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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신시우 님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모인 캉구르 연합군은 수뇌부를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최고 지휘관이라고 해 봤자 대대장이었고, 지휘관급이라고 남은 이들은 상급 법사 하나와 짬이 많은 중급 기사 여럿이 전부였다.
그러나 계급이 낮은 이들도 신시우라는 이름은 뇌리에 박혀 있었다. 아킬라 대륙에서 역사상 두 번째로 대제행을 완주한 존재였으니까.
그들 모두 내가 정말 신시우가 맞는지 묻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달려와 주셨군요……!”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의 인사들부터.
“칠대제를 코앞에서 볼 수 있다니…….”
“정말 그 유명한 분이라고?”
“저 풍채 좀 봐.”
“훤칠하시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선 제각기 나를 평가하기 바빴다.
“대륙 동부로 가야겠는데, 근처에 마법 이동소가 있나?”
“아, 예. 있습니다.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상급 마법사였다.
“좋아. 나머지는 각자 피난민들 다시 끌어모아서 도시 재건하고, 다른 도시와 마을을 돕고, 캉구르 연합은 결속력이 좋잖아? 서로 도우면서 남은 검은 군대를 소탕할 수 있도록 해. 만일, 감당하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면…….”
금빛 물결을 소환해, 주먹만 한 작은 개별 통신구를 꺼냈다.
“이것으로 연락해라. 사람을 보내줄 테니까.”
“예. 끝까지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대장이 고개를 숙이자, 나머지들도 함께 비슷한 말을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상급 마법사가 길잡이로 붙었고, 나는 모두가 서 있는 땅을 끌어올려 하나의 탈것으로 만들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대제행을 마쳤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어디 다른 곳에 다녀오신 거예요?”
마를레나는 뭔가 아는 듯한 느낌으로 물어왔다.
마나를 통해 느낀 게 있나?
“오… 산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산속에 있어도 대륙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있어요. 친구들이 먼 거리의 소식들도 다 알려 주거든요.”
그 말에 웃으며 얘기했다.
“사연이 좀 길어.”
“네. 들을 준비 되어 있어요.”
화사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본 나는, 뒤쪽 녀석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것을 눈치채며 얘기를 시작했다.
“칠대제 즉위식 날이었어. 난생처음 올라가 보는 천공섬 그라가레에서 즉위식을 거행했지. 정확히 얘기하자면 천공섬 내부는 아니고 그 옆에 딸린 작은 섬인데, 그곳에서 진행됐어. 나를 욕하는 놈들과 욕하는 놈들을 비판하는 놈들 사이에서 나는 황승단을 올랐어. 그러다가 문제의 그것이 나타났지.”
차원 균열. 날 마계로 날려 보냈던 그 기이한 현상에 대한 것을 자세히 있는 그대로 얘기해 줬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이계종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 누구도 동요하는 이는 없었다.
“고향에서 너와 닮은 아이를 만났어. 마나의 축복을 받은 존재.”
자연스럽게 수현의 얘기까지 나왔고, 먹먹한 가슴을 안고 얘기를 계속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과 그곳에서 만났던 칼란의 육황 얘기. 그리고 하얀 날개를 단 악마까지.
내 얘기 곳곳에 담긴 충격적인 얘기들에 마를레나보다는 뒤쪽에 앉은 칼란 녀석들과 상급 마법사가 충격을 적잖이 먹었다.
그 와중 상급 마법사의 길 안내를 따라 충실히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마를레나는 수현이라는 아이가 죽음을 맞게 된 것에 가장 충격을 받았는데, 그것은 내게서 전해진 감정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그녀는 마나를 통해 상대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아주 숙련된 마나의 축복을 받은 자니까.
“자책은 그만해도 돼요. 너무 무거운 감정을 느낄 필요 없어요. 당신을 다시 이곳에서 본 순간. 그 아이의 감정까지 전해졌으니까.”
“뭐?”
놀라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는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사람들마다 다른 이의 감정들이 묻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이가 진한 감정을 품게 되고, 그것이 지속되면 그 사람에게 그 감정이 남아 있어요. 저만이 알 수 있는 거라, 시우 씨는 모를 거예요.”
“…….”
“수현이라는 아이. 시우 씨에 대한 신뢰와 고마움이 굉장히 많았어요.”
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녀석에게서 그런 감정을 느껴 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나 또한 마나를 통해 읽어 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생각했는데, 역시 마나의 축복을 받은 이들을 읽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인 듯했다.
“그러니 그 무거운 마음을 좀 내려놓았으면 해요.”
그녀의 위로에 내 돌덩이 같은 마음이 조금씩 물렁해졌다.
“고마워.”
그녀는 환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저기 멀리 도시 보이십니까?”
“응.”
“바로 저깁니다.”
멀리 마법 이동소가 있는 도시가 보이고 있었다.
* * *
“언제까지 도망가야 합니까?”
황실 수석마법사 중 하나인 ‘히네’의 등에 업힌 채 울상이 된 어린 황자가 물었다.
“항구까지 가면 살 수 있습니다. 조금 기다리십쇼.”
10일 동안의 도주로 지칠 대로 지친 히네였지만, 그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처음에는 황도의 시민들을 피난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병력이 죽어 나갔다.
이후, 피난 행렬은 추격대에게 따라잡혔고, 앞에서 몰려오는 검은 군대에 포위된 채 무참히 도륙당했다.
이후 살아남은 소수가 북동쪽에 있는 항구로 황족들을 데리고 도망쳤는데, 제국 전체를 침공당한지라 중간중간 하나씩 희생되었고, 결국 히네와 황태자만이 살아남았다.
“헉… 헉…….”
나무 밑에 기댄 히네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침은 말라 입술이 갈라졌고, 피와 땀은 눌어붙어 엉망이었다. 홀로 도망쳐도 죽을 판에, 어린아이까지 하나 달고 도망가는 것이기에 죽을 맛이었다.
식량도 물도 떨어진 지 이틀째였다.
“물 먹고 싶어, 히네…….”
“참으십쇼. 참으셔야 삽니다. 하루만 더 가면…….”
구구구구…….
미세한 진동이 들려왔고, 쩍 붙은 입술을 떼던 히네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마력 따위는 더 이상 끌어올릴 힘도 없었다. 있는 체력 없는 체력 다 바닥났고, 이제는 그저 정신력에 기대어, 관성으로 뛸 뿐이었다.
“헉… 헉…….”
그나마 머리를 써서 이곳저곳 숨어 다니며, 아티팩트까지 동원해 검은 군대의 눈을 피했으나, 이젠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더 이상 숨겨 둔 비장의 수도 없었고, 그저 몸뚱어리 하나뿐이었다.
황자에게 말할 힘도 없어서 그저 뛰었다.
“크읏……!”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진 그녀는, 황자를 놓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르던 황자가 큰 나무에 머리를 박고 기절해 버렸다.
“화, 황자님……!”
무릎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네발로 기어 황자를 들고 흔들었다. 업혀라도 있으면 달리기라도 하지. 이렇게 기절해 버리면, 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녀는 마법사이지, 기사로 훈련 받지 않았기에 체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10일 동안이나 도망 다닌 것은 정말 신이 도왔다고밖에 할 수 없을 정도. 그런 상황에 이런 난관이 펼쳐지니 절망밖에 할 수가 없었다.
“하아… 황자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히네의 동공이 떨렸다. 그와 함께 땅의 떨림도 심해졌고, 히네는 나무 뒤에 황자를 기대어 놓고는, 허리 뒤쪽에 차고 있던 연검을 빼 들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따가운 목의 상태를 세세하게 느꼈다. 피곤에 절어 퀭한, 영혼이 반쯤 나가 버린 그녀의 눈은, 점차 생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드디어 멀리 보이는 놈들의 그림자를 주시했다.
겨우 생기를 되찾은 듯했던 눈은 다시 흐리멍텅해지고 있었다. 도저히 그녀의 정신력이 더 이상은 버텨 주지 못했다. 죽음이 코앞에 왔음에도 그녀는 쏟아지는 졸음과 싸워야 했다.
차라리 죽으면 편해지지 않을까? 와 같은 생각들이 마구 샘솟았고, 그녀는 결국 털썩 주저앉았다.
“하…….”
마른 한숨과 함께 그녀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힘겹게 들었다.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검은 것들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순간 보랏빛 불길 같은 것이 지나가면서 검은 것들을 쓸어내는 것을 보며 그녀는 풀썩 쓰러졌다.
“이 벌레 같은 것들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냐?”
이마 양쪽에 백색의 뿔을 가진 보랏빛 머리의 남자가,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투덜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 남자의 옆에선 키 작은 남자가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경멸하는 눈으로 부활하는 검은 것들을 쳐다봤다.
“이것들이 대체 왜 아킬라를 활보하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둘의 시선이 쓰러진 히네에게로 향했다.
“챙겨.”
“예.”
“저 뒤에 꼬마도.”
“예.”
부활한 놈들은 기이한 느낌마저 풍기는 보랏빛 불길에 다시 휩싸이며 모두 녹아내렸고, 몇 번 반복 끝에 모두 소멸했다.
“가자.”
그 둘은 황자와 히네를 데리고는 산을 내려갔다.
* * *
잔뜩 겁을 먹은 도시. 겁먹은 군대가 경계를 하고 있는 성벽을 너머, 도시 안으로 바로 들어갔다.
“누군데 성안으로 무단으로 들어오는 겁니까!”
잔뜩 긴장한 지휘관 하나가 버럭 화를 냈다.
“칠대제시다. 예를 갖추어라.”
“칠대제는 무슨… 예? 칠대제……!”
화가 나 한바탕 하려던 지휘관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나와 뒤에 있는 셋을 훑었다.
“이… 분이……?”
“어서 예를 갖추지 않고 뭘 하느냐!”
상급 마법사가 노호성을 터트리자, 지휘관은 바로 허리를 접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그만…….”
“이분과 뒤에 있는 칼란 대륙분들이 캉구르 연합을 구하셨다. 이곳으로 쳐들어오던 놈들은 모조리 격퇴되었고, 나누어서 운용되는 놈들의 병력만 소탕하면 돼.”
고개를 쳐든 지휘관은 물론이고, 함께 고개를 숙였던 이들 모두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게… 정말…….”
“제국으로 가야겠다.”
“예? 아… 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왜 이리 급하게 도시로 들어온 것인지 대충 분위기 파악을 한 지휘관이, 멀찍이 떨어져서 관망하던 자신의 상급자에게 갔다. 그러곤 뭐라고 하더니, 상급자가 내게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귀한 분을 몰라뵈어 송구합니다. 마침 근처에 마법 이동소가 있으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꽤 점잖아 보이지만, 여우같이 생긴 남자였다.
“시장인가?”
“아닙니다. 시장은 시청에 있고, 저는 도시의 방어군을 통솔하는 총지휘관입니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다른 도시들과 협력하여 군대를 잘 운용해야 할 것이야. 놈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본대를 부쉈을 뿐. 나머지 것들이 대륙을 활보하고 있으니, 제대로 소탕해야 한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놈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존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신시우다.”
녀석이 화들짝 놀라 나를 홱 쳐다봤다. 그러고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전 육황이셨던 분도 몰라 뵙고… 제가 우물 안 개구리인지라…….”
“됐다. 그럴 수도 있어. 바로 넘어갈 수 있게 준비나 빠르게 해.”
“예.”
녀석이 옆에 있던 부관을 닦달했고, 부관은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