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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대제행 완주자… 사실입니까?”
알리가 조금은 황당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어. 내가 들은 것과 인상착의가 일치해. 아킬라 대륙에선 전설 같이 내려오는 존재다.”
“…….”
비현실적일 것이다. 모두 다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아덴이라는 남자는 초차원, 마신계에서 내려왔다는 얘기가 되기에 더욱 놀라는 것이다.
“살면서 한 번도 뵙기 힘든 칠대제를 뵌 것도 놀라울 따름인데, 마신계에서 나온 분까지 뵐 줄은 몰랐습니다.”
스레인은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혼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도 어이가 없는데, 그들은 오죽할까.
“일단 이 둘을 깨워 보자.”
의료 마법 계열의 신체 탐지 마법으로 그들의 현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 * *
천상의 낙원. 천공섬 그라가레. 과거 강자 숭상의 율법에 따라 만들어진, 마계에서 가장 강한 자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인공섬.
마계에서 가장 강한 칠대제는, 1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호의호식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칠대제에 오른 이들 중 그저 호의호식만 누리며 놀고먹는 이는 극히 드물다.
마계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이 내린 재능 외에도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뼈를 깎는 수련 끝에 경지를 넘고, 또 그것을 반복한다.
마치 그들은 경지를 넘기 위해 태어난 이들처럼 경지를 높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고, 대부분 칠대제까지 올라간 이들은 경지를 넘어 격을 높이고 싶어 한다. 초차원 마신계로 갈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100년 동안의 그라가레의 생활 중 대부분을 수련과 단련으로 보낸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집중을 깨는 행위를 아주 싫어한다.
지금처럼.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마족이 피를 공중에 흩뿌리며, 석관을 부수고 튀어 나갔다. 그리고 부서진 석관의 잔해는 떨어지다 말고 떠올라 다시금 그 부서진 부분을 메우며 언제 부서졌냐는 듯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보므란델!”
한 여자가 달려가 높은 곳에서 추락한 남자를 안아 올렸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슬피 우는 그녀의 목소리 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덧씌워졌다. 그에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붉은 머리칼을 한 키 작은 소년이 서 있었다.
피부는 구릿빛 피부에, 마족이 아닌 소수 종족. 특유의 검붉은 눈동자가 빨아들일 듯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라가레의 자유로운 영혼. 바라멜리아.
“간테는 저기 있나?”
바라멜리아는 그녀가 예를 갖출 틈도 없이 물었고, 그녀는 앉은 자세 그대로 대답했다.
“이… 예!”
놀라서 더듬는 그녀의 대답을 들은 바라멜리아는 가볍게 땅을 박차더니, 한달음에 높은 곳에 지어진 커다란 석관의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그대로 석관을 부쉈다.
그걸 지켜보던 여자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고, 입은 닫힐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자신이 모시는 칠대제 ‘간테’는, 수련을 방해한 자는 무조건 죽여 버리는 미친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바라멜리아에게 강력한 일격이 쇄도했다. 모든 것을 분쇄해 버릴 것 같은 강력한 회오리바람을 머금은 주먹. 바라멜리아는 피하지 않고, 그 주먹을 화염에 휩싸인 두 손으로 막았다.
“정신 차려라, 간테. 마계가 망할 판에 무슨 놈의 수련이냐!”
바라멜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쳤다.
“바라멜리아… 네가 드디어 미친 것이…….”
순식간에 뻗은 바라멜리아의 불주먹에, 간테는 말을 끊고 그의 주먹을 막아야 했다. 둘의 힘이 부딪혀 굉음을 냈고, 그 틈에 바라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지금 마계가 침공을 받고 있다.”
“들었다.”
“그런데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마계가 침공받는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지? 대륙마다 육황이 있고, 수많은 강자들이 즐비한 곳이 마계다. 누가 침공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들의 명복을 빌어 줘야 할 판이지.”
간테는 자신의 수련을 제대로 방해한 바라멜리아 때문에 분노로 눈이 뒤집어져 있어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사고를 했다면 분명 마계가 봉인이 되었다는 사실부터 얘기를 해야 할 것이고, 뭔가 이상한 점들을 집어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저 분노할 뿐이었다.
“그리고 감히 내 수련을 방해한 네놈 또한 명복을 빌어 줘야겠지.”
간테가 날개를 펴며 힘을 끌어올렸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들 제정신이 아니군.”
바라멜리아는 그냥 뒤돌아서 가 버렸고, 간테는 차마 무방비 상태로 뒤를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공격을 날릴 수 없었다. 그리고 간만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는 곰곰이 그가 했던 말들을 되새겼다.
‘마계가 망해 간다라…….’
그는 바로 걸음을 옮겨 공포에 질려 있는 시종에게 다가갔다.
“저놈의 말이 사실이냐?”
“예……! 맞습니다. 현재 여러 대륙의 육황들이 죽고, 대륙 전역이 폐허가 된 곳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곳곳에서 너무 많이 연락이 와서 그라가레 통신소도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쯧. 무능한 것들.”
간테의 눈빛에 노기가 서리자 주변의 기류가 달라졌고, 그에 놀란 시종이 숨을 헛하고 삼켰다.
“다른 칠대제들은 뭘 하고 있지?”
“다… 다른 분들도 간테 님과 마찬가지로 수련에 몰두 중이십니다.”
“흥.”
간테는 검은 날개를 한번 펼쳤다 접으며, 언짢은 기분을 표했다. 그러고는 걸어가며 명령했다.
“준비해라. 내려가 봐야겠다.”
‘어떤 놈이 마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지 그 낯짝을 좀 봐야겠다.’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 그때. 멀리 어떤 존재가 등장했고, 그 존재감이 일대의 분위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존재감에 의해 걸음을 멈춘 간테는 부릅뜬 눈으로 멀리 그 존재를 바라봤다. 그는 특이한 은빛 마기를 끌어올리며 시력을 높였다. 꽤나 멀리 떨어졌기에, 아무리 시력이 좋다 한들 그 존재를 눈에 담을 수 없었다.
높은 구조물 위에 나타난 두 존재들을 본 그는 눈매를 살짝 좁혔다. 그리고 그 존재와 눈이 마주치고는 눈을 다시 부릅떴다.
그는 그 존재와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최소 칠대제에 준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가 어느 경지에 오른 존재인지,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치, 짙은 안개 속에 있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존재…….’
그는 생각을 마저 하지 못했다. 보랏빛 머리칼을 날리는 그 존재가 그 먼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왔기 때문이었다.
마치 한 걸음을 내딛는 듯한 가벼운 느낌. 그 존재는 그가 모르는 언어로 말했다.
“넌 몇 번 자리에 앉은 놈이냐?”
보랏빛 머리의 사내와 함께 등장한 난장이가 그의 말을 통역해서 전달했다. 간테는 무례한 상대의 언사에 기분이 상했지만,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기에 점잖게 입을 열었다.
“남에게 무얼 묻기 전에 본인이 누구인지부터 밝히는 게 예의가 아니겠소?”
“예의라…….”
낮게 중얼거린 보랏빛 머리 사내가 피식 웃었다.
“너 같은 같잖은 게 예의를 논하다니 재밌구나.”
순간 남자의 눈에서 보랏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섬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계가 존재해야 그 안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많은 생명체들이 존재해야 상호 간에 예의라는 것이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네놈은 세계가 멸망하고 있는 이 시국에 이 호화로운 섬에 처박혀 있으면서, 뭐? 예의?”
간테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상대의 분노가 그의 피부를 찢어발길 듯 일어났고, 순간 뿜어진 기파에 그는 뒤로 나뒹굴며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그리고 황급히 고개를 쳐 든 그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예를 갖추고 찬양하라. 내가 바로 보랏빛을 지배하는 신 아덴이니라.”
마계에는 색과 관련된 신들이 존재한다. 그중 단연 으뜸을 꼽으라면 붉은빛과 보랏빛이고, 아덴이 바로 그 보랏빛의 신이었다. 그리고 그의 속성은 화염.
그의 전신에서 보랏빛 불길이 일면서, 그의 본모습이 강림하기 시작했다. 보랏빛으로 불타는, 3층 건물만 한 키를 가진 신이 존재감으로 일대를 짓누르며 강림했다. 그리고 간테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감히 아덴 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불충을 저지른 점. 깊이 사죄합니다. 부디 넓은 아량을…….”
그러나 간테의 급격한 태세 전환에도 불구하고, 아덴의 노호성이 일대를 울렸다.
“닥쳐라. 칠대제라는 자리에 앉아서 호의호식하며, 하고 싶은 것들은 다 하면서. 정작 세계가 위험할 때는 나 몰라라 하다니. 이런 처죽일 것들.”
간테는 간이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으며, 살기 위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가 폐관 수련을 방해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여, 바깥의 소식을 접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당장 내려가 마계를 구하는데 일조하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
난생처음 접하는 신격체. 그 존재감만으로 그의 머릿속은 이미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
나름대로 자신의 세대의 최고의 무력을 지닌 존재였던 간테. 그런 그도 본체로 강림한 신격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수련으로 단련된 정신과 마음부터 흔들려 버렸으니.
“태워 버리기 전에 당장 사라져라.”
“감사합니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치, 이때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전속력으로 마법 이동소를 향해 달렸다.
달리는 와중 그의 머릿속에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뭔가 내려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뭐부터 시작을 해야겠다, 와 같은 계획이 세워지지 않았다. 그저 분노한 신격에서 멀어지기 위해 달릴 뿐이었다.
“쯧.”
다시 본체를 감춘 아덴이 혀를 찼다.
“저렇게 꼴사나운 게 칠대제란 말인가. 내가 칠대제로 있을 땐 차라리 목숨을 내놓았지, 저런 병신 같은 꼴은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야.”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되었나 봅니다.”
“이 칠대제라는 것. 기강을 다시 잡아야겠다. 아주 개판이야. 그나마 부드러운 내가 와서 살려 줬지, 다른 녀석이 왔으면, 저놈은 그 자리에서 소멸했을 거야.”
“맞습니다.”
“딴 놈들을 보러 가자. 어떤 낯짝으로 무슨 짓거리들을 하고 있는지.”
아덴은 거대한 섬 곳곳에서 자신을 향한 시선들을 느끼며, 그중 하나를 향해 이동했다.
* * *
두근두근. 바라멜리아는 간테가 있던 곳에서 엄청난 존재가 강림한 것을 그 멀리서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마 그라가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느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정도로 그 존재가 뿜어내는 존재감은 무시무시했다. 뭔가에 화가 났는지 그 분노도 전해졌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 같은 느낌에 바라멜리아는 잠시 떨어야 했다.
‘내가 떨다니… 대체 누가 저곳에 있는 거지……?’
그의 머릿속에서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칠대제인 자신의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할 만한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가진 자가 누가 있을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신계에서 누군가 내려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던 마신계. 그는 환상과도 같은 그곳을 언급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그는 처음 보는 존재와 마주할 수 있었다.
“네놈은 몇 번째 자리에 앉아 있는 놈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