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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1)화 (11/173)

11화

“그 정도다.”

‘잉? 내 실력이 그 정도라고?’

황태자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발레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계단 한가운데 멈춰 섰다.

“…뭐예요? 지금 제 검술 실력을 인정하신 거예요?”

“그래.”

저 인간이 진짜 진심으로 저러는 걸까. 발레리는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되물었다.

“정말요? 진짜로?”

“…널 이곳에 들인 건 순전히 네 실력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는데.”

테렌스의 대답은 한 치 흔들림 없이 확고했다.

그러자 발레리의 양 입꼬리가 꼬물거리더니 서서히 상승곡선을 그렸다.

발그레한 두 뺨이 기쁨으로 점점 부풀어 올랐다.

얼마 안 가 만면에 미소가 가득해졌다.

‘10여 년을 괜히 연습한 게 아니었어. 무려 황태자한테 인정받을 정도라니.’

어느새 흰 치아까지 드러낸 그녀의 미소는 갓 따낸 페퍼민트 잎사귀처럼 청량했다.

테렌스의 눈길은 한동안 발레리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흠칫하며 눈 맞춤을 피할 때까지.

어두운 층계를 비추는 벽면의 촛대 때문일까. 테렌스의 호수 같은 눈동자 한가운데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뭐야, 이 새끼. 왜 이렇게 오랫동안 쳐다봐. 섬뜩하게.’

발레리는 날카로우면서도 어딘가 진득한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거짓말처럼 싹 빠져나갔다.

“왜 그러세요? 사람 웃는 거 처음 보세요?”

“…아니.”

테렌스는 이제야 제 행동을 자각하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렇게 오래 응시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멋쩍은 얼굴을 재빨리 앞으로 돌려 다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표정을 정말 자유자재로 바꿔대는군. 속내가 그대로 내비쳐도 상관없다는 건가.’

테렌스에게 발레리는 여러모로 처음 보는 인간상이었다.

빼어난 검술 실력. 툭툭 꽂히는 직선적인 말투. 모든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얼굴. 여자 중에선 보기 드문 근육질 체형.

특이하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테렌스는 묘한 감상을 떨쳐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레리도 말없이 속도를 높였다.

대화가 끊긴 둘은 금방 석실에 도착했다.

황녀가 이들을 희미하게 웃으며 맞아들였다. 어린 남자아이들이 입을 법한 흰 셔츠에 리넨 바지 차림이었다.

“아, 좋은 아침이에요. 오빠는 바쁠 텐데 왜 왔어?”

황녀의 나른한 목소리에선 약간의 무기력함이 묻어났다.

“첫 수업 참관.”

“그래, 좀 보다 가.”

이제 진짜 수업을 해야 한다.

발레리는 허리춤의 칼자루를 살포시 쥔 채 고민에 빠졌다.

사실 아직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부터 가르칠지도 모르겠는데 뭔 참관을 하겠다는 건지. 첫날부터 번듯한 커리큘럼이라도 내놓길 기대하는 건가.

쿵쿵.

답답하던 차에 누가 석실 문을 두드렸다.

“레이븐입니다.”

황녀가 출입을 허하는 종을 울리자 마법사가 들어왔다. 역시 초록색 천을 친친 휘감은 꼴이었다.

매번 황태자랑 붙어 다니는 걸 보니 호위뿐 아니라 개인 비서 역할도 하는 듯했다.

“무슨 일이지, 레이븐.”

“외무부 대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자.”

테렌스는 곧장 레이븐을 따라나섰다.

발레리는 석실을 떠나는 테렌스의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흘겨봤다.

‘에휴, 저거 저거 1분도 안 돼서 나가네. 바쁘면 그냥 지 할 일이나 하지.’

이제 석실에는 두 여자만 남았다.

그나마 감시자가 없어지니 발레리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발레리는 눈앞에 선 프리다의 모습을 훑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뭐부터 가르쳐야 하지. 검을 들기 전에 일단 몸부터 준비가 돼 있어야 할 텐데. 별로 건강해 보이지가 않네.’

“잠시만요, 황녀님. 괜찮으시면 지금 몸 상태를 좀 봐도 될까요?”

“그래요.”

발레리는 프리다의 주변을 돌며 몸 구석구석을 찬찬히 살펴봤다.

왜소한 몸, 가느다란 팔다리는 살도 근육도 없이 겨울나무처럼 앙상했다.

‘와, 말라도 너무 말랐잖아. 살짝만 부딪혀도 스러질 것 같네.’

전신을 훑는 날카로운 시선에, 프리다는 바짝 긴장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또다시 철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프리다가 종을 울리자 로저 경이 석실에 들어왔다.

문지기 수장인 로저 경은 프리다의 집사 역할까지 도맡고 있었다.

“황녀님, 오늘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평소에 먹던 대로 부탁해요.”

로저 경이 네, 하고 대답하며 석실 밖으로 나갔다.

“황녀님, 아직 아침 안 드셨나 봐요.”

“보통 이때 먹어요.”

“근데 시녀가 아니라 기사가 시중을 드네요?”

“아, 여기가 출입이 엄격하다 보니 따로 시종이 없어요. 필요한 건 로저 경이 날라다 줘요. 여기 집사거든요.”

“아아….”

“시녀들도 없어서 목욕도 혼자 하는걸요. 옷도 혼자 입을 수 있는 편한 걸로 입고요.”

프리다는 자신의 상황을 담담하게 설명했다.

목욕은 원래 혼자 하는 거 아닌가, 목욕 시중의 개념을 모르는 발레리는 살짝 갸웃했지만 의문을 참았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로저 경이 들고 온 건 손바닥만 한 접시 두 개였다.

하나엔 수프가 반쯤 담겼고, 나머지 하나엔 조막만 한 롤빵 한 조각이 놓였다.

“엥? 황녀님, 이걸로 아침이 돼요?”

“먹고도 남죠. 조금 남겨뒀다가 점심으로 먹기도 해요.”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지. 발레리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요깃거리도 안 되는 양으로 두 끼니를 때운다는 건가, 지금.

“그럼 저녁은요?”

“주로 샐러드나 과일을 먹어요.”

발레리는 심각한 얼굴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검술 배운다는 게, 살 빼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보다시피 말라깽이잖아요. 먹는 건 옛날부터 항상 이랬어요. 배부른 느낌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황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발레리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켰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와, 이런 것만 먹고 사는 사람한테 힘든 검술 수련까지 시킨다고? 이건 인간 학대나 다름없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사들도 황녀가 달라고 하는 음식만 갖다 주면 어떡하나. 땀 뺄 만큼 휘두르려면 풀 코스요리를 먹어도 모자랄 텐데.’

발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뭔가 결심한 듯 말했다.

“황녀님. 혹시 고기를 못 드세요?”

“아뇨, 가끔은 먹는데…. 왜요?”

“일단 먹는 것부터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발레리는 대뜸 석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문 앞에 멀뚱히 서 있는 로저 경을 불러 주문을 넣었다.

“저기, 기사님. 황궁에 닭 많죠? 닭고기 요리랑, 삶은 달걀도 몇 개 가져다주세요.”

“로빈슨 양도 식사하려고요?”

“아 네, 황녀님이랑 같이 먹으려고요.”

예고 없이 들어온 대량 주문에 로저 경은 당황했다.

그래도 황태자가 지명한 황녀의 스승이니 요청을 안 받아 줄 순 없었다.

“황녀님은 매번 똑같은 메뉴만 고집하셨는데…. 일단 알겠습니다.”

음식을 주문한 지 30분쯤이 지났다.

로저 경은 두 여인 앞에 커다란 접시 하나를 대령했다.

“주방장이 새로 만들기엔 시간이 없다 해서, 이미 구워진 걸 데워 왔습니다.”

노릇노릇한 통닭이었다. 비스듬히 썰린 반숙 달걀 여섯 알이 그 옆에 가지런히 놓였다.

브로콜리와 양상추, 방울토마토 등 싱그러운 생채소가 공백을 빼곡히 채웠다. 그야말로 눈까지 즐거워지는 접시였다.

“우와아…. 저 반숙 진짜 좋아하는데!”

“나도 반숙을 좀 더 선호하는 편이에요.”

노른자위가 마치 순금처럼 찬란했다. 높은 사람들이 먹는 달걀은 때깔부터 다르구나. 발레리는 황실 주방의 고급스러운 플레이팅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황녀님, 배부른 걸 싫어하신다니까 먹는 양을 억지로 늘리진 않을게요. 대신 고기나 달걀은 조금이라도 드셔 주세요. 이만큼이면 되려나?”

발레리가 닭고기를 손바닥 절반 크기로 잘라 맞은편에 앉은 프리다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프리다는 약간 당황했다. 고기를 자르는 건 예법상 석실의 주인인 황녀가 해야 하는 일인데, 그걸 발레리가 하고 있었으니.

“아, 알겠어요. 그런데 왜요?”

“우리 두모─ 아니 아버지가 몸 키우는 데는 닭고기랑 달걀이 최고랬어요.”

“아아….”

“와 이거 진짜 맛있다. 이렇게 부드러운 닭 요리는 처음 먹어봐요.”

발레리는 닭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우적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프리다도 닭고기를 자그맣게 썰어 입안으로 가져갔다.

후추 향이 다소 강했으나 간도 적당하고 육질도 부드러웠다. 오물오물 씹다 보니 신선한 바질의 풍미도 느껴졌다.

“음,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이 괜찮네요. 그런데…. 몸을 키운다고요?”

“살찌는 걸 말하는 건 아니고요. 근육이 붙는 거예요. 저처럼.”

프리다는 발레리의 몸을 지그시 바라봤다. 녹갈색 군복 재킷 위로 쩍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팔뚝 실루엣이 선명히 잡혀 있었다.

어제 발레리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길고 늘씬한 체형의 여성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근육까지 발달한 경우는 처음 보았으니까.

‘키도 키인데…. 어쩜 이렇게 건강하고 생기 있어 보일까. 내 몸하곤 아예 다른 물질로 만들어진 것 같네.’

프리다는 궁금해졌다. 얼마나 노력해야 발레리 같은 몸을 가질 수 있는지.

“근육이라…. 로빈슨 양은 고기랑 달걀을 많이 먹어서 그렇게 몸이 탄탄한가요?”

발레리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몸 쓰는 게 직업인 사람에게 몸 칭찬만큼 달콤한 게 없었다.

“아, 제 몸이 좀 탄탄하긴 하죠? 고기랑 달걀도 많이 먹었지만, 운동을 많이 했어요. 감옥에 있을 땐 식사랑 운동이 둘 다 부실해서 근육이 좀 줄었겠지만요.”

“감옥이요? 로빈슨 양이 감옥에 있었다고요?”

옥살이를 했다니. 프리다는 깜짝 놀라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아, 잠깐 들어갔다 나왔어요. 입대하려고 신분을 속이기도 했고, 오빠분이랑 약간의 오해가 있었거든요. 별 건 아니에요!”

“우리 오빠요? 테렌스랑 무슨 오해가 있었는데요?”

발레리는 진땀을 흘리며 프리다의 시선을 피했다.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을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 황태자 놈이 나와의 악연을 동생한테는 얘기 안 했구나. 하긴, 굳이 전할 이유는 없지.’

“하하, 좀 지독한 오해라서요. 저보단 오빠분이 설명할 게 더 많을 거예요. 근데 황녀님,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프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 말고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아무리 들어도 로빈슨 양이라는 가짜 이름은 귀에 익지 않았다. 성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더 그랬다.

“그게 편한가요? 알았어요, 발레리라고 했었죠…. 그렇게 부를게요.”

발레리의 몸을 보며 자극을 받았는지, 프리다는 발레리가 덜어준 양의 절반이나 해치웠다. 삶은 달걀도 한 알을 뚝딱했다.

프리다는 내심 놀랐다. 사람을 앞에 두고 식사하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가. 평소보다 훨씬 많이 먹었는데도, 더부룩하지 않고 적당히 배부른 게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 위에 슬쩍 내려놓았다.

“배부르세요, 황녀님?”

“응, 조금요. 나 신경 쓰지 말고 편히 먹어요, 발레리.”

“고백할 게 있는데요. 사실 저 아침 먹고 왔는데 여기서 또 먹는 거예요.”

“정말요?”

“저는 먹는 만큼 기운이 나거든요. 이따 점심 식사는 소고기 어떠세요?”

발레리는 아침 식사를 다 들기도 전에 점심 메뉴부터 생각했다. 프리다가 살기 위해 먹는 부류였다면, 발레리는 먹기 위해 사는 편에 가까웠다.

‘황녀랑 같이 먹는 거니까, 시키는 음식은 뭐든 갖다 주겠지? 내일은 오리고기로 해야겠다.’

그녀의 입가에 깊은 만족의 미소가 떠올랐다.

근위병에게 보급되는 식사와는 비교도 못 할 고급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다니. 생각보다 훨씬 우수한 근무환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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