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테렌스는 황당했다. 등 뒤의 여자는 무시무시한 지하실 고문을 상상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잇새에서 피식, 하고 바람이 새어 나왔다. 무슨 상상력이 저렇게 엉뚱하고 비약적인지.
그는 이내 웃음기를 거두고 정색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답했다.
“…그런 취미는 없는데.”
발레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큭, 아가씨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드릴 순 있어요.”
뒤에서 레이븐이 한마디 보탰다. 발레리는 몸을 홱 돌려 그를 쏘아봤다. 레이븐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지팡이 끄트머리에 주먹만 한 불꽃을 일으켰다.
뭐 저런 미친놈이 있나. 발레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는 폭이 꽤 넓은 복도가 있었다.
여기부터는 바닥과 벽, 천장이 모두 묵직한 화강암 벽돌로 이뤄져 있었다.
고대 동양의 어느 돌무덤 석실 같은 분위기였다.
이건 대체 무슨 비밀 공간일까, 하며 그녀는 복도 끝 쪽을 바라봤다.
웬걸, 사람이 떼로 모여 있었다. 보통 사람도 아닌 황실 기사와 마법사들이.
머릿수가 족히 서른은 돼 보였다. 그들은 암사자 문양이 그려진 커다란 철문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기사와 마법사들은 테렌스를 발견하곤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곧바로 흐트러진 열을 바짝 맞추고 거수경례했다.
“황태자 전하께 경례!”
경례가 끝나자,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기사 한 명이 철문을 쿵쿵 두들겼다. 안쪽에서 맑은 종소리가 화답하듯 들려왔다.
그게 입장 허가 신호인지, 또 다른 기사 두 명이 양 문고리를 하나씩 잡고 힘차게 당겼다.
무거운 금속음과 함께 철문 틈새가 벌어졌고, 내부가 드러났다.
안쪽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예배당처럼 천고가 높은 석실은 마치 귀족 저택같이 꾸며져 있었다.
용도에 따라 공간이 가벽으로 나뉘어 있었다. 침대와 화장대, 소파와 티 테이블, 식탁과 의자가 곳곳에 배치됐다.
천장에는 마법사들이 띄워 놓은 광구가 따뜻한 조명 역할을 했다.
‘뭐야…. 여기 누가 사는 거야? 화장대가 있는 걸 보니 여자 방인가?’
발레리는 정신없이 사방을 살피다 한쪽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웬 연무장이 설치돼 있었다. 벽면에는 검도 여러 자루 걸려 있고.
누가 여기서 무예 연습을 하는 걸까.
때마침 연무장 안쪽에 사람 한 명이 보였다.
가녀린 체구의 백금발 여인이었다.
여인은 어설픈 자세로 목검을 휘두르다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석실에 들어온 세 손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약간 지친 듯한 기색이었으나 입가에 반가운 미소가 걸렸다.
여인을 처음 본 발레리는 충격 속에 얼어붙었다. 다물렸던 입술이 스르르 벌어졌다.
세상 처음 보는 절세미인이었다. 머리칼엔 백금 가루를, 얼굴엔 진주 가루를 뿌린 듯 눈부셨다. 눈동자는 불순물 하나 없이 투명한 콘플라워 블루 사파이어 같았다.
여인의 뒤통수에서 빛줄기 여러 개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착시까지 일어났다.
그때 레이븐이 여인을 향해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발레리도 무의식중에 그를 따라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모자도 안 썼는데…. 괜한 무안함에 뒷머리만 긁었다.
여인이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자 발레리는 심장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반가워요. 이분이 그때 말한 그 적임자야?”
황태자를 쳐다보며 여인이 물었다.
“그래.”
여인은 발레리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가죽바지에 헐렁한 흰 셔츠를 입고 있는데, 품에 안으면 쏙 들어올 듯 아담한 체형이었다.
그녀가 발레리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손목이 어린아이처럼 가느다랬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스승님.”
‘스승님?’
낯선 호칭이었다. 발레리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여인의 사파이어색 눈동자에 비치는 사람은 본인밖에 없었다.
“지금 누구한테 말씀하시는 거예요?”
발레리가 어리둥절하며 악수를 받지 않자, 여인은 황태자를 보며 눈살을 살짝 구겼다.
“오빠, 이분한테 미리 말 안 했어?”
지금 황태자를 뭐라고 부른 거지. 발레리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말문이 막힌 채 여인과 황태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발레리의 동공 한가운데 대규모 소용돌이가 일었다.
“아 참, 소개가 늦었어요. 알고 있겠지만…. 프리다라고 해요.”
잠시 발레리의 사고회로가 정지됐다.
프리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가만있자, 얼굴도 어딘가 낯이 익다.
발레리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황궁에 입성한 이래 계속 찾아 헤매던 표적.
칼레바니아 황녀 프리다가 바로 지금 눈앞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코빼기도 안 보일 수밖에 없었네. 이런 깊은 곳에 숨어있었구나.’
동료들에게 황녀의 행방을 물어도 원하는 답이 안 나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베일에 싸인 사람에게 “볼일이 좀 있다. 어디 있냐”고 묻고 다녔던 과거의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와…. 초상화가 실물의 성스러움을 다 못 담았구나. 정말 시에나 여신의 현신인가.’
발레리는 또다시 황홀경에 빠졌다.
지금까지 이런 미모를 본 적이 없었다. 이 사람은 천사일까, 아니면 여신일까.
이번엔 발레리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늦게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발레리입니다.”
프리다가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두 여인의 악수가 드디어 성립했다.
황태자는 둘의 모습을 지그시 지켜보다 입을 뗐다.
“로빈슨, 오늘부로 널 특수 보직에 채용한다.”
“…특수 보직이라뇨?”
“넌 이제부터 황녀의 검술 스승이다. 수업은 평일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점심시간 제외하고 하루에 여덟 시간이다.”
이렇게 발레리에게 새로운 업무가 주어졌다.
조건도 붙었다.
“이곳의 위치, 네가 하는 일, 모두 발설 금지 사항이다. 공식적으로 넌 채플 담당 근위병이니까.”
황태자의 곁에 선 레이븐이 품에서 지팡이를 불쑥 꺼내 들었다.
“전하, 저 아가씨 입에다가 발설 금지 마법을 걸까요?”
저게 지금 뭐라는 거야. 발레리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애국심이 강하다니 믿어보기로 하지.”
“사실 그런 마법은 없어요, 아가씨.”
레이븐은 이죽거리며 다시 지팡이를 집어넣었다.
저딴 걸 말장난이라고 하는 건지.
발레리는 그의 초록색 망토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르는 상상을 하다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어쨌든 옥살이를 면하게 됐으니까.
면하기만 했는가. 입지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황태자 살해미수범이자 신원을 속여 입대한 병역 비리 혐의자가, 하루아침에 황녀의 검술 스승으로 등극했다.
믿을 수 없는 수준의 전화위복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찾아온 기회였다.
실패했다고 여겼던 임무에 다시 착수할 수 있는.
***
프리다 테레즈 켄트웰.
온 백성이 떠받드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
결 고운 백금발과 그윽한 사파이어 눈동자만으로 황녀의 아름다움은 충분히 빛났다.
하지만 황녀의 존재를 고귀하게 만드는 건 무엇보다 ‘희소성’이었다.
출생 자체가 기적적이었다.
아들만 줄줄이 낳기로 유명한 칼레바니아 황실에서 무려 한 세기 반 만에 태어난 딸이니까.
장장 백 년 하고도 오십 년 동안 황실에는 황녀가 단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았다.
이 기간 황자들은 계속 출생했기에 황위 계승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여아가 이토록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 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여러 대에 걸쳐 황후들이 해산할 때마다 산파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황자님이십니다…. 경하드립니다, 폐하.
황실에 아기가 태어났다 하면 어김없이 늘 사내아이였다. 언젠간 황녀가 나오겠지, 하는 희망은 해를 거듭할수록 희미해져 갔다.
온 백성이 수심에 잠겼다.
황후가 회임할 때마다, 칼레바니아 백성들은 딸이 태어나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게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어느덧 ‘딸 바라기 기도’가 나라의 전통처럼 자리 잡았다.
─시에나 여신님, 우리 황후 폐하 딸 낳게 해주세요!
─이번에는 제발 예쁜 황녀님이길….
─제가 딸만 넷인데, 제 기운 받아 가세요.
이웃 나라들이 보내오는 임신 축하 선물도 보석으로 장식한 아이용 드레스와 아기자기한 장신구 따위였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쓸모없는 물건이 돼 버렸다.
선대 황후는 얼마나 딸을 낳고 싶었는지, 어린 아들, 지금의 엘리엇 황제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다녔다가 남편에게 핀잔을 들을 정도였다.
백성들의 오랜 염원이 마침내 이루어진 건 24년 전, 황후 레베카가 쌍둥이 남매인 테렌스와 프리다를 출산하면서다.
그해 칼레바니아 건국제는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치러졌다.
한 세기 반을 넘는 기다림 끝에 태어난 황녀였다. 온 나라에 축복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자연스럽게 황녀 프리다는 만백성의 연인 같은 존재로 자랐다.
백성들은 황녀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제 딸 키우듯 맘속 깊이 뿌듯해했다.
─어쩜 저렇게 사랑스러우시지.
─저런 딸이 있으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아.
─황실이 150년 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었네. 황제 폐하랑 황후 폐하는 얼마나 행복하실까.
황녀의 10대 시절은 티 없이 맑고 사랑스러운 요정 같았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미소 짓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프리다가 성년인 스무 살이 되고부터는 얘기가 달라졌다.
공식 석상에서 황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백성들이 황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건국제 마지막 날인 시에나 여신의 축일이 유일했다. 그마저도 황궁 발코니에서 손을 잠깐 흔들어준 뒤 바로 사라졌다.
언제나 주인공을 맡았던 황궁 무도회에도 발길을 뚝 끊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늘 귀족들의 가십거리였다.
─우리가 자꾸 쳐다보면 황녀님 얼굴이 닳을까 봐 그런가?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걱정되네.
─관심을 가지지 말아 달라는 걸까.
황녀의 처소도 황궁 내 이름 모를 곳으로 옮겨졌다.
궁에서도 프리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분명 궁 안에 사는 것 같기는 했으나 도통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어느덧 황녀의 결혼 문제가 백성들의 단골 근심거리로 떠올랐다. 두문불출하는 동안 혼기를 훌쩍 넘겨 이십 대 중반이 됐기 때문이다.
그녀가 독신인 데는 여러 가설이 있었으나 아무래도 황제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혼담은 황녀가 성인이 될 무렵부터 일 년에 수십 차례씩 들어왔다. 그러나 황제 엘리엇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족족 걷어찼다.
당사자인 황녀에게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서.
그렇게 거절한 구혼자가 쌓이고 쌓여서 일흔일곱 명이 돼 버렸다.
프리다에게 ‘철벽 요새’라는 별명이 생긴 건 분명 황제의 과보호 때문이었다.
20년 가까이 황실의 자랑이었던 황녀를, 이젠 왜 숨기지 못해 안달인 걸까. 시집은 또 왜 안 보내는 걸까.
신하들이 조심스레 황녀 문제를 입에 올릴 때마다, 황제는 고개를 내저으며 언급 자체를 꺼렸다.
─프리다는 이곳 황궁 안에서 잘 지내고 있다. 그럼 다음 안건에 관해 얘기하지.
황궁 월급쟁이들은 잠정적으로 이런 결론을 냈다.
황녀에게 무슨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그중에서도 건강 이상설, 신변 위협설이 가장 유력했다.
최근부터는 황태자 테렌스가 직접 황궁 순찰에 앞장서기 시작하면서 신변 위협설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테렌스는 며칠에 한 번씩 황궁 안팎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러던 끝에 달밤에 냇가에서 멱 감고 빨래하던 발레리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발레리는 황녀를 이런 곳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있었지만, 발레리에겐 황녀를 둘러싼 사전 정보가 극히 부족했다.
발레리는 도적단에 있을 땐 사전 답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었다. 건물 구조와 목표물의 위치만 숙지해 두면 잠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황녀는 위치를 미리 파악할 수 있는 목표물이 아니었다.
자그마치 4년 전부터 지하 석실에 감금되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