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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2)화 (2/173)

2화

기가 막힌 발레리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젠 막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두목. 저 그냥 해본 말인데요. 의뢰인이 무슨 피의 맹세까지….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증표도 가져왔어. 성호 긋고 확인해 봐.”

피어스의 얼굴에서 농담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가죽조끼 안에 손을 집어넣더니, 손바닥만 한 무언가를 눈앞에 내밀었다.

발레리는 그에게 등불을 넘기고 의뢰인의 증표를 받아들었다.

손바닥 크기의 원형 펜던트였다. 플래티넘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성물인 건 분명했다. 캄캄한 밤중에도 신성하고 이채로운 광택이 감도는 걸 보니.

발레리는 문득 심장이 철렁했다. 도적질을 하며 진귀한 보석은 웬만큼 다 만져봤지만, 성물에 손을 대는 건 처음이었다.

‘이런 물건에 나 같은 인간이 함부로 손대도 되려나.’

증표 한가운데는 암적색으로 물든 크리스털이 박혀있었다.

이게 맹세의 증표라면 의뢰인이 제 입술을 스스로 찢어 흘려낸 혈액일 것이다.

뒷면에는 섬세한 눈꽃 송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칼레바니아의 건국을 예언한 여신 시에나의 상징이었다.

“살다 살다 피의 맹세 증표는 처음 보네….”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시험해 보면 알겠지.

발레리는 증표를 왼손으로 감싸 쥐고 가슴에 댔다. 피어스가 품속에 넣고 있어서 그런 걸까. 금속 특유의 서늘한 감촉 없이 사람 체온처럼 뜨끈했다.

그녀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떨리는 손끝이 이마와 가슴, 양어깨와 입술에 순서대로 닿았다.

동작이 끝나자마자 증표를 댄 왼쪽 가슴에서 강한 진동이 일었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온 흰 섬광이 발레리의 시야를 완전히 지배했다.

눈을 감아도 뜬 것처럼 눈이 부셨다.

어디선가 불어온 스산한 바람에 그녀의 머리칼이 소리 없이 흩날렸다.

동시에 귓가에 낯선 음성이 흘러들었다.

[내가 황녀를 해칠 일은 없을 것이다. 시에나 여신 앞에서 심장을 걸고 맹세하겠다.]

위엄 있고 차분한, 남성에 가까운 음역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성물을 거쳐서 그런 건지, 사람 목소리라기엔 형언할 수 없이 기이한 울림이 있었다.

맹세가 끝나자 펜던트는 원래의 빛으로 되돌아왔다.

발레리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강렬한 섬광이 남긴 잔영이 눈앞에서 가실 때까지.

피의 맹세.

반역 혐의를 받는 귀족들이 목숨을 걸고 결백을 증명할 때 주로 쓰는 방법이었다. 맹세를 어겼다간 즉각 심장이 멎어버렸으므로.

이런 증표를 성물에 남기는 의식은 사람 목숨을 좌우하는 만큼 높은 권위를 요구했다. 여신과 직접 소통하는 대신관이나 고위 사제만이 주관할 수 있었다.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겠네. 신 앞에까지 가서 이런 맹세를 받아 오다니.’

발레리는 손안의 증표를 멍하니 들여다봤다.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던 피어스가 입을 열었다.

“발레리, 나도 생각 없이 받아 온 의뢰는 아니야. 우리 펠런의 신조가 뭐니.”

“…물건은 훔쳐도 사람은 해하지 않는다.”

“그래. 그걸 어기면서까지 받고 싶진 않다고 했더니, 나중엔 이런 증표까지 내밀더구나.”

“대체 누구예요? 뭘 이렇게까지 해서 황녀를 데려오란 거예요?”

발레리는 맹렬한 기세로 따져 물었다.

피어스는 조용히 고개를 젓기만 했다.

의뢰인의 정체를 발설할 수 없다는 건지, 아니면 본인조차 누군지 모르는 건지.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마력석 상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발레리는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두목, 의뢰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일을 뭘 믿고 하라는 거예요.”

“수락할지 말지는 네 자유야. 하지만 완수하면 이 마력석의 스무 배가 주어진다. 지금 상황에선 다 같이 10년 넘게 벌어도 못 모을 양이잖니.”

“아으, 돌겠네 정말.”

“발레리, 알다시피 우리 펠런이 이 땅에서 10년을 버티긴 힘들 거다. 이곳 프레이저 후작령도 더는 보호막이 못 돼줄 순간이 올 테니까. 이번 의뢰는 모험에 가깝지만…. 다신 없을 기회기도 해.”

그의 말이 맞았다.

의뢰인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지만, 덮어놓고 거부하기 힘든 조건을 제시했다.

발레리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근데 왜 굳이 저한테 시키세요? 케빈도 있잖아요.”

“의뢰인이 여자 단원을 보내란다. 내 생각에도 그편이 황녀에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 싶다.”

“…하아.”

그녀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깊은 고뇌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단원들 구하자고 하는 일이라지만…. 그렇다고 애먼 사람을 어떻게 납치해오라는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녀라니.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이름조차 가물가물했다.

얼추 비슷한 또래에, 칼레바니아 황실에 오랜만에 태어난 딸이라는 것까지만 알았다.

도적 생활 열두 해째, 이렇게 어려운 선택의 기로를 맞닥뜨린 건 처음이었다.

***

그날 이후, 발레리는 몇 날 며칠 곡기를 끊었다.

자타공인 대식가인 발레리가 끼니를 거르자, 펠런 단원 전체가 우려에 잠겼다.

“두목, 발레리가 왜 저럴까요? 쟤 무슨 죽을병 걸린 거 아니에요?”

발레리의 친오빠를 자처하는 단원 케빈이 피어스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또 밥 안 먹겠다고 하든?”

“네. 멍하니 누워있길래 닭튀김을 입에 넣어줬는데, 바로 퉤 하고 뱉더라고요.”

“걔가 닭튀김을 뱉었다고?”

“네. 아무래도 의원에 데려가야겠어요.”

“…그냥 둬라.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발레리는 며칠 동안 밤잠조차 이루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그 와중에 심란한 일이 더 겹쳤다.

단원 한 명이 가족을 보러 후작령 밖으로 나갔다가 치안대에 잡혀 구금됐다.

나흘쯤 지났을까.

새벽이 동틀 무렵, 그녀는 불그스름하게 충혈된 눈으로 피어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할게요, 두목. 다치는 사람 없다면 못할 게 뭐 있겠어. 단원들 도망 생활 청산하고 새 출발 할 수 있으면 뭐든 해야죠…. 잘 안 되면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고맙다, 발레리. 죽는다는 말은 넣어두고.”

두목은 그녀를 따스하게 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분명 위험천만한 의뢰였다.

그녀가 이를 수락한 배경에는 도적단 에이스라는 자존심도 한몫했다.

펠런에서 그녀만큼 검술에 능한 단원은 없었다.

그뿐인가. 잠행과 은신, 줄타기 등 여러 잔기술도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이십 대 초반의 어린 단원이라 아직 얼굴도 알려지지 않았다.

여러모로 최적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걸리는 게 또 있었다.

“두목, 근데 황실의 보검이란 게 대체 뭐예요? 전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황녀를 데려오란 요구도 터무니없긴 했지만, 의뢰인은 황실의 보검에 대한 정보도 딱히 주지 않았다.

피어스도 백방으로 알아봤으나 보검을 실제로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칼레바니아 건국신화에나 등장하는 물건이었다. 황궁 안에 실재하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래도 황궁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니, 그곳에 들어가기는 해야 했다.

“일단 황궁에 하녀로 들어가서, 밤에 황제의 무기고를 천천히 뒤져 보는 걸로 하자.”

발레리는 미간을 확 좁혔다. 황궁에 하녀로 들어가라니. 내키지 않는 방법이었다.

“두목, 하녀로 들어가는 건 좀 그래요.”

“왜? 거의 유일한 방법일 텐데.”

“이렇게 기골 장대한 하녀가 어딨어요. 요리, 청소, 빨래도 젬병이고. 차라리 근위병으로 입대할래요.”

“흠, 남자 신분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만…. 안 걸릴 수 있겠니?”

“…두목, 제 키가 180이에요. 아무도 여자인 줄 모를걸요. 팬티만 안 벗으면.”

때마침 3월 말은 제국 청년들의 징병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발레리는 ‘빅터 사이먼’이라는 가짜 신분을 얻자마자 부랴부랴 입대 원서를 써냈다.

얼마 후 황성에서 곧장 입영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렇게 발레리는 칼레바니아 제국의 병사로 당당히 입대했다.

***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발레리는 패기가 넘쳤다.

하지만 황궁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한 달간 열심히 굴렀으나 일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라벤더궁 말고 황태자궁에 배치될 줄 누가 알았나.’

황궁 지도만 생각하면 한숨만 나왔다.

황녀가 산다는 라벤더궁은 황태자궁과 아주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에.

직선거리로 걸어도 족히 20분은 걸릴 정도였다. 이래선 황녀의 동선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하는데… 공간적 제약이 너무 크단 말이지.’

발레리는 침상에 엎드려 베개 밑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 안에서 뭔가 반짝이는 게 나왔다.

황녀의 초상화가 담긴 펜던트였다. 황성 시내에서 무려 50갈렌을 주고 샀다.

“에휴, 드디어 실물로 보나 했는데.”

뒤늦게 알게 된 황녀의 이름은 프리다라고 했다.

황제 부부의 하나뿐인 딸이자, 황태자의 쌍둥이 여동생이었다.

지방에서만 활동하던 발레리는 잘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프리다는 바다 건너 다른 대륙까지 이름을 떨친 전 대륙급 유명인사였다.

구혼자 일흔일곱 명을 얼굴도 안 보고 튕겨낸 콧대 높은 여자라고.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이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칼레바니아의 철벽 요새’

명성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허리춤까지 풍성하게 굽이치는 백금발. 맑고 또렷한 사파이어색 눈동자. 그 위에 길게 드리운 금빛 속눈썹. 한여름 복숭아처럼 발갛고 보송한 뺨.

기품이 흘러넘치는 미소에는 따사로운 성품이 그대로 내비쳤다.

프리다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나의 형상을 떠올렸다.

온 백성이 받들어 모시는 축복의 여신 시에나를.

발레리는 초상화 속 얼굴을 엄지로 쓸어내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람이 뭐 이리 성스럽게 생겼어? 털끝도 안 건드렸는데 벌써 흉악범 된 기분이네….”

그녀는 밤새도록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깊은 새벽에야 스르르 잠들었다. 펜던트를 손에 고이 쥔 채로.

***

발레리의 꿈에는 입대 전날의 기억이 그대로 재생됐다.

그날 두목 피어스는 가위를 들고 그녀의 머리를 손수 다듬어주었다.

어깨까지 오던 까만 머리칼은 금방 숏컷이 됐다.

─다 됐다, 발레리. 근데 수염이라도 붙이고 가는 건 어떠냐.

─수염은 왜요, 두목?

─속눈썹도 길고 턱선도 갸름해서, 남성미가 좀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에이, 지금도 충분하니까 걱정 붙들어 매세요. 그럼 저 갑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원래부터 선머슴 소릴 듣던 그녀는 굳이 남장할 필요가 없었다.

여자치곤 드문 장신. 귀밑에서 끝나는 짧은 흑발. 윤기 흐르는 구릿빛 피부.

수년간의 훈련과 실전으로 어깨도 떡 벌어져 있었다.

탄탄하게 부푼 팔근육과 촘촘히 짜인 복근, 쩍 갈라진 허벅지 근육까지. 틈날 때마다 검술 수련과 근력운동을 병행한 결과물이었다.

여기에 풍만한 가슴이라도 있었으면 임무에 방해가 됐을 터다.

다행인 건지, 발레리에겐 아무런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입대 후, 발레리는 숙소 거울에 옷매무새를 비출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살다 살다 절벽인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다니. 압박붕대도 필요 없고 얼마나 좋냐.’

그러다 위기의 순간이 도래했다.

다음 날 자고 일어난 아침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어딘가 휑한 느낌이 들었다.

발레리는 불길한 예감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윗도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겨드랑이 부근까지 쭈욱.

당연히 상체도 훤히 드러난 채였다.

“히익!”

발레리는 숨이 멎을 것처럼 기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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