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9)화 (9/173)

9화

“1년 내로 프리다를 뛰어난 검사로 만들 수 있겠는가.”

“나를 닮아 운동은 잘 못할 텐데, 그래도 잘 부탁해요.”

황제 부부가 딸의 검술 교육에 몰두하기 시작한 건 반년쯤 전부터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황녀는 24년 평생 검술을 배울 생각조차 안 하던 인물이었다. 여태 해본 운동이라곤 숨쉬기와 걷기뿐.

깡마른 몸에는 최소한의 근육만이 붙어있었다. 과거 자신이 주인공이었던 무도회에서도 춤을 두 곡 연속으로 추지 못했다. 체력이 달려서 쉬어줘야만 했기 때문에.

이런 황녀에게 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한 건 석실 문지기를 맡은 전속 기사들이었다.

석실 문지기들은 황제와 테렌스가 엄격한 기준으로 선발한 명검사들이었다.

황제 부부는 이들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처음 교육을 맡았던 문지기 수장 로저 경은 상당히 의욕적이었다.

하지만 이내 황녀의 굼뜨고 어설픈 동작에 답답해하기 시작했다.

황녀는 나름대로 노력하는 듯했지만, 실력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비실거리는 몸은 목검을 제대로 드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로저 경이 두 손을 들고 포기를 선언한 건 불과 일주일 뒤다. 

“송구하오나, 아무래도 좀 더 좋은 선생을 붙이시는 편이 나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다음엔 또 다른 문지기 기사, 덕스턴 경이 황녀를 가르쳤다.

그는 검술 교육보다는 다른 쪽에 관심이 있었다.

“자아…. 황녀님. 이렇게 잡고 휘두르시면 됩니다.”

덕스턴 경이 황녀의 등 뒤에 밀착해 섰다. 그리고 목검을 잡은 황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명백히 뒤에서 껴안는 자세였다.

당황한 황녀는 목검을 휘두르면서도 진땀을 흘렸다. 제대로 된 동작이 나올 리 없었다.

덕스턴 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황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살거렸다.

“후우…. 옳지…. 옳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급기야 귓가에 입을 들이대고 숨까지 훅 불어넣었다.

선을 넘는 행동에 황녀는 몸서리치며 교육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와 있었던 일을 전부 테렌스에게 고발했다.

“오빠. 덕스턴 경한테는 못 배우겠어.”

“왜?”

“변태 같아.”

“변태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검술을 꼭 뒤에서 끌어안고 가르쳐야 하는 거야? 막 귓가에 대고 숨을 부는데, 어휴…. 소름 끼쳐서 나가라고 소리 질렀어.”

테렌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딜 감히…. 바로 처분하겠다.”

황궁 지하 감옥. 발레리 옆방에 갇혀 곡소리를 내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자가 덕스턴 경이었다.

다른 문지기 기사들도 차례로 황녀에게 검술을 가르치려 시도했다.

그래도 프리다의 실력은 늘 제자리였다.

자세를 바로잡아 주려고 해도 황녀는 좀체 따라 하지 못했다. 팔다리 위치를 손수 잡아주는 방법도 있었지만, 지체 높은 여인의 몸에 손을 대는 건 기사들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한 차례 불미스러운 일이 있기도 했고.

문지기 기사들은 석실 앞을 지키며 조용히 투덜거렸다.

“왜 황녀님은 보고 따라 하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하지. 천천히 하는데도 그래.”

“목검 들 때조차 무거워서 휘청거리는데 뭘 어떻게 가르치냐고.”

“일 년 만에 뛰어난 검사? 오천 년을 쏟아부어도 안 될 것 같은데.”

물론 가장 속상한 사람은 황녀 본인이었다.

오라비인 황태자가 석실로 찾아올 때마다, 황녀는 울먹이며 하소연했다.

“오빠, 난 진짜 자질이 없는 것 같아. 가르쳐주는 스승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야…. 나 이러다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테렌스는 무기력해진 쌍둥이 여동생을 토닥였다. 그는 장갑이 끼워진 제 오른손을 원망스럽게 내려다봤다.

“미안하다. 내 손이 이러지만 않았어도 직접 가르쳤을 텐데.”

“아니, 오빠가 가르쳤어도 똑같았을 거야.”

“너무 조바심 내지 마. 어떻게든 방법은 나올 테니까.”

황제 부부의 걱정은 날로 커져만 갔다.

테렌스에게도 답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테렌스의 눈에 예상외의 인물이 포착됐다.

남자로 위장해 황궁 근위병으로 입대한 신원미상의 범죄자.

감히 자신의 눈앞에 칼끝을 들이밀었던 그 여자.

발레리 로빈슨이었다. 

테렌스는 그녀를 엄중히 처벌할 생각이었다. 무슨 의도로 황궁에 들어왔는지 확인이 안 된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녀의 출중한 검술 실력은 테렌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냇가에서 한판 벌였던 그날부터, 밤에 자려고 누우면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반복 재생됐다.

남녀를 떠나서 그렇게 뛰어난 검술을 구사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것도 프레이저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정통 검술을.

‘그 여인의 실력은 분명 보통이 아니었다. 왼손으로 상대했지만 날 쉽게 이길 정도였으니. 프레이저 검술답게 불필요한 동작이 하나도 없었고, 잔기술이 좋아서 작은 틈을 예리하게 파고들었지.’

여기에 켄드릭의 증언이 테렌스의 관점을 더 움직여놨다.

가장 결정적인 포인트는 바로 이 부분에 있었다.

─어렵기로 이름난 저희 가문의 검술을, 여자의 몸으로 빠르게 체득한 사람입니다.

그래. 여자의 몸으로 검술을 배워 그 정도 경지에 오른 자다.

어쩌면 프리다가 어려워하는 부분을 더 잘 이해하고, 극복하도록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애국심 투철한 여인이 아닌가. 사내들도 오기 싫어하는 군대를 자원해서 들어왔으니. 칼레바니아 황제의 방패가 되고 싶다며.

‘프리다도 같은 여자에게 배우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겠지. 덕스턴 경처럼 불미스러운 짓도 하지 않을 테고.’

프레이저 후작가에서 발레리의 신분을 증명하자마자, 채플 한구석에는 새로운 공간이 마련됐다.

***

발레리와 프리다의 상견례는 금방 끝났다.

석실을 나온 세 사람은 나선형 계단을 다시 밟았다.

이번엔 오르막이었다. 이번에도 테렌스가 앞장서고, 발레리와 레이븐이 차례로 뒤따랐다.

올라가는 길은 체감상 훨씬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계단이 대체 언제 끝나려는 건지.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것 같았다.

“…후, 이 계단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네요.”

“불만인가?”

“아뇨, 전 체력이 좋아서 이 정도는 입가심이에요. 근데 검술 선생 일, 설마 병사 월급 주고 시키려는 건 아니죠?”

발레리가 대뜸 돈 얘길 꺼내자, 테렌스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서늘하게 내려다봤다.

“넌 공식적으로 황궁 근위병이다. 계급별로 급여 체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럼 계속 쥐꼬리 받아먹고 일하란 말씀이네요. 네에, 알겠습니다.”

발레리의 잇새로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근로 의욕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비공식적인 업무에 주어지는 보상은 따로 있다. 그 금액을 어떻게 책정할지는 고민해 보도록 하지.”

“그럼 성과에 따라서 액수가 달라진다는 거예요?”

“프리다의 실력이 얼마나 느는지 지켜보고 나서 결정하려 한다.”

“저 질문 있어요.”

발레리는 오른팔을 번쩍 들었다.

테렌스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궁금증이 투명하게 내비치는 표정이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물음표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 같았다.

“…답할지 말지는 내가 결정하겠다.”

“황녀님은 왜 이런 데서 지내요? 원래 살던 라벤더궁이 훨씬 넓고 좋잖아요. 햇빛도 잘 들고.”

“안전상의 문제라고 해 두지.”

“뭐 누가 살해 협박이라도 해요?”

“답하기 곤란하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곤란할 건 또 뭘까.

집게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던 발레리는 천연한 얼굴로 질문을 이어갔다.

“흐음, 문 앞에 서 있는 기사랑 마법사들은 뭐 하는 거예요?”

“보다시피 석실 문지기들이다. 프리다를 지키는.”

“그렇게나 많이 필요해요? 서른 명은 돼 보이던데.”

“정확히 말하면 100여 명이 24시간 체제로 교대근무를 한다.”

발레리는 순간 몸이 굳어 발걸음을 멈췄다.

24시간 체제라니. 그렇게 철통같이 지키고 있을 필요가 있나.

“흠, 황녀님은 외출 같은 건 안 하시나요? 지상에선 뵌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못 하는데.”

“잉, 왜요? 그럼 감금된 거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테렌스는 멈칫했다.

이런 직설적인 질문은 처음이었다.

감금이라. 사전적 의미대로라면 사실상 감금이긴 했다.

석실 문지기들은 표면상 황녀를 지키는 게 임무였지만, 암묵적으로는 밖으로 못 나가게 막는 역할도 하고 있었으니.

테렌스는 한 번 크게 호흡한 뒤 목소리를 낮추어 답했다.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그렇게 정의하진 말아라.”

“흠, 혹시 뭐 잘못하셔서 벌이라도 받는 거예요?”

무슨 이런 질문이 다 있지. 제국의 유일한 황녀가 징역살이라도 하냐는 건가.

테렌스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럴 리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뿐이다.”

그는 발레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거참 말 되게 아끼시네.”

“…….”

그녀의 볼멘소리에도 테렌스의 뒤통수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발레리는 촛불을 은은히 반사하는 테렌스의 뒷머리를 쳐다보며 슬슬 핵심 질문을 준비했다.

황녀가 약 열 달 뒤에 납치해가야 하는 표적이란 점을 상기하면서, 그녀는 침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이번엔 진짜로 마지막 질문이에요.”

테렌스는 반쯤 고개를 틀어 그녀에게 턱짓했다. 어디 한번 해보라고.

“황녀님은 저 밑에서 언제까지 지내시는 거예요? 설마 영원히 지하에 사시진 않을 거 아녜요.”

“…글쎄. 이제 열 달 정도 남은 것 같은데. 정확한 날짜는 미정이다.”

열 달? 열 달이라니.

임무 기한으로 머릿속에 새겨둔 숫자가 황태자의 입에서 그대로 튀어나왔다.

발레리는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느낌에 동작을 멈췄다.

“열 달? 지금 열 달이라고 하셨어요?”

“그래. 프리다는 열 달 내로 뛰어난 검사가 되는 게 목표다. 넌 그때까지만 가르치면 되고.”

테렌스는 차분히 프리다의 목표 시한을 이야기했다.

공교롭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발레리의 임무 시한과 맞아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잘됐다.”

발레리는 작게 읊조렸다. 어쩌면 시기를 잘 맞춰 데려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뭐가 잘 됐다는 거지.”

“아, 어, 지하에 너무 오래 있으면 답답할 수 있잖아요. 하하.”

귀도 밝네. 발레리는 무심코 뱉은 혼잣말을 얼른 주워 담았다.

“음, 그래서 목표 달성을 위해 이 안에서 집중 훈련하는 거예요?”

“…질문은 아까가 마지막이라고 하지 않았나?”

테렌스는 추가 질문을 칼같이 막았다. 발레리는 그의 뒤통수에 눈총을 쏘며 고개를 저었다.

드디어 계단을 다 올랐다. 세 사람은 철문을 지나 기도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테렌스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제복 재킷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발레리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굳은살투성이 손바닥 위로 작은 쇠붙이 하나가 툭 떨어졌다.

“음? 열쇠네요?”

테렌스는 기도실 바로 옆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앞으로 저 방에서 지내면 된다. 그럼 수고해라.”

“푹 쉬어요, 아가씨. 새 보금자리에 시에나 여신의 축복이 임하길.”

황태자와 레이븐은 그녀를 뒤로하고 순식간에 채플을 빠져나갔다.

발레리는 홀로 남겨진 채 손안의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뭐야, 나한테 이 건물에서 살라는 거야?”

그녀는 방금 황태자가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평범하게 생긴 나무 문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