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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건물 위 굴뚝. 바람과 같이 나타난 로아이스가 2층 건물보다 키가 큰 검은 괴수를 바라봤다.
‘이젠 괴수라 부르지도 못하겠군.’
괴수. 확실히 칼란과 버마 대륙을 침공한 것들은 ‘괴수’라 부를 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아킬라 대륙에 와서 그의 눈으로 본 검은 괴수들은 무기에 대한 숙련도가 꽤 높았고, 번질번질한 검은 표피는 갑옷의 그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네놈이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모양이구나.”
로아이스의 등장을 눈치챈 검은 ‘병사’가 고개를 홱 돌려 붉은 눈으로 그와 눈을 맞췄다.
“기세만 보면 어디 육황이라도 되는 줄 알겠구나.”
검은 병사는 전신에서 투기를 발산하고 있었고, 꺼림칙한 검은 기운은 로아이스의 피부를 소름 끼치게 긁어 댔다.
로아이스는 마기를 끌어올리며, 뒷짐을 풀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은 병사의 거대한 창날과 검을 맞대고 있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놈이군.’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막아 내는 놈의 반사 신경에, 로아이스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고는 검에 고농도 마기를 두른 채 놈을 몰아쳐 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십 합이 겨뤄졌고, 검은 병사는 계속해서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짙은 검은 기운을 두른 놈의 창날은 로아이스의 공격에 점점 갉아 먹히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살기 짙은 화살에 로아이스는 공격을 멈추고 물러났고, 그제야 그는 포위되어 있음을 인지했다.
“허허… 그래. 그렇게 싸우겠다? 그럼 네놈들 모가지부터 따야겠구나.”
그에게서 뿜어진 마기에 주변에 거센 기류가 생겨났고, 지붕의 기와들이 모조리 뜯겨 날아갔다. 그와 함께 사라진 그는 주변을 돌며 검은 활잡이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게 놀라운 속도로 그를 쫓아온 우두머리 창잡이 때문에 그는 활잡이 사냥을 할 수가 없었고, 결국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에 계속 피해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활잡이는 제가 맡겠습니다.]
회피 기동 중 스레인이 로아이스의 정신에 접촉해 왔고, 로아이스는 다시 우두머리 놈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스레인이 참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두머리는 로아이스의 손에 목이 날아갔고, 소멸 절차를 밟았다. 그사이 알리와 마를레나가 영지민들을 쫓는 검은 병력들을 정리했고, 로아이스와 스레인은 나머지 그들이 남긴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후우… 갈수록 쉽지 않군요.”
“우두머리가 누구냐에 따라서 짐승 같은 놈들도 있고, 이렇게 훈련받은 병사 같은 놈들도 있는 것 같네.”
“앞으로 얼마나 더 강한 놈들이 나올지…….”
“그라가레가 움직일 것이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말게. 마신계에서 내려온 분이 가셨으니 뭔가 움직임이 있겠지.”
“다른 칠대제분들이 얼마나 강할지 궁금하군요.”
“강해 봤자 저이만 못하겠지.”
로아이스는 신시우를 두고 얘기했다.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영지민들을 다시 불러 모아야겠네. 서둘러 끝내고 돌아감세.”
“예.”
* * *
“아니……! 태자 전하께서 어떻게…….”
진정된 하마디아가 내 뒤에 있는 황태자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마디아…….”
황태자가 울먹거렸다. 아무래도 하마디아와 친했던 모양이었다. 브라마흐의 아들이니, 하마디아와 친할 만했다.
하마디아는 황태자의 부름에 대답을 못하고 나를 쳐다봤다.
“수도는 함락됐다.”
“뭐……?”
하마디아의 얼굴이 충격에 휩싸였다.
“수도가… 결국…….”
그의 목소리에서 허탈함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어쩔 수 없어. 대륙 전체가 놈들의 손아귀에 넘어갈 뻔했으니까.”
“그럼 피난은…….”
그의 눈이 다시 황태자와 히네에게 향했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얼굴로 변했다.
“다… 내 탓이야……!”
“그만해. 네 탓 아냐. 누가 가도 다 죽었어. 여기 있어서 살아남은 게 그나마…….”
“네 선물을 가지고 황궁으로 갔어야 해……!”
“그런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고, 더 어마어마한 얘기들이 지금 대기 중이니까. 일단 들어가자. 히네. 태자 데리고 따라와.”
또 자기 비관적으로 변하는 하마디아의 모가지를 팔에 끼고는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곧바로 뛰어온 그의 아내와 마주할 수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녀는 내게 황제에게 갖추는 예를 갖춰 보였다.
“예를 차릴 필요 없어요. 예전처럼. 편안하게 대해 주세요. 옛날 우리 셋이 만났던 시절처럼.”
“그럴까요?”
그녀는 금세 씨익 미소를 날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뒤에 있는 히네와 황태자를 봤다.
“어머. 태자 전하 아니세요? 전하께서 어떻게…….”
“얘기가 깁니다. 일단 가면서 얘기합시다.”
“아, 네. 일단, 식사부터 준비할게요. 시우 씨. 일행 더 있어요?”
“음… 네 명 더 있습니다.”
“네. 일단 들어가서 쉬고 계세요.”
그녀는 날개를 펴고 날아서 본관으로 이동했고, 우리는 얘기를 하며 걸어서 이동했다.
“마계 전체가… 공격받고 있다고?”
“어. 지금 나랑 같이 온 녀석들은 모두 칼란에서 데려온 녀석들이야. 마계로 넘어오니까 칼란 대륙이라서.”
하마디아는 눈을 부릅뜨더니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얘기했다.
“아……! 그래……! 너 그동안 어디 갔다 온 거야 대체? 너 없어져서 난리도 아니었어. 비밀리에 그라가레에서 조사단 내려와서 엄청 오래 있다가 갔어.”
역시 알고 있었구나.
“그라가레에서 비밀로 하라니 아무도 발설은 안 했지만, 다들 엄청 걱정했다고.”
“흠. 뭐부터 설명을 해 줘야 할까. 일단은 나도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라는 점. 날 고향으로 데려다 놓은 현상은, 어떻게 손쓸 수도 없는 자연현상이었어.”
“고향? 아, 그럼 너 고향으로 간 거야? 그 X 같은 곳?”
옛날에 내가 했던 애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하마디아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 맞아.”
“아… 그렇구나.”
“칠대제 즉위식을 하던 도중에, 황승단을 올라갈 때였어. 한 중간쯤 올랐을까? 갑자기 눈앞의 공간에 금이 가더니, 금이 점점 커지며 결국 그 틈이 벌어지며 날 집어삼켰지.”
그렇게 얘기를 시작했다. 얘기는 본관에 들어갈 때까지 이어졌는데, 그곳에 나온 본가의 식솔들이 모두 나를 맞았다.
“대제폐하.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이들이 내게 예를 갖췄다.
“그래. 됐다. 어서 들어가서 할 일들 해. 그리고… 영지민들 생존자들이 귀환할 거다. 그들을 보살펴야 할 거야.”
“예.”
가신으로 보이는 자가 대답했다.
“우린 어서 들어가면서 얘기하자.”
“그래.”
도착해서 느꼈던 것들과 내 고향이 변화했던 것들 모두 얘기해 주었다. 나와 같이 다른 세계로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온 이들의 얘기까지 들은 녀석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메인은 따로 있었다.
화려한 응접실 소파에 앉으며 녀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거기서 내가 누굴 만났는지 알면 너도 놀랄걸?”
“뭔데?”
말을 하려던 찰나. 시녀가 차를 내왔다.
“셰일 지방에서 나는 특산물 ‘헤락’꽃 차입니다. 피로를 날려주고,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지요.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인사에 미소가 지어졌다.
“차 잘 마시마.”
시녀가 나갔고. 하마디아가 재촉했다.
“뭘 만났는데?”
“베라크리토를 만났어.”
“뭐……? 베라…….”
하마디아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듯 시선을 위로 올리며, 기억을 더듬는 시늉을 했다.
“칼란 대륙의 육황. 나와 결투 중에 사라진 놈.”
“아……! 그래, 그래. 그 친구. 아니, 그 친구를 거기서 만났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를 봉하고 있던 봉인이 풀렸던 거지. 놈도 나와 같은 차원 균열을 타고 갔던 것 같아.”
“아…….”
하마디아는 입을 닫을 줄을 몰랐다.
“놈과의 결투는 거기서 마무리 지었고, 내 손에 죽었다.”
하마디아는 인상을 살짝 찌푸려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5천 년을 산 이들의 말에 하마디아는 또다시 놀라야 했다.
“너. 하얀 날개의 악마라고 기억하지?”
하마디아가 내게 해 줬던 얘기였다.
“당연하지. 우리 마계가 각성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인데, 어떻게 잊겠어?”
네 조상님도 못 봤을 그 사건을 어떻게 잊냐니…….
이 녀석, 역사에는 진심이었다.
“그놈들은 내 고향에 숨어 있었다.”
“뭐어……?”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서 듣게 된 히네와 태자를 둘러봤다.
“너희들도 들어봤지?”
“네. 마계 차원을 봉인시켰던 놈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들어봤습니다.”
“그래. 그놈들은 지금 우리 마계를 침공 중인 놈들의 손에 멸망했다.”
충격이 장내를 강타했다. 모두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얼굴.
태자 리액션 좋네.
“천자족이라고 하는 놈들인데, 그놈들의 신들도 검은 것들의 손에 죽거나 봉인됐어. 그중 봉인된 신을 부활시키기 위해 우리 세계에 들어와 내 고향 차원을 봉인하고, 그들 스스로 내 고향에 잠적한 것이지.”
그들이 부활시키려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 부활시키려 했는지, 그리고 검은 군대는 어디서 온 것인지, 놈들이 마계에서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 설명해 줬다.
“그리고 악신 바르라는 놈이 있다.”
“악신……?”
“검은 군대들의 배후에 있는 신격체라고 할 수 있지. 십이사신이라는 강한 놈들을 만들어서 자신의 권능을 나눠 주고, 그들을 이용해 차원을 침공해 힘과 세를 불리고, 세계를 잠식해 나가.”
모두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만 껌뻑거렸다.
“놈들은 죽음을 먹고 산다. 그 죽음의 기운을 흡수하여 힘을 키우고, 숫자를 늘려. 그래서 놈들과 싸울 때엔 아군의 사상자를 최소화해야만이 이길 수 있지. 아군이 계속 죽으면 죽을수록 놈들의 숫자는 불어나고, 힘은 세지니까. 무슨 원리인지 대충 알겠지?”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재생을 한다. 팔이 잘리면 팔이 자라나고, 머리를 날리면 머리가 자라나. 없애 버리면, 다시 모여서 살아나. 타격을 많이 받을수록 힘이 약해지고, 크기가 작아지는데, 계속 죽여서 소멸시켜야만 놈들과의 싸움은 끝이 난다.”
“끔찍한 것들이군.”
하마디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끔찍한 것은, 이 대륙이 놈들의 힘에 잠식당하고 있다는 거야.”
“뭐?”
“검은 회오리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으로 대륙을 잠식해서 악신 바르가 내려올 길을 만드는 것 같다. 하나는 내가 오는 길에 없앴고, 나머지는 어디 있는지 아직 몰라.”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좋을 텐데…….”
하마디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울 방법이 없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당연히 녀석이 도울 것은 없었다.
“네가 할 일은, 영지를 다시 일으키고, 제국을 다시 부활시키는 거야. 우리는 돌아다니면서, 아킬라 대륙에 있는 검은 것들을 모조리 소멸시킬 거고. 혹시나 우리가 놓친 것들이 이 도시를 향할 수 있으니까. 대비는 항상 해 두고.”
“그래. 정말, 네가 있어서 이 대륙이 살았다.”
“내 대륙인데. 그래야지.”
서로 씨익 웃었다.
“조금은 천천히 쉬다가 가. 그래야 더 힘을 낼 수 있을 테니까.”
“식사하고 조금 쉬다가 바로 출발할 거야.”
“그래.”
마침 나베니아가 식사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렸다.
“식사 준비 다 됐어요~ 식당으로 나오셔요~ 태자님은 제가 모시고 갈게요. 이름이 어떻게 되죠?”
“히네입니다. 궁중 수석 마법사였습니다.”
“네. 천천히 같이 오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마계에 들어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