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황궁 지하 감옥은 음습한 냉기로 가득했다.
발레리의 몸은 싸늘한 돌바닥 위에 가차 없이 던져졌다.
양쪽 발목엔 족쇄가, 손목에는 쇠고랑이 채워졌다. 쇳덩이의 찬 기운이 살갗 깊숙이 파고들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괴괴한 독방에 누워, 발레리는 멍하니 천장만 응시했다. 오들거리는 몸을 움츠릴 기운조차 없었다.
시야에 잡히는 건 칠흑 같은 어둠뿐. 기절할 듯 피곤했지만 눈이 좀체 감기지 않았다. 이대로 내일이 올까 두려워서.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정적이 깨졌다. 복도로 난 쇠창살 너머로 바쁜 발소리가 울려왔다.
낯선 목소리가 웅얼웅얼 들렸다. 간수가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었다.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과.
이 시간에 누구지. 발레리는 고개를 살짝 들어 복도 쪽을 내다봤다.
자물쇠가 철컥 풀리고, 간수가 시녀 세 명과 함께 들어왔다. 모두 등불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뭐예요?”
“황태자 전하 명으로 왔어요. 잠시 신체검사 좀 하겠습니다.”
발레리의 물음에 시녀 하나가 답했다.
“예? 뭔 검사요?”
“성별만 확인하라고 하셨어요. 잠시면 돼요.”
발레리의 성별을 재차 확인하는 게 목적이었다.
시녀들이 발레리의 옷에 손을 대자, 옆에서 지켜보던 간수가 목을 큼큼 가다듬으며 밖으로 나갔다.
“오, 옷은 벗기지 마세요.”
“안 벗겨요. 잠깐 일어나 보세요.”
확인 작업이 진행됐다. 시녀들은 적잖이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남자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그 무엇인가는 실루엣조차 없었다. 게다가 바지 뒤쪽에 묻은 핏자국은 뭐란 말인가.
시녀 하나는 눈을 부릅뜨며 발레리의 얼굴 가까이 등불을 들이댔다.
얼굴선이 가늘고 예쁘장하긴 했지만…. 키가 특출나게 크고 온몸의 근육이 발달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미소년과 성인 남성의 중간쯤으로 보였다.
근데 생물학적으로는 여자였다. 그것도 달거리 중인.
“…확인됐습니다.”
시녀들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치며 발레리의 옷차림을 수습해줬다.
이렇게 그녀는 순식간에 성별검사를 당해 버렸다. 닭 농장에서 태어난 병아리들처럼.
순간 치욕감과 절망감이 밀려들면서 눈물과 콧물이 벌컥 솟구쳤다.
“흐엉…. 확인 끝났으면 얼른 나가요, 좀!”
울부짖는 발레리를 뒤로하고 시녀들은 황급히 감옥을 떴다.
감방문은 굳게 잠겼고, 발레리는 다시 혼자 남겨졌다.
‘망할 놈의 임무는 무슨 임무. 뭣 같은 의뢰인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황궁에 들어와서 인생 조졌네.’
그녀는 깊은 절망의 바다에 잠겨 허우적댔다.
과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황궁에 들어오면 뭐든 될 것 같았는데.
짝사랑하던 친구 얼굴이라도 한번 볼 수 있을까 했는데.
고백도 못 해 봤는데.
고작 스물두 해밖에 못 살았는데.
***
황궁에 입성한 이래 가장 긴 밤이었다.
발레리는 퉁퉁 불어 터진 얼굴로 아침을 맞이했다. 애써 눈꺼풀을 맞붙여 봤지만 잠이 올 리 만무했다.
피로감이 쏟아지는 와중에 철커덕 소리가 들려왔다. 간수가 자물쇠를 따는 소리였다.
‘또 뭐야.’
죽은 듯 누워있던 발레리는 시선을 돌려 인기척을 확인했다.
직속상관인 클린트 하사였다.
그가 병사 두 명을 거느린 채 복잡한 표정으로 감방에 들어오고 있었다.
발레리는 상체를 일으켜 습관처럼 거수경례하려 손을 들었다. 그러나 묵직한 쇠고랑 탓에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뒤따라 들어온 간수는 발레리의 앞에 꿇어앉아 족쇄를 풀었다. 발목에 시뻘건 쇳자국이 선명했다.
클린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발레리의 두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상관에게 물었다.
“…하사님, 저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긴급 재판이 소집됐다. 잘못하면 즉결 처분될 수도 있다.”
“즈, 즉결 처분이요?”
클린트는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사, 사형?
발레리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병사들은 휘청이는 그녀를 얼른 부축해 냈다.
“진정해라, 사이먼. 해명할 기회는 주실 테니.”
“저, 저 진짜, 냇가에서 빨래한 게 답니다. 군 생활도 잘했는데….”
“그건 내가 제일 잘 알지만…. 계집애가 대체 무슨 배짱으로 입대를 했나? 황실을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 줄 알았어? 뭣보다, 어느 안전이라고 칼을 들이민 거냐? 넌 중죄인이야. 까딱하면 연대책임으로 나까지 처벌받을 수 있다고!”
클린트가 버럭 큰소리로 쏘아붙이며 발레리를 나무랐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상관과 동료들에게 불똥이 튈 수 있는 사안이었다. 발레리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계속 방치했으니. 황실이 이들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나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 목이 날아갈 수도 있겠구나.’
발레리의 안색이 잿빛으로 물들어갔다. 함께한 시간은 비록 짧았지만, 군대에서 미운 정 고운 정 나눈 사람들이었다. 애먼 이들이 처벌받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두목 피어스와 나머지 동료들의 얼굴도 주마등처럼 스쳤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이딴 임무 처음부터 못 하겠다고 발 빼는 거였는데.’
물론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후회였다.
발레리는 병사들에게 두 팔을 붙들린 채 감방 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녀는 클린트를 멍하니 뒤따랐다. 감옥 계단을 밟아 오르는 발끝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쌀쌀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걷다 보니 어느덧 황궁 법정 문턱 앞이었다.
거대한 법정 문은 이미 훤히 열려있었다.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안에 들어서자마자 적막하고 엄숙한 공기가 사방에서 그녀를 짓눌러 왔다.
긴급 소집된 재판이라 방청석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황실 기사들과 근위대 간부들, 다 합해 이십여 명이 듬성듬성 앉아있을 뿐이었다.
발레리를 붙들고 온 두 병사는 그녀를 피고인석에 확 던지듯 밀어 앉혔다.
“으엇!”
딱딱한 의자에 꼬리뼈가 부딪혔다. 둔탁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발레리는 아랫입술을 질끈 문 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는 재판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카만 법복을 입은 재판관 뒤편으로 익숙한 머리통이 보였다.
망할 놈의 황태자. 그가 꼿꼿이 앉아있었다.
환한 백금발 덕에 굳은 얼굴이 더 돋보였다. 늘 똑같은 그 무표정이었다.
발레리는 속으로 복수심을 불태웠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황태자 너,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재판관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더니 기소장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재판을 시작하겠다.”
재판관은 공소를 제기한 황태자를 대신해 발레리의 혐의를 쭉 읽어내려갔다.
“본명은 불명이니 가명으로 칭한다. 피고인 빅터 사이먼의 혐의는 다음과 같다.”
발레리는 마른침을 목 뒤로 넘겼다.
“황태자 전하에 대한 살해미수죄. 반역에 해당하는 중범죄다.”
벌써부터 속에서 천불이 났다.
애먼 사람에게 먼저 칼을 들이댄 건 황태자였다. 솔직히 죽이려면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정말 상처 하나 안 내고 보내줬다. 손에 피 묻힐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녀의 목청에 절로 힘이 실렸다.
“황태자이신 줄 정말 몰랐다고요! 야밤에 웬 낯선 사람이 칼을 들이미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당신들 같으면 그럴 수 있어요?”
발레리는 방청석을 둘러보며 외쳤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재판관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기소장을 계속 읽었다.
“황실 모독. 신원을 속이고 입대했다. 여자의 몸으로 남자로 속여 황궁 근위병으로 들어왔다…. 잉?”
믿기 힘든 혐의 내용에 재판관은 흠칫했다. 황태자 명으로 아침부터 재판이 급히 잡혔기에 기소장을 미리 살펴보지 못했던 터다.
저 병사가 여자라고? 충격에 빠진 재판관은 피고인석으로 고개를 돌려 발레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재판관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다시 기소장에 눈을 가져갔다.
“화, 확인 결과 상인 사이먼에겐 딸이 없으므로 그 가문도 아니다. 추가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일종의 병역 비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요! 신원은 속이긴 했는데요! 그게 황실 모독일 건 뭐예요…. 그동안 위에서 시키는 건 다 했어요! 여자라서 못한 거라곤 단체로 하는 목욕 하나밖에 없었다고요!”
죽기 전에 할 말은 다 하고 싶었다.
발레리는 상관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의심받을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항변을 멈추지 않았다.
“제가 이 황실을 위해 교대근무를 얼마나 빡세게 돌았는지 아십니까? 썩은 생선 먹고 배탈 난 놈들, 땡볕에 픽픽 쓰러지는 놈들, 제가 다 대신 근무 서줬다고요!”
재판관은 발레리의 외침을 귓등으로 흘리며 깃펜으로 기소장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결투가 황궁 밖에서 있었다니. 탈영, 이것도 혐의에 추가해야겠군.”
“아니, 성 밖으로 나간 건 맞는데요. 냇가에 빨래하러 나간 게 뭐 큰 잘못이에요?”
“흐음…. 시끄러우니 재갈을 물려라.”
발레리가 따박따박 대꾸하자 재판관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명령했다.
법정 치안관들이 다가와 발레리의 입에 재갈을 밀어 넣었다.
재판관은 버둥거리는 그녀를 흘겨보며 혀를 찼다.
“이 밖에 수상한 점이 여러 가지 포착됐다고 한다. 송구합니다만, 전하께서 좀 나와 주시겠습니까?”
재판관의 요청에 황태자가 뒷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얼음장 같은 얼굴로 검사석을 향해 걸어 나왔다.
“칼레바니아 제국 황태자 테렌스, 발언 시작하겠다.”
모두의 시선이 황태자의 입으로 향했다.
“나는 어젯밤 황궁 인근에서 피고인과 결투했다. 그 결과 저자가 프레이저 후작 가문의 검술 동작을 쓴다는 것을 확인했다. 후작가와의 관련성을 조사하기 위해 참고인을 소환한다.”
발레리는 직감했다. 누구의 이름이 호명될지.
“제1 기사단 소속 켄드릭 프레이저 경.”
그리워서 몸살까지 앓을 지경이었던, 오랜 친구이자 짝사랑 상대의 이름이었다.
“네. 제1 기사단 소속 근위기사 켄드릭 유진 프레이저입니다.”
“앞으로 나오라.”
경례를 마친 뒤 터덜터덜 걸어 나와 참고인석에 앉는 한 남자를, 발레리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켄드릭. 그는 변한 게 없었다.
깊은 눈두덩 속, 잘 영근 청포도 알처럼 생기 있는 녹안. 섬세한 T자 라인을 그리는 이마와 콧대. 굳건히 앙다문 입술과 강한 턱선까지. 어깨까지 오는 옅은 갈색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묶은 채였다.
암적색 황실 기사 제복은 그의 위엄 있는 체격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발레리의 눈에는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황궁 물 먹더니 예전보다 더 멋있어졌네.’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도 잠시 잊은 채 그녀는 짧은 감상에 빠졌다.
영문도 모르고 법정에 불려 나온 켄드릭은 어리벙벙한 얼굴이었다. 그는 피고인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한 뒤 눈이 주먹만 해졌다.
프레이저 가문의 검술을 쓰는 범죄자가 대체 누구인가 했더니,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발레리?!’
열두 살 때부터 검술 수련을 함께한 소꿉친구였다. 황궁에서 볼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던.
게다가 엄청난 혐의를 쓰고 있는 피고인 신분이라니.
켄드릭은 양손으로 눈을 비비며 발레리의 얼굴과 그 손에 채워진 수갑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에게 이보다 어이없는 상황이 있을까. 도무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단 듯이, 켄드릭은 이런 입 모양을 만들어냈다.
‘발레리, 네가 왜 여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