤이었다.
켄드릭은 이 백금발 여인이 누군지 파악하려는 듯 집중해서 살폈다.
그의 시선을 받는 프리다의 뺨에는 분홍색 꽃물이 번져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먼저 침묵을 깬 건 테렌스였다.
“켄드릭 경은 프리다와 초면이겠지. 이쪽은 내 여동생이다.”
“반가워요, 프리다예요.”
“아…!”
백금발 여인이 황녀라는 설명에 켄드릭의 널따란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상상 속의 동물을 실제로 본 듯 경탄하는 얼굴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녀 전하. 켄드릭 유진 프레이저입니다.”
상황 파악이 끝난 켄드릭은, 곧바로 절도 있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경례했다.
저런 게 기사들이 하는 인사인가. 발레리는 켄드릭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네의 집착광팬을 이곳에서 또 보게 돼서 놀랐겠지.”
테렌스가 발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켄드릭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발레리,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러는 너야말로 왜 여기 있는데? 광산 간다며.”
테렌스는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광산이라니. 누가 광산을 간다는 거지.”
그의 질문에 켄드릭은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전하, 사실 제가 광산으로 발령 나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햇빛 못 보는 곳에서 마법사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고 하시기에, 저희 영지의 마력석 광산 경비대로 보내시려는 줄 알고….”
“나름대로 일리 있는 추론이긴 한데. 광산 쪽으로 가길 원했나?”
“결단코 아닙니다. 지금 주신 소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실 켄드릭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황녀의 석실 문지기로 발탁된 건 좋은 의미의 인사발령이었다. 황실이 기밀 업무를 믿고 맡긴다는 뜻이니까.
당연히 근무환경 또한 어두컴컴한 광산보다는 석실 쪽이 나았다.
앞으로의 승진 가도 또한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켄드릭은 등 뒤로 주먹을 불끈 쥐며 작게 읊조렸다.
‘앗싸’라고.
“이제 켄드릭 프레이저 경은 프리다의 전속 기사다. 석실 앞을 지키며 황제 폐하보다도 황녀 프리다의 안전을 우선시해야 한다. 충성서약은 약식으로 하지.”
테렌스의 말에 켄드릭은 무릎을 꿇고 자신의 검을 프리다에게 바쳤다. 프리다는 검을 뽑아 들고 켄드릭의 머리와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난생처음 보는 의식을 발레리는 멀거니 서서 바라봤다.
눈앞이 팽글팽글 돌았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선뜻 적응할 수 없었다.
슬슬 이런 자각이 들기는 했다.
‘나 지금 짝사랑하는, 아니 짝사랑하던 놈이랑 직장 동료 된 건가.’
충성서약이 끝나고 넷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프리다는 잠시 머뭇대다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랑 켄드릭 경은 저녁 식사했을까요?”
“아직 안 먹었다.”
“저도 아직입니다, 황녀님.”
“그럼, 여기서 들고 가요. 발레리도 괜찮죠?”
“하하, 네, 황녀님께서 원하신다면요.”
여기서 싫다고 하면 분위기 깨는 거겠지. 발레리는 퇴근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