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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정돈된 짧은 수염. 뒤로 짧게 묶은 갈색머리와 날카로운 눈매의 중년인 ‘카이라그’. 그는 순간 압도적인 존재감을 느끼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의 걸음을 멈추게 만든 것은 바로 거대한 존재감. 마치 거대한 티탄이 강림한 듯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세상을 짓누르는 느낌에 그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흰머리 귀환자인가.’
프리메이슨의 창설 이후 프리메이슨이 누군가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은 처음 있는 일. 아무리 흰머리 귀환자가 중국과 일본을 굴복시켰다곤 하지만, 프리메이슨의 전력은 전 세계를 상대로 싸움을 벌여도 이길 자신 있을 만한 조직이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카이라그는, 프리메이슨이 누군가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한국에 온 것은 온전히 수장 ‘브릴란스’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생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저 어떤 이의 존재감을 느꼈을 뿐인데, 전의가 꺾이고, 절로 두려움이 생겨났다.
그의 머릿속에서 이 정도의 압도적인 강함을 느껴 본 것은 오직 단 한 명. 프리메이슨의 수장 브릴란스뿐이었다. 하여 귀환자 신시우의 강함이 최소 브릴란스에 필적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조금 전까지 있던 떫은 기분이 저절로 떨쳐져 나갔고, 긴장감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원관문 관리자를 만날 수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관리자들의 물음에, 카이라그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신시우 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것이 그가 명령을 받은 이유 중 하나였다.
“성함과 소속을 말씀해 주십쇼.”
“프리메이슨 소속 카이라그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여러 사람들로 북적이는 주차장. 그리고 멀리서도 보이는 흰 머리의 귀환자. 그 존재의 시선을 받은 카이라그는, 순식간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멀리서도 느껴질 법한 싸늘한 시선. 처음 느껴 보는 그것에 그의 다리가 굳어 버렸다.
“따라오십쇼.”
그는 겨우 얼얼한 허벅지를 움직여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신시우의 앞에 당도한 그는, 난생처음 느끼는 무시무시한 존재감에 짓눌려 온몸에 바짝 힘을 넣어야 했다.
“넌 촛불이 몇 개냐.”
“예……?”
“프리메이슨에서 보낸 놈 아냐?”
금빛이 일렁이는 신시우의 눈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카이라그 꿰뚫고 있었다.
“아… 맞습니다.”
“너한테서는 구린내가 더 많이 나는데, 추종자가 아니고, 정식 멤버인가.”
마치 다 보았다는 듯한 얼굴.
“맞습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관조자 카이라그라고 합니다.”
“그래. 무슨 용무인지 들어나 보자.”
꿀꺽.
식은땀이 흐르는 카이라그의 목에서 목탁소리가 났다.
“프리메이슨의 수장을 대신해서 거래를 제안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 * *
어쩐지 아침부터 기류가 썩 안 좋더라니, 프리메이슨이 직접 제 발로 찾아왔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이제는 좀 거슬린다고 생각을 했겠지. 그런데 또 거래라니. 내가 무슨 상인이 된 느낌이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놈에게서 나는 구린내가 아주 거슬린다.
분명 뭔가 아주 구린 짓들을 하고 다니는 놈이라는 직감이 왔다. 눈빛에서는 그런 악기가 나오지 않지만, 분명 그의 손에 거쳐 간 것들이 심상치 않을 것이다.
“읊어 봐.”
12개의 고리를 공명시킨 그대로 위압감을 유지한 채 말했다.
“시우 님께서 이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차원 관문을 연구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너무나 오래 걸리는 작업이고, 성공 여부도 장담하기 힘듭니다. 하여, 저희가 수천 년간 인류가 가진 차원 관문에 대한 지식을 공유해 드리는 조건으로, 저희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저희의 거래조건입니다.”
내가 조금 전에 뭘 봤는지, 내 연구가 어디까지 진척됐는지 얘기해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너희가 가진 지식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도움이 안 될 거다. 이미 조금 있으면 차원관문에 대한 밑그림이 완성될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난 이미 과거 인류의 지식을 전해 받았다.”
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당황한 그의 시선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발상은 칭찬하지만, 거래가 성사되긴 힘들겠군. 그리고…….”
놈의 목에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간섭이라는 건방진 용어는 두 번 다시 쓰지 마라. 그리고 경고하건데, 내 휘하에 있는 사람들과 한국에 위해가 되는 행위를 했다간, 지옥을 보여 줄 테니까. 조심해.”
차분한 경고였지만, 놈은 숨 막히는 얼굴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시우 님의 뜻 잘 전하겠습니다.”
“그래. 알았으면 가 봐.”
그렇게 내게 뻣뻣한 묵례를 한 놈이 가고 나자 12개 고리 활성화를 풀었고, 이어 멀든이 다가왔다.
“고마워.”
진심이 담긴 눈빛을 보내니 왠지 부담스러워졌다.
“거래했잖아. 인사는 됐어.”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나는 정말로 너에게 감사하고 있어. 네 뜻대로 나는 이제 네 부하야. 시키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시켜도 돼.”
그에 나는 눈빛을 묘하게 바꿨다.
“그래?”
내 장난기 있는 눈빛을 받은 멀든은 표정을 고치며 못 박았다.
“네 성적 취향을 맞추라거나 이런 것 말고.”
피식 웃었다.
“너 프리메이슨 알지?”
멀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수가 없지.”
“프리메이슨과 원한은?”
“당연히 있지. 걔네는 세상의 악이야.”
도대체가 프리메이슨을 증오하지 않는 기에테가 없구만.
“여기 기에테들이 많이 모이고 있는 것은 알지?”
“어.”
“걔네들이 다 프리메이슨 잡아 족치려고 하는 것도?”
“아니. 그런 것까진 몰라.”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기에테들이 프리메이슨과 싸우면, 너도 가세할 건가?”
“그래야지. 갚아야 할 빚도 있으니까.”
무슨 빚인지 묻진 않았다.
“그렇군. 한국에 들어와 있는 기에테들과 만나 보면 빚을 갚을 길은 쉽게 열릴 거다. 일단 내 휘하에 들어오게 된 걸 환영하고. 편하게 한국에서 지내면 돼. 아직까지 네게 부탁할 만한 건 없어.”
지금껏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한 이들은 있었지만, 내 휘하에 부하로서 들어온 이는 멀든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조금 마음이 특별해졌다.
“그런데 저 친구는 딸이야?”
멀든이 아까부터 빤히 눈으로 레이저를 쏘고 있는 수현을 가리켰다.
“아니. 제자야.”
“오… 네 제자라니 대체 어떤 재능이 있을지 궁금하네.”
“마나의 선택을 받았지.”
“오…….”
뭔지 잘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했다.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남 비서. 주 비서는 언제 오지?”
“아… 올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한번 연락해 보겠습니다.”
“그래. 시간 맞으면 같이 점식 먹으러 가자고 그래. 맛집 있으니까.”
“아, 순두부집 말씀이십니까?”
“어. 이번에 가면 차돌로 먹어 봐야겠어.”
아침에 먹은 순두부찌개집은. 정말 특별하게 내 입맛을 사로잡는 것이 있어 계속 끌렸다. 없는 식탐도 부르는 맛이랄까?
“넵.”
“참. 레이나인가 그 친구도 부르고.”
“네.”
그렇게 돌아서려는 남 비서를 다시 불러 세웠다.
“참. 남 비서.”
“예?”
“영감은?”
“아… 참. 말씀드린다는 게……. 그… 조만간 찾아뵙겠답니다.”
“그래. 알았다.”
남 비서는 멀찍이 떨어졌고, 고든이 내게 다가왔다.
“고맙습니다. 뭔가 거래가 있었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고마움은 표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도 멀든과 같이 당신의 일을 성심껏 돕고 싶습니다.”
금발의 남자는 굉장히 선이 굵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너무 고지식하게 생겨서 정반대의 성격 같아 보이는 멀든이 저런 남자랑 무슨 재미로 사귀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래. 그래 주면 고맙고. 그나저나 5천 년 만에 눈을 뜬 소감이 어때? 넌 그냥 하루 만에 눈을 뜬 기분일거 아냐.”
“맞습니다. 오천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요.”
고든은 주변을 슥 훑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세계에 온 느낌입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천히 둘러보도록 해. 네가 살던 세상이랑은 완전히 다른 느낌일 거다. 여긴 과학이 발달된 세상이거든. 조금 있다가 점심 식사 하러 갈 거니까. 준비하고.”
“하하. 예. 그래야죠. 시우 님은 정말 친절하시네요.”
친절이라니.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말에 순간 표정이 이상해졌다.
“친절은 개뿔. 이따가 부를 테니 가 봐. 애인이 눈에서 꿀 떨어지려고 그런다.”
고든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멀든에게로 갔다.
친절이라.
고향에선 들어본 적 없는 칭찬. 그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이딴 칭찬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리다니.
[칭찬에 약하시네요. 사부.]
마지막 마무리는 역시 수현이었다.
[날 약하게 만드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단다. 제자야.]
[굉장히 흔들리던데요?]
너무 정곡을 찌르니까 얄밉다.
[곧 점심 먹으러 갈 거니까. 대기 하고 있어.]
[부끄럼쟁이.]
저 쓸데없는 말들은 대충 무시하고는 바위에 올라탄 채 관문 앞으로 이동했다.
이제 곧 밑그림이 완성된다. 이제부터 시작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방대하고도 심오한 마법술식들을 어느 정도 해석하고 파악했다는 것에 내 자신이 대견했다.
수많은 마법들을 다뤄 봤지만, 이렇게 광대한 마법술식을 다뤄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이 정도까지 해독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힘내자. 마계로 넘어가는 그날까지.
* * *
국가 간 공간이동 마법 허용 지역 인천공항. 그곳에 와서야 카이라그는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그리고 신시우의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다시금 상기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인간의 영역에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는 신시우의 경고에 섬뜩함을 다시금 느끼며, 그의 뒤를 따른 두 주시자들에게 말했다.
“마이콜은 아직 연락이 없나?”
“예.”
‘문제가 생긴 건가?’
마이콜은, 백광마정의 회수 임무를 위해 그보다 먼저 도착해서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프리메이슨의 추종 길드인 바알과 협업을 하는 데다, 마법을 이용하여 백광마정을 기지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임무이기에 어려운 것이 없는 임무였다.
하여 마이콜은 뒤늦게 오는 자신과 합류하여 귀환하자고 말을 해 놓은 상태였다.
“카이라그 님.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
“마이콜 님의 폰이 계속 통화 불능입니다.”
‘설마… 다른 기에테 놈들이 냄새를 맡은 건가……?’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 한 구석에서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여 결단을 내렸다.
“일단 귀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