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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0)화 (10/173)

10화

발레리는 황태자가 주고 간 열쇠를 문구멍에 넣고 돌렸다. 다섯 평 남짓한 독방이 나왔다.

싱글 침대와 어깨너비보다 약간 큰 옷장, 작은 나무 책상과 의자까지 갖춰져 있었다.

다만 창문은 바깥이 아닌 복도 쪽으로 나 있어 채광은 좋지 않았다.

“오, 그럴듯한데?”

난생처음 생긴 혼자만의 공간에 발레리는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도적단에서는 남자 단원들과 같은 공간에서 간단히 가림막만 치고 지냈었다.

발레리는 새 침대에 대자로 뻗어 팔다리를 신나게 휘적거렸다.

“앗싸, 이제 남자애들이랑 같은 방 안 써도 된다!”

다소 딱딱한 침대였지만, 싸늘한 지하 감옥 바닥에 비하면 거의 구름 위에 누운 수준이었다.

“방도 생겨 신분도 생겨 번번한 직업도 생겨.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그때부터 발레리는 머릿속 엉킨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보았다.

“자,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이제부터 생각을 해보자.”

일단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한다.

황녀가 납치 기한인 내년 3월 말 전까지 석실에서 방을 빼야 일이 편해진다.

“그때까지 석실에 있게 되면 상황이 영 복잡해지는데….”

발레리는 머릿속으로 최악의 상황을 그려보았다. 황녀가 석실 안에 있을 때 데리고 나와야 하는.

황녀야 야밤에 들쳐 메고 나오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혼자만의 힘으로 무시무시한 문지기 30여 명을 뚫어야 했다.

문지기도 그냥 문지기인가. 기사와 마법사로 구성된 황녀 전속 부대였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켄드릭만큼이나 덩치가 컸다. 마법사들은 함부로 까불었다간 불로 태워 죽일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거기다 근무체제도 24시간이고. 

“어휴, 아무리 나라도 그 인간들을 무슨 수로 뚫냐고…. 절대 못 할 일이지.”

어쨌든 지금은 움직일 타이밍이 아니었다.

목표물이 황녀뿐이면 또 모를까, 황실 보검의 위치도 아직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떻게 생긴 지도 모르는 그 망할 놈의 보검, 아오.”

발레리는 이마를 턱 짚었다. 보검만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게다가 발목에는 탈출 금지 마법까지 걸려 있어 성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빤들빤들한 얼굴로 마법을 걸던 레이븐이 떠오르니 울화가 치솟았다.

“어쨌든 잘 보여서 신뢰를 얻어야 이런 뭣 같은 마법도 풀어낼 수 있겠지.”

발레리는 벽 쪽으로 돌아누워 먼 훗날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임무를 완수한 다음에는 단원들과 무사히 외국으로 망명할 수 있을까.

“아, 맞다.”

발레리는 상체를 번쩍 일으키며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생각지 못한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켄드릭. 법정에서 자신을 열심히 변호해 준 그의 입지였다.

열심히 ‘애국자 친구’라고 두둔했던 작자가, 나중에 황녀의 납치범이자 보검 절도범으로 드러난다면.

아무리 프레이저 후작가의 아들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게 뻔했다.

“하, 성공한 뒤에도 문제네. 어떻게든 걔한테 피해 안 가게 움직여야 하는데.”

발레리는 몸을 엎드려 베개 속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임무는 어떻게든 성공해 내야 한다. 하지만 켄드릭에게 불똥이 튀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깔끔한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범행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들키지 않으면 된다.

“후…. 미치겠다. 내가 범인이란 걸 또 어떻게 숨겨. 다른 누구한테 덮어씌우기라도 해야 하나.”

발레리는 또다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답답한 속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우여곡절 끝에 황녀의 위치를 파악했는데. 주어진 임무의 난이도는 몇 단계나 더 올라가 있었다.

확실한 건 한 가지였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다는 것.

“하, 일단 몸 사리고 황녀 가르치는 일에 충실하자. 위치 파악한 것만도 어디야.”

***

다음 날 이른 새벽,

발레리는 황궁 서쪽 구역의 가장 작은 출구로 향했다.

뭐가 어떻게 되든, 탈출 금지 마법이라는 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성문 앞에는 아는 얼굴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오오, 사이먼, 아니 로빈슨이라고 불러야 하나? 풀려난 걸 축하해!”

훈련병 시절 알고 지내던 병사 하나가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발레리의 석방 소식을 듣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녀는 못 들은 체 무시했다.

그녀는 성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에 접근하려는 순간 발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쿵, 하고 몸이 앞으로 넘어졌다.

누군가가 뒤에서 발목을 꽉 부여잡고 확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씨, 마법이란 게 이런 거였어?’

“크크큭, 사이먼, 몸개그 하는 거야?”

병사들이 와락 자빠진 발레리를 보며 키득거렸다. 돌부리에 걸린 것도 아닌데 허우적대는 그녀의 꼴은 퍽 우스꽝스러웠다.

땅을 짚은 손바닥이 쓰라리고 무릎이 지끈거렸지만, 발레리는 훌훌 털고 일어났다.

‘이번엔 성벽을 타 넘어봐야지. 설마 마법이 성벽에까지 걸려 있으려고.’

그렇게 인적이 드문 서쪽 성벽 위에 올라서는 순간.

누군가가 발목을 밧줄로 단단히 묶고 잡아당기는 듯한 반동이 느껴졌다. 여기서 더 나가면 성벽 안쪽으로 퉁겨져 떨어질 것 같았다.

‘하, 안 되겠네.’

발레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성벽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하여간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후우, 재수 없어.”

테렌스 특유의 무감한 표정을 떠올리며 발레리는 분노를 삭였다. 

***

어디 누가 감히 황태자를 재수 없다 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단연코 발레리 한 명뿐이었다.

포마드로 깔끔하게 쓸어 넘긴 백금발. 매끄럽고 뽀얀 피부는 칼레바니아 귀족들이 환장해 마지않는 상아 조각품 같았다.

황태자궁에 자주 드나드는 익명의 관리들은 이렇게 말한다. 

─황태자 전하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자면요, 가끔 숨이 멎을 것처럼 가슴이 철렁합니다요.

─맞습니다. 그 눈을 똑바로 보면서 거짓부렁을 고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테렌스의 연한 청안은 갖가지 보석을 연상시켰다. 맑은 하늘 아래서 보면 바닷빛 아콰마린 같았고, 실내에선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빛을 발했다.

그 눈동자에서 나오는 시선은 얼음송곳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상대방의 속내를 모두 간파할 듯이.

언뜻 보면 굉장히 특권의식을 지녔을 것 같은 차가운 외모였다.

의외로 테렌스는 아랫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춰 대했다. 몸가짐이나 말투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하인들이 실수해도 크게 화를 낸 적도 없었다. 조곤조곤 엄격히 잘못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통했으니까.

그의 무릎에 뜨거운 차를 쏟은 하녀에게도 “다음부턴 조심하라”라고 할 뿐 아무런 불이익도 주지 않았다.

분명 다음 날 화상 치료를 위해 주치의가 다녀갔는데도.

─오늘은 저한테 먼저 인사하셨어요!

─물걸레질하다 미끄러질 뻔했는데 뒤에서 잡아주셨어요….

─분명 지적을 들었는데 왜 기분이 짜릿한 거죠?

황태자궁은 모든 여성 월급쟁이들의 0순위 희망근무처가 된 지 오래였다.

아무리 그래도 찬 기운을 풀풀 내뿜는 냉미남은 발레리의 취향이 아니었다.

황태자궁 후문을 지키던 시절에도 발레리는 테렌스 보기를 돌같이 했었다.

땀 흘릴 때 손수건을 건넨 건 고맙긴 했지만, 매번 뚱한 표정으로 이곳저곳 쏘다니는 게 어딘가 재수가 없었다.

동료 병사들이 “황태자 전하는 남자가 봐도 정말 반하겠다”고 칭송할 때마다, 발레리는 고개를 흔들며 딴청을 피웠다.

잘 웃고 활기찬 켄드릭이 취향에 더 가까웠으니까.

발레리가 스마일 맨을 선호하게 된 건 어린 시절의 영향이 컸다.

그녀는 거리의 고아였다. 도적단 두목 피어스가 거두어 준 열 살 때까지는.

부모의 얼굴도 몰랐다. 그냥 태어나 보니 너저분한 길거리였다. 넝마를 걸친 채 아무나 붙잡고 뭐든 달라고 빌어야 했다. 그래야 입에 풀칠하며 하루하루 살아낼 수 있었다.

다섯 살 꼬마 때부터 알았다. 자신을 향해 눈을 맞춰주며 웃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걸. 대부분은 불쌍해하거나, 피하거나, 손가락질하거나, 침을 뱉거나 했으니까.

어쩌다 억울하게 밀치기라도 당할 때면, 배보다도 사람의 미소가 참 고팠다. 비웃음이나 동정 어린 웃음이 아닌, 정말 순수한 의미의 미소가.

별 시답잖은 소리에도 시원한 웃음으로 화답하는 켄드릭은 그녀에게 큰 활력소였다.

“아무렴, 켄드릭이 최고지.”

오늘은 드디어 첫 출근 날이다. 거친 빵으로 아침을 때운 발레리는 검을 챙겨서 방문을 나섰다.

“아오, 깜짝이야!”

문을 잠그고 돌아선 발레리는 난데없는 인기척에 놀라 머리털이 쭈뼛 섰다.

방문 옆에 웬 남자 한 명이 바짝 기대 서 있었다.

황태자였다.

“왜 그렇게 놀라지.”

발레리는 가자미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나오자마자 문 옆에 사람이 붙어있는데 어떻게 안 놀라요! 어휴,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녀의 짜증 섞인 반응에 테렌스는 잠시 굳었다.

어제부터 든 생각이었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구시렁대는 사람이 주변에 존재했던가.

매번 바득바득 기어오르는 호위 마법사 레이븐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분명 그녀는 무례하다. 직접 데리러 왔는데 인사조차 없고.

하지만 행실을 굳이 지적하고 싶진 않았다. 평민이니 예법을 잘 모르는 게 당연하겠거니. 몇 번 지적한다고 바뀔 리 없을 테니까.

“…그럼 내려가지.”

“저 혼자도 갈 수 있는데요.”

“네가 어떻게 하는지 보려는 거다.”

“뭐 그러시든가요.”

발레리는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린 채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그래, 날 못 믿겠다며 발목에 이상한 마법까지 걸게 한 작자인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싶겠지.’

두 사람은 함께 옆방 기도실로 들어섰다.

테렌스는 커튼 뒤의 철문을 열고 앞장서서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레리는 어제처럼 그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천천히 뒤따랐다.

“앞으로 틈틈이 찾아와서 참관하려 하니 그리 알고 있어라.”

“밤낮으로 바쁘게 쏘다니시는 분이 참 동생 사랑이 지극하시네요.”

“…….”

그녀 특유의 방자한 말본새는 상대방을 은근히 몰아붙이는 데가 있었다.

테렌스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일일이 대답하면 말려들 것만 같아서.

“저기,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래, 내게 여쭤볼 게 있다고.”

테렌스는 발레리의 말을 존댓말로 교정해 주며 대답했다.

“아 네, 여쭤볼 게 있는데요. 왜 저예요?”

뜬금없는 질문에 테렌스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흘끗 쳐다봤다.

“왜 너냐니.”

“저 밑에 어마무시한 기사님들이 있는데, 황녀님이 그분들한테 안 배우고 왜 굳이 저한테 배우냐고요.”

“흠….”

“그게 궁금해서 잠도 잘 못 잤어요. 제가 검술 실력이 좋긴 하지만 황녀님을 가르칠 정도인가 싶어서.”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테렌스는 발레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답했다.

“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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