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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4)화 (4/173)

4화

며칠 후, 발레리는 답답한 마음에 수색 장소를 바꿨다.

이번에는 황녀의 처소로 알려진 라벤더궁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방문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이상했다.

방이란 방을 다 뒤져봐도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온 가구에는 흰 천이 덮여 있었다.

그 위를 손가락으로 슥 그어보니 회색 먼지가 두툼하게 묻어났다.

한없이 적막한 공간이었다. 안 쓴지 몇 년은 지난 것처럼.

“뭐야 여기…? 사람 안 살아?”

라벤더궁은 분명 황녀가 사는 곳이라고 들었건만, 실제로 와 보니 휑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빈 깡통처럼.

발레리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황녀는 이 궁전에 살고 있기는 한 건가. 여기 없으면 대체 어디 붙어있다는 거야.”

이제야 깨달았다. 왜 라벤더궁은 근위병을 뽑지 않았는지.

사는 사람이 없는데 지켜서 뭐 하나.

임무를 받자마자 바로 투입된 발레리는 황녀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했다.

황녀가 바깥에 잘 나오지 않는다고 듣긴 했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외출은 할 줄 알았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부모가 사는 중앙궁에 얼굴은 비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처소라는 곳은 텅 비어 있고, 황녀라는 인간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점점 시간은 가고 있는데 말이다.

뭔가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발레리는 결국 집단지성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그래봤자 룸메이트 병사들에게 물어보는 게 전부였지만.

“야, 너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카드놀이를 하던 병사 네 명이 그녀를 멀뚱히 올려다봤다.

발레리는 평소 동료들과 말을 잘 섞지 않았다. 임무를 떠올리며 혼자 고뇌에 빠져 있는 날이 많아서다. 공놀이나 카드놀이를 하자는 제안은 매번 칼같이 거절했다. 그러다 보니 이젠 물어보지도 않고 저들끼리 놀았다.

“사이먼, 네가 웬일로 우리한테 먼저 말을 거냐.”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

“황녀님은 왜 황궁에서 코빼기도 안 보여?”

“황녀님? 내가 아는 그 프리다 황녀님? 왜?”

“어, 좀 볼일이 있어서.”

3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푸하하하하!”

동료들의 난데없는 폭소가 발레리의 귓전을 아프게 때렸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건데 이 새끼들아!”

발레리가 눈썹을 팍 찡그리며 열불을 냈다.

동료들은 배를 잡고 웃으며 그녀에게 한마디씩 했다.

“네가 황녀님한테 볼일이 왜 있어! 나도 입대하고 한 번도 못 봤구먼.”

“바깥 활동 안 하신 지 꽤 되지 않았냐? 너 볼 일이 퍽이나 있으시겠다.”

“왜애? 황녀님 눈에 들어서 팔자라도 고쳐 보게? 사이먼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야심 있는 사람이네.”

“사이먼, 얼굴 믿고 너무 나대지 마. 이웃 나라 왕자들도 전부 뻥뻥 걷어차는 마당에 너 같은 게 눈에 차겠냐.”

예상대로였다.

황녀의 신변 정보가 말단 병사한테까지 들어갈 리 있나.

“에휴, 이딴 놈들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발레리의 한숨 소리는 깊어져만 갔다.

***

며칠이 지났다.

고된 일과를 마친 어느 늦은 밤.

발레리는 몰래 혼자 숙소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그녀는 한 번도 무단 외출을 들킨 적이 없었다.

본업이 도적인 만큼 은신에 능했으니까. 미리 점찍어둔 개구멍으로 숙소를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건 이제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씻고는 살아야지.”

오늘의 외출 목적은 멱 감기였다. 

발레리는 경비병의 인적이 드문 서쪽 성벽에 다다랐다. 

그녀는 미리 설치해 둔 밧줄을 타고 성벽에 올라,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환한 보름달 위에 불현듯 그리운 얼굴이 하나 겹쳐 보였다.

“켄드릭, 너도 이 성에 있겠지? 계급이 까마득히 높아서 볼 수나 있으려나.”

십년지기 소꿉친구이자 검술 대련 파트너. 그리고 언제부턴가 계속 마음이 쓰이던 사람.

발레리보다 한 달 먼저 입대한 켄드릭은 현재 황실 근위기사였다.

켄드릭은 제국 남부를 호령하는 프레이저 후작가의 아들임에도, 도적 신분인 그녀를 언제나 편견 없이 대했다.

“우연이라도 한번 마주치길 기대했는데…. 황궁이 좀 넓어야 말이지.”

그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떠올리며 발레리는 밤하늘 구석구석을 가만히 바라봤다.

물기를 머금은 별들이 그녀의 까만 눈동자 속에서 총총히 빛났다.

성벽에서 내려온 발레리는 횃불에 불을 붙이고 황궁 뒤편의 얕은 개울에 다다랐다.

온 세상이 고요한 가운데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발레리는 매번 이렇게 황궁 밖까지 나와서 몸을 씻었다.

이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병영 내 목욕탕은 상관들의 숙소와 너무 가까웠다.

“거기서 혼자 씻다 걸리기라도 한다면…. 워후, 상상만으로 아찔하네.”

하지만 유난히 귀찮은 시기가 찾아왔다.

“입대하기 전에 자궁을 떼놓고 왔어야 했어.”

한 달에 나흘을 괴롭히는 달거리, 즉 생리 주기가 도래했다.

이 시기엔 피를 받아내는 천 조각을 빨아 나뭇가지에 널어놔야 했다. 그래야 다음 날 밤에 걷어서 쓸 수 있었다.

문제가 또 있었다. 생리 기간에는 시원한 개울물에 몸을 푹 담글 수도 없었다.

그래도 씻는 방법이 없진 않았다.

발레리는 어깨에 짊어진 자루에서 제 팔뚝만 한 물통을 하나 꺼냈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 고개를 숙이고, 물통에 개울물을 받아 머리에 끼얹었다. 그렇게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몸도 씻었다.

물통 샤워를 마친 발레리는 옷을 챙겨 입은 뒤 자갈 돌밭에 횃불을 꽂았다.

“빨래 시작해야지….”

발레리는 자루에서 피 묻은 달거리 천들을 꺼냈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물에 담가 열심히 비벼 빨았다.

워낙 건강한 몸이라 월경통은 거의 없었지만, 쪼그려 앉으니 허리가 지끈거렸다.

물속으로 천천히 번지는 핏물을 보며, 발레리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매달 이게 무슨 생고생이냐. 이놈의 달거리만 안 하면 한평생 소원이 없겠네.”

그 순간이었다.

스윽.

목덜미에 오싹한 기운이 와닿았다.

등줄기 아래서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왼쪽 목에 난데없이 서슬 퍼런 검날이 드리운 탓이다.

“정체가 뭐냐.”

서늘한 밤공기처럼 낮게 깔리는 남자 목소리였다.

척추가 빳빳이 굳고 오금이 얼어붙었다.

‘방심했다. 빨래한답시고 인기척을 못 느끼다니.’

발레리가 대답이 없자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묻는다. 정체를 말해라. 그리고 뭐, 달거리?”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이 남자도 들은 모양이었다.

“아, 아니 그게….”

발레리는 양손을 들며 고개를 슬쩍 틀어 뒤를 돌아봤다.

남자의 주의가 잠시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반대쪽 손을 올려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때다 싶은 찰나에 발레리는 고개를 푹 숙여 칼날을 피했다. 그리고 재빨리 뒤구르기를 해서 땅바닥에 놓인 검을 뽑아 들고 맞섰다.

혹시 몰라 검을 챙겨 나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누구든 알 바 아니잖아요?”

칼을 든 발레리는 적의를 뿜으며 대꾸했다.

남자는 발레리의 행색을 단숨에 훑었다.

그녀가 걸친 옷은 황실이 근위병에게 보급하는 튜닉이었다. 체형은 눈에 띄게 훤칠하긴 했으나 전체적인 몸 선은 여인에 가까웠다.

당황해서 내뱉는 말투와 목소리도, 분명 여자였다.

“여긴 여인이 꼭두새벽에 올 곳이 아니다.”

“그쪽같이 수상한 인간이 올 곳도 아닌데!”

발레리는 악에 받쳐 일갈했다.

“허, 수상한 인간?”

남자는 기가 찬다는 반응이었다.

다시 표정을 굳힌 그가 또다시 발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피하기 힘들 만큼 날카롭고 빠른 동작이었다.

발레리는 날랜 몸으로 능히 비껴갔다.

이젠 발레리의 차례였다. 남자의 오른쪽 옆구리가 비어 있었다. 그쪽을 향해 얼른 칼끝을 찔러 넣었다.

남자는 흠칫하며 검의 각도를 바꿔 발레리의 공격을 받아쳤다.

두 사람의 칼날은 쩌렁쩌렁한 금속음을 내며 여러 차례 맞부딪쳤다.

챙, 하는 소리가 삼십 번쯤 울린 시점.

남자는 발레리의 검이 그리는 궤적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프레이저 후작 가문의 검술 동작인가.”

“…뭐요?”

프레이저라는 말에 발레리는 저도 모르게 화들짝 반응했다.

프레이저 후작가는 발레리의 검술 대련 파트너인 켄드릭의 가문이었다.

그리고 남자의 추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지금 쓴 동작은 발레리가 켄드릭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이 정체불명의 남자는 발레리의 동작만 보고도 어떤 검술을 구사하는지 뻔히 파악하고 있었다.

‘프레이저 검술을 이 인간이 어떻게 알지? 그럼 켄드릭과도 아는 사이인가?’

발레리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거기서 빈틈을 읽은 남자는 더 맹렬한 동작으로 발레리를 밀어붙였다.

“프레이저, 이 말에 반응한 것 같은데.”

남자가 발레리를 떠봤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대답해선 안 될 것 같단 생각에.

“대답이 없으니 더 수상하군.”

발레리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녀는 뒤로 밀리면서도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남자는 간결한 동작으로도 제법 예리하게 허를 찔렀다. 속도도 꽤 빨랐다. 태세를 전환하려면 얼른 평정심을 되찾아야 했다.

하지만 머릿속의 잡념은 쉽게 걷히지 않았다.

‘켄드릭네 가문 검술이 이렇게 유명했나? 내가 그 검술 쓰는 게 무슨 문제지?’

그녀는 샘솟는 의문을 애써 잠재우며 남자의 공격을 척척 막아냈고, 반격 기회가 올 때마다 거세게 몰아쳤다.

승패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한 접전이 십여 분째 이어졌다.

딱 그 시점부터다.

무슨 이유에선지 남자의 움직임이 점점 무뎌졌다. 동작이 둔중해진 부분도 있는데, 약간 힘에 부쳐 보였다.

‘뭐야, 실력은 제법인데 여기서 벌써 지친다고?’

발레리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선 자세를 낮추고 빈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는 칼에 체중을 한껏 실어 상대방의 검날 밑부분을 강하게 쳐냈다.

그 충격으로 남자의 검 자루가 손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탕타당.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남자의 넓은 어깨가 크게 동요했다.

발레리는 그 눈앞에 검 끝을 훅 들이밀었다. 남자는 멈칫하며 살살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완연한 승리였다.

발레리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남자에게 물었다.

“여자 상대한답시고 잘 안 쓰는 손을 쓰네. 멋있어 보이고 싶었냐?”

그녀는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 남자가 검술 실력에 비해 체력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이유를.

남자는 검 자루를 왼손에 쥐고 있었다.

분명 오른손잡이인 것 같은데, 평소에 잘 안 쓰는 왼팔을 쓰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덜 쓰는 팔은 기운이 쉽게 빠지니까.

발레리의 검날이 코끝에 스칠 정도로 다가오자 남자는 양손을 들며 항복했다.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충격에 휩싸인 얼굴이었다.

발레리는 그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검을 휙 내렸다.

“사람 죽이는 취미는 없어. 이제 각자 갈 길 가자고.”

그녀는 땅에 떨어진 남자의 검을 힘껏 걷어찼다.

꽤나 값져 보이는 그의 검은 자갈밭을 떼구루루 굴러 개울물 속에 폭 잠겼다.

발레리는 이제야 한숨을 돌렸다.

그녀가 자갈밭에 꽂아둔 횃불을 다시 뽑으려는 순간.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순식간에 발레리를 에워쌌다. 그녀는 질겁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뭐, 뭐야? 왜들 이러세요?”

아무리 발레리라도 장정 다섯 명이 달려드는 걸 막아낼 순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제압당해 땅바닥에 엎드려졌다. 양팔도 등 뒤로 붙들렸다.

괴한 중 하나가 발레리의 행색을 살피더니 남자 쪽을 보며 말했다.

“근위병 복장이네요. 어떻게 할까요?”

“체포해.”

방금 체포라고 한 건가. 발레리는 돌연 섬뜩해졌다.

그녀는 괴한들의 복장에서 익숙한 그림을 발견했다.

포효하는 수사자. 황실 기사단 문양이었다.

“기, 기사님들! 제가 뭘 했다고 이러세요!”

발레리는 새파래진 얼굴로 발악했다.

“닥쳐라. 네놈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군.”

그녀를 짓누르고 있는 기사 한 명이 역정을 냈다.

발레리는 등골이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은 십여 년 만이었다. 머릿속에서 모든 게 엉키고 사고가 마비됐다.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남자의 뒤에서 마법사 한 명이 나타나 휘적휘적 걸어왔다.

“기사님들. 괜히 힘 빼지 마세요. 제가 포박 마법을 걸어 드리겠습니다.”

마법사가 지팡이를 척 들더니 발레리의 손목과 발목을 향해 주문을 걸었다.

그의 지팡이 끝에서 푸른색 고리가 나와 발레리의 사지를 모두 결박했다.

발레리는 그물에 걸린 생선처럼 온몸을 펄떡였다. 그럴수록 푸른 고리는 그녀를 더 강하게 옥죄어 왔다.

저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몸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마법사는 흡족한 얼굴로 남자 쪽을 쳐다봤다.

“다 됐습니다, 전하.”

‘전하? 내가 아는 전하?’

그렇게 불리는 사람은 이 나라에 단 한 명뿐이었다.

설마, 잘못 들은 거겠지. 발레리는 땅에 처박힌 이마를 천천히 틀어 남자 쪽을 바라봤다. 

그제야 자갈밭에 꽂아둔 횃불이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비추었다.

불빛을 반사해 일렁이는 백금발.

얼음장처럼 투명한 하늘색 눈.

맨날 보던 얼굴인 걸 이제야 알겠다.

칼레바니아 황태자, 테렌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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