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귀환 20일 차 아침.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아무리 마나 수련으로 피로를 날린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인간의 수면 욕구.
바쁠 땐 마나 수련으로 피로를 날리며 강행군을 하지만, 웬만하면 수면을 취하려고 하는 편이다.
“자, 이제 수현이는 마력 단련, 마나 수련에 집중하도록 하고, 나는 다녀올 데가 있다.”
오늘 아침 일어나 결심했다. 놈들을 이대로 둬선 안 되겠다고.
“엥? 오늘은 관문 너머 안 가요?”
“일이 생겼어. 그리고 어제 갔는데 오늘 또 가겠니? 너 마력 단련은 언제 하려고.”
“어제는 그 거북이 때문에 뭐 하지도 못했잖아요.”
“다음에 갑시다.”
수현이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일단락 했다.
“김 비서. 오늘 남 비서랑 교대지?”
이곳 거창에 둘이 필요한 관계로 3일마다 교대였던 것을 5일마다로 바꿨다. 10일 일하고 5일 쉬고 교대하는 식으로 돌아간다.
“네.”
“안타깝지만 앞으로 한 일주일 정도는 셋 다 근무하자. 며칠 좀 바쁠 것 같거든.”
“아… 넵.”
김 비서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그에 나는 웃으면서 그녀의 팔을 툭툭 쳤다.
“수현이 잘 데리고 있어. 경호는 붙여 줄 테니까.”
“네. 걱정하지 마세요.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그래. 수현이 너도 애먹이지 말고 말 잘 듣고 있고.”
“어디 가는지는 알려 주고 가요.”
살짝 퉁명스러운 것이, 말 안 해 주면 지독하게 삐져 버리겠다. 협박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프리메이슨 애들 손 좀 봐줘야 할 것 같아서.”
수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김 비서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어. 남 비서. 어디야. 아, 그래. 일이 있어서 너는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야겠다. 어. 그래.”
그리고 단군 밑의 기에테들을 한데 모았다.
“야… 정말 빨리 오는구나 너희들.”
제라드, 소이메르, 사막. 셋은 내가 갑작스럽게 불렀음에도, 부른지 얼마 되지 않아 순식간에 모였다.
“마침 모여 있었거든요. 급한 일이라고 하시길래 바로 왔습니다.”
언제나 같은 얼굴의 제라드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바로 달려와 줘서 고맙다. 내가 없는 동안 수현이를 좀 봐줬으면 해.”
그런데 갑자기 셋 다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왜? 뭐 문제 있어?”
“아뇨. 그게 아니라…….”
제라드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사막이 대답했다.
“조금 전 말은 조금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응? 뭐가.”
“고맙다는 말이 어색해서 그랬어요.”
사막 이 녀석은 뭔가… 너무 직설적이다.
“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아무튼 잘 부탁한다. 며칠 걸릴 거야.”
“그런데 어디 가십니까?”
이번에는 항상 웃는 얼굴의 소이메르였다.
“프리메이슨 조지러.”
“아…….”
셋 다 분위기가 우중충해졌다.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지요?”
“고전하는 모양이야. 너무 걱정들은 하지 말고 있어. 좋은 소식 가지고 올 테니까.”
“네.”
“그나저나 남 비서가… 늦네.”
* * *
신시우 직속 비서의 자격으로, 특별히 방위청에서 공간이동 마법이 가능한 남 비서는, 손쉽게 거창 차원관문 근처로 이동했다. 관문에 영향이 갈까 우려되어 관문과 좀 떨어진 곳에 공간이동 가능 구역이 있어서 좀 걸어야 했다.
그런데 그의 앞에 돌연 이상한 남자가 하나 나타났다. 씻지 않아 꼬질꼬질한,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 세탁은 했을까 싶은 낡은 옷가지. 딱 봐도 거렁뱅이처럼 보였으나, 그 눈빛만은 가벼이 볼 수 없을 만큼 깊고 강렬했다.
“누구십니까?”
“아, 여기 거창 차원관문이 어디지?”
‘뭐지……? 외국인인가?’
생김새는 한국인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의 입에서는 처음 듣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당황하고 있는데, 문득 되새겨보던 그의 말속에서 거창이라는 단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여기가 거창입니다.”
그는 온몸을 이용하여 이곳이 거창임을 그에게 알려 줬다. 잘 못 하는 영어까지 써 가며. 허나, 그의 목적과는 달랐는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뜻밖의 이름을 꺼냈다.
“신시우를 찾고 있다.”
모르는 언어 속에서 단 하나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 신시우. 그에 남 비서는 얼어붙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심상치 않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에 경계심이 일고 있는 와중에, 신시우의 이름까지 나오자 그의 머릿속에서 불길한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따라오세요.”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안내하는 것뿐. 신시우를 떠올리면 모든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는 언제나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의심하고, 고민했다.
“호오… 저 녀석이 신시우인가.”
그리고 멀리 육안으로 겨우 신시우가 보일 만한 거리에 왔을 때.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한마디 말만 남기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쾅-!
순간적으로 전개한 실드와 오러 맺힌 검이 부딪혀 폭음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내 미간에 주름이 갔다.
뭐지 이 미친 새끼는?
멀리 로타리 건너 길목. 남 비서가 보인다 싶더니, 그 옆에 있던 놈이 순간 사라졌다. 그러곤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나, 흉흉한 푸른빛의 오러가 맺힌 검을 휘둘렀다.
딱히 살심은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무방비한 상태에서 막을 수 있는 속도와 위력은 아니었다.
나니까 막았지.
갈 길이 먼 와중에 나타난 방해꾼 때문에 짜증이 와락 솟구쳤다. 그렇게 살심 가득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났다.
꼬질꼬질한, 언제 씻었는지도 모를 만큼 지저분한 머리와 피부. 세탁은 한 번도 하지 않은 듯한 옷가지. 완전 거지꼴에, 한 손에는 푸른 오러가 넘실거리는 기다란 검을 들고 히죽거리고 있으니, 짜증도 싹 가실 만큼 충격적인 풍경이 그려졌다.
“확실히 단단하군.”
알 수 없는 언어에 펜던트가 통역을 시작했다.
“뭐라는 거야.”
“너 단단하다고.”
그러나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외모 중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너 프리메이슨이냐?”
내 말에 놈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떨거지 모임과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떨거지라…….”
기에테들도 입을 모아서 최강의 조직이라는 프리메이슨보고 떨거지라고 할 정도면, 꽤나 높은 경지에 이른, 못해도 육황에 버금가는 정도는 되어야 저런 말은 할 수 있지 싶은데, 일단 현재까지 보기엔 별 근거가 없어 보였다.
“너와 겨뤄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
겨뤄 보고 싶다라…….
“내가 지금 좀 바쁜데, 다음에 붙는 건 어때?”
“아프리카에서부터 꽤나 오래 이동해서 도착했는데, 이렇게 보내주기는 좀 그렇다.”
녀석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에 슬슬 짜증이 치솟았다.
“후우… 좋아. 너희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어.”
김 비서와 수현이 멀찍이 떨어지자마자 두 손으로 빠르게 수인을 맺어갔다. 녀석은 가만히 보고 있었고, 나는 꽤나 복잡하고 번거로운 술식들이 조합되어 만들어지는, 아공간 마법을 완성해 냈다.
공간 계열 마법 중에서도 아공간류로 분류되는 마법인 이 마법은, 공간을 밀어내고, 그 사이에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마법으로. 보통 마계에서는 결투로 인해 주위에 막심한 피해가 예상될 때나 혹은 마법사들이 비밀스러운 작업을 할 때 주로 사용된다.
지금 내가 이 마법을 시전했다는 것은, 내 앞에 있는 저 거렁뱅이를 제대로 부숴 주겠다는 내 의지를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녀석과 나를 중심으로, 배경들이 마치 종이가 밀려나듯 밀려 나가며, 검은 갈색으로 된, 단단하고도 넓은 흙바닥이 밀려난 자리를 채워 갔다.
“호오…….”
“꽤 크지? 전력으로 와라. 귀찮으니까.”
“하하하! 그래. 좋다.”
“입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웃는 건 하지 말자.”
“아, 그래? 미안하군.”
녀석은 마치 이 세계를 소개하는 듯이 자연스러운 팔놀림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많은 오러 구체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자, 일단 맛보기로…….”
구구구구…….
공간 전체가 진동했다. 왜냐하면 내가 최대의 마력을 끌어올렸으니까. 내가 녀석을 진심으로 경계하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녀석이 구현한 오러 구체는, 신검합일의 경지에 도달하고도 꽤나 수련을 해야 만이 구현해 낼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런 기술을 그렇게 가벼이 손을 휘저어 십수 개를 만들어 냈다.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그것이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른 것이 분명했다. 마계에서도 그 경지에 오른 이들은 단둘뿐. 그중 하나를 대제행(大帝行)에서 만났는데, 내가 싸웠던 육황 중에서 가장 위험한 싸움을 꼽으라면 놈과의 싸움을 꼽을 것이다.
그만큼 그 경지에 오른 이들은, 정말 초월적인 무력을 보여 준다.
“흠…….”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마나들이 계속해서 모여들며 아공간 전체의 마나 농도를 계속해서 높여 갔다. 여유 있던 녀석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고, 어느 순간 놈이 먼저 움직였다.
놈은 십수 개의 오러 구체를 내게 쏘아 보냄과 동시에 시야에서 사라졌는데, 오러 구체들은 기이한 경로를 그리며 각기 다른 각도와 도착 시간을 가지고 내게 접근했고, 녀석은 내 뒤를 점했다.
오러 구체의 섬세한 조작술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그야말로 신기라고 할 만한 솜씨였다. 그에 감탄하며 마나를 조작했다.
오러 구체들이 날아오는 경로에 마나 벽을 만들어 구체들을 폭파시켰다. 그와 동시에 블링크를 이용하여 역으로 놈의 뒤를 점했다.
본래 블링크란 육안으로 보이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단거리 공간이동 마법인데, 숙련도가 극한에 다다르면 펼친 마나 감각망의 어디로든지 이동이 가능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놈의 뒤를 점한 나는 곧바로 주먹을 뻗었다. 뻗음과 동시에 주먹에 모이기 시작한 금빛 기류가 주먹에 모여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실로 어마어마한 에너지. 내 의지와 마나 자체의 공격 의지가 합쳐져 녀석의 전신을 옭아 맬 것이다. 마치, 얼마 전 내 손에 허무한 결말을 맞은 베라크리토의 강력한 공격 의지가 내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역시 녀석은 내 예상을 빗나간 행동을 보여 줬다. 나와 마나의 강렬한 의지를 뚫고 몸을 좌측으로 빼냈다. 그에 내 주먹에서 뻗어진 마나 폭발 에너지는 빈자리를 훑었고, 바로 녀석의 검이 찔러 들어왔다.
그렇게 수없는 공방이 펼쳐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공간 내의 마나 농도는 높아져, 일반인이라면 쥐포로 만들어 버릴 만큼 높아졌다. 그러나 움직임이 느려질 법도 하건만 녀석은 아직도 팔팔했다.
이것이 녀석의 무서움이었다. 물아일체의 경지가 되면 체력도, 오러도 한계가 없어진다. 생명 에너지인 오러를 자연에서 끌어다가 쓸 수 있게 되니까. 하여 저렇게 오러로 마나들을 사방팔방 밀어내며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면 어떨까.
금빛 마나를 이용하여, 찔러 들어오는 놈의 칼날을 잠시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머리 위에 금빛 기둥이 순식간에 만들어졌고, 그대로 찍어 눌렀다.
마법을 이용해 마나를 변환시키는 것이 아닌 마나 그 자체를 조작하여 만든 고밀도 마나 기둥. 그것은 마치 손오공을 꼼짝 못하게 가둔 석가여래의 손바닥같이 녀석을 누르고 있었다.
이건 기술 싸움이 아닌 오로지 힘 싸움. 나는 힘 싸움에서는 밀려 본 적이 없다. 육황 그 누구에게도. 그렇기에 이놈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이걸 밀어 낼 순 없을 것이었다.
자… 그럼 슬슬 마무리를 지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