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검술 교육 2일차.
발레리는 석실에 들어오자마자 프리다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황녀는 식사용 테이블에도 없고, 소파에도 없고, 연무장에도 없었다.
“발레리, 나 여기 있어요!”
가벽 뒤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프리다는 하얀 침구 속에 폭 파묻혀 있었다. 순백색 잠옷 차림으로.
“으잉? 왜 아직 누워 계세요?”
“…나 오늘은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왜요?”
“온몸이 너무 아파서 앉아있기조차 힘들어요.”
“오, 근육통이다! 하긴 어제 많이 움직이시긴 했죠. 그거 좋은 징조예요.”
사람이 아프다는데 그게 왜 좋은 징조란 거지. 프리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발레리…. 삭신이 너무 쑤시는데 이게 좋은 징조라고요?”
“네, 근육통이 생긴 자리에 근육이 붙더라고요. 잘 풀어주기만 하면 돼요.”
“근육통이 있는 자리에, 근육이 붙는다고요…?”
프리다가 발레리의 말을 곱씹으며 근육이 붙은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러니 아픔이 조금은 참을 만해졌다.
“황녀님, 일단 다리 알부터 풀어 드릴게요. 잠깐 다리 좀 줘 보실래요?”
발레리는 이불을 들어내고 침대에 누운 프리다의 종아리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진짜 학다리가 따로 없네. 여기 살하고 근육 붙이려면 한참 걸리겠는걸.’
발레리는 황녀의 음식 섭취량을 더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으으, 조금만 살살 해줘요.”
“저 지금 살살 하는 건데. 많이 아프세요?”
“네, 아흑….”
프리다의 다리를 한참 주무르던 발레리는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그러더니 황녀의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봤다.
“…왜 그래요, 발레리?”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황녀님께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 봐요.”
“라벤더궁이 버젓이 있는데, 굳이 이런 지하 석실에서 지내시는 이유가 뭐예요? 검술 연습도 밖에서 하면 더 쾌적하고 즐거울 텐데.”
이미 황태자에게 한 차례 했던 질문이지만, 황녀 본인에게 물으면 좀 다른 대답이 나올까 싶었다.
“그건….”
황녀의 살구색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시선은 바닥에 착 내려앉았다.
꽤 오랜 정적 끝에 그녀의 입이 열렸다.
“…내가 정말 검술을 잘하게 된다면, 그때 이야기할게요.”
프리다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이 움츠러지고 짙푸른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아차, 실수한 건가. 발레리는 후회했다. 괜한 질문에 분위기가 어두워진 것 같아서.
“아하, 제 노력에도 달린 일이네요! 오늘은 새 목검이 올 테니 계속 정진해 보실까요?”
발레리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수습에 나섰다.
“응, 우리 땅따먹기부터 해요. 어제 5단계까지 했으니까 오늘은 6단계.”
다행히 의욕이 식은 건 아니었다.
프리다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옷을 휙휙 갈아입더니 연무장 쪽으로 쪼르르 뛰어갔다.
발레리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분주한 모습이 마치 산토끼 같아서.
프리다가 침상에서 빠져나가자, 바로 옆벽에 걸린 커다란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날짜들에 모두 X자 표시가 돼 있었다.
석실에서 지낼 날이 열 달 남았다고 했었지. 여기서 나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걸까.
‘음, 여기 있는 게 황녀님 본인 의지는 아닌 것 같은데. 설마 검술 말곤 아무것도 못 하게 하려고 가둬놓은 건 아니겠지. 에이…. 무슨 인간병기 키우는 것도 아니고.’
발레리는 연무장 쪽을 바라봤다. 프리다는 벌써 땅따먹기 그림 위에서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그녀는 프리다에게 얼른 다가가 어깨를 잡아 세웠다.
“황녀님, 몸 제대로 풀고 시작하셔야죠. 오늘은 근육통도 있으시니까, 어제보다 스트레칭 오래 하셔야 해요.”
“아 맞다, 스트레칭. 발레리가 알려준 방식 참 좋아요. 할 때는 엄청 아픈데, 하고 나면 시원해져서….”
“소질이 보이네요. 스트레칭이 운동의 첫 단추인데, 그걸 벌써 좋아하게 되셨다니.”
“히힛, 발레리가 같이 해주는 덕분인걸요. 나도 얼른 유연해지고 싶어요.”
프리다는 이런 가벼운 칭찬에도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보드레한 미소로 화답했다.
발레리는 잠시 그 화사함에 홀려 헤벌쭉 해졌다.
쿵쿵.
철문 두들기는 소리였다.
“아, 오빠 왔나 보다.”
프리다가 연무장 한구석에 놓여있던 종을 흔들었다. 발레리는 앞머리에 훅 바람을 불며 짜증을 삭였다.
“…감시자 또 납셨네.”
프리다의 예상대로 테렌스가 걸어 들어왔다. 이번에는 레이븐과 함께였다.
“왔어, 오빠?”
“잘 있었구나. 잠시 짬이 나서 와 봤는데…. 아직 수업 시작 전인가?”
테렌스가 발레리를 향해 물었다.
“이제 막 하려고요.”
“한 15분쯤 있다 가려 한다.”
“…그러시든가요. 황녀님, 목부터 한번 돌려 볼까요?”
스트레칭이 시작됐다.
발레리는 프리다와 함께 몸을 푸는 내내 얼음송곳 같은 테렌스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감시당한다고 생각하니 불편했다. 근육이 전혀 안 풀리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테렌스는 예고했던 것처럼 15분 후에 바로 뒤돌아 떠났다.
‘아…. 저 인간 매일 찾아올 기세네. 내가 황녀님한테 뭐 해코지라도 할까 봐 저러나?’
발레리는 그의 뒷모습을 흘겨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발레리, 왜 그래요?”
“아, 아니에요. 저 배고파서 그런데 로저 경한테 아침부터 주문해도 될까요?”
***
일요일 오전에는 채플에서 예배가 집전된다.
칼레바니아 건국신화의 주역, 시에나 여신께 영광을 돌리는 성스러운 날이니까.
이날 아침 발레리는 오랜만에 보초병 역할을 했다.
발레리는 병적 상 채플에 배치된 근위병이었다. 검술 수업이 없는 이 날만큼은 예배당 앞을 지켜야 했다.
‘주중에는 검술 선생, 일요일에는 채플 앞에서 뺑이. 이거 완전 개고생이잖아. 황태자궁 보초 시절보다 더 빡세네. 보너스 얼마나 주나 두고 보자.’
게다가 거슬리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예배에 참석하러 오는 병사와 기사들은 하나같이 발레리를 흘끗 보며 수군거렸다.
“쟤가 걔야? 남장하고 입대했다던?”
“어, 석방돼서 여기 배치됐대.”
“쟤 훈련병 때 몇 번 봤어. 이제 보니까 계집애같이 생기긴 했네.”
그들은 나름대로 말소리를 죽였지만, 발레리의 밝은 귀에는 한마디 한마디가 쏙쏙 박혔다.
그녀의 얼굴은 한층 뾰로통해졌다.
‘채플 왔으면 곱게 예배나 드릴 것이지, 뭔 남의 일에 저렇게 관심이 많아.’
그들을 보며 입 모양으로 욕지거리를 하던 중, 발레리의 눈에 반가운 얼굴이 포착됐다.
그녀는 금세 표정이 풀어져서는 한 남자를 향해 손을 반갑게 흔들었다.
“어, 켄드릭! 채플엔 웬일이야? 없던 신앙심이 어디서 솟아났어?”
“오, 드디어 찾았다. 발레리, 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어디 있긴. 그냥 황궁에 있었지.”
“흠, 네 병적이 채플로 돼 있길래 몇 번 찾아왔는데 한 번도 없더라고.”
오랜 친구의 질문에 발레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일주일 내내 지하 석실로 출근했으니 당연히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황녀의 검술 스승이 됐다고 하면 얘는 안 믿겠지. 말할 생각도 없지만.’
“뭐…. 엇갈린 거겠지. 근데 네가 내 병적을 어떻게 보냐.”
“근위기사라고 몸만 쓰는 건 아니야. 문서 보는 업무도 하거든. 네 병적에 해고가 아니라 복직처리가 돼 있길래 어디로 배치됐나 찾아봤지.”
“집요하셔라.”
켄드릭은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근데 있잖아, 발레리.”
“왜?”
“나 어디 멀리 발령 날 것 같아.”
이게 무슨 소리지. 발레리가 눈을 높이 치켜떴다.
“엥? 너 나보다 고작 한 달 먼저 입대했잖아. 벌써 배치가 바뀌어?”
“어, 황태자 전하한테 불려갔었어. 햇빛도 잘 못 보는 데서 마법사들이랑 일해야 한다는데. 아무래도 마력석 광산 경비대로 보내려는 것 같아. 거기선 폭파 마법 쓰는 마법사들도 같이 일하잖아.”
“…마력석 광산이면 너희 아버지 영지네.”
마력석은 대부분 칼레바니아 남부 프레이저 후작령에 분포돼 있었다. 특히 와이어 숲 인근 광산에 매장량이 집중돼 있었다.
“응, 영지로 돌아갈 것 같아. 광산은 기피 지역이니 승진도 빠를 거고, 언젠간 중앙으로 다시 불러줄 테니 기회라고 생각하려고.”
“…이 시대의 긍정왕 납셨어, 아주.”
“좋게 좋게 생각해야지. 그나저나 발레리, 조만간 축하 겸 이별주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켄드릭이 손으로 잔을 꺾는 시늉을 했다.
발레리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그의 술자리 제안을 마냥 반갑게만 받아들일 수 없어서.
재회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떨어져야 하는지. 자꾸 켄드릭과의 인연이 엇갈리는 느낌이 들어 착잡했다.
“이별주…. 안 돼. 나 성 밖으로 못 나가.”
“외출 허락받도록 도와줘? 너 위에 상관이 누군지만 말해.”
“아니야, 외출은 됐어. 술 먹을 거면 황궁 안에서 먹자. 마침 나 독방 쓰는데 곧 초대할게.”
차마 발목에 탈출 금지 마법이 걸려서 못 나간다고 말할 순 없었다.
“오, 여자라서 독방 받은 거야? 그럼 오늘 밤은 어때?”
***
저녁 여덟 시쯤 켄드릭이 채플 뒤편으로 찾아왔다. 나무통 하나를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후원에서 기다리던 발레리가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아니 이런 누추한 곳에 이렇게 귀한 술을. 맥주가 아니라 포도주 같은데?”
“이별주 겸 축하주가 이 정돈 돼야지. 근데 왜 채플로 오라고 했어? 숙소가 어디길래.”
“숙소가 여기야. 채플 안에 있어.”
“방이 채플 안에 있다고?”
켄드릭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발레리가 성직자도 아닌데, 왜 채플 안에서 생활하나 해서.
“응, 1층 구석에 조그맣게.”
“하긴 널 남자들 바글바글한 숙소로 다시 밀어 넣을 순 없었겠지. 흠, 신성한 성전에서 음주라. 마시고 나서 시에나 여신께 회개해야겠네.”
“뭐래, 왜 이렇게 성스러워졌어? 주말에 채플을 나오질 않나.”
“우리 기사단장이 되게 독실한 신자라. 매주 나와서 얼굴 비춰 줘야 점수 따.”
발레리는 건조한 눈으로 켄드릭을 흘겨보며 혀를 끌끌 찼다. 오랜만에 보는 켄드릭은 여전히 야심으로 가득했다.
“정말 투명하다 투명해. 사람이 야심을 숨길 줄도 알아야지.”
방문 앞에 도착했다. 발레리는 열쇠 구멍에 가는 쇠막대 두 개를 밀어 넣고 양손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너 도적 때 습관 아직도 있네. 네 방문에 왜 열쇠를 안 쓰고 락픽을 써? 그러다 문 고장 날라.”
“문 따는 실력 녹슬까 봐 그러지. 열쇠보단 이게 익숙해.”
딸깍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한 칸짜리 방이 드러났다. 있을 것만 있는 단출한 공간이었다. 싱글 침대와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어깨높이의 옷장, 그리고 벽면에 거울 하나.
두 사람은 차례로 방안에 들어섰다. 발레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지난 10년간 발레리는 켄드릭과 실외에서만 만났다. 검술 대련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다 맞으면서 했었다.
입안에 괜스레 침이 고였다. 이렇게 밀폐된 장소에서 켄드릭과 단둘이 있는 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