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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황(陸皇)께서 행차하십니다!”
마력이 담긴 목소리가 도시의 제1성벽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와 함께 도시의 귀족들이 대로변으로, 육황의 친위대가 2열 종대로 들어섰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인 얇은 갑옷과 투구. 허리에 찬 곡도와 단도. 전신에서 뿜어지는 칼날 같은 기세. 투구 사이로 보이는 눈빛은 날카롭게 벼려진 창날 같았다.
칼란 대륙의 상징인 ‘칼란’ 꽃이 새겨진 섬세한 갑옷들이 그들이 누구의 친위대인지 말해 줬다.
2열 종대의 중간쯤. 두껍진 않지만, 단단해 보이는 검은 갑주의 여자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성문을 통과했다.
그는 베라크리토의 뒤를 이어 칼란 대륙의 육황에 오른 ‘바할 네브 제로니’. 백색의 피부를 가진 최상위 마족인 그녀는 실력으로는 베라크리토에게 못 미친다는 평이지만, 그 독기만큼은 역대 최고라 평한다.
싸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마족의 긍지인 뿔 2개를 잘라 냈으며, 두 날개마저 떼어 낸 무지막지한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제국 북부 도시 ‘알란’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칼란 대륙을 침공한 정체불명의 검은 괴수들을 토벌하기 위해서다.
황제 위의 황제. 대륙에서 가장 강한 자에 대한 증명이자 대륙에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인 육황이 직접 나섰다는 것은, 이번 침공 사건에 대륙의 존망이 달려 있다는 얘기였다.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영주가 내 성문 앞에 나와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았고, 육황 제로니는 그런 영주를 특유의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놈들의 위치는?”
“4시간 전 국경을 통과하여 남하 중입니다. 2시간 전 ‘마레나이’ 영지에 상륙하였고, 아마 곧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곧 첨병에게서 연락이 올 겁니다.”
여자는 시선을 거두더니 돌연 걸음을 돌려 성벽 위로 향했다. 그에 당황한 영주가 그녀의 뒤를 쫒았다.
“어찌 안에 들지 않으시고, 성벽으로 가시는지요?”
“내가 여기 왜 왔다고 생각하나?”
“예……? 그야… 검은 악마들을 격퇴하려고 오셨지요?”
“그런데 성안으로 들어가자고?”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인지한 영주가 우물쭈물 둘러대려 했다.
“아, 하하. 그건…….”
“닥쳐라. 무엇이 중요한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놈이 영주라니.”
노기가 깃든 제로니의 말에 영주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왜냐하면, 육황이라는 것은 국가를 다스리는 직위는 아니지만, 대륙에서 가장 강하며, 대륙을 대표하는 자로서, 생각보다 입김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가 제국에 오늘의 일을 이야기하며 영주의 직책과 작위를 박탈하라고 얘기한다면, 큰 이변이 없는 한 그리 진행될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육황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앗아가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아… 아이고……! 제가 모자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육황이시여. 부디 노여움을 거둬 주십시오.”
제로니는 그를 무시하고는 한걸음에 뛰어올라 성벽 위에 올라섰다. 꽤나 높은 성벽. 그 위에 올라선 그녀는 마기를 끌어 올려 시력을 높였다.
그러자 구불구불 뻗은 강줄기의 끝에서 검은 것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좌로는 강이, 우로는 커다란 산을 끼고 있는 평원. 그곳을 빼곡히 매우며 몰려오고 있었다.
“전원 전투 준비.”
“전원 전투 준비하라!”
나직한 제로니의 명령에, 어느새 그녀의 옆에 선 친위대 하나가 목소리에 마기를 담아 외쳤다. 내성 외성 할 것 없이 퍼져 나간 그의 목소리에, 잠시 멈칫하던 도시의 병사들은 지휘관의 재촉에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숫자군.’
머릿수를 초월한 전장을 만드는 것이 바로 그녀가 이른 경지였지만, 그런 그녀마저 질릴 법한 물량이 밀려오고 있었다. 거기다 속도도 꽤나 빨랐는데, 보통의 군대가 속행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빠름이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 맞았다.
“사령관은 어딨지?”
제로니는 출정하면서 사실 자신이 친위대를 이끌고 출정한 이상 작전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건 그녀가 거만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녀 혼자의 무력도 어마어마하지만, 그녀의 휘하에 있는 30명의 친위대는, 그 자체로 일국의 전 군사력과 맞먹는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막강했다.
개개인의 경지도 높았지만, 그들이 두르고 있는 무구의 힘 또한 굉장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미 끝난 싸움이라고. 전략 전술이 필요 없는 싸움이 될 거라고.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앞에 몰려오는 대군은, 그녀의 그런 생각을 흔들었다. 몰려오는 기세, 그 숫자와 느껴지는 흉흉하고 기분 나쁜 기운. 그것들이 한데 뭉쳐 근심으로 변했다.
“부르셨습니까. 육황 폐하.”
“작전이 어떻게 되는가?”
“작전은…….”
그때 어디선가 음울하면서도 소름 돋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멀리 산 너머로 거대하고 시커먼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거대함에 도시 방위군 사령관을 비롯한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생전 그렇게 거대한 것은 모두가 처음이었으니까.
그것은 고래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공중을 유영하듯 움직였다.
“작전은?”
“아, 예. 그, 작전은… 일단 마법사들이 외성벽 밖에 결계를 쳐두었습니다. 특수한 마나스톤을 지닌 자만이 드나들 수 있는 결계인데, 특수한 마나스톤을 지닌 기동대가 외성 밖 시가지에서 1차적인 전투를 벌입니다. 그 후 후퇴하며 결계 안으로 들어오고, 원거리 공격으로 놈들을 격퇴하는 것이 1차 전술입니다.”
제로니가 가만히 있자 사령관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 후 결계가 깨어지면 성벽에서 뒤엉켜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법사들의 마법이 걸려 있어 쉽게 무너지지 않겠지만, 만일 성벽이 부서지거나 무너진다면 그때부터는 그저 부대 단위의 전술로 난전이 벌어질 겁니다.”
“1차 전술 앞에, 나와 친위대가 설 것이다. 도시로 들어오기 전, 놈들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준 후 시가지 전투를 진행한다. 그리고… 저놈은 내가 맡도록 하지.”
제로니의 시선이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고래를 향해 있었다. 하늘을 나는 검은 고래. 말만 들어도 기분이 나쁠 만큼 좋지 않은 그림이었다.
고래의 몸에서는 계속해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흘러나와 하늘을 검게 수놓았다. 흡사 재앙이 몰려오는 풍경에, 전투를 하기도 전에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쳤다. 그런 좋지 않은 상황을 감지한 제로니가 전신에서 기운을 폭사시켰다.
그녀에게서부터 폭발적으로 뻗어 나온 마기가 퍼져 나가며 성벽을 중심으로 병사들의 떨어진 사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강한 마기가 모두의 가슴에 불씨를 피워 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투기들이 치솟아, 병장기를 움켜쥐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어서 제로니의 목소리가 도시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우린! 긍지 높고, 강인한 칼란의 마족이다! 그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그 어떤 적이 와도 물러서지도, 무너지지도 말아라! 반드시 내가 승리로 이끌리라!”
제로니의 외침에 사기는 찌를 듯 솟아올랐고, 모두들 장비와 전술을 재점검하며, 곧 닥칠 전투를 준비했다. 그리고 드디어 육안으로도 놈들의 맹렬한 돌진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론. 작전 들었지?”
“예.”
“친위대들을 이끌고 나가 놈들에게 최대한 피해를 입히고, 후퇴해서 시가지 전투를 진행한다. 그리고 천천히 후퇴하여 결계 안으로 들어와 대열을 정비하고, 성벽 전투를 이어 가야 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친위대장 카론은, 친위대들과 정신을 연결하여 육황의 명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친위대 모두 일제히 뛰어올라 검은 날개를 펴고, 외성 밖으로 활강을 시작했다.
30명의 친위대들은, 도시 일정 거리 밖에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곡도를 치켜들고 마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사기는 찌를 듯 솟아올랐지만, 점점 다가오는 거대한 고래의 위압감에서는 벗어나질 못했다. 그걸 안 제로니는, 성벽을 박차고 솟아올라 허공을 딛고 달리기 시작했다.
“부름에 응하라. ‘쟌달’.”
그녀의 부름에, 뒤로 뻗은 그녀의 손에 빛이 모여들며 검의 형상을 갖추더니, 이내 빛이 벗겨지며 푸른빛이 어른거리는 몽환적인 검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검을 움켜쥔 그녀의 손을 통해 짙은 마기가 검으로 뻗어 나갔고, 이내 푸른빛이 어른거리는 검에서, 붉은 마기가 불길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허공을 딛고 빠르게 고래를 향해 나아가던 제로니는, 순간 가속하며 총알과 같은 속도로 고래를 향해 쏘아졌다. 이윽고, 강력한 힘의 충돌이, 일대를 뒤흔들어놓았다.
* * *
워어어엉-
속 깊은 곳까지 울리는 거대한 울림이 산천을 뒤흔들었고, 그 위로 칠흑같이 검은 고래가 날았다.
그것은 허공을 유영하며 검은 연기 같은 것을 뿜어내, 죽음의 기운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그런 거대한 고래의 위에는 한 남자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 칼란 대륙을 침공한 ‘십이 사신’. ‘콩’이다.
삐죽삐죽 제멋대로인 흑발에 구릿빛 피부를 가진, 16세 정도의 왜소한 체구를 가진 존재. 수많은 공적을 세우고, 수많은 죽음을 먹어 악신 바르로부터 육신의 소유를 허락받고, 가호까지 받는 자. 콩. 십이 사신 중 막내 격인 콩이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했다.
“이야~ 느껴진다. 느껴져.”
지루해 마지않던 콩은, 핏발이 선 눈을 부릅뜨며, 무언가를 느꼈다.
“강력한 힘의 냄새다……!”
바르가 탄생시킨 죽음의 군대. ‘바르의 수족’들은, 힘의 냄새를 맡고 쫓는 것이 가능하다. 강한 힘을 가진 자를 죽이고 그 죽음을 흡수해 바르와 공유하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 그렇기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강한 힘에 이끌리게 설계되어 있다.
콩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 같은 힘의 냄새를 느끼고는, 검은 고래를 비롯한, 자신이 이끄는 부대들에 명령했다.
[속도를 높여라!]
강변의 평원을 따라, 수도 없는 바르의 수족들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 왕국의 죽음을 통째로 흡수한 콩의 부대는 그야말로 무량대수. 셀 수 없이 많은 대군이었다.
커다랗게 솟은 산을 옆을 돌자, 강을 따라 펼쳐진 평원의 끝에 커다란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력한 힘들의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하하하하하하! 오늘은 너무나 기분이 좋다. 축제다-!”
콩은 마계로 온 후 최고의 기분을 느끼며 빠르게 도시로 접근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시에 도착하기 직전. 무언가가 높이 솟아올랐다. 그러곤 빠르게 그를 향해 접근해 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다가오던 존재는 갑자기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가속했고, 콩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빼 들어 상대의 검을 맞받아쳤다.
부들부들. 그는 팔이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