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발레리,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켄드릭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재갈에 입이 막힌 발레리는 얼굴 근육을 한껏 끌어모아 대답했다.
‘왜 나오긴 왜 나와. 우리 도적단 망명 자금 마련한답시고 별 이상한 의뢰 수락했다가 폭삭 망하고 나왔지.’
하지만 내면의 소리가 전해질 리 없었다. 애초에 켄드릭은 발레리의 임무를 둘러싼 상황 자체를 몰랐으니까.
‘시에나 여신께 감사해야 하나. 죽기 전에 첫사랑 얼굴은 보게 해주네.’
발레리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어렸다.
그러다 문득 눈이 크게 벌어졌다.
클린트 하사가 언급했던 ‘연대책임’을 떠올리면서다.
‘이러다 켄드릭까지 처벌받게 되면…. 그땐 어떡하지?’
뒷덜미가 오싹해졌다. 까만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심박수는 최대치까지 치솟았다.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눈가에 어룽어룽 이슬이 맺혔다. 굵은 눈물방울이 무릎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지켜보며, 켄드릭은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발레리는 도적단 펠런 소속이었다.
대체 왜 성별과 신분을 속이면서까지 황궁 근위병으로 입대한 걸까. 빅터 사이먼이라는 이름은 뭘까. 분명 뭔가가 있을 텐데 말이다.
켄드릭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참고인 켄드릭 프레이저, 증언 시작하겠습니다.”
법정에 켄드릭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선명한 중저음이 만든 깊은 공명에 모두가 귀를 쫑긋했다.
방청인들의 얼굴에 궁금증이 한가득 피어올랐다.
특히 기사들은 이 사건을 더 흥미롭게 주시했다. 제1 기사단장의 총아인 켄드릭이 황태자 살해미수범과 엮였다는 건 꽤 큰 화젯거리였다.
켄드릭은 제 얼굴에 몰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웠으나 한 차례 심호흡한 뒤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저자가 프레이저 검술을 쓰는 이유를 물으셨습니다.”
“그렇다.”
발레리는 피고인석에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켄드릭에게 다급한 신호를 보냈다.
‘미친놈아!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차라리 모른다고 해!’
켄드릭은 펄쩍 뛰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를 믿어보라는 듯이.
그리고 황태자를 향해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전하, 한 가지만 청하겠습니다. 저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부터 하문해 주시지요.”
부탁의 모양새는 갖췄지만 당돌한 요구였다. 주어진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본인이 할 말부터 하겠다는 소리였으니까.
황태자는 미간을 좁히면서도 켄드릭의 말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그래, 켄드릭 경. 저자의 정체가 뭐지.”
켄드릭은 애써 받아낸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의 집착광…. 팬입니다.”
방청석이 한 차례 술렁였다.
“…집착광팬?”
황태자가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뜬 채 되물었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표현이었다.
집착광팬. 최근 칼레바니아 예술계에서 유명 인사들을 맹목적으로 쫓아다니는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였다.
보통은 오페라 가수나 연극배우 등 저명한 공연예술인들이 몰고 다녔다. 때와 시를 안 가리고 어디든 집요하게 쫓아다녀서 당사자들에겐 골머리인 존재였다.
그런데 일개 근위기사에게 그런 팬이 있다는 건가.
모두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켄드릭은 멋쩍어하며 뒷머리를 긁었다.
“하하, 제가 방금 좀 과장을 했습니다만…. 어릴 적에 제 검술 실력에 반해서 가르쳐달라 쫓아다니던 아이입니다.”
실력 때문이라면 납득이 가긴 했다. 프레이저 후작가 자제들은 대대로 제국에서 손꼽히는 검술 실력을 갖추기로 유명했으니까.
“그래서 저 근본 없는 자에게 가문의 검술을 가르쳤다 이건가.”
“…예, 장장 십 년 동안 제가 전수해 준 겁니다.”
‘근본 없다’라는 표현에 켄드릭은 얼굴을 잠시 굳혔다가 다시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그래, 저자가 검술을 배운 계기까진 알겠다. 하지만 그게 저자가 신분까지 속이고 근위병으로 입대한 이유를 설명하진 못할 텐데.”
“왜 설명할 수 없겠습니까.”
“…음?”
“누군가를 동경한다면 뭐든 따라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입니다.”
켄드릭의 아무 말 대잔치에 발레리는 어처구니가 없어 멀뚱거렸다.
‘뭔 개소리야? 집착은 뭐고 광팬은 또 뭐야? 내가 쟤를 동경해서 따라 입대했다고?’
그에게 검술을 가르쳐달라 한 것까지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광팬처럼 따라다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집착은 무슨. 바쁜 발레리를 붙들고 대련하자며 질척인 건 오히려 켄드릭 쪽이었다.
본인을 따라 입대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황녀 납치하러 들어왔는데 무슨 헛소리인지.
“그럼 경은 저자와 사제 관계라는 건가.”
“그렇기도 하지만, 사적으로는 친구 사이입니다.”
“흠, 친구라…. 아무리 악의가 없었다 해도, 황실을 속인 자는 쉽게 용서할 수 없는 법이다.”
황태자의 어투는 여전히 건조하고 단호했다.
그때였다.
발레리의 뒤쪽으로 대검을 든 집행관 한 명이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칼자루를 손에 움켜쥐고서.
집행관은 검집에서 검을 한 뼘 길이만큼 꺼낸 채 발레리의 뒷덜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검이 창밖의 햇빛을 반사해 번쩍거리자 켄드릭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즉결 처분까지 가능한 상황일 줄이야. 생각해 보니 칼레바니아는 혐의가 낱낱이 증명된 반역죄인에 한해 법정 내 참수형 집행을 허용하고 있었다.
켄드릭은 질겁했다. 모래를 삼킨 듯 목구멍이 막혀왔다. 어찌 됐든 친구의 목이 잘리는 일은 막아야 했다. 무슨 얘기를 쥐어짜서라도.
“저, 저자가 입대한 이유, 또 있습니다.”
켄드릭이 다급히 변호를 재개했다.
“무엇이지.”
황태자는 왼손으로 턱 끝을 매만지며 그를 차갑게 응시했다.
“애국심, 입니다.”
켄드릭은 웬 뜬금없는 단어를 꺼내 또박또박 발음했다.
“애국심?”
“예, 평민 여인으로 태어났지만 늘 황제 폐하의 방패가 되고 싶어 했던 애국심 깊은 친구입니다.”
“…흠.”
“신분과 성별을 바꾸기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그만큼 칼레바니아 제국군에 합류하고 싶어 그랬을 겁니다. 평소에도 얼마나 군대에 가고 싶어 했는지 모릅니다.”
애국심이 뉘 집 개 이름인가. 발레리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녀는 애국가인 칼레바니아 찬가의 1절조차 외우지 못했다. 애국심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황녀 납치와 황실 보검 절도라는 의뢰를 접수했을 리 없다.
지금 목표 또한 애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라를 버리고 단원들과 외국으로 망명하려 하고 있으니까.
신분도 틀렸다. 발레리는 평민이 아니라 공식적인 신분이 없는 도적 나부랭이다.
그 시점, 발레리의 뒤에 선 집행관은 제 입술을 쓱 핥고 있었다. 피에 굶주린 듯 섬뜩한 눈빛이었다. 손에 든 대검이 한층 길게 뽑혀있었다.
켄드릭은 그자의 동작을 의식하며 끊임없이 말을 토해냈다.
“전하, 프레이저 검술은 저희 가문의 무형문화재 같은 자산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아무에게나 가르치지 않습니다. 실력과 인품, 애국심까지 갖췄기에 전수해 준 겁니다.”
켄드릭이 계속 확신에 찬 어조로 지껄이자 발레리는 급기야 코웃음을 터뜨렸다.
‘하, 참…. 도적한테 인품은 뭐고 애국심은 또 뭐야. 왜 저렇게 미친 듯이 허풍을 떨어?’
변호를 받는 사람조차 부담스러운 변론이었다. 저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황태자가 과연 믿어주기나 할까.
발레리의 입에 물린 재갈 사이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전하께서 결투를 해 보셨다니 아시겠지요.”
“무엇을 말인가.”
“어렵기로 이름난 저희 가문 검술을, 여자의 몸으로 빠르게 체득한 사람입니다.”
“…….”
“성별과 신분을 떠나 생각해 주시면 어떠실지요. 일개 병사 중에 이만큼 실력 있고 능동적인 인재가 또 있겠습니까. 살려두시기만 한다면 제국의 앞날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저게 미쳤나? 자꾸 뭐라는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허튼소리네.’
이젠 속에서 온갖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변호해 주는 것 자체로 고맙기는 하지만…. 계속된 허풍 퍼레이드에 발레리는 넌덜머리가 났다.
그러던 중 황태자는 축 처져 있는 발레리를 가리키며 켄드릭에게 물었다.
“저자의 신분을 보증할 수 있나.”
“예, 저희 가문에서 보증할 수 있습니다.”
켄드릭은 지체 없이 답했다. 어떻게든 신분증명서는 형식적으로나마 만들면 되니까.
희미한 기회를 엿본 켄드릭은 고개를 숙이며 핵심 요구 사항을 덧붙였다.
“전하께서 정상을 참작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마무리 인사와 함께, 공갈로 얼룩진 변호가 끝났다.
발레리는 아무런 기대도 없었지만, 황태자가 어떤 반응일까 해서 그를 흘끗 쳐다봤다.
이상했다.
혹독한 한파를 연상시키던 냉엄한 표정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풀어져 있었다.
잠시 휴정.
재판관은 황태자와 한참을 대화하더니 이렇게 발표했다.
“판결은 보류한다. 피고인은 감옥에서 대기하도록.”
***
발레리는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으로 복귀했다.
다행히 재갈과 족쇄, 수갑은 모두 풀렸다. 독방 안에서나마 거동이 자유로워졌다.
재갈을 물었던 입안이 텁텁했다. 잊고 있던 배고픔도 파도처럼 밀려왔다.
일단 목숨은 부지했지만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징역살이를 얼마나 하게 되려나.”
앞날이 캄캄했다. 햇빛 한줄기 안 드는 이 지하 감옥처럼.
발레리는 독방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서러웠지만 막상 울려 하니 눈물샘이 말라 즙이 짜지질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인기척이 나서 고개를 들었다. 쇠창살 너머로 복도에 켄드릭이 보였다. 간수가 그에게 깍듯이 경례한 뒤 자리를 비켜줬다.
그녀는 켄드릭과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석 달 만에 최악의 상황에서 재회하는구나. 이렇게 비루한 죄수 신분이라니.’
발레리는 복잡한 속내를 감추며 뻔뻔스레 고개를 쳐들었다. 그에게 핀잔부터 주고 싶었다.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거짓말이 청산유수더라. 뭐, 무슨 집착광팬? 애국심? 아주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지 그래?”
“고맙단 말 먼저 해야지. 내 덕에 형벌 면하는 건데.”
켄드릭은 생색을 내며 환히 웃었다. 그의 입매가 양옆으로 시원하게 벌어졌다.
“내가 형벌을 면할지 말지 네가 어떻게 알아.”
“감이 그래. 근데 너 알고 있었어? 네 뒤에 집행관이 대검 칼자루 쥐고 서 있던 거.”
“…뭐?”
발레리는 아연실색했다. 전혀 몰랐다. 집행관은 그녀의 시야 밖에 있었으니까.
“눈에서 광기가 뿜어져 나오더라. 황태자보다 그 사람이 무서워서 더 열심히 변호했어.”
“하, 나 진짜 죽을 뻔한 건가….”
“아무튼, 네 신분증명은 아버지한테 부탁드릴게. 영지에 발레리라는 평민 여자가 한 명쯤은 있겠지.”
발레리는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확 낮춰 물었다.
“…너 나한테 가짜 신분을 만들어주겠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