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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
절망에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상급 기사 발렛. 그의 견갑에 무언가 떨어졌다. 빗방울 같은 느낌에 하늘을 올려다본 그의 얼굴에도 빗방울이 떨어졌는데, 뭔가 기분이 나쁜 느낌에 그는 손으로 빗방울을 닦아 냈다.
“앗…….”
얼굴 피부에서 통증이 느껴졌고, 그의 손에는 검은 것이 묻어 나왔다.
‘검은… 빗방울?’
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는 검은 것이 묻은 손을 유심히 관찰했다. 천천히 손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란 그는, 먼저 빗방울을 맞은 견갑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견갑 일부가 부식되어 부서져 가는 것을 목격했다.
충격을 받은 그는 머리에 떨어진 빗방울을 문지르며,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나무판자로 일단 머리를 가리고, 머리에 쓸 투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떨어지는 빗방울은 점점 많아졌고, 그의 갑옷은 모두 부식되어 부서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가린 나무판자는 물론, 부서져 빗방울이 머리와 얼굴로 다 튀어 들어왔다.
묵직한 느낌의 기분 나쁜 빗방울. 그러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빗방울의 능력.
발렛은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과 무시무시한 빗방울의 능력에서 오는 공포 속에 죽어 갔다.
“호호호호호…….”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죽어 버린 바닷가를 울리고 퍼져 나갔다. 커다란 검은 천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거대한 낫을 든 사신의 형상. 그것은 둥둥 뜬 채 바다 위에서 육지로 넘어왔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시커먼 빗방울은 대지를 더욱 검게 물들였고, 모든 것을 부식시켜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이 지나간 자리는 시커멓게 죽은 대지와 메마른 가루만 흩날리는 종말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완전히 검게 변한 대지에서는 온통 시커먼 색의 거대한 기갑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늪 속에서 솟아나오는 듯한 모습은, 좌중을 압도할 만큼 위력적으로 보였다. 그들이 땅에 발을 딛는 순간. 해안가에 진동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웬만한 성벽만 한 거대한 몸집의 거병들이 창칼을 들고 산과 산 사이 난 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일반 마족보다 큰 덩치를 가진 검은 병사들이 줄지었다.
칼과 방패를 든 병사, 지팡이를 든 법사, 활을 든 궁수 등 각기 다른 부대들이 그 뒤를 이었고, 또 거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국의 군대의 규모는 우스울 정도로 큰 규모의 병력들이 산길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를 거대한 사신이 둥둥 뜬 채 따라 이동했다.
* * *
높은 산위 거대한 침엽수의 꼭대기에서, 산골짜기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멀리 보이지 않는 곳. 무언가 불길한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높은 경지에 이른 자들이 갖는 일종의 촉.
그렇게 그 나무 꼭대기 위에 서서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어느 순간. 마나를 타고 불길한 기운이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아직 먼 시점. 위험하다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런 직감이 들자마자 마력을 끌어올려 마나 고리를 열 개까지 공명시킨 후 마나를 통해 멀리서 오는 것들의 움직임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숫자는 대략 천 이상. 위에 날고 있는 거대한 놈이 내게 정신 접촉을 했던 그놈이고, 병력들의 질은 여태껏 보아 왔던 어떤 군대보다 강력하다.
파악이 끝난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뿔 달린 놈이나 멜랑과는 궤를 달리하는 힘을 느꼈으니까.
그렇게 그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며 또다시 한참을 있었다. 그러자 멀리 산골짜기에서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겁나게 커다랗군.”
맨 먼저 보인 놈들은 멀리서도 그 형태를 정확하게 볼 수 있을 만큼 컸다. 작은 성벽들은 그냥 넘을 수 있을 것같이 큰 느낌이었다.
손에는 커다란 창과 칼을 쥐고 있었는데, 그 위용이 상당했다. 고도의 수련과 수행을 거친 기사 같았다.
놈들의 한 발 한 발이 산천을 울렸다. 한 무리의 거병들의 뒤에 작은 병사들이 따랐는데, 그냥 보기에 작아 보인다뿐이지, 나무들과 비교했을 때 그것들도 꽤 덩치가 컸다.
그리고 대망의 십이사신. 허공에 날고 있는 거대한 사신의 형상이 나타났다.
“호호호호호……!”
산천을 울리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눈매가 좁아졌다.
“목소리마저도 병신 같네.”
매우 기분을 나쁘게 하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와 동시에 그놈과 시선이 교차했다. 그 먼 거리임이도, 서로가 서로의 시선을 느꼈다.
[자. 너도 빗방울을 경험해 보거라.]
그 말과 동시에 놈에게서 보이지 않는 기운이 뻗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주 진한 느낌이었고 묵직했는데, 죽음의 기운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하고, 마나나 마기 같은 것과도 달랐다.
엄청난 양이 지속적으로 뻗어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계속해서 퍼져 나온 그것은 내 머리 위 상공에서 빙빙 돌며 뭉쳐지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지만 초월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내게는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그것들은 뭉쳐서 낙하하기 시작했는데, 녀석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반사적으로 마나 장막을 펼쳤다.
검은 빗방울……!
녀석이 말했던 죽음의 비라는 얘기가 떠올랐다. 그와 함께 투명에 가까운 마나 장막을 검은 빗방울이 때리기 시작했고, 마나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검은 빗방울은 색깔처럼 묵직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마나 장막은 마치 부식되어져 가루가 되어 날아가듯 분해되어 버렸고,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진 빗방울이 내게 짓쳐들었다.
그것들이 내게 닿기 전 순식간에 주변 마나 기류를 만들어 빗방울을 사방으로 털어 냈고, 그 빗방울을 만드는 근원적인 힘을 흩어 버렸다.
그러곤 바로 고리 열세 개를 공명시켰다.
정확하게 어떤 능력인지는 모르지만 마나 장막에 이 정도 심각한 타격을 줄 정도라면 그것은 아주 위험한 물질이라 봐야 했다.
물질이라는 단어가 어울릴진 모르겠지만, 그 검은 빗방울은 아주 위험했다.
금빛을 발하는 몸으로 탈태를 마친 나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마나의 기류를 타고 앞으로 쏘아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날 보던 놈은, 주변의 보이지 않던 힘들을 모아 짙은 검은색의 실드를 전개했다.
검은 연기가 풀풀 나는 듯한 모습에 눈으로 보기에도, 마나를 통해 느끼기에도 범상치 않은 실드인 것은 알았지만, 왠지 한 방에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른손에 금빛 마나들이 모여들어 순식간에 압축되어져 찬란한 빛을 발했고, 그대로 내지른 내 주먹은 놈의 검은 실드를 때렸다.
풀풀 날리던 검은 연기 같은 것이 강력한 풍압에 모두 걷혀 나가며, 실드는 나의 주먹과 부딪혔다.
강력한 폭음과 함께 놈의 실드는 단번에 와해되었고, 그 거대한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곧바로 놈의 낫과 내 주먹이 맞부딪혔다.
[꽤 성가신 힘을 다루는군. 그것이 바르라는 놈의 힘 중 하나라는 얘긴가?]
[정답.]
후드 속, 활활 타는 붉은 눈동자밖에 없는 놈이 순간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더니 검은 가루인지 연기인지 모를 것들이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고, 금빛 마나들이 그것들을 막으며 전방위적인 공방을 펼쳐야 했다.
[격이 조금 높다고 섣불리 덤볐다가는 후회하지.]
녀석의 조소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어. 확실히 네놈은 다른 놈들보다 까다로운 놈이야. 그런데 말이야. 넌 금빛 폭풍을 만나 본 적이 있나?]
순간 놈의 눈에서 물음표가 떠오르는 듯했다. 하여 씨익 웃어 줬다.
[이곳의 있는 마나 전부가 다 내 편인데 감당할 수 있겠어?]
콰콰콰콰……!
금빛을 발하는 마나들이 마치 빗방울처럼 모여 놈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아니 온 세상이 놈을 공격하는 듯 숨을 쉴 순간도 주지 않고 세차게 몰아쳤다.
놈의 검은 것들은 흩어져 희석되어 갔고, 놈은 점점 내게서 거리를 벌려 방어하기 급급했다.
“금빛 폭풍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지.”
마치 거세게 흐르는 강물처럼, 그것은 놈을 향해 흘렀다. 그리고 소용돌이를 치듯 놈의 주변을 맴돌며 공격했고, 그 금빛 마나가 품은 힘은 대충 막고 흘려 보낼 만큼 가볍지 않았다.
“이…….”
쿠구구구…….
대기가 떨려오기 시작했다. 금빛 폭풍이 만드는 떨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놈에게서 시작되는 떨림이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아주 진한, 새카만 사악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정신에 접촉한 놈의 음성은 이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이름이 무엇이냐.]
[신시우다. 넌?]
[나의 이름은 ‘라밧’. 아주 오래전부터 바르 님을 보필해 온 사신 중 하나지. 수많은 강자들이 내게 흡수되었고, 바르 님께 흘러갔다. 신시우. 네놈도 오늘 바르 님의 양분이 될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죽어라.]
순간 웃음이 나와 풉 하고 웃었다.
[이런 씨… 침 나왔네. 너 때문에 웃겨서 침 튀었잖아. 병신 같은 소리도 적당히 해야지. 더 나은 세상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 남의 세계를 침공하고 무너트리면서 더 나은 세계? 그래. 내가 널 더 나은 세계로 보내줄게.]
고리 열세 개를 공명시키면서, 아주 높은 탑의 1층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어떤 느낌이냐면, 지금 나는 이 격이 가진 힘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이고, 그 위로 무궁무진한 힘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나는 이 위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힌트는 얻을 수 있었다.
보랏빛의 신 아덴을 보면서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속성’. 나의 속성은 무엇인가? 에 대한 의문.
그 의문이 내가 한층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 생각했고, 마침 느낌이 왔다. 한 단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그것은 한 단계 높은 경지의 벽을 부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순간 폭풍같이 몰아치던 마나가 잠잠해지고, 정적이 흘렀다. 놈도 움직이지 않았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그런 고요 속에서, 오로지 강화된 마나만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는데,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감각을 극대화시켰다.
평소와 다른 마나의 감각이 느껴졌다. 뭐라고 할까.
시원한 물 같은 느낌이…….
샤아아아-
시원한 물이 퍼져 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곧 세상이 고요에 잠겼다. 그리고 눈을 떴다.
맙소사…….
나는 물속에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검은 아우라로 둘러싸인 사신 놈이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고, 발밑을 보자 허우적거리는 검은 병사들이 보였다.
내 속성은 물인가……?
손을 들어 올려 놈을 가리켰다. 물속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아무런 저항이 없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손가락이 밑으로 향하자, 거대한 사신 녀석은 순식간에 바닥에 처박혔다.
수압.
마법사들이 다루는 물들이 평범한 먹는 물이 될 수도 있고, 강철마저 잘라 내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아무래도 내가 다루는 이 물도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손가락을 까닥하자 허우적대던 검은 병사들이 내 앞으로 떠올랐고, 수압으로 놈들을 그대로 찌그러트렸다.
품고 있는 죽음의 힘이 꽤나 강하게 반발했으나, 생각보다 그 반발을 쉽게 잠재우며 그 거구를 종잇조각처럼 작게 만들어서 그대로 소멸시켜 버렸다.
여러 번 죽일 필요가 없이 그냥 소멸되어 버리는군.
아마 그것은 이 물이 보통의 물이 아니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이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고 느껴지니까.
“후우…….”
그러면 마무리를…….
수압으로 인해 땅에 처박힌 놈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