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 즉위식 날 균열을 만났다-43화 (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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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긴장되죠.”

“아니.”

“에이~”

“긴장 하나도 안 되거든?”

“에~ 이~”

찌릿.

동글동글한 고양이상의 젊은 여자는, 무리의 대장 ‘멀든’의 눈빛을 받고는 귀여운 얼굴을 한 채 옆으로 빠졌다.

“기대되네요. 여기 기에테들 다 모이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근육질의 남자가 손의 관절을 꺾고, 목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몸을 풀었다.

“숨어 있던 놈들 대부분 모일걸. 귀환자들도 포함해서. 참, 걔는 언제 온다고 했지?”

“아, 골렘이요?”

“어.”

“더 논다는 게 대체 언제까지 놀라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며칠은 놀지 않을까 싶네요.”

“하여간…….”

혀를 찬 멀든은, 담배를 하나 피워 물고는 거리를 거닐었다. 그리고 금방 신시우의 비서와 조우할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한국말을 잘 모르는 멀든을 위해 그녀의 무리에서 통역 마법을 시전했다.

“안내해.”

“따라오시죠.”

그렇게 남 비서를 따라 거창 차원관문으로 간 멀든과 그녀의 무리는, 문제의 그 흰머리 귀환자와 만날 수 있었다.

“그래. 넌 또 뭔 목적으로 왔지?”

허공에 낮게 띄운 바위 위에 양반다리로 앉은 신시우가, 멀든을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했다.

“거래를 하러 왔다.”

“거래?”

썩 귀찮은 얼굴을 한 신시우의 눈썹이 치솟았다.

“나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차원관문을 열 수 있는 핵심 기술이 담긴 자료들을 넘겨주지.”

자신이 가진 패가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시일 줄 알고 자신만만하던 멀든은, 뜻밖에 시큰둥한 얼굴의 신시우를 보고는, 속으로 당황했다.

‘왜… 아무런 동요가 없지?’

고향에 넘어왔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귀환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멀든은 분명 가고 싶어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내와 자식들이 있다거나, 뭐 그런 것 말이다.

그러나 홀로 차원관문을 해석하고 재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라는 것을 알았던 멀든은, 아무리 신시우가 높은 경지에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 상상을 초월하는 난관에 봉착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여 그의 힘이 필요했던 멀든은, 마침 그가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고, 이렇게 오게 된 것인데, 처음부터 뭔가 단추가 잘못 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흠…….”

망설임보다는 흥미가 없는 듯한 느낌을 주는 신시우의 태도에, 그녀는 마음을 추스르고 당차게 말했다.

“필요 없어?”

그런 그녀의 물음에 신시우는 충격적인 답변을 내놨다.

“글쎄. 필요 없다고 하긴 그렇고. 그렇다고 거래를 통해 그걸 보기에는… 이미 밑그림은 거의 다 완성되어 가고 있으니까.”

고도의 마법 문명을 기반으로 타차원의 종족들까지 지배하던 인류. 그 찬란한 시대에 멀든의 아버지 ‘헤일레이’는 현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린 명망 높은 마법학자였다.

심장에 여섯 고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마법사보다는 마법학자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헤일레이는 차원마법학 분야에서도 이름을 날린 학자였는데, 그 덕에 멀든은 차원마법에 대해 여러 가지로 아는 것이 있었다.

그중 헤일레이의 평생 과업 중 하나였던 차원관문 해석 과제는, 그가 죽으면서까지도 연구를 이어서 하길 바랐던 중요한 핵심 과업이었고, 그가 처음으로 불가능을 입에 담았던 난해한 연구과제였다.

그런 그것을 홀로 해석한 것을 넘어서 밑그림을 완성해 간다니. 그녀로선 믿기가 힘들었다.

“으흠……!”

당황했으나 그녀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가져온 것은 관문해석에 필요한 핵심 자료였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꼭 이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니까.

“그래도 한번 보는 게 어때?”

“뭐, 꺼내 보든지.”

시크하게 말을 내뱉는 신시우에, 멀든은 부하가 내민 서류를 받아 그에게 건넸다.

“어리석군. 내가 이걸 받고 그냥 꿀꺽하면 어쩌려고 그냥 내미는 거지?”

“영상을 통해 본 네 행보에서, 또 너의 말에서 네가 어떤 인물인지 느꼈으니까. 넌 절대 그런 치졸한 수법을 쓸 인물이 아니야.”

“만일 네 예상이 틀리면?”

“틀리면 틀리는 거지.”

당당한 얼굴로 내뱉는 멀든을 유심히 바라보던 신시우는, 피식 웃더니 자료를 허공에 흩뿌렸다. 그러자 백 장이 넘는 두꺼운 자료들이 낱낱이 흩어져서는 허공을 빼곡히 수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리가 된 자료들을 그의 시선이 하나하나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그의 입이 열렸다.

“안타깝지만 지금 이 자료는 내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미 그 부분을 넘어섰거든.”

* * *

보이는 대로 열정적이고, 당돌한 여자군.

그녀와 몇 마디 주고받은 나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말투에서 느껴지는 당돌함. 그리고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다시금 거래에 임하는 열정. 저돌적인 기질.

체내에 기력이 느껴지더니, 거친 부분도 있는 것 같고, 나름 악인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물론, 거래에는 실패하겠지만 말이다.

가져온 자료가 쓸모없다는 것을 들은 여자는 동공이 흔들렸다. 아마 차원관문에 대해서 조금 아는 것은 있는 모양인데,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어, 판단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았다.

“뭐, 그래도 네가 하려던 부탁이나 들어보자.”

내 말에 그녀는 조금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살리기 위해 오천 년간 그 곁을 지켜온 여자의 이야기. 그것은 꽤나 감동적이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병적인 집착이라고 보이기도 했다. 보는 사람이 답답해서 화가 날 정도의 집착.

대체 뭘 보기 위해 그렇게 그 곁을 지켜온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누워서 숨도 쉬지 않는 봉인 상태의 연인을 오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보호하고 있었다니.

상상도 안 되는군.

마법을 이용해 허공에 흩어진 자료들을 다시금 원래대로 모아서 그녀에게 전해주며 입을 열었다.

“네가 가져온 물건은 거래로서 적합하지 않으니, 새로운 조건을 내가 제시하지,”

멀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의 부탁은 봉인된 연인을 봐달라는 것. 불가능할 수도 있기에 살려 달라곤 하지 않았다.

“내가 네 연인을 봐주는 조건으로, 네 힘을 내게 맡겨라.”

체내에서 느껴지는 힘의 크기로만 봤을 때 멀든이라는 이 여자의 무력은 최소 마스터 정상급. 비교하자면 단군의 밑에 있던 은발의 여자와 비슷하거나 조금 높은 경지라고 볼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이지?”

“네 행동에는 아무런 제약을 걸지 않을 거야. 단지 내가 원할 때 너의 힘을 빌려줄 수 있으면 돼. 횟수 제한 없이.”

실로 간단한 조건.

“좋아.”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그녀가 손짓하자 뒤에 있던 로브를 입은 여자가 주문을 읊으며 손을 뻗었고, 곧이어 허공에서 투명한 천이 벗겨지는 듯하더니 범상치 않은 관이 하나 나타났다.

석관인가.

석재 재질로 된 것 같은, 범상치 않은 관이 나타나 둥둥 뜬 상태로 내 앞에 내려앉았고, 이어서 관에 걸린 봉인이 해제되었다. 그리고 묵직한 뚜껑이 미끄러지듯 열렸다.

깨끗하군.

관 속에는 깨끗하게 보존된 남자가 마치 죽은 듯이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런데…….

“저주 봉인술이군.”

아주 강한 사기(邪氣)가 느껴지는 것이, 가까이 하기도 싫을 만큼 진한 살의가 느껴졌다. 저주술 중에서도 여럿이서 합동해서 사용하는 술법. 이 정도면 그 누가 와도 풀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저주술이라 할 만했다.

이에 비해 어제 봤던 프리메이슨의 저주들은 귀엽게 보였다. 그런데…….

왜 자꾸 저주술을 푸는 과제가 생기는 거야, 대체.

별로 좋지 않은 기분을 느끼던 그때, 문득 어떤 물음이 떠올라 멀든을 바라봤다.

“근데 죽이려면 죽이지 왜 봉인을 시킨 거지?”

“그건…….”

멀든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는 고리 열 개를 조용히 공명시켰다. 물론, 조용히 공명시켜도 공명은 공명. 퍼져 나가는 마력 고리의 공명에 모두의 눈이 부릅떠지는 광경이 펼쳐졌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얘기해. 네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한 거니까.”

그녀는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는 그녀에게 집중했다.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악의나 거짓이 느껴지진 않았다. 최소한 믿어 볼 만한 얘기라 판단했다.

들어보니 그의 애인이었던 남자 ‘고든’은 어떤 종교의 꽤나 높은 자리에 있었는데, 지금 고든의 상태는 그 종교에서 행해진 어떤 의식의 결과라 했다.

여럿이서 봉인 저주술을 거는 것이 의식이라니. 제정신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지만, 고든은 사이비종교에 너무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나머지 함부로 발을 빼는 것을 할 수 없었고, 주변인들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그 의식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당시에 나는 아무런 힘이 없었어. 그래서 고든은 그 미치광이들의 교회 밑에 잠들게 됐지.”

아무런 힘이 없어 사랑하는 이를 잃어야 했던 그녀는, 그때부터 기력을 깨우치고 힘을 기르기 시작. 10년 만에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해 버렸고, 몇몇 동료들과 함께 그 교회의 본산을 쓸어버리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후 전쟁이 터져 고든이 잠든 석관을 숨겨 놓고 전쟁에 참전해야 했지.”

23세라는 나이에 기력을 깨우친 아주 늦은 시작. 그럼에도 10년 만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경이로운 재능.

실로 탐나는 재능이군.

“혹시, 너도 해석자인가?”

“아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을 하나 더 추가하지. 내가 이 친구를 만일 살려 내면, 내 밑으로 들어와라.”

왠지 그녀의 눈부신 재능에 이끌렸다고 해야 할까.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좋아. 살려 낸다면.”

엷은 미소를 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려 혈맥을 타고 질주시켰다. 무시무시한 기세를 가진 마력이 시원하게 혈맥을 타고 질주했고, 심장으로 모여들어 12개의 마력 고리를 공명시켰다.

강력한 공명이 일대를 휩쓸며 마나들이 황금빛을 띠기 시작했다.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마나들이 하나의 줄기가 되어 내 손바닥으로 모여들었고, 그것은 이내 회전하며 구체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여들고 모여들어 마나 구체가 거대해지자 난생처음 하는 규모의 성질 변환을 시작했다.

모두들 물러서게 만들 만큼 거대한 황금빛 마나 구체가 점점 성력으로 바뀌어 갔다. 성스러운 힘이 일대에 퍼지며, 마치 세상을 정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과연 이걸로 될까?

내 자신마저 겸손해질 만큼 거대한 성력이었으나 고든의 저주를 풀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두 손을 뻗어 거대한 성력을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회오리치는 거대한 성령을 천천히 움직여 고든이 잠든 석관에 천천히 내려앉혔다. 그에 굉장한 반발력이 생기는 것이 느껴졌는데, 프리메이슨 추종자의 몸에 있던 저주와는 그 격이 다르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해 줬다.

굉장한 사력이다. 그러나…….

걱정과는 다르게, 나의 성력이 안정적으로 저주술의 반발력을 누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대로 내리 눌렀고, 저주술은 비명을 질러 댔다. 그 특유의 사악한 기운이 내게 쌍욕과 저주를 퍼부어 댔다.

저주술법의 바탕이 되는 사력 자체가 악한 기운을 품은 영혼들에 그 뿌리가 있는 탓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저주와 욕을 처먹은 나는, 결국 놈의 반발력을 누르고 성력으로 석관 전체를 품었다. 그리고 일대에 강력한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샤아아아-!

그리고 바람소리와 비슷하지만 조금 결이 다른, 저주술법이 풀려 나는 소리가 일대를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 소리가 끝이 났고, 하얀 빛을 내뿜는 성력도 흩어졌다. 그리고 석관 안에 있는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슴과 복부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후- 됐군.”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바람이 모두 죽고 주위가 잠잠해질 즈음, 남자는 눈을 떴다. 그리고 놀란 듯 일어섰다.

“고든!”

눈물이 그렁그렁한 멀든이 그에게 달려들었고, 둘의 상봉이 시작됐다.

이야… 오천 년이 지났는데도 나올 눈물이 있구나.

그렇게 눈물겨운 상봉을 하는 와중 불청객이 하나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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