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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5)화 (15/173)

15화

“나 어디 앉으면 돼?”

켄드릭이 물었다. 발레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책상 의자를 침대 곁으로 옮겼다.

“여기 의자에 앉아. 내가 침대에 앉을게.”

발레리의 방에는 컵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둘은 포도주가 담긴 나무통 하나를 주고받으며 번갈아 마셨다. 딱딱한 빵을 안주로.

“크으…. 이 맛이지. 방 아늑하고 좋네. 혼자 지내긴 괜찮고?”

켄드릭이 포도주 한 모금을 넘기며 물었다.

“응, 두목이랑 단원들이 가끔 보고 싶긴 하지만.”

발레리는 시선을 사선으로 내리깐 채 수줍은 얼굴을 감췄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켄드릭이 툭툭 두드렸다.

“그래도 손 씻은 건 정말 잘 생각했어. 펠런 상황 안 좋았잖아. 여기저기 현상 수배 걸리고.”

“뭐…. 그런가.”

켄드릭은 오해하고 있었다. 발레리가 도적단을 떠나 손을 씻고 입대한 거라고.

하지만 발레리는 단 한 번도 펠런을 떠난 적이 없었고, 떠날 생각도 없었다.

지금도 혹자가 직업을 묻는다면, 군인이 아니라 도적이라고 답할 그녀였다.

빗속에서 구걸하다 혼절한 열 살짜리 소녀.

두목 피어스는 그 소녀를 선뜻 거두어 발레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모든 단원은 발레리를 애정으로 보듬어 키웠다. 전부 그녀의 아버지이자 오라비였다.

발레리가 위험천만한 임무를 가지고 황궁에 들어온 것도, 모두 그들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발레리, 나 궁금한 거 있어.”

“뭔데.”

“제대하면 뭐 할 거야?”

징집 병사들의 의무 복무 기간은 딱 1년이었다. 여성인 발레리에겐 딱히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글쎄, 왜?”

“혹시 나중에라도….”

“어.”

“결혼 생각 있어?”

“결혼? 너 지금 결혼이라고 했냐? 갑자기 뭔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발레리가 버럭 역정을 냈다.

그녀의 고함에 놀란 켄드릭은 하마터면 포도주 통을 놓칠 뻔했다.

“…발레리, 누가 보면 내가 결혼하자고 한 줄 알겠다. 무슨 반응이 그래? 그냥 계획을 묻는 건데.”

“없어. 여러 번 말했잖아. 그런 거 관심 없다고.”

“아니 뭐, 직업을 바꿨길래…. 인생 계획도 좀 바뀌었나 했지. 자, 더 마셔.”

켄드릭은 포도주 통을 발레리에게 넘겼다.

받아드니 반쯤 비어 있었다. 그녀는 세 모금을 연거푸 들이켰다.

슬슬 취기가 올랐다.

‘한 치 앞날도 모르는 도적 인생에 결혼이 가당키나 한가. 손 씻은 척하기 되게 어렵네.’

켄드릭 또한 알딸딸하게 취해 있었다. 느슨하게 풀린 그의 시선이 발레리의 얼굴에 슬며시 닿았다.

살짝 벌어진 그의 입에선 옛날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발레리, 10년 전 처음 만난 날 기억해? 와이어 숲에서…. 내가 너한테 다짜고짜 덤볐잖아.”

“그 막무가내 꼬맹이를 어떻게 잊냐? 눈깔 뒤집혀서 검 돌려달라고 얼마나 악을 쓰던지.”

두 사람이 숲에서 처음 맞닥뜨렸을 적의 이야기였다.

“내가 뭐 괜히 덤볐어? 둘째 형 검을 네가 떡하니 차고 있으니까 그랬지. 솔직히 말해 봐. 그때 네가 이겼으면 검 안 돌려주려고 했지?”

“야, 내가 도적질로 먹고살아도 그런 쓰레기는 아니거든? 실종된 사람 물건인데 당연히 가족한테 돌려줘야지.”

10년 전, 열두 살 켄드릭은 몰래 가출을 감행했다. 와이어 숲에서 사라진 형들을 구한다는 일념으로.

그 숲속에서 동갑내기 소녀 발레리를 처음 만났다. 나무 위에서 잠을 자다 뚝 떨어진 그 소녀는 땅에 끌릴 만큼 길고 화려한 검을 차고 있었다.

숲에서 실종된 둘째 형, 프레데릭의 검이었다.

켄드릭은 형의 검을 내놓으라며 발레리에게 무섭게 달려들었다.

발레리는 거세게 저항했다.

두목 피어스가 숲에서 주워 온 진귀한 무기를, 처음 본 꼬마에게 빼앗기기 싫었으니까.

두 아이는 금단의 숲 심장부에서 한바탕 치열한 칼싸움을 벌였다.

“…가끔 꿈에도 나와. 우리 싸우고 나서 마물한테 잡혀갈 뻔했잖아. 발레리, 그때 그 목소리 기억나? 우리한테 막 나가라고 했던.”

“그걸 어떻게 까먹어. 어휴, 그 사람 같지도 않은 이상한 목소리.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쳐.”

두 사람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함께 탈출한 사이였다.

켄드릭은 대뜸 손을 뻗더니 발레리의 뻗친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따스한 손길이 예고 없이 귓가를 스치자 그녀의 어깨가 빳빳이 굳었다.

“고마워, 발레리. 그때 손잡고 같이 도망쳐 줘서.”

“야, 그 상황에서 혼자 튀면 그게 악마 새끼지 사람이냐.”

“하하, 그건 그렇지만. 너 아니었으면…. 나도 거기서 못 돌아왔을 거야.”

“그래. 나 덕에 프레이저 후작가 대가 안 끊겼지. 그 빚은 이번에 네가 재판에서 변호해 준 거로 퉁치자. 어우, 술 먹어서 그런가? 덥네.”

발레리는 홧홧해진 얼굴에 손부채를 부쳤다.

둘은 10년간의 추억을 안주 삼아 포도주 통을 바닥까지 비워냈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켄드릭의 근위기사 선발시험 합격 후기, 발레리가 냇가에서 황태자를 손봐준 이야기, 이후 감옥에서 탈출을 계획하던 이야기. 그리고 최근 켄드릭이 황태자에게 불려가 면접을 본 소감까지.

하지만 정작 켄드릭이 궁금한 건 발레리의 근황이었다.

“…발레리, 네 얘기 좀 해봐, 요즘 평일엔 뭐 하는 거야?”

“아 뭐, 일하고 퇴근하면 잠만 자. 별일이야 뭐…. 철컹철컹 한 번 하니까 너무 유명해져서 불편해. 다 나만 보고 수군거리는 것 같아.”

“하하, 자의식 과잉이구나. 그거 얼마 안 갈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졌다.

켄드릭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빈 술통을 들고 떠날 채비를 했다.

“발레리, 나 이제 가봐야 해.”

“왜? 기사단 숙소에 통금 있어?”

“그런 건 아닌데. 늦으면 상관들이 눈치 주니까. 나 높은 사람 돼야 하는 거 알잖아.”

“높은 사람 타령 오늘은 왜 안 하나 했다. 평판 되게 신경 쓰네. 프레이저 후작 아들한테 누가 감히 눈치를 준다고.”

“최대한 빨리 승진할 거야. 너도 알잖아. 내 목표가 뭔지.”

그렇게 말하는 켄드릭의 눈에는 야망의 빛이 형형했다.

“여전히 넌 그 생각뿐이구나. 응원할게. 미래의 총사령관 각하.”

“…발레리. 우리 한동안 못 볼 텐데. 작별 인사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켄드릭이 두 팔을 벌렸다.

“그래.”

발레리는 활짝 열린 그의 가슴팍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담백한 포옹이었다.

방 안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새빨개진 귓불을 들키지 않을 수 있어서.

켄드릭의 긴 머리카락에선 시트러스 향이 났다.

‘그래, 어차피 가까이서 지내봤자 내 속만 복잡할걸. 이참에 싹 정리해야지. 잘 가, 내 오랜 짝사랑.’

***

발레리의 방문이 닫혔다.

켄드릭은 그 안에서 나오자마자 술기운 가득한 날숨을 허공에 내뱉었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뭔가를 만지작거렸다.

검은색 초커 목걸이가 하나 나왔다.

목걸이 한가운데는 미끈한 광택이 흐르는 청록색 보석이 달렸다. 그 주변엔 보랏빛 기운이 감돌았다. 무슨 주술이라도 걸려 있는 것처럼.

“이제 도둑질도 그만뒀는데 쓸모없는 물건이겠지. 다른 걸 살 걸 그랬어.”

그렇게 혼잣말하던 차에 갑자기 어딘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켄드릭은 목걸이를 황급히 주머니에 넣고 그쪽을 바라봤다.

옆방 문 앞에 키 큰 남자 한 명이 우뚝 서 있었다.

“켄드릭 경? 자네가 왜 그 방에서 나오지.”

그 남자가 물었다. 어디선가 들었던 낮은 목소리. 정갈하게 넘긴 백금발, 근엄하게 다물린 입술.

황태자였다.

켄드릭은 술이 번쩍 깼다.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대체 왜 황태자가 채플에 있는 걸까. 그것도 지금, 이 시각에.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왜 그 방에서 나오느냐고 물었는데.”

“아…. 발레리가 여기서 지내고 있어서, 같이 한잔하고 이만 돌아가려던 참입니다.”

그의 대답에 황태자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불편한 심기가 충분히 드러났다.

“둘이 술을 마셨다는 건가. 이 시각까지.”

“네, 그렇습니다.”

“여기가 성전이라는 걸 잊은 모양이군.”

“아….”

“그리고 여긴 여인 혼자 지내는 숙소다. 아무리 친구 관계라 해도 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켄드릭은 황태자의 말투에서 따끔한 적의를 느꼈다. 솔직히 억울했다.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예배당도 아닌데 친구랑 한잔할 수도 있지. 그럼 당신은 뜬금없이 채플엔 왜 와 있는 건데.’

“제가 조심성이 없었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켄드릭의 입에서는 속마음과는 다른 대답이 나왔다. 높은 분을 대할 때 불편한 속마음을 누르는 건 이제 익숙한 일이었다.

그때 발레리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누가 자꾸 문밖에서 떠드…. 아니 둘이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때아닌 대화 소리에 방문을 연 발레리가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테렌스는 발레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평소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공을 집어삼킨 듯 새카만 눈동자는 반쯤 풀린 채 가라앉아 있었다. 눈꼬리는 촉촉이 젖은 데다 불긋하기까지 했다.

‘뭐지. 울고 있었던 건가.’

“…로빈슨, 성전에서는 음주 금지다.”

“네, 앞으로 안 마실게요. 안녕히 가세요.”

힘 빠진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방문이 다시 닫혔다. 동시에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

다음 날 발레리는 하마터면 지각할 뻔했다.

당연히 숙취 때문이다. 그뿐인가. 계단을 내려오던 중 방에 검을 두고 온 걸 깨달았다. 한참을 다시 올라가 검을 가지고 내려왔다.

아직 수업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출근길에만 땀을 한 바가지 흘렸다.

“발레리,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프리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발레리에게 쪼르르 다가왔다. 이내 술 냄새를 감지하곤 살짝 물러났다.

“아아, 술 많이 마셨구나. 그쵸?”

“네에, 그렇게 됐습니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었나요?” 

“짝사랑하던 사람이 떠나가 버렸어요. 아주 멀리멀리요.”

“아아…. 많이 마실 만했네요. 유감이에요.”

프리다가 그녀를 안쓰러워하며 어깨를 토닥였다. 발레리는 간밤에 울었는지 눈까지 퉁퉁 부어 있었다.

“황녀님, 오늘 전 수프를 주문해야겠어요. 해장을 안 하고선 못 움직일 것 같아요.”

로저 경이 오리고기 수프를 내오자마자, 발레리는 대접째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프리다는 그 광경을 신기하다는 듯 빤히 구경했다. 숟가락 없이 수프를 먹는 사람은 스물네 해를 살면서 처음 목격했다.

“으어어, 이제야 살 만하네. 황녀님은 고기 위주로 건져 드세요. 아시죠? 다 근육으로 가는 거.”

“헤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쿵쿵.

석실 문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프리다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식탁 위에 놓인 종을 울렸다.

곧이어 테렌스가 걸어 들어왔다.

평소와 같은 제복 차림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레이븐은 역시 오늘도 초록색 망토를 두른 채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오빠, 요즘 자주 오네. 바쁠 텐데.”

“…안녕하세요.”

발레리가 테렌스와 레이븐을 향해 멋쩍게 인사를 건넸다.

테렌스는 얼른 발레리의 상태를 다시 살폈다. 눈꺼풀이 뒤룩뒤룩 부어 있었다. 옆에서 보면 숫자 3이 연상될 정도로.

“간밤에는…. 잘 잤나?”

“아, 예, 뭐, 그럭저럭요.”

어젠 술 먹지 말라고 잔소리하더니 갑자기 웬 안부 인사람. 발레리는 억지웃음을 지어내며 대충 답했다.

잘 잤다는 건 물론 거짓말이었다. 주먹 물고 오열하느라 두어 시간밖에 못 잤다.

프리다는 오리고기를 우물거리며 테렌스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아직 식사 안 끝났는데.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오빠.”

테렌스는 식탁에 앉아 여동생이 식사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확실히 이전보단 덜 깨작거린다.

수프를 먹으면 세 숟가락을 안 넘던 아이였는데. 벌써 다섯 숟가락째다. 특히 이전에 잘 안 먹던 고기를 오물오물 잘 씹어 삼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로빈슨이 식습관까지 바꿔놓은 건가.’

테렌스는 수프를 대접째 들이켜는 발레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프를 저렇게 먹는 사람은 또 처음 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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