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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7)화 (7/173)

7화

“신분 위조야 어렵지 않아. 아버지 인장 찍힌 문서 한 장이면 되니까. 명색이 영주 아들인데 친구한테 그 정도 일도 못 해주려고.”

켄드릭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고마워.”

발레리는 수줍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가 아니었다면 한창일 나이에 세상을 하직할 뻔했으니.

그리고 미안했다. 괜한 폐를 끼친 것 같아서.

“…근데 말이야, 켄디.”

“응?”

발레리가 애칭으로 부르자 켄드릭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날 왜 그렇게 애국자로 포장한 거야?”

“음, 최대한 무해해 보여야 하니까? 뭐 그럴 리야 없겠지만, 우리 가문에서 심은 자객인 줄 오해받을 수도 있잖아. 요즘 황태자가 좀 날카롭대. 황녀님 문제로 예민한 것 같다던데.”

“…황녀? 황녀님 문제라니?”

황녀라는 말에 발레리는 귀가 번쩍 뜨여 쇠창살을 꽉 부여잡았다.

그러나 궁금증은 이내 식었다.

어차피 황녀 납치는 물 건너간 임무였다. 이렇게 갇힌 몸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도 자세한 건 잘 몰라. 근데 입대는 왜 한 거야? 병사 월급 짜잖아.”

“어, 짜긴 짜더라. 입에 딱 풀칠할 정도만 줘.”

“도둑질할 때가 더 많이 벌지 않았어? 네 실력이면 용병일 해도 수입 짭짤할 텐데.”

“…….”

“발레리, 말 좀 해봐. 왜 입대한 건지.”

“아, 뭐 복잡해. 네 말대로 그냥 애국하려다 실패했다고 치자.”

발레리는 발끝을 내려다봤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황궁에 들어온 실제 이유를 설명할 순 없었다.

범죄를 저지르러 들어온 게 사실이니까. 그것도 몹시 죄질이 나쁜.

“…보고 싶었어.”

켄드릭이 불쑥 낯간지러운 말을 꺼냈다. 발레리의 귓불이 제멋대로 달아올랐다. 별 뜻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 지금 보고 있잖아.”

“너 그날 약속 장소에 왜 안 왔어? 나 세 시간 기다렸어. 합격 소식 제일 먼저 들려주고 싶어서.”

“그게….”

그녀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켄드릭의 기사 선발시험 결과가 나온 뒤, 둘은 마지막 회포를 풀기로 했었다.

발레리는 분명 그 자리에 나갔지만, 그의 앞에 나서진 않았다.

켄드릭은 황실에서 보내온 합격 서신을 손에 들고 꼬박 세 시간을 기다렸다. 그녀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발레리의 침묵이 이어졌지만 켄드릭은 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또 바빴겠지 뭐…. 자유의 몸이 되면 또 대련하자. 애국 투사 발레리 선생, 오늘부터 칼레바니아 찬가 외워 놔라! 간다!”

켄드릭이 품속에서 웬 봉투를 꺼내 쇠창살 사이로 툭 던진 뒤 뒤돌아 떠났다.

독방에 갓 구운 빵 냄새가 진동했다.

빵 봉투 외에도 부스럭거리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종이봉투 안에 든 달거리 천이었다.

재판 후 퇴장하는 발레리의 바지에서 핏자국을 발견하고 어디선가 구해온 거였다.

발레리는 켄드릭이 떠난 빈 복도를 멍하니 바라봤다. 한없이 고맙고 또 미안한 사람이었다.

***

재판 일주일 후.

프레이저 후작가에서 발레리의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가 도착했다.

다행히 영지민 가운데 동명이인이 있었다. 발레리 로빈슨이라는 스물둘 동갑내기 평민 여인이었다.

후작은 그 여인의 신분증명서를 켄드릭에게 흔쾌히 보내주면서 이런 서신을 첨부했다.

「아들아, 네가 요청한 서류는 동봉했다만…. 이 여인의 신분증명은 왜 필요한 것이냐? ─드와이트 프레이저 후작」

켄드릭은 ‘황궁 내 사건 수사에 필요해서 그렇다’라고 대충 휘갈겨 답장했다.

이렇게 발레리의 신원이 확인됐다. 이름을 제외한 모든 게 거짓이었지만.

감방을 뒤덮은 퀴퀴한 곰팡내에 익숙해질 무렵, 발레리는 이 소식을 간수로부터 전해 들었다.

‘살다 살다 22년 만에 신분이라는 게 다 생기네. 그래도 처벌은 받겠지.’

발레리는 징역 3~4년 정도를 예상했다. 어쨌든 황태자한테 칼 들고 덤빈 데다 모종의 병역 비리가 있었으니까.

이제 고민거리는 하나로 귀결됐다.

어떻게 탈옥할 것인가.

형기를 모두 채우고 나가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임무고 자시고 무슨 수를 써서든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으허엉…. 으흑…. 흐어엉….”

옆방에 갇힌 남자가 밤낮없이 오열하는 소리도 발레리의 신경을 긁었다.

“옆방 놈 좀 닥치게 해달라”고 간수에게 부탁했지만 곤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귀족 출신이라나 뭐라나.

“에이 씨, 감방에 있으면 다 똑같은 죄인이지. 여기서까지 신분 차별할 건 또 뭐야?”

탈옥 욕구가 극으로 치달았다.

발레리는 틈날 때마다 복도 바깥을 내다보며 감옥 구조를 속속들이 익혔다. 간수들의 근무패턴도 완벽히 파악했다.

아무도 안 볼 때 쇠창살을 살짝 구부려보기도 했다. 의외로 유연하게 잘 휘긴 했지만, 몸통이 빠져나가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의 이런저런 노력은 금방 수포가 되고 말았다.

며칠 뒤 재개된 재판 결과가 예상을 한참 빗나갔기 때문이다.

“피고인 발레리 로빈슨에 대한 기소를 유예한다. 로빈슨은 즉시 석방되어 황궁 근위병으로 복직한다.”

—땅, 땅, 땅.

재판관은 의사봉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온통 탈옥 생각뿐이었던 발레리는 뜻밖의 판결에 어이를 상실했다. 골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이거 꿈 아니겠지.”

얼결에 칼레바니아 건국 이래 최초의 여자 병사라는 타이틀까지 얻어 버렸다.

재판 내내 손목을 옥죄던 쇠고랑이 풀렸다.

발레리는 혼자 법정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그녀는 건물 입구에 멀거니 서서 제 허벅지를 꼬집어 비틀었다. 선연한 통증에 한쪽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으, 생시긴 하네. 근데 나 진짜 왜 풀려났냐….”

영문도 모른 채 자유의 몸이 됐다. 재판관은 정상 참작 사유조차 말해주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 생활이 어느덧 익숙해졌는지, 오랜만에 쬐는 따사로운 햇볕이 낯설 지경이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발레리는 갈피를 못 잡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온몸을 초록색으로 도배한 낯익은 마법사였다.

그가 따라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뒤따라 걷다 보니 익숙한 장소가 나왔다.

황태자궁 뒤뜰.

마법사가 멈춰 선 곳은 등나무 덩굴이 가득 얽힌 아치형 구조물 아래였다. 포도송이 같은 청자색 등꽃이 머리 위로 주렁주렁 드리웠다.

늦봄의 달보드레한 꽃향기가 코끝에 스몄다.

이게 얼마 만에 맡아 보는 양지의 냄새인지. 발레리는 눈을 감고 콧구멍을 발름대며 향긋한 꽃내음을 만끽했다.

“눈 떠라.”

발레리는 흠칫 눈을 치켜떴다.

어느새 그녀의 앞엔 제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단정히 빗어넘긴 백금발. 맑고 서늘한 연청색 눈동자.

황태자 테렌스였다.

그의 얼굴이 시야에 잡히자마자 발레리의 속이 빠글빠글 끓어올랐다.

그래, 너 마침 잘 만났다. 그녀는 불쾌한 기색을 최대한 감추며 물었다.

“나 왜 풀어줬어요?”

물론 적의는 전혀 감춰지지 않았다. 초록 마법사가 그녀의 언행을 제지했다.

“아가씨, 전하께 인사는 하고 여쭤봐야죠. 공대도 똑바로 하고요.”

“안녕하십니까. 저 왜 풀어주셨습니까?”

뚝뚝 끊기는 어투에 울분이 가득했다. 테렌스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아니 그럼 안 궁금하겠어요? 온갖 혐의는 다 씌워서 감옥에 처넣을 땐 언제고, 이렇게 갑자기 풀어주는 건 또 무슨 경우예요?”

발레리가 제법 험한 소리로 따져 물었는데도, 테렌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정말 감정이랄 게 없는 인간 같았다.

“곧 알게 될 텐데, 그전에 할 일이 있다.”

“뭔데요?”

“아직 널 완전히 믿지는 못해서 말이지.”

“…아니, 뭐라고요?”

“레이븐, 시작해.”

뭘 시작하라는 건가 싶었는데, 마법사가 대뜸 지팡이를 발레리의 발목에 대더니 주문을 외웠다.

“아, 지금 남의 발에 뭐 하시는 거예요!”

발레리는 잽싸게 한 발짝 물러섰으나 이미 늦었다. 그녀의 양 발목 둘레에 빛나는 고리가 생겼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탈출 금지 마법이다.”

“…탈출 금지라고요?”

“이제 네 발로는 성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테렌스가 그녀의 처지를 간략히 설명했다.

“성벽이라는 대형 감옥에 갇혔다고 보면 돼요. 지내긴 괜찮을 거예요. 황궁 안에 있을 건 다 있잖아요, 애국자 아가씨.”

마법사 레이븐이 그녀의 활동 범위를 명확히 규정했다. 감옥에선 나왔을지 몰라도 완전히 자유의 몸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발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두 남자의 명치끝에 불주먹 세례를 퍼붓고 싶었다. 지금 당장.

하지만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레이븐의 말마따나 그녀는 지금 애국자니까.

발레리는 속으로 ‘나는 애국자다’, ‘나는 애국자다’를 되뇌었지만 울화는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후우…. 그럼 언제까지 못 나가는데요?”

“그건 아가씨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겠죠?”

레이븐이 느물거리며 눈웃음을 쳤다.

발레리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툭 불거졌다.

‘후려 패고 싶은 놈들이 세트로 다니네. 아 미치겠다. 이러다 황궁에 평생 말뚝 박히는 거 아닌가.’

잔뜩 복잡해진 상황에 발레리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따라와라. 네가 일할 곳으로 직접 안내할 테니.”

테렌스가 뒤를 돌아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발레리는 체념한 얼굴로 그를 쫓아갔다. 레이븐은 휘파람을 불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

십여 분을 걸어 이들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황궁 부속 채플이었다.

채플은 황궁 상주 직원들이 시에나 여신께 예배를 드리는 건물이다.

지은 지 100년도 더 된 2층짜리 석조 건물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하늘 높이 솟은 첨탑과 시에나 여신의 행적을 상세히 그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돋보였다.

이곳은 예배가 있는 일요일을 제외하면 인적이 드물었다.

오늘 같은 평일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건물에 들어서니 아무리 발소리를 죽여도 신발과 바닥의 마찰음이 쩍쩍 울렸다.

어둑한 건물 내부를 둘러보던 발레리의 입에서 또다시 질문이 나왔다.

“웬 채플이에요? 저 회개 기도라도 시키시게요?”

“아니.”

그럼 여길 왜 끌고 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낌새가 이상했다. 테렌스는 그녀를 자꾸 건물 안쪽 깊은 구석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멈춘 건 작은 기도실 앞이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안쪽이 드러났다.

한두 명이나 쓸 법한 자그마한 기도실인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축복의 검을 치켜든 여신상만이 제단에 덩그러니 놓였을 뿐.

테렌스는 제단 뒤편에 드리운 붉은 커튼을 휙 걷어냈다. 그러자 어깨높이의 작은 철문이 드러났다.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여 문을 통과했다.

발레리와 레이븐도 차례로 머리를 수그리며 철문 안으로 입성했다.

햇살 한 줌 안 드는 좁고 어두컴컴한 공간이 나왔다. 그곳엔 폭 좁은 나선형 계단이 까마득히 깊은 지하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벽면에는 일정 간격으로 설치된 촛대가 어슴푸레한 불빛을 냈다.

발레리는 동굴에 들어온 것처럼 한기를 느꼈다. 양팔에 생닭 껍질처럼 소름이 돋아났다.

어디까지 끌고 가는 걸까. 한참 계단을 타고 내려가다 보니 막연한 공포감이 엄습했다.

발레리는 주춤거리다 굳은 표정으로 우뚝 멈췄다.

그녀는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테렌스의 뒤통수를 향해 물었다.

“미, 밑에 고문실 있죠?”

“고문실? 그게 무슨 말이지.”

“…나 때릴 거죠? 물에 담그고 불에 지질 거죠?”

그녀는 땀에 젖은 손바닥을 꽉 말아쥐고 질문했다. 곧 죽더라도 행선지는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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