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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6)화 (16/173)

16화

곧이어 두 여인의 검술 수업이 시작됐다.

어린이용 목검을 든 프리다는 이전보다 손동작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더 이상 휘청거리는 느낌도 없었다. 여전히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건 힘들어했지만, 몸이 비뚤어질 때마다 발레리의 손길이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아줬다.

발레리는 몸을 숙여 프리다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황녀님. 저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으니까, 우리 좀 더 열심히 하는 척하자고요.”

“발레리, 나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알죠, 알죠. 저 사람들 가면 우리 땅따먹기랑 가위바위보 또 해요. 이번엔 3배속으로.”

프리다는 발레리의 말을 듣더니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녀가 목검을 휘두르는 동작이 좀 더 경쾌해졌다.

테렌스와 레이븐은 연무장 구석에 서서 두 여인의 수련 장면을 관전하고 있었다.

레이븐은 테렌스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전하, 황녀님 말이에요. 확실히 이전하고는 다른데요.”

“…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저 아가씨 영입하길 잘하셨어요. 황녀님이 저렇게 웃으시는 건 4년 만에 처음인 것 같은데.”

“…그동안 잘 안 웃긴 했지.”

“선생으로 또래 여자 친구가 와서 말벗도 되고 좋으신가 봐요. 그쵸?”

테렌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한 지점만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레이븐은 검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테렌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직선을 쭉 그었다.

그 끝에 닿은 사람은 프리다가 아니었다.

“음, 전하? 보시는 방향이 틀렸는데요?”

“…무슨 소리지.”

“저 아가씨만 계속 보시는데요? 아까부터.”

또 대답이 없다.

레이븐은 눈을 부릅뜨고 테렌스의 미세한 안면 근육 움직임을 독해했다. 그는 입술을 작게 달싹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둘러댈지 고심하는 것처럼.

“…감시, 그래. 감시해야 하니까.”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감시하는 사람도 있어요?”

“초롱초롱?”

레이븐은 양손을 현란하게 흔들어 대며 ‘반짝반짝’ 율동을 했다.

“눈에서 막 이렇게 별빛이 쏟아지는데요? 평소엔 얼어붙은 동태 눈깔이시잖아요.”

테렌스는 못 들은 체하며 재킷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각료회의까지 20분이다. 가자.”

***

황녀의 석실에 출근한 지 일주일.

발레리는 아침 식사로 나온 게살 수프를 푹푹 떠먹고 있었다.

그녀의 복스러운 식사를 지켜보며, 프리다는 미소를 머금고 질문을 건넸다.

“발레리, 오늘 날씨는 어땠어요?”

“음, 구름이 좀 꼈는데요. 듬성듬성 하늘색이 보였어요. 아직 초여름이라 아침엔 별로 안 더워요.”

프리다는 매일 아침 그녀에게 날씨부터 묻곤 했다. 비가 오는지, 하늘은 맑은지, 온도는 어떤지.

석실에선 밖을 내다볼 길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바깥 풍경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발레리는 출근 직전 꼭 채플 후원에 나가 날씨부터 살폈다. 황녀의 질문에 최대한 구체적으로 답변하려고.

“달력 보니 벌써 6월 중순이던데…. 여름꽃은 많이 폈나요?”

“네, 채플 화단에는 보라색 라벤더랑 파란 샐비어가 많이 펴 있어요. 수국도 꽤 있고요.”

“정말 예쁘겠다, 그쵸.”

발레리는 꽃 종류를 잘 아는 편이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도적단 아지트는 깊은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숲은 그녀의 놀이마당이었고, 그곳의 풀꽃들은 친구였다.

“네, 황궁에는 진짜 온갖 꽃이 다 있는 것 같아요. 원래는 야생화밖에 몰랐는데, 입대하고 화단에서 삽질 시작하면서 꽃 종류를 많이 배웠어요.”

“그렇구나….”

프리다는 씁쓸하게 미소하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발레리, 가끔은 내가 너무 지루한 주제만 꺼내는 것 같아서 미안해요. 바깥 물정을 잘 모르니 날씨니 꽃이니 재미없는 얘기만 하게 되네요.”

“엥? 아뇨, 저는 재밌는데요.”

“…여기 있으면 계절 감각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요. 시간 지나가는 걸 체감할 방법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달력에 날짜 표시하는 게 전부거든요.”

발레리는 프리다의 침대 옆에 붙어있던 큼지막한 달력을 떠올렸다. 지나온 날짜 하나하나에 X 표시가 돼 있었다.

‘하긴 여기는 창문도 없고, 정말 계절 감각이 없을 수밖에 없겠네…. 하루하루가 늘 똑같으니까.’

이런 무료한 석실 생활이 벌써 4년이 넘었다고 했다.

황녀는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답답하고 무기력했을까.

아무리 있을 건 다 있는 곳이라지만, 햇살 한 줌 안 드는 음지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이 미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 아닐까.

발레리는 말없이 시선을 떨궜다. 가슴 한쪽이 아릿하고 뭉글거렸다.

***

다음 날, 발레리는 양팔에 무언가를 가득 안고 석실에 등장했다.

화사한 여름꽃을 담은 화분 네 개였다.

“와아, 발레리. 그게 다 뭐예요?”

발레리는 멋쩍게 웃으며 프리다에게 화분 속 주인공들을 소개했다.

“이 키 큰 분홍색 꽃은 글라디올러스고요, 이 하얀 애는 데이지예요. 샐비어랑 라벤더는 채플 화단에서 가져왔고요.”

“…너무 예뻐요. 고마워요, 발레리.”

프리다는 감격에 겨워하며 발레리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흐흐, 얘네들 시들면 마음 안 좋으실 테니까, 비실비실해진 애들은 제가 바로 데리고 나갈게요. 다른 싱싱한 놈들로 바꾸면 되니까요.”

그렇게 석실 한쪽 구석엔 소박한 화원이 조성됐다.

이날 테렌스가 석실을 찾아온 건 해가 다 진 이후였다. 오전에는 일정이 꽉 차서 도저히 짬이 나지 않았다.

업무를 마치자마자 황급히 달려왔으나 석실에는 프리다뿐이었다.

“로빈슨은 퇴근했나?”

“응, 한참 전에 갔어.”

“…이건 다 뭐지.”

테렌스는 입구 근처에 놓인 꽃 화분을 보며 프리다에게 물었다.

“어때, 오빠? 이제 석실에도 계절이 있어 보이지?”

“누가 이런 생각을….”

“발레리가 아침에 가지고 왔어.”

“로빈슨이?”

“응, 내가 바깥세상을 궁금해하니까. 이렇게라도 계절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대.”

프리다는 신이 나서 말을 계속 이어갔다.

“발레리 말이야, 채플 화단에서 꽃 뽑다가 사제님한테 걸려서 된통 혼났대. 그래서 데이지는 황궁 뒷산까지 가서 캐온 거래. 크흐흐, 정말 고맙지 않아?”

테렌스는 가만히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채플 화단에서 꽃을 뽑다가 사제에게 꾸중 듣는 발레리의 얼굴을. 분명 쭈뼛거리며 곤란한 표정을 했을 것이다.

씩씩하게 뒷산에 올라 데이지를 캐는 모습도 쉽게 상상이 갔다.

요즘 석실에 너무 자주 찾아온 걸까. 업무를 보다가도 프리다와 수업하는 그녀의 모습이 때때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괜히 입가가 스멀스멀 간지러워졌다. 바로 지금처럼.

“오빠, 표정이 이상해. 뭐 잘못 먹었어?”

“…아니.”

입꼬리를 억지로 눌러 내리니 부자연스러운 표정이 될 수밖에.

테렌스는 언제나처럼 정색하면서도, 속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발레리는 이제 프리다뿐만 아니라, 석실 자체에 생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는 걸.

***

그 뒤로 발레리는 석실에 출근할 때마다 선물을 하나씩 들고 나타났다.

손으로 엮은 꽃반지나 꽃목걸이, 화관 등이었다.

그러는 이유는 하나였다. 프리다의 감동 어린 미소가 보기 좋아서.

며칠 뒤 잠자리에 들려던 발레리는, 문득 황태자궁 뒤뜰에 만개해 있던 장미를 떠올렸다.

병사 시절 동료들과 함께 땀 흘리며 직접 심은 것들이었다.

“장미꽃 지기 전에 보여드리고 싶은데. 아직도 피어있으려나. 가봐야겠다.”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난 발레리는 황태자궁 뒤뜰로 달려가 장미 덩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반 정도는 졌지만, 아직 신선한 꽃송이가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붉은 장미 여섯 송이를 땄다.

발레리는 황태자궁 뒤뜰 벤치에 앉아, 토끼풀과 개망초를 촘촘하게 엮어 화관을 만들었다.

그녀는 완성된 화관에 장미꽃을 꽂아 마무리 장식을 하고 있었다.

“…손에서 피가 나는데?”

“아오 씨, 깜짝야!”

느닷없는 말소리에 놀란 발레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뒤를 돌아봤다.

벤치 뒤에 웬 키 큰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테렌스였다.

“아침부터 욕을 먹으니 기분이 산뜻하군.”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인기척 좀 내주세요.”

업무를 막 시작한 테렌스는 커피를 마시며 집무실 창밖의 뒤뜰을 내다보던 참이었다.

그러다 헛것을 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비볐다.

화단 벤치에 발레리와 너무 닮은 병사 하나가 앉아있어서다.

직접 확인하러 나와 보니 진짜 발레리가 화관을 엮고 있었다. 오른손 검지에 핏방울을 달고서.

“그나저나 손가락은 왜 그러지?”

“아, 가시를 잘못 만져서요.”

장미를 맨손으로 따는 과정에서 가시에 찔린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화관을 만들어야 하나?”

“장미 가시에 찔린다고 안 죽어요. 독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장미 가시처럼 따끔한 말투로 대꾸했다.

테렌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앞으로 이런 거 만들지 마라.”

“왜요?”

“화관이나 화분은 황실 정원사에게 주문해서, 로저 경을 통해 보내면 되니까.”

“하긴, 제가 곰손으로 만드는 것보단 전문가가 만든 게 보기에도 낫겠죠….”

왜인지 그녀는 약간 풀 죽은 얼굴이었다. 손재주를 지적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네.”

“이런 거 하다가 다치지 말라는 거다.”

“예?”

“손가락을 다치면 검을 제대로 못 들잖아. 프리다와 검술 수련을 하는데 지장이 있으면 안 되지.”

“아, 네.”

“너는 네 본분에만 충실하면 돼. 넌 프리다의 시녀가 아니라 검술 스승이란 점을 유념해라.”

그러면서 테렌스는 손수건을 내밀었다.

턱 끝으로 그녀의 피 나는 손가락을 가리키며.

“…감사해요.”

손수건을 받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발레리는 화관을 무릎 위에 놓고 검지의 피를 닦아냈다.

“그나저나 이 화관, 황녀님 머리에 맞을까요? 만들다 보니 좀 커진 것 같아서요.”

“직접 써봐. 머리 크기는 너와 별 차이 없는 것 같으니.”

“흠, 저보단 좀 더 작으신 것 같은데….”

발레리는 곰곰이 망설이며 화관을 머리에 썼다.

흐드러지게 핀 6월의 선홍색 장미가 그녀의 머리 위에 얹혔다.

아침 햇볕을 받으니 붉은빛이 더 선연해졌다.

황후 레베카의 보관 한가운데 박힌 루비처럼.

그녀는 화관을 쓴 채 고개를 들고 테렌스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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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는 살짝 얹히네요. 황녀님한테 딱 맞겠어요.”

테렌스는 발레리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녀는 시원스럽게 웃고 있었다.

건강한 구릿빛 피부에 반짝 윤이 났다. 눈매는 반달처럼 휘었다. 그 아래는 속눈썹 그림자가 기름하게 드리웠다.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미소였다.

아무런 의도도 내비치지 않는 투명한 미소는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테렌스의 연청색 눈동자 한가운데 동공이 점점 까맣게 벌어졌다.

시선을 피하고 싶은데, 안구가 한자리에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쵸?”

“넌 왜 그렇게 웃는 거지?”

“뭐가 불만이세요? 웃는 것도 맘대로 못해요?”

테렌스의 말을 시비로 받아들인 발레리는 얼굴을 팍 찡그렸다.

그는 말문이 막힌 채 굳어버렸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너처럼 무방비하게 웃는 여자는 처음 본다고.

그렇게 웃은 지 일초 만에 오만상이 되는 여자도 처음 본다고.

솔직히 조금은 부럽다고.

보고 느끼는 대로 낯빛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게.

매일같이 신하들의 긴장 띤 얼굴을 마주하다 보면, 이따금 생각이 난다고.

억지와 가식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레 변화하는 네 얼굴이.

“…가보겠다. 너도 늦지 않게 수업 들어가라.”

“아니, 저기요! 손수건 가져가야죠!”

테렌스는 그녀의 부름을 흘려들으며 성큼성큼 황태자궁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집무실에 돌아오고 나서야 자각했다.

“…나 방금 도망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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