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황궁 근위대 장교와의 일대일 면접시간.
발레리는 면접실에 입성하자마자 깍듯이 거수경례했다. 야무진 손끝이 정확히 눈썹 언저리에 닿았다.
“신병 빅터 사이먼입니다!”
그녀는 웬 낯선 남자의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어, 그래그래. 네가 그 괴물 신병이구나. 얘기 많이 들었다.”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격투술 교관을 한 방에 때려눕혔다면서. 안 알아주면 섭섭하지 않겠나?”
“…아하하.”
역시 소문은 빨랐다.
시범 대련에서 교관을 제압한 게 벌써 윗사람 귀까지 들어갔다니.
‘콕 짚어 앞으로 불러내길래 상대해 준 건데. 교관씩이나 돼서 한 방에 나가떨어질 줄 누가 알았나.’
발레리가 멋쩍게 눈알을 굴리는 사이, 장교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빅터 사이먼, 즉 발레리의 병적기록부를 찬찬히 살피며.
맨 위에 ‘최우수 병사’ 딱지가 붙은 이유가 있었다.
체력검정 기록이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모든 종목이 최상위 기준을 한참 뛰어넘었다.
특이사항에는 딱 네 글자가 적혔다.
「인간병기」
“…팔굽혀펴기를 한 번에 백 개를 한다고. 이게 끝까지 정자세로 되나?”
“지금 당장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강단이 묻어나는 대답이었다.
발레리는 벌써 양 손바닥을 비벼 털고 있었다. 당장 바닥에 엎드릴 수 있다는 기세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놈이 들어왔군. 장교는 흡족하게 미소하며 까슬한 턱 끝을 매만졌다.
그는 발레리의 전신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었다.
신장은 180센티미터. 예상보다 체격이 크지는 않았으나 척 봐도 날렵한 근육질이었다.
선 자세부터 각이 제대로 잡혀 있었다. 잔주름 하나 없는 녹갈색 정복 위로 탄탄한 어깨선이 드러났다.
즉석에서 체력을 시험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았다.
“됐다. 괴물이라길래 우락부락한 덩치일 줄 알았는데…. 웬 계집애같이 곱상한 놈이 들어와서 놀랐다.”
“하하, 이래 봬도 튼튼한 사나입니다.”
발레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까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선 굵은 남자 병사들 사이에서 그녀는 꽤 돋보이는 편이었다. 특히 작은 얼굴과 매끈한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여자일 땐 선머슴 소리, 군대에선 계집애 소리. 뭐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이날 발레리가 장교 앞에 불려 나온 건 근무처 배정 때문이었다.
훈련병 생활을 끝냈으니, 이제 면접을 보고 정식 배치를 받을 차례였다.
장교는 발레리가 제출한 배치 희망서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어디 보자, 네 희망근무처가….”
그는 껄껄 웃었다. 1지망부터 3지망까지 모두 같은 곳이 적혀 있었다.
「라벤더궁」
라벤더궁은 황녀가 기거한다고 알려진 건물이었다.
“허허, 세 칸 다 라벤더궁 써내는 놈은 처음 봤네. 황녀님의 일흔여덟 번째 구혼자라도 될 생각인가?”
‘구혼자? 뜬금없이 뭔 소리야, 이 아저씨.’
장교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 발레리는 가만히 멀뚱거렸다.
그녀가 별 반응이 없자 장교는 웃음기를 싹 거둬들였다.
그리고 이렇게 통보했다.
“아쉽겠지만 거긴 근위병을 안 뽑는다.”
“…예? 잘 못 들었습니다.”
“라벤더궁은 신병 안 뽑는다.”
청천벽력이었다.
발레리는 라벤더궁 외에 다른 근무처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덜컥 내려앉은 심장을 어떻게든 진정시켜야 했다.
“…왜 안 뽑습니까?”
“왜긴 왜겠나. 안 필요하니까 안 뽑지.”
별 걸 다 묻네. 장교는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병적기록부 아래서 인력 배치도를 꺼내 펼쳤다.
빈자리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에 시선이 탁 꽂혔다.
발레리의 근무처는 쉽게 낙점됐다.
“빅터 사이먼, 너는 황태자궁 후문 배치다.”
“아, 안 됩니다!”
그녀의 다급한 외침에 장교는 눈살을 구겼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나가서 다음 병사 들어오라고 해!”
고압적인 명령에도 발레리는 꿈쩍 않고 버텼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꼭 황녀님 처소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허, 참. 나더러 라벤더궁에 없는 자리라도 만들어 달란 거냐?”
“빈자리가 없다면, 교체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한 명 빼고, 그 자리에 절 넣는 식으로 배치를 바꿔 주시면….”
“지금 무슨 체스 두는 줄 아나? 어디서 누구 맘대로 사람을 빼라 말라야?”
장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인사권자한테 반항하는 것도 모자라 이래라저래라하는 신병은 처음이었다.
보아하니 황녀의 열성 팬인 것 같은데, 라벤더궁은 선발 예정 인원이 전무했다.
‘별 희한한 놈일세. 황태자궁이면 양호한 근무처건만. 중앙 게이트처럼 빡빡하지도 않고.’
장교는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최우수 병사라 해도 이런 억지를 받아줄 순 없었다.
이 와중에 발레리는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간곡한 눈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제발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바꿔 주시면 안 될까요?”
“안 돼. 안 바꿔줘. 바꿔 줄 생각 없어. 나가!”
장교는 언성을 높이며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발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 최후의 수단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녀는 한 번 심호흡한 뒤 입술을 천천히 뗐다.
“히잉….”
그녀는 양어깨를 살랑대며 도톰한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
억지로 쥐어짠 애교는 물론 역효과가 났다. 장교의 손에는 어느새 재떨이가 들려있었다. 그의 넓은 이마 한복판에 핏대가 불쑥 솟았다.
배식 시간에 빵 한 덩이 더 받자고 하는 수작이 이런 데서 통할 리가.
“지금. 당장. 뒤돌아서 나간다. 실시.”
레드카드였다.
결국 발레리는 면접실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계속 생떼 부리다 머리통이 박살 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그녀의 입대 후 첫 목표는 보기 좋게 수포가 됐다.
뒷덜미로 싸늘한 절망감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사지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황태자궁이라니.
그런 애먼 데서 일하려고 땡볕에서 죽어라 구른 게 아니었다.
‘아오, 거긴 왜 사람을 안 뽑아? 이래서 황녀를 어느 세월에 납치해. 돌아버리겠네, 진짜.’
발레리는 짧은 머리를 세차게 헝클어뜨렸다.
***
악명 높은 도적단 ‘펠런’의 에이스이자, 유일한 여자 단원인 발레리.
그녀가 이곳 황궁에서 수행할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황녀를 산 채로 데려오라」
「황실의 보검을 함께 가져오라」
「지금으로부터 1년 후에」
물론 그녀가 제국 병사로 입대하기까지는 신분과 성별을 속여야만 했다.
남성 징병제 국가인 칼레바니아에서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병약한 아드님 대신 입대할 사람 안 필요하세요?
─제가 어떻게 해 드리면 됩니까?
─간단해요. 신분만 주시면 돼요.
발레리의 이런 달콤한 제안에, 향신료 상인 사이먼은 손을 덥석 잡고 연신 감사를 표했더랬다.
사이먼의 로비 덕인지, 입영 시 지망했던 황궁 근위대에 배치받는 것까진 어찌어찌 성공했다.
그러나 근무처 배정에서 삐끗해 버릴 줄은 몰랐다.
무참히 실패한 면접을 뒤로하고, 발레리는 일찍이 병영 숙소에 복귀해 있었다.
그녀는 침상에 털썩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리고 애꿎은 이불에 발길질을 해댔다. 먼지가 풀풀 날릴 정도로 세찬 발버둥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의뢰를 두 개씩이나 받아와서…. 아오!’
임무 내용을 떠올릴 때마다 한없이 막막하기만 했다.
4월 초에 황성에 올라와 훈련병 생활을 마치니 눈 깜짝할 새 한 달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시간은 열한 달인데, 라벤더궁 입성에 실패해 버리니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탈영 생각이 굴뚝같이 치솟았다.
‘하지만 나한테 그럴 선택권이 있을 리 없지.’
천애 고아인 그녀를 거둬 길러준, 가족과도 같은 도적단의 생존이 걸린 임무였으니까.
도적단 펠런은 높은 악명만큼이나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귀족들의 부정축재 재산만 이십 년째 노려왔다. 그러다 보니 가지신 분들의 원한을 너무 많이 샀다.
수년간 집요한 추적을 당했다.
그 결과 단원 40여 명 중 절반 이상은 얼굴이 알려졌다.
칼레바니아 대부분 지역에 현상 수배 벽보가 붙어있었으니, 이젠 도적단이라기보단 도망자 집단에 가까웠다.
조금이라도 큰 도시에 가면 꼭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났다.
치안대와의 추격전이 잦아지면서, 예전처럼 전국 곳곳을 누비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도피 중에 인명피해도 있었다. 정체 모를 귀족이 고용한 암살단의 손에 숨진 단원만 다섯이었다.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자, 몇 년 전부터 펠런은 활동 목적을 완전히 틀어 버렸다.
망명 자금을 모아 손을 털고, 이곳 칼레바니아 땅을 떠 버리자고.
***
발레리가 이런 임무를 받은 건 지금으로부터 한 달여 전쯤이었다.
“발레리, 자니? 안 자면 잠깐 나와라.”
펠런 두목 피어스의 은밀한 부름에 막 잠자리에 들려던 발레리는 그를 따라나섰다.
졸린 눈을 비비는 그녀를 이끌고, 피어스는 아지트 뒤편의 으슥한 숲속으로 들어갔다.
삽 하나를 등에 지고서.
“뭐예요, 두목? 삽은 왜 들고 가는데요?”
“일단 따라와 봐.”
거친 수풀을 헤치고 목적지에 도착하니, 웬 떡갈나무 가지에 보라색 리본 하나가 걸려 있었다.
피어스는 그 아래 삽 머리를 꽂고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발레리는 그의 동작을 긴장 속에 지켜봤다.
“…설마 사람 시체 묻어두신 건 아니죠?”
피어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삽질을 계속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발레리는 더 불안해졌다. 등불을 쥔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후들거렸다.
얼마 안 가 삽 끝에서 둔탁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거기서 나온 건 녹슨 상자 하나였다.
묵직한 크기였다. 웅크린 성인 남자 한 명이 들어갈 수도 있을 만큼.
뭐야. 진짜 시체야?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피어스는 상자 위의 흙을 툭툭 털어내고는 덮개를 살짝 열었다. 그 안에는 뭔가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발레리는 그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내용물을 찬찬히 살폈다.
보랏빛 광택이 감도는 검은 광물.
마력석이었다.
“아니 이 귀한걸…. 두목, 어디서 났어요?”
“임무를 하나 받았어. 그 선수금이야.”
“무슨 선수금이 이렇게 많아요? 그럼 나머지 대금은 얼만데요?”
“스무 배다. 단원 전체가 손 털고 망명하기에 충분한 자금이지.”
발레리의 눈과 입이 동시에 쩍 벌어졌다.
마력석은 마법 무기 강화 재료였다.
칼레바니아의 대표 수출품이자, 군사력 강화를 노리는 이웃 나라들이 너나없이 침을 바르려 하는 물질이었다.
망명 신청을 조건으로 외국 정부에 제시하기엔 더없이 좋은 자원이기도 했다.
“그래서 뭘 하면 되는데요?”
“1년 동안 황궁에 잠입해 있다가….”
“엥? 황궁이라뇨?”
“황녀를 내게 데려와라. 황실의 보검도 찾아서 함께 가져오면 된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발레리는 귀를 의심했다.
터무니없는 의뢰 내용이 머릿속에 입력되기까진 한참이 걸렸다.
뒤늦게 요지를 파악한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며 경악했다.
“황녀? 황녀를 데려오라고요? 그거 납치잖아요. 아니 무슨 훔칠 게 없어서 사람을 훔치라는 거예요?”
피어스는 덥수룩한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부연했다.
“납치라면 납치랄 수 있겠지만, 의뢰인은 황녀를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볼일이 있으니 제 눈앞에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고.”
“참 나,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시에나 여신 앞에서 피의 맹세라도 했대요?”
“그래.”
피어스의 단답에 발레리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이었는데, 덥석 긍정 대답이 돌아왔으니.
“네? 지금 뭐라고….”
“했다고. 피의 맹세.”
피어스가 대답에 못을 박자, 발레리의 새카만 눈동자가 큰 폭으로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