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테이블을 치우러 들어온 로저 경은 닭 뼈만 앙상하게 남은 접시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닭이 꽤 실한 놈이었는데…. 남으면 조금 맛보려 했는데….’
로저 경은 못내 아쉬운 얼굴을 한 채 빈 접시를 쌓아 들고 석실을 나섰다.
다시 석실엔 두 여인만 남았다.
발레리와 첫 식사를 마친 프리다는 약간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녀는 확실히 이전에 검술을 가르치던 사람들과는 달랐다. 태도부터 격의가 없었다.
평민 출신이라고 전해 들었다. 말투와 행동거지를 보니 예법을 잘 모르는 듯했다. 특히 식사예절을.
발레리는 포크와 나이프, 숟가락을 양손에 한꺼번에 든 채 정말 무서운 속도로 접시를 비워냈다. 그 현란한 손동작은 마치 전장에서 쌍검을 휘두르는 용맹한 장수 같았다.
다행히 비위생적이거나 선을 넘는 수준은 아니었다.
‘먹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한 사람은 처음이네.’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간 아무도 지적하지 않던 자신의 식습관을 대뜸 교정하려고 들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기사들은 황녀가 주문한 음식만 군말 없이 가져다줬다.
물론 좋은 점도 있었다.
자신을 어려워하던 석실 문지기 기사들보단 훨씬 대하기 편했다.
기사들은 프리다가 가르침을 못 따라올 때마다 쩔쩔맸고, 더러는 한숨을 푹 쉬어서 기를 죽이기도 했으니까.
눈앞의 새 스승님은 적어도 그럴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이제 시작할까요?”
먼저 운을 뗀 건 프리다였다. 발레리의 수업이 어떨지, 벌써 호기심이 발동했다.
“오오, 황녀님, 첫날부터 의욕 넘치시네요.”
“든든히 먹으니까 기운이 나는 것 같아요.”
“배부른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죠.”
프리다가 먹은 양은 객관적으로 든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발레리는 제 나름의 발전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렴, 수프 한 접시랑 빵 쪼가리보단 기운이 날 터다.
발레리는 프리다를 따라 석실 연무장으로 향했다.
벽에는 저번에 봤던 연습용 무기가 여럿 걸려 있었다.
“그런데 황녀님은 그동안에도 계속 검술 수련을 하신 거죠? 목검이랑 레이피어랑 별게 다 있네요.”
모두 값깨나 나가 보이는 고급 무기들이었다.
“응, 그동안은 요 문 앞에 있는 기사들한테 배웠어요.”
“아아, 빡셌겠다. 맞죠?”
“어떻게 알았어요?”
“본인들이 배운 식으로 가르쳤을 거 아니에요. 몸풀기는 어떻게 하셨어요?”
프리다는 허공에 눈을 굴리며 그간의 훈련을 복기했다. 발레리는 황녀의 사파이어 빛 눈동자를 멍하니 감상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몸풀기는 주로 기사 체조를 했어요. 숨이 차서 오래는 못했지만.”
“아아, 그 삐걱삐걱하고 펄쩍펄쩍하는 이상한 체조요?”
“푸훗, 그건 또 어떻게 알아요?”
“기사 선발시험 준비하던 친구가 매번 하던 거라서요. 어휴, 그 흉한 동작을 황녀님한테 시키다니. 배려심이 좀 부족하네요.”
발레리가 언급한 친구는 켄드릭이었다. 그는 발레리와 대련하기 직전마다 기사 체조를 하며 몸을 풀었다. 황실 근위기사 선발시험 과목 중 하나라나 뭐라나.
그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따라 하며 켄드릭을 조롱하는 게 발레리의 취미 중 하나였다.
‘켄드릭…. 잘 지내고 있을까. 기사 선발시험 참 열심히 준비했었는데.’
어차피 후작 아들이라 설렁설렁해도 붙었을 걸,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게 발레리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맨날 높은 사람 될 거라고 노래를 불렀으니 실력으로도 눈에 띄고 싶었을 테다.
발레리는 벽에 걸린 무기들을 다시 하나하나 훑으며 프리다에게 물었다.
“그럼 이 중에서 황녀님이 쓰시던 검이 뭐예요?”
프리다는 가장 길이가 짧은 목검을 바로 꺼내 들었다.
“이거예요.”
“잠깐 줘 보시겠어요?”
발레리는 황녀가 건넨 목검을 손에 들어봤다. 이곳에 마련된 무기 중에선 가장 짧았지만, 길이가 1미터를 훌쩍 넘었다. 검날 부분이 두꺼워 무게 또한 묵직했다.
“황녀님 키가…. 160 정도 되시죠? 이 검 조금 길지 않아요?”
“161이에요. 길기도 한데 너무 무거워요.”
“날이 두꺼워서 그럴 거예요. 엄청 비싸 보이긴 하네. 이거 어린이용으로 바꿔 달라고 하면 바꿔 주나요?”
“…어린이용? 뭐든 로저 경에게 부탁하면 내일 가지고 올 거예요.”
프리다는 내심 반가웠다. 어깨와 손목에 무리만 안 간다면 어린이용이라도 상관없었다. 실력도 없는 마당에 자존심 세워서 뭐 하겠나.
“어릴 땐 저도 팔심이 없어서 무거운 걸 못 들었어요. 그래서 두모─ 아니 아버지가 작은 목검을 직접 깎아서 만들어줬어요.”
“좋은 아버지를 두었네요.”
“아하하, 그럼 검은 내일부터 만지고, 몸부터 좀 풀어볼까요?”
발레리는 오른쪽 어깻죽지를 슬슬 돌리며 몸을 예열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프리다는 회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좀 색다른 선생님이긴 하지만…. 이 사람한테 배운다고 뭐가 달라지기는 할까. 난 가망이 없는 것 같은데.’
***
검술 교육 중 황녀에게 신체 접촉을 시도하던 덕스턴 경.
황족 추행 혐의를 받은 그에게, 드디어 판결이 떨어졌다.
중앙궁 집무실 책상에 앉은 황제 엘리엇의 얼굴에는 붉으락푸르락 노기가 가득했다.
그 앞에서 테렌스는 벌이라도 서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감히 제국의 황녀를 추행해? 이딴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 프리다의 석실 문지기로 배치가 됐었다니. 대체 선발 기준을 뭘로 잡았던 거냐?”
황제는 재판관이 보내온 판결문에 도장을 쾅 찍으며 테렌스를 책망했다.
“면목 없습니다, 폐하. 검술 실력과 가문, 그간의 공훈을 위주로 보다 보니 인성 문제를 놓쳤습니다.”
테렌스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프리다의 검술 교육 중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재판장도 참…. 쯧쯧쯧. 고작 징역 5년이 뭐냐. 단두대에 세워도 모자랄 중죄인데.”
“덕스턴 백작가에서 로비가 있었나 봅니다.”
“에휴…. 내가 따로 기소해서 죄를 물어야겠군. 그럼 이놈 대신 넣을 기사는 알아봤고? 구멍이 생기면 안 될 텐데.”
“대체 후보자 목록 가져왔습니다.”
테렌스는 들고 있던 문서를 얼른 황제에게 넘겼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어둡게 내리깔려 있었다.
“어디 보자….”
황제는 콧부리에 돋보기안경을 걸치고 문서를 한참 살폈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오오, 프레이저 후작의 막내아들이 있구나.”
“켄드릭 프레이저 경 말씀입니까. 네, 제1 기사단 소속입니다.”
“제1 기사단이라면 선발시험 성적이 좋았겠군. 어릴 때 몇 번 보긴 했는데. 너와 얘기 나눈 적은 있느냐?”
테렌스는 법정에서 발레리를 열심히 변호하던 켄드릭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 번 대화했습니다. 길지는 않았습니다만….”
“마음에 들더냐?”
“…좀 더 지켜봐야 알 것 같습니다. 서임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걸로 압니다.”
법정에서 발레리를 변호하던 켄드릭은 강직한 인상의 달변가였다.
하지만 테렌스에겐 아직 백 퍼센트의 확신이 없었다. 프레이저 후작가라면 검술 실력은 보증되겠지만, 아직 켄드릭은 황실 기사로서의 경력이 일천했다.
“나이는 어려도 후작을 닮았다면 분명 괜찮은 사내겠지. 내일 그쪽 기사단장을 불러 평판을 물어야겠다. 나는 오늘 알현이 좀 많이 잡혀서. 면접은 네가 보거라.”
아무래도 황제의 마음은 이미 결정된 것 같았다.
프레이저 후작은 황실 기사부터 시작해 총사령관까지 달았던 인물로, 남부 영지로 내려간 뒤에는 황제파 귀족의 거두로 자리 잡았으니까.
테렌스도 달리 떠오르는 대안이 없었다.
***
투명한 창으로 햇살이 붉게 내비치는 늦은 오후.
켄드릭은 업무 도중 호출을 받고 황태자궁 집무실에 불려왔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테렌스에게 깍듯이 경례했다. 군기가 바짝 잡혀 있었다. 이날은 연한 갈색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채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그래, 거기 자리에 앉지.”
“감사합니다.”
테렌스는 서류가 수북이 쌓인 책상에서 일어나 테이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일은 할 만한가?”
그가 켄드릭의 맞은편에 착석하며 물었다.
“맡은 소임은 다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테렌스는 그의 옷매무새부터 살폈다. 암적색 기사 제복에 단추란 단추는 모두 채워져 있었다.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정갈했다.
“제1 기사단으로서 자긍심이 높을 텐데. 소속이 바뀌어도 괜찮겠나?”
“저야 어떻게 써 주시든 영광입니다.”
켄드릭은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답변했다.
제국 최고 군사령관을 꿈꾸는 그는 상급자의 비위를 맞출 줄 알았다. 아버지인 후작을 대하는 가신들의 언행을 유심히 관찰한 덕이다.
“24시간 체제고, 교대근무라 힘에 좀 부칠 수 있는데.”
“가진 건 체력뿐입니다.”
“햇빛 보기가 어려울 수 있다.”
“피부가 너무 그은 게 고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별일은 없었지만…. 돌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칼레바니아 제국 기사는 어떤 상황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마법사들과도 함께 근무하는데도 괜찮겠나?”
기사들과 마법사들 사이에는 전투 방식이 다른 만큼 약간의 알력 다툼이 있었다.
최근엔 마력석을 놓고도 갈등이 있었다.
기사들이 창검과 방패에 마력석을 부착하면서 항마력 강화에 나섰는데, 이 때문에 마력석 수요가 급증하며 값이 천정부지로 솟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석실 앞을 지키려면 함께 근무를 서는 마법사들과도 마찰이 없어야 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막힘없이 시원스럽게 대답하면서도, 켄드릭은 내심 불안했다.
대체 어딜 보내려 하기에 황태자가 이런 질문을 할까.
‘햇빛 잘 못 보고, 마법사들과 함께 일하는 근무지라면….’
바로 추론이 끝났다. 칼레바니아 남부, 아버지의 영지에 있는 마력석 광산밖에 없었다.
광산에는 지하에서 폭파 마법을 쓰는 마법사들이 상주했다. 그곳에 파견된 기사들은 광부들이 채굴한 마력석을 보호하는 일을 했다.
“흠….”
테렌스가 잠시 뜸을 들였다.
무슨 할 말이 더 남은 걸까. 켄드릭은 고개를 들고 황태자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 로빈슨과는 친구랬지.”
“예?”
켄드릭은 당황했다. 로빈슨이 누구였더라.
“경의 그…. 집착광팬이라는 그자 말이다.”
이제 기억났다. 발레리의 신분증명에 이용된 동명이인의 성이었다.
“발레리 말씀입니까. 석방됐다고 들었습니다. 오해를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발레리 이야기는 갑자기 왜….”
“경과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지?”
황태자의 입에서 웬 뜬금없는 질문이 나왔다.
발레리를 알게 된 경위라니.
켄드릭은 마호가니 원목 테이블의 나뭇결을 멍하니 응시하며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