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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즉위식 날 균열을 만났다-88화 (8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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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디아의 가문, 라벤 가문의 본가는 밤늦도록 환한 불과 함께 분주했다. 생각보다 많은 생존자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어 본가 주변까지 북적댔다.

공포에 질려 싸움을 포기하고 도망쳐서 살아남은 병사들도 돌아와 도시를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는 데 힘을 보탰다.

본래라면 전투 중 이탈하거나 도주하는 병사들은 즉결 처형에 처해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하마디아는 오히려 사과까지 하면서 너그럽게 그들을 받아주었다.

그것은 현 상황이 그저 재앙과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본가에만 실드를 전개한 무능하고 이기적인 자신에 대한 속죄와 같았다.

마를레나와 히네는 힘에 부칠 텐데도 계속해서 마법으로 환자들을 돌봤다. 특히 마를레나의 탁월한 마법은 기적과 같이 환자들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워낙에 숫자가 많았고, 위중한 환자들이 많아 밤늦도록 쉴 틈이 없었다.

다음 날 일찍 출발하는 칼란인들은 모두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고, 나는 마를레나를 도왔다.

“또 헤어져야 하네.”

내 말에 마를레나가 수줍게 웃었다.

“금방 올 거죠?”

“저번보다는……?”

그에 마를레나가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장난도 참.”

나도 히죽 웃었다.

“오래 혼자 내버려 둬서 미안해. 마를레나.”

“이번엔 금방 와요.”

“응. 노력할게.”

금방이라는 불확실한 단어. 그에 그저 노력하겠다는 말 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어디 다치지 말고요.”

“이야… 내가 어디 가서 다치지 말라고 걱정해 주는 건 세상에 마를레나밖에 없다.”

워낙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일이 없는 나는, 누군가 걱정해 주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마를레나의 웃음에 함께 웃어 주며, 마지막 부상자 치료를 끝냈다.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 쉬어요.”

“마를레나도 쉬어. 하마디아네랑 잘 지내고. 누가 뭐라고 하면 담아 두지 말고 나한테 꼭 얘기해.”

“네.”

흐뭇한 미소가 맘에 들었다.

“갔다 올게.”

아무도 모르게 새벽 일찍 나갈 예정이라 미리 작별 인사를 했다.

“잘 다녀오세요.”

그렇게 마를레나와 헤어진 나는 뒷 정원에 하마디아에게로 향했다.

“하마디아.”

“어. 인사 잘했어?”

“그럼~ 이거 있어?”

손으로 담배 피우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럼~”

지구에서처럼 그런 담배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피는 시늉도 달랐다. 하마디아는 주섬주섬 안 주머니에서 짤막한 쇠막대기를 꺼냈다.

한국의 곰방대를 짧게 줄여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곰방대처럼 재를 담는 그런 방식은 아니고, 피우는 방식은 현대의 담배와 비슷하다.

“후우- 그리운 맛이네.”

“어딜 가든 ‘부렌’은 꼭 챙겨야지.”

그는 내 주머니에 마계식 담배인 부렌에 넣는 부렌 잎을 한 통 넣어줬다.

“고맙다.”

“옛날 생각 나네.”

그는 어디선가 주섬주섬 또 다른 부렌을 꺼내 불을 붙였다. 아마도 내게 준 것은 따로 준비해 놓았던 모양이었다.

“후우-”

“동료들은 다 저세상으로 가고. 우리만 남았네.”

하마디아가 씁쓸한 얘기를 꺼냈다.

“어딘가 살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글쎄. 그렇다고 한다면 다행이긴 한데…….”

“공간이동 마법으로 타 대륙이나 다른 세력 쪽으로 갔을 가능성은?”

“남부로 갔다면 아마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수도로 놈들이 전진할 당시, 듣기로는 남부도 전쟁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거든. 그리고 캉구르는… 워낙 우리랑 사이가 좋지 않아서 선택을 한다면, 타 대륙으로 갈 것 같은데……. 그것도 타 대륙으로 가는 건 고위 마법사들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 힘들지 않을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네.”

잠시 둘 다 말이 없어졌다. 수년간 같이 동고동락하며 구 제국을 무너뜨리고, 신제국을 세웠던 그때의 동료들과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기억들이 스쳐 지나갈수록 악신 바르에 대한 원한의 크기는 점점 깊어져 갔다.

“마를레나를 잘 부탁한다.”

“걱정 붙들어 매셔.”

“그래. 아무도 모르게 새벽 일찍 갈 거니까. 막 나베니아랑 같이 뛰쳐나오고 그러면 안 돼.”

하마디아가 피식 웃었다.

“그래. 잘 다녀와라.”

그렇게 하마디아와 헤어져 별관으로 향하는 길.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검은 것에 걸음을 멈췄다.

둥둥 뜬 돌덩이에 검은 천을 뒤집어씌워 놓은 것 같은 그것은 그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는, 마치 무기물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검은 천에 있는 붉은 점 같은 것은 나를 명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정체는?”

조용하게 물었다.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은 채.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다 뭔가 정신에 접촉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놀랍게도 그 검은 천에게서 전해지는 음성이었다.

[반갑다.]

[십이사신인가?]

본능적으로 떠오른 것을 말했다.

[잘 알고 있군. 멜랑이 알려 주던가?]

[그전부터 알았다.]

[오호. 다른 놈들과도 만났다 이 말이군.]

[다 내 손에 죽었지.]

[무서운 얘기군.]

십이사신이라는 놈들은 모두 광기에 물든 또라이들인 줄 알았는데, 이놈은 무섭다는 단어도 쓸 줄 아는 걸 보니 또 다른 놈들과는 좀 다른가?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아주 심약하다. 그럼에도 아주 무시무시한 힘을 다루지.]

가만히 녀석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바르 님이 다루시는 네 가지 힘 중 하나를 다루니까 말이야.]

가만히 이놈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이놈들은 왜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길게 늘어놓을까? 말할 사람이 없어서? 아니면, 걍 또라이라서?

글쎄. 잘 모르겠다.

[검은 구름을 본 적이 있나?]

[어. 당연하지.]

[호오… 그래. 그럼 비를 맞아 봤겠구나.]

[뭘 말하고 싶은 거냐?]

[워워. 화내지 말라고. 그저, 네가 앞으로 직면할 공포에 대해서 얘기해 주려는 것뿐이니까 말이야.]

뭔가 가슴속에서 불쑥 솟아오르려는 것을 가라앉히며 놈의 말을 들었다.

[네가 서 있는 땅에 죽음의 비가 내릴 것이다. 모든 생명은 죽고, 세상은 절망에 빠질 것이야.]

죽음의 비는 뭘까?

[이미 멜랑이라는 새끼가 이곳에 있는 수많은 생명을 도륙했다. 네가 죽일 생명도 별로 없어.]

[호오……! 그런가? 네놈만 죽이면 되는 것인가? 너와 비슷한 강한 놈이 아주 흥분해서는 내게 달려들었었는데.]

나와 비슷한 놈?

뭐가 비슷하다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혼란이 왔으나, 이내 그것이 칠대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싶어 가만히 놈의 말에 집중했다.

[흑흑…….]

미친놈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죽어 버렸어…….]

역시 이놈 또한 또라이였다. 이전에 보지 못한 또라이.

[너 어디 있냐?]

[나? 글쎄… 여기가 어디라고 해야 하나… 사방팔방이 물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헤엄쳐서 오나?]

[크크… 정답.]

[어지간히도 멀리서 말을 걸어 오는군.]

[나는 대화하는 걸 좋아하니까.]

[그래. 오면, 내 마나와 대화하게 해 줄게. 빨리 와라.]

[그래그래. 금방 간다. 죽음의 비가 어떤 건지 경험하게 해 줄게.]

눈 깜빡임과 함께 나를 응시하던 검은 천이 사라졌다. 언제 그곳에 뭔가가 있었냐는 듯 고요했다.

기분 나쁜 또라이군.

그나저나 칠대제급을 죽인 놈이라니. 갑자기 불안하기도 하고,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내 손에 소멸했던 놈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사라져 갔다.

악신 바르의 힘이라…….

그런 생각들을 하며 별관으로 들어간 나는, 마나 수련을 하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이른 새벽. 눈을 뜬 나는 본능적으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뭐라고 할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촉이 왔다고 할까?

기분이 아주 더럽군.

어제 또 다른 십이사신 놈과 마주하고 나서 계속 기분이 언짢았는데, 오늘 그 기분이 최고조가 되었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똑똑똑.

“일어나셨습니까.”

문밖에서 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 크지 않은 방에, 조용한 새벽이었기에 바깥의 작은 목소리가 잘 들렸다.

“어. 들어와.”

문을 열고 알리가 들어왔다.

“좀 주무셨습니까.”

“아니, 수련으로 때웠다. 넌?”

“저도 도통 잠이 오질 않아, 마나 수련으로 때웠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가 있어. 금방 나갈 테니까.”

“예.”

옷을 갈아입고, 하마디아가 준 부렌도 챙겼다. 조용히 바깥으로 나가자 셋이 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잘들 쉬었냐?”

“늙어서 그런가 잠도 없어져?”

“전 조금 눈을 붙였습니다.”

스레인은 잤고, 로아이스는 못 잤다.

“곧 큰 놈이 이 대륙에 상륙할 거다.”

“예?”

잘 잤는지 묻던 내가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를 꺼내자 모두들 벙 찐 얼굴이 되었다.

“어젯밤에 어떤 놈이 정신을 접촉해 왔어. 검은 군대를 이끄는 놈 중 하나로 추정되는데, 꽤 성가신 놈일 것 같다. 다들 바다와 접하는 곳은 오지도 말고, 만약에 내가 신호를 주면 바로 도시로 가서 모든 이들을 데리고 피신해.”

“그 정도로… 위험한 놈입니까?”

“어. 굉장히.”

“알겠습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준비해 둔 작은 종이에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알리에게 맡겼다.

“그 종이에 불이 붙으면 바로 움직이면 돼.”

“아… 예.”

“따로 어디다 넣어 둬.”

“옙.”

“조심하십시오.”

스레인이 진지한 눈빛을 보냈다.

“어. 그래. 너희들도 조심하고. 얼마나 강한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예.”

“검은 회오리를 만일 목격하게 되면, 뭐 하지 말고 위치만 알아놔.”

“예.”

그렇게 나와 셋은 흩어졌고, 나는 바로 북동쪽 해안으로 향했다.

하늘이 썩 좋지 않군.

아직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울 시기. 하늘의 기운이 좋지 않게 느껴졌다.

* * *

“헉… 헉…….”

상급 기사 ‘발렛’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많은 동료들과 병사들, 시민들이 희생된 끝에, 결국 자신 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검은 것들에, 겨우 마지막 검은 병사를 소멸시킨 그는 완전 탈진 상태였다.

‘작은 규모라 다행이야.’

그는 검은 군대가 작은 규모라는 것에 안도하며, 부서진 건물 벽에 기대었다.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한 그는 다시 온몸을 긴장시켜야 했다.

구구구구…….

예사롭지 않은 떨림. 작은 떨림이었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은 규모임을 말했다.

멀리, 바닷물이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의 몸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여 해안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를 절망 속에 빠트렸다.

“맙소사…….”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은, 거대한 사신의 형상. 그리고 그것에게서 느껴지는 소름 끼치듯 서늘한 기운이 그의 온몸을 찌르고 들어왔다.

‘죽었다.’

겨우 살았다고 생각했던 그의 머릿속은 절망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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