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히익!”
어쩐지 허전하다 했다. 잠결에 웃통을 까 버렸을 줄이야.
발레리는 상의를 급히 내리며 허리를 벌떡 세웠다.
“하, 나 언제부터 이러고 잔 거야?”
같은 방 동료들은 먼저 일어나 군화를 닦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댔다. 아침 댓바람부터 웬 난리냐는 듯이.
“어젯밤부터 그러고 잤잖아, 인마.”
“밤새 그렇게 더웠냐? 난 괜찮던데.”
“사이먼, 더우면 그냥 벗고 자. 옷이 땀에 절면 빨랫감만 늘잖아?”
이내 찾아온 안도감에 발레리는 차림새를 수습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 그래…. 너희들은 이게 여자 가슴이라곤 도저히 안 믿기겠지.”
왠지 모르게 씁쓸했으나 위기 상황은 넘겼다.
이후 발레리는 상의 밑단을 바지 속에 넣어놓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
어쨌든 외간 놈들한테 상체를 내보이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
발레리의 군 생활에 또 다른 복병이 하나 찾아왔다.
5월의 땡볕이었다.
황태자궁 화단에 제철 식물을 옮겨심는 ‘즐거운 삽질 시간’이 됐다. 말단 병사라면 계절마다 해야 하는 고된 노역이었다.
발레리는 비번인 동료 열댓 명과 함께 삽을 짊어지고 화단으로 향했다.
하필이면 구름 한 점 없이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날이었다. 화단에는 허리 높이의 꽃나무뿐이라 그늘 비슷한 것도 없었다.
자비 없는 햇살이 등줄기를 훅훅 볶았다. 삽질을 시작하자마자 온몸 구석구석에서 땀이 분수처럼 터졌다.
한참 흙을 퍼내던 병사들은 하나둘씩 웃통을 훌렁훌렁 벗어 던졌다.
‘와, 시원하겠다.’
동작을 잠시 멈춘 발레리는 동료들을 부러워하며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훔쳤다.
근위병 복장은 하복도 옷깃이 목까지 올라와 더울 수밖에 없었다. 통기성이 안 좋아서 땀도 금방 찼다.
이 날씨엔 그냥 벗는 게 답인 옷이었다.
이러다가 더위 먹는 거 아닌가. 불볕에서 고군분투하던 발레리는 어느덧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녀는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다가 화들짝 놀라 삽질을 멈췄다.
‘뭐야 얘네…? 나 빼고 다 벗었잖아?’
그랬다. 병사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살색이 되어 삽질에 임하고 있었다. 그녀를 제외하고 전부 다.
발레리는 분연히 움직이는 살색 덩어리들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옆방 동료 토머스는 그런 발레리가 거슬렸는지 핀잔을 줬다.
“사이먼, 너는 왜 안 벗냐? 보는 내가 더 덥다.”
“…내 맘이야.”
“야, 너 앞판 등판 다 젖었어. 땀띠 나면 가려울 텐데.”
“신경 꺼라.”
“아오, 답답해. 땀이 그렇게 쏟아지는데 못 벗을 건 또 뭐냐?”
“시끄러워.”
“의외로 부끄러움이 많단 말이지. 너 혹시…. 꼭지 여러 개 달린 거 아니냐?”
토머스의 같잖은 농담에 동료들이 삽질을 멈추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발레리의 표정은 험상궂게 썩어들어갔다.
‘미친놈이 지금 뭐라는 거야. 누군 안 벗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나. 가뜩이나 더워서 짜증 나 죽겠는데.’
발레리는 삽 머리를 힘차게 뽑아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어, 내 손에 마침 삽이 들려있네? 사람 시체가 나무 거름으로 그렇게 좋다던데.”
그녀의 무시무시한 경고에 동료들은 금세 웃음소리를 죽였다. 일전에 발레리가 격투술 훈련 시간에 보인 모습이 떠올라서다.
그날 발레리는 시범 대련에서 교관을 한 방에 제압했다. 다음 날엔 연습 상대 여덟 명을 때려눕혔다.
인간병기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게 뻔했다.
병사들은 다시 차분히 삽질에 몰두했다.
발레리는 이들을 흘겨보며 한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더운데 고생이 많다.”
뒤에서 웬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쳐다본 동료들이 하나같이 자세가 빳빳이 굳었다. 이윽고 일제히 거수경례했다.
“황태자 전하께 경례!”
발레리도 눈치껏 잽싸게 자세를 따라 취했다.
누군가 했더니, 매일 지키는 이 궁전의 주인 되는 사람이었다.
황태자의 백금발이 햇빛을 그대로 반사해 눈이 부셔왔다. 발레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외양을 관찰했다.
이름이 테렌스라고 했던가.
표정이 늘 엄격하고 근엄했다. 웃는 법이라곤 도통 모를 것처럼 진지하고 딱딱한 면상이었다.
연청색 눈동자에는 새벽녘 호수처럼 찬 기운이 감돌았다.
‘저 눈동자랑 똑같이 생긴 보석이 있었는데, 뭐였더라…. 아, 생각났다. 아콰마린.’
돌아다닐 때마다 눈에 띄는 인물이긴 했다. 얼굴도 얼굴인데, 키가 크고 등판이 넓은 데다 늘씬하게 쭉 뻗은 체형이어서.
금장 달린 흰색 제복이 퍽 잘 어울렸다. 긴소매라 좀 더워 보이긴 했지만.
이때 발레리의 눈에 하나가 거슬렸다.
황태자는 긴소매 제복을 입은 것도 모자라 양손에 갈색 가죽장갑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5월에 가죽장갑이 웬 말이래, 혼자 다른 계절에 살고 있나.’
발레리는 더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도리질을 뚝 그쳤다.
황태자와 시선이 제대로 마주쳐 버렸다.
그는 온통 땀범벅이 된 발레리의 군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 자체가 서늘하면서도 건조했다. 발레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맨살에 얼음이 닿은 듯 선득한 기분이었다.
‘뭐야, 뭘 보는 거지. 뭔가 거슬린다는 표정 같은데.’
그녀는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주변을 확인했다. 일단 화단에서 삽질하는 병사 중에 본인이 가장 눈에 띄긴 했다.
혼자서만 웃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하, 설마 나한테도 웃통 벗고 하라는 건 아니겠지. 황태자가 벗으라고 하면 진짜 벗어야 할 텐데….’
발레리는 괜한 불안감에 옷깃을 여미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였다. 황태자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뭐야. 갑자기 왜 오는 거야.’
발레리는 옷깃을 더 세게 쥐며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근엄하게 다물려 있던 황태자의 입술이, 조금씩 틈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힘들면 쉬어 가면서 해라.”
목소리 온도는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황태자는 재킷 가슴팍에 왼손을 집어넣더니 흰 손수건을 하나 건넸다.
한구석에 군청색으로 ‘T’자가 수 놓여있었다.
“어어, 감사합니다.”
발레리는 얼떨떨해하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슥 닦은 뒤 다시 황태자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받아주지 않았다.
“…가져.”
황태자는 곧장 몸을 틀더니 보좌진과 함께 건물 안으로 향했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는 왠지 모를 찬 기운이 감돌았다.
‘뭐야, 이 비싸 보이는 손수건을 왜 그냥 가지래? 내 땀 묻었다고 버리는 건가?’
발레리는 그의 싸늘한 뒷모습을 흘깃하며 목덜미의 땀까지 싹싹 닦아냈다.
“와, 사이먼 계 탔네!”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옷 입고 하는 건데!”
그녀가 황태자의 호의를 독식하자, 동료 병사들의 아쉬운 원성이 터졌다.
이렇게 발레리는 ‘근위병사 사이먼’이라는 새로운 신분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도적단에 이어 부대에서도 쉽게 에이스를 차지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열 살 때부터 도적단에서 체력, 근력, 민첩성 능력치를 최대로 찍은 철인이었으니까.
고된 삽질도, 빡빡한 교대근무도 그녀에겐 일도 아니었다.
그런 발레리의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만 가장 고역인 건 다름 아닌 목욕시간이었다.
동료들은 보통 단체로 병영 목욕탕에서 씻었다. 당연히 신체 구조가 다른 발레리는 합류할 수 없었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밤에 슬쩍 나가서 혼자 씻어야 했다. 피곤하고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못마땅한 시선도 견뎌야 했다.
목욕시간마다 자취를 감추는 발레리에게, 동료들은 한 마디씩 던졌다.
“사이먼, 너는 목욕을 싫어하는 거냐? 좀 씻고 다녀라.”
“근데 안 씻는 것치곤 별로 냄새는 안 난다, 그치?”
“야 솔직히 말해. 사이먼, 너 작지?”
“어 그거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인데!”
“야야, 사이먼, 단점 가리려고 근육 단련한 거 아냐?”
이윽고 빵 터지는 동료들의 웃음소리가 발레리의 심기를 건드렸다.
동료들은 발레리의 매운 주먹에 한 대씩 쥐어 터지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발레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에휴, 나한테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 너네한테 있는 그 소중한 덜렁이가.”
공동변소를 이용할 때도 동료들의 사소한 태클은 이어졌다.
병사 전용 변소 칸막이는 키의 절반 높이쯤밖에 되지 않았다.
앉아서 볼일을 보노라면 머리통이 빼꼼 드러났다. 아래는 가려졌지만 누가 볼일을 보는지는 훤히 보였다.
“야, 빅터 사이먼은 맨날 똥만 싸나 봐!”
“그러게, 변소에 오면 매번 앉아있기만 하네.”
“야, 너 변비 있냐?”
발레리의 이마에 또다시 힘줄이 돋아났다.
이런 은밀한 사생활을 가지고도 놀리고들 싶을까. 이젠 정말 지긋지긋했다.
퍽.
퍽.
퍽.
까르르 웃던 동료 세 명은 칸막이에서 나온 발레리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이고 나서야 표정을 굳혔다.
“하아, 진짜. 나도 서서 쌀 수 있으면 좀 좋게?”
그녀가 혼자 울화통을 터뜨리는 날이 점점 잦아졌다.
***
황태자궁 후문에서 보초를 선 지 어느덧 2주가 지났다.
발레리는 이 일에 나름대로 익숙해졌다. 매일 후문으로는 관리들이 수도 없이 오갔다.
직속상관인 클린트 하사는 보초들에게 책자를 한 권씩 나눠주며 지시했다.
“황궁 고위 관리 명부다. 누가 몇 시에 드나들었는지 정확히 보고해야 한다.”
귀찮지만 한 명 한 명 얼굴과 이름을 대조하며 외울 수밖에 없었다.
‘하…. 기껏 황궁에 들어와서 하는 일이 나이 지긋하신 분들 얼굴이랑 이름 외우는 거라니.’
물론 가장 자주 보이는 인간은 궁전의 주인인 백금발 황태자였다.
정말 밤낮없이 무표정으로 이곳저곳 쏘다녔다.
“얼굴을 돌로 만들었나. 표정이 영 재수가 없단 말이지.”
늘 황태자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호위 마법사도 하나 있었다.
행색이 특이했다. 모자부터 로브, 신발까지 전부 녹색이었다.
“취향 참 독특한 마법사야. 초록 물감 뒤집어쓰고 다니는 줄 알았네.”
낮에는 이렇게 성실히 보초를 서면서도, 발레리는 주어진 임무도 충실히 하려고 애썼다.
야밤에는 잠을 아껴가며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중앙궁의 황실 무기고에 잠입했다.
고맙게도 새벽엔 보초들이 곤히 자고 있어서 들어가기 쉬웠다. 작고 기다란 쇠막대로 자물쇠 푸는 건 손에 익을 대로 익은 일이었다.
그렇게 며칠 밤에 걸쳐 상자를 오십 개쯤 뒤져봤지만, 아직 황실의 보검처럼 보이는 무기는 나오지 않았다.
문제는 이백오십 상자가 더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뒤질 상자가 한참 남았다.
“애초에 보검이 어떻게 생긴 줄 알아야 찾지. 의뢰를 줄 거면 정보도 같이 주든가. 갑갑해서 정말.”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