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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3)화 (13/173)

13화

테렌스는 켄드릭에게 묻고 있었다. 발레리와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과거를 회상하는 켄드릭의 낯빛이 점차 어두워졌다. 테렌스는 그의 표정 변화를 가만히 주시했다.

“발레리와는 10년 전 와이어 숲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와이어 숲? 그곳은 자네의….”

“예, 제 형들이 실종된 그 숲 맞습니다.”

테렌스의 동공이 보일 듯 말 듯 살짝 벌어졌다.

와이어 숲.

칼레바니아 최남단에 있는 거대한 활엽수림으로, 마력석 광산에 빙 둘러싸여 있었다.

건국신화에 따르면 이 숲속에는 지하세계로 통하는 아공간이 존재한다고 전해진다.

10년 전 그곳에선 대대적인 실종사건이 벌어졌다.

처음엔 숲의 심장부에 접근한 민간인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지하세계의 마물이 사람들을 잡아간다는 해괴한 소문이 돌았다.

이후 마물 퇴치를 목적으로 여러 용사들이 숲에 도전했다. 그리고 그들조차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용사들이 사라진 자리엔 검과 지팡이, 수정구 등 무기만이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무기만 남기고 수백 명이 증발한 미제 사건이었다. 실종자 명단에는 켄드릭의 두 형, 패트릭과 프레데릭도 있었다.

켄드릭은 지금 프레이저 후작가에 마지막으로 남은 아들이었다.

테렌스 또한 그의 안타까운 뒷사정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숲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결계가 세워져 있지 않았나?”

“당시엔 폐하께서 결계를 치기 전이라 경비대 몰래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0년 전이면 경은 어린아이였을 텐데. 그 위험한 곳에 들어간 이유는 뭐지.”

“마물로부터 형들을 구해오고 싶었던…. 열두 살 어린아이의 치기였습니다.”

씁쓸하게 웃는 켄드릭의 얼굴에 자조의 빛이 어렸다.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다행이군. 한데 로빈슨은 왜 거기 있었던 거지.”

“아, 발레리는 워낙 모험심이 강한 애라서요. 호기심에 한번 가본 거라고 들었습니다.”

테렌스는 속으로 흠칫했다.

사람이 증발한다는 위험한 숲에 고작 호기심 때문에 발을 들였다니. 그것도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가.

대체 성장 배경이 어땠기에 그렇게 간덩이가 부은 것인가.

‘역시 어릴 때부터 범상치 않았군. 하긴, 성별과 신분을 속이고 군에 입대한 것 자체가 모험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지.’

테렌스가 말없이 생각에 잠기자 켄드릭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더 하문하시겠습니까?”

“아니, 오늘은 이쯤 할 테니 이만 가봐도 좋다.”

테렌스도 켄드릭의 낯빛을 관찰했다.

여기서 그에게 무언가를 더 묻기엔 내키지 않았다.

왠지 힘든 기억을 끄집어내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켄드릭은 바로 경례한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사이로 레이븐이 초록색 망토를 휘날리며 들어왔다.

“석실 문지기 면접이죠?”

“그래.”

“마음에 드셨을까요?”

“딱히 대안이 없다. 폐하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시고.”

“저도 찬성표 하나 행사해도 됩니까? 늠름하니 잘생겼던데요.”

“외모로 뽑는 자리가 아니다.”

“에이, 뽑으실 거면서 왜 그러십니까. 대답도 척척 잘하던데. 근데 전하, 그 아가씨 얘기는 왜 자꾸 물으세요?”

레이븐의 공식 직함은 황태자궁 수석 마법사.

테렌스의 호위 겸 비서 역할이고, 취미는 집무실 문에 귀 대고 엿듣기였다.

“…평판 조회 차원이다. 중대한 책무를 맡은 자니까. 됨됨이가 어떤지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 덕스턴 경 사건도 있었고.”

***

발레리와 프리다가 드디어 석실 연무장에 입성했다.

두 여인은 두 발짝 거리로 마주 서서, 결연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를 이렇게 앞뒤로 벌리면 가위. 이렇게 모으면 바위. 이렇게 양옆으로 벌리면 보예요.”

발레리가 룰을 설명하며 자세 시범을 보였다.

“응, 숙지했어요.”

“점점 속도 높일 거예요. 준비되셨죠?”

고개를 끄덕이는 프리다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두 여인은 한참 동안 폴짝대며 발동작으로 가위바위보를 했다. 가위바위보를 외치는 힘찬 소리가 철문 바깥까지 새어 나왔다.

로저 경을 비롯한 문지기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로저 경, 검술 수련한다더니 웬 가위바위보 소리가 들리는 걸까요?”

“글쎄 말이다.”

발 가위바위보에 나선 프리다는 생각보다 동작을 곧잘 따라 했다. 신체 능력은 떨어지지만, 집중력 자체는 좋았다.

발레리는 일부러 프리다보다 조금 빨리 자세를 취했다. 프리다가 가위바위보를 대부분 이길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프리다는 계속 이기는 게 신났는지 승부에 더 깊이 몰입했다. 발레리는 그 모습을 보며 괜히 뿌듯했다.

발레리는 점점 속도를 높였다. 프리다는 따라오는 듯싶더니 숨이 차다며 잠시 멈추자고 제안했다.

“황녀님, 그래도 생각보다 잘하시는데요.”

“헉헉…. 이거 승부욕 생겨요. 그런데 발레리, 이게 검술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가위바위보나 검술 대련이나 기본적으로 겨루기잖아요. 승부욕하고 집중력이 중요해요.”

“그렇구나.”

발레리는 자신의 양쪽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설명을 시작했다.

“검을 잘 쓰려면 다리 움직임부터 잘 제어해야 해요. 칼싸움하는데 다리에 힘 풀리거나 넘어지면 바로 죽은 목숨이거든요.”

“아아…. 내가 다리를 잘 못 가눠서 여태 힘들었나 봐요.”

“근육이 없으셔서 그래요. 많이 먹고, 운동하고, 이렇게 놀면서 같이 키워 봐요.”

프리다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황녀님, 이제부터 2배속으로 하니까 스텝 안 꼬이게 신경 써주세요.”

“알았어요!”

황녀는 힘차게 대답하며 허리춤까지 오는 머리칼을 포니테일로 높이 묶었다.

두 여인은 또다시 한창 가위바위보 삼매경에 빠졌다.

프리다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의 승부욕 넘치는 표정을 본 발레리는 문득 생각난 질문을 던졌다.

“황녀님, 막 누군가랑 싸워서 꼭 이기고 싶다, 이런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음….”

“진짜 막 너무 얄밉고, 딱밤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다, 그런 사람도 없어요?”

“글쎄요, 그런 건 왜 물어요?”

“아니 뭐, 검술도 다 싸워서 이기자고 하는 건데. 이겨 먹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동기부여가 되니까요.”

발레리에겐 켄드릭이 그런 존재였다. 원래도 검술을 좋아했지만, 이기고 싶은 맞수가 있었기에 더 의욕 있게 수련할 수 있었다.

손등으로 땀을 훔친 프리다는 곰곰이 대답할 말을 고민했다.

“있어요. 이겨야 하는 게 있기는 있는데….”

“네, 누군데요?”

“일단은, 나 자신부터 이겨야 할 것 같아요.”

황녀의 짙푸른 눈동자에서 선명한 빛줄기가 보였다. 발레리는 거기서 가능성을 보았다.

자기발전 의지는 실력 향상에 좋은 연료가 되니까. 아무리 놀이라고 해도, 안타까울 만큼 가냘픈 몸으로 잘 따라와 주는 게 보기 좋았다.

“황녀님, 그럼 이제 다른 것도 해볼까요?”

발레리가 주머니에서 웬 자갈돌을 꺼내더니, 연무장 바닥에 쭉 금을 그었다.

뭘 그리나 봤는데, 커다란 직사각형이었다. 그녀는 구획을 여덟 개로 나눈 뒤 각 칸에 1부터 8까지 숫자를 적어 넣었다.

땅따먹기 그림이었다. 칼레바니아 어린아이들이 흙바닥에서 자주 하는 민속놀이다.

이 놀이는 다른 용도로도 쓰였다.

어릴 때 펠런 도적단이 발레리에게 시키던 민첩성 훈련 중 하나였다.

금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깽깽이걸음으로 제한시간 내에 각 칸에 있는 돌을 가지고 돌아오도록 했다. 발소리 없이 사뿐사뿐.

“제가 여기 1번 칸에 돌을 놓을게요. 돌 있는 칸은 밟으시면 안 되고요. 끝까지 갔다가 뒤돌아서, 2번 칸에 왔을 때 돌 주워 오셔야 해요. 제가 하는 걸 잘 보세요.”

발레리가 가볍게 시범을 보였다.

프리다는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를 자세히 관찰하며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바로 프리다의 도전이 시작됐다.

그림 위에서 콩콩 가볍게 뛰는 모습이 깜찍했다. 어찌나 집중하는지, 제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아이고, 황녀님 금 밟으셨어요! 다시!”

발레리는 한편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너무 진심으로 하는 거 아닌가…. 아냐. 일단 신뢰를 얻고, 발목에 족쇄부터 풀자.’

***

테렌스가 여동생의 석실에 다시 찾아온 건 업무가 끝나고 밤 열 시가 다 되어서다.

마법사들은 프리다의 수면 시간에 맞춰 천장의 광구들을 모두 거두어 갔다.

프리다는 이미 새하얀 네글리제 차림으로 취침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침대맡에 기름등만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그녀는 침구 속으로 몸을 얼른 밀어 넣었다. 내일 있을 검술 수업을 기대하면서.

쿵쿵.

아닌 밤중에 웬 노크일까. 프리다는 막 누우려다 말고 몸을 일으켰다.

“이 시간에 누구예요?”

프리다는 목소리를 높여 바깥의 문지기들에게 물었다.

“황태자 전하 드십니다.”

“응? 오빠라고?”

그녀는 기름등 옆에 놓인 출입 허가 종을 울렸다. 테렌스가 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맡으로 다가왔다.

“아니 오빠, 지금 막 불 끄려고 했는데. 이 시간에 웬일이야?”

“오늘 검술 수련은 어땠나 해서.”

“아아, 재미있었어!”

“재미가…. 있었다고?”

이런 후기는 처음이었다. 이전까지 프리다는 수업이 어땠냐고 물으면 한숨부터 푹 내쉬곤 했었다.

프리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뭔가를 보여주려는 듯 기름등을 들고 연무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테렌스도 그녀를 저벅저벅 뒤따라갔다.

“바닥에 이게 다 뭐지.”

그가 연무장 바닥에 그려진 정체불명의 도형을 보며 물었다.

“이게 땅따먹기라는 거래. 나 금 안 밟고 5단계까지 했어. 보여줄까?”

프리다는 하얀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도형 위에 올라 팔짝댔다. 처음 보는 여동생의 모습에 테렌스는 그저 얼떨떨했다.

“그게 뭐 하는….”

“봐봐, 나 발동작 빠른 거. 나 잘하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테렌스는 당황 속에 잠시 말을 잃었다. 이렇게 고양된 프리다의 모습은 수년 만에 처음이었다. 혼자 신나서 뜀박질하는 모습도 낯설었다.

“오빠, 나 발로 가위바위보도 할 줄 알아. 지금 나랑 해볼래?”

“…아니, 나중에. 목검도 작은 걸 새로 구해오라 했다던데.”

“응. 내가 쓰던 게 너무 길고 무거워서. 로저 경한테 어린이용으로 구해 달라고 했어.”

“어린이용이라…. 네 팔심이 약하니 그게 낫기는 하겠군.”

“그리고 오늘 밥도 엄청 많이 먹었어. 닭고기랑 계란도 먹고, 소고기도 두 점이나 먹었어.”

“…네가?”

프리다의 말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아무리 권해도 통 안 먹던 고기까지 먹었단다.

무엇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침울했던 여동생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있다. 사람에게 단기간에 이렇게까지 의욕을 불어넣는 게 가능한 일이었던가.

테렌스는 여러 생각 끝에 결론에 이르렀다.

여동생의 새 스승을 좀 더 면밀히 지켜봐야 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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