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육중한 몸집. 다른 괴수들과는 다른 어두운 금속 같은 질감의 피부. 전신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 멀리서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에 바라멜리아는 바짝 긴장한 채 바로 ‘각성기’를 준비했다.
각성이라는 것은 여러 의미로 쓰이지만, 자연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는 한계를 돌파하고 한 단계 더 높은 힘을 얻는 것을 뜻한다.
화염의 능력을 가진 바라멜리아가 각성으로 얻은 능력은 바로 ‘태양’의 힘. 그는 손바닥에 태양을 구현해 내는 것이 가능하다.
콰콰콰콰……!
강렬한 열기가 모여들더니, 그의 손바닥 안에 강렬한 빛을 내뿜는 작은 태양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바라멜리아 외에 모든 것을 태우고 녹이며 그것을 향해 날아갔다.
제아무리 단단하다 한들, 태양을 정면으로 맞부딪힐 수 있는 존재는 없기에 바라멜리아는 놈을 죽이진 못해도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주시했다.
강력한 위력을 가진 작은 태양이 접근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던 놈은, 순간 전신에서 강렬한 검은 기운을 뿜어냈고, 그를 중심으로 구의 형태를 띠며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은 그대로 태양과 부딪혔다.
마치 실드를 전개한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바라멜리아가 느끼는 것은 전혀 달랐다. 그것은 방어 차원의 힘이 아닌 강력한 파괴력을 품은 힘이라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태양은 그 검은 힘과 부딪히자마자 삼켜졌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 어떤 폭발이나 충격도 없이 그대로 게 눈 감추듯 없어져 버렸다.
‘대체 저건… 뭐지?’
그 능력에 충격을 받은 바라멜리아. 그에게 다시 놈의 정신이 접촉해 왔다.
[꽤 강한 힘을 다루는구나. 네놈.]
바라멜리아는 그저 가만히 그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힘이라도 내 앞에선 무용지물이지. 바르 님께 받은 이 권능 앞에선 모두가 공평하다.]
바르라는 말에 희미하게 신시우에게서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악신 바르라…….’
바라멜리아는 잠시 흘렸던 시선을 들어 다시 놈을 노려봤다.
[내 이름은 바라멜리아. 네놈은?]
[사란테. 십이사신 중 세 번째다.]
정식으로 상대를 인정한 둘은, 다시 맞붙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바라멜리아. 공격하는 척하며,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는 그 검은 구체에 가까이 접근해 봤다.
그러자 뭔가 강하게 당기는 느낌이 들어 얼른 거리를 벌렸다.
‘인력인가?’
강해지고 강해진 인력은 결국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대재앙으로 바뀐다는 것. 바라멜리아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 녀석이 쓰는 능력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계속 공격을 퍼부으며, 그것을 실험해 봤다.
가만히 예의주시하던 사란테라는 십이사신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검은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바라멜리아를 몰아넣기 시작했다.
‘강력한 인력은 아니다.’
그가 들었던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듯 보였다. 문제는 그 강력한 태양 에너지도 빨아들이는 그 검은 운무 같은 것에 빨려 들어가면 어떻게 되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그는 계속해서 거리를 벌리며 공격했고, 사란테는 계속 거리를 좁혀 오며 검은 운무를 뻗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바라멜리아는 자신을 공격해 오는 그 검은 운무에 손끝을 살짝 넣었다 뺐다.
일종의 실험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능력에 대해서 알기 위해.
그의 손끝이 검은 운무 속으로 잠시 들어갔는데, 그 순간 그는 괴이한 느낌을 받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으로 넘어갔다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거리를 벌리고, 공격하는 것을 이어 가며, 어떻게 공략할지 생각에 잠겼다.
‘운무로 둘러싸여 있으니, 직접적인 공격을 안 하는군.’
사란테는 운무를 이용하여 그를 공격했고, 그 본체는 계속 운무 안에 숨어 있었다. 그래서 바라멜리아는 그 능력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 계속해서 도망만 다녀 보기로 했다.
그렇게 쫓겨다닌 지 얼마나 지났을까? 사란테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셈이지?]
바라멜리아는 그 추측에 확신을 가졌다. 궁지에 몰리고 있는 것은 사란테라고.
[조그마한 게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 다니는구나.]
사란테는 공격 속도를 더욱 높이며 몰아쳤다. 원래도 빠른 속도의 맹공을 펼쳤으나 바라멜리아가 여유롭게 피해 다니는 탓에 사란테는 굉장히 약이 오른 상태였다.
검은 운무의 공격이 거의 사란테 본체의 공격 속도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바라멜리아도 피해 다니는 것이 점점 빠듯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란테의 착각이었다. 바라멜리아는 아직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이동법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사란테가 곧 바라멜리아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더 무리를 하는 순간. 바라멜리아의 몸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화염이 뿜어져 나왔고, 마치 불덩이처럼 변한 바라멜리아가 한 단계 더 높은 속도로 도망다니기 시작했다.
‘이……!’
뒤늦게 상대의 의도를 알아챈 사란테는, 검은 운무를 거두고 숨을 몰아쉬었다. 최소한의 여유를 두고 권능을 운용하려 했으나, 바라멜리아의 밀당에 휘말려 본래 계획보다 더 무리한 운용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분명 그의 실책이었다. 평소에도 감정적으로 본능적으로 움직이던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좀 자제하려 노력했던 그였다.
허공에서 땅을 딛고 선 사란테를 내려다보던 바라멜리아가 돌연 폭발을 일으켰다. 그와 거의 동시에 지상에서도 폭발이 일어났다.
허공을 박차자마자 땅에 도달한 바라멜리아의 불주먹이 사란테의 머리에 직격했다. 초고열의 화염을 전신에 두르고 있던 바라멜리아는 그대로 쉬지 않고 공격을 이어 갔다.
순식간에 뿌연 먼지가 지상을 뒤덮었고, 그 먼지 속에서 바라멜리아가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는 커다란 태양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구구구구.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에 일대가 모두 달아오르며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태양은 빠르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열기가 만들어 내는 대류 현상에 뿌연 먼지들이 순식간에 걷혀 나가고 그 안에 있던 사란테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력을 다한 주먹질과 발길질에 그 단단한 사란테도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 그런 와중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커다란 태양.
산만 한 크기의 거대한 태양. 충돌하기 전임에도 그의 전신을 짓누르는 강력한 에너지가 있었다. 그가 속도를 낸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으나, 그는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전신에서 다시금 검은 운무를 뿜어 냈다. 그러나 그 타이밍이 좋지 않았고, 그 운무의 크기가 부족했다.
강렬한 빛과 함께 태양은 폭발했고, 일대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에너지. 척박했던 대지에는 거대한 크레이터의 흔적이 남았다. 마치 작은 소행성이 충돌한 듯한 어마어마한 구덩이. 그 가운데 바라멜리아가 떠 있었다.
‘운이 좋았다.’
분노로 인해 상대를 짓이겨 버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바라멜리아였지만, 사란테와 마주하고 활활 타오르고 있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만큼 사란테가 강한데다가 난적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힘으로 찍어누르는 전투를 해왔던 바라멜리아였기에 기이한 능력을 사용하는 그를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힘으로 붙는다면 자신이 있는 그였지만, 기이한 능력으로 전신을 두르고 있는 그를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전투 스타일을 바꿔, 치고 빠지는 식의 전투를 하다가 녀석의 힘을 빼는 계획을 우연히 수립하게 되었고, 결국 그의 추측이 맞아떨어졌다.
‘만일 그놈이 계속 그 능력을 사용했다면 내가 패배했겠지.’
바라멜리아는 근심이 생겼다. 여러 대륙들이 동시에 침공을 당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더 강한 놈이 있을까? 하는 걱정. 그리고 이 비나몬 대륙에 얼마나 많은 피해가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는 전 비나몬 대륙의 육황이자 현 칠대제의 책임감을 가지고, 일단 대륙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 이동했다.
* * *
쾅쾅. 뚝딱뚝딱.
파괴된 고렝데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벌써 도시의 재건을 시작하고 있었다.
마를레나와 히네의 마법으로 치유된 사람들이 도시의 남은 건물들 중 그나마 성한 건물들을 하나씩 잡고는 수리를 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라벤 본가에서 고용되어 마을 성벽을 다시 쌓기 시작했다. 비록 작은 시작일 뿐이지만, 그 성벽은
“마를레나는요?”
“친구들 부르러 간다고 갔는데?”
마를레나에 대해서 잘 몰랐던 하마디아와 나베니아는 서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오후로 접어들 즈음. 도시 바깥 경계를 서던 경계병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본가를 향해 뛰어왔다.
“저기……! 짐승들이 몰려옵니다! 날짐승 들짐승 산짐승 할 것 없이 굉장한 숫자예요! ”
그 말에 가장 먼저 히네가 도시의 경계까지 나가 시력 강화 마법으로 멀리 오는 짐승들을 쭉 살폈다. 그렇게 살피던 어느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를레나……!”
그 짐승의 무리들의 한복판에는 마를레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네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그녀는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그에 히네도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마를레나예요!”
마력을 실은 히네의 목소리가 도시에 울려 퍼졌다. 워낙 규모가 있는 도시다 보니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시민들이 병사들에게 병사들이 라벤 본가에 전달했다.
“마를레나……!”
“마를레나가 짐승들과 함께 온다고?”
“예! 일단은 그렇다고 합니다.”
모두들 뛰쳐 나갔다. 그녀가 온갖 짐승들과 영물들을 동료 삼아 나타난 것은, 캉구르 연합군밖에 보질 못했으니, 이들은 마를레나의 능력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본가에 있는 말을 몰아 하마디아가 제일 먼저 뛰어나갔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그였기에 빠르게 도시의 경계까지 달려 나갈 수단은 말을 타는 것뿐이었다.
나베니아는 본가의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가 아는 마를레나에 대한 정보는, 그녀가 마나를 굉장히 잘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신시우에게서 들은 것도 그것 외엔 없었다.
너무 이상한 나머지. 하마디아는 마를레나가 혹시 어떤 놈의 꼬임에 넘어가 짐승들을 데리고 침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괴상한 추측까지 했다.
‘아니면… 짐승들을 부릴 줄 아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던 건가?’
그런 추측들을 하는 새 도시의 경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히네가 있었다.
“마를레나예요.”
히네의 표정이 좋은 것으로 볼 때 위협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마디아는 판단했다. 그리고 짐승의 대군을 그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