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청장, 협회장, 단군, 대통령, 부 마스터. 이들을 불러다 놓고 내 포부와 계획을 풀어놓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정말 이들을 데리고 한국을 살려 보겠다는 내 의지였고. 둘째는 배신자 색출이었다. 다른 이들도 나와 신뢰 관계가 없다시피 하지만, 두 부마스터들은 불신이 있으면 있었지, 신뢰가 있을 리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녀석들의 우두머리가 된 이상, 녀석들을 이끌고 가야만 한다. 그렇지만 내게 불신을 가지거나 말을 듣지 않는 놈은 내 밑에 두지 않는다. 하여, 놈들도 위의 두 가지 이유로 이번 회의에 참석시킨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일본으로 향하는 이유는 그 때문은 아니다. 애초에 나는, 녀석들이 뭔가 눈치를 채거나 우리의 움직임을 읽고 움직이기 전에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것이 내 목표였고, 그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른 시각에 기습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정보가 샜는지 확인하여, 돌아오는 즉시 배신자 색출을 할 것이다. 그리고 본보기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다.
이런 걸 보고 일석이조라 하나……?
여러 가지로 보면 일석이조 정도로 표현을 할 순 없지만, 아무튼 이번 기습으로 많은 것을 해결하게 될 것이다.
그때처럼.
단신으로 제국의 중심부에 쳐들어가 홀로 모두를 쓰러뜨리고, 결국 제국을 무너뜨려 새로운 나라를 세웠던 그 시절처럼. 혈혈단신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멀리 바다가 보였다.
* * *
“모이는 것도 제대로 못하다니.”
계시자 요한은, 경멸하는 얼굴로 눈매를 좁혔다.
“어떻게 할까요?”
관조자 ‘베로미론’이 조용히 묻자, 나머지 1급 각성자들의 안색이 썩 좋지 못하게 바뀌었다.
“맘 같아서는 쓰레기 같은 것들 치워 버리고 싶지만, 앞으로 있을 일들이 많아 일단은 살려 놓는다.”
맹렬한 살기에, 그 자리에 있는 열네 명 모두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하여간, 이 병신 같은 것들은 말을 안 들어 처먹어요. 간만에 좀 맞아야겠네.”
호랑이도 말하면 나타나듯, 멀리서 두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죄송합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실실 웃으며 사과를 하려던 남자가 땅에 처박혔다. 이어서 옆에 있던 여자도 뭔가를 하려고 했으나, 그대로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고는 멀리 날아가 석재 구조물에 처박혔다.
“시발. 죄송은. 죄송할 짓을 하지 말아야지. 이 병신 같은 새끼들아.”
잔뜩 성난 관조자 ‘칸’이 미간을 찌푸리며, 바닥에 처박힌 놈을 노려봤다.
“커헉……! 쿨럭쿨럭…….”
“뒤져 가는 척하지 마라.”
“크읏…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지는 알고?”
“계시자님의 부름에 늦었…….”
“천황께서 부르셨다.”
그에 바닥에 앉아 목을 어루만지던 남자가 히죽 웃었다.
“에이~ 저희도 다 알고 있습니다. 천황께서는 별 관심도 없으시잖습니까? 이번 회의도 계시자님이 주최하신 것 정도는 알고 있습죠.”
“근데 이 시발 노…….”
“그만해라.”
요한이 화를 내려는 칸을 말렸다.
“세 놈 남았구나.”
그때 모두의 머릿속으로 어떤 음성이 전해져 왔다.
[언제까지 날 기다리게 할 생각이지?]
‘오늘따라 급하군.’
음성에서 전해진 ‘노기’에 계시자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나머지들이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서둘러라.”
요한의 음성이 묘하게 일대를 울렸고, 모두들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알현실이 있는 본 건물로 가기까지 꽤나 지루한 석재 바닥을 지나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본 건물에 들어서자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수록 목청을 찢는 듯한 비명 소리가 점점 커졌고, 알현실 근처에 다다랐을 때 그 비명 소리는 뚝 끊겼다.
커다란 기둥 수십 개가 천장을 받치고 있는, 너무도 비효율적인 거대한 공간. 그 공간을 가로지르는 붉은빛이 감도는 석재. 그 가운데 천황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축 처진 무언가가 사지를 쭉 벌린 채 매달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그 붉은 것은 모든 피부가 다 벗겨진 사람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잔혹하여 일부는 시선을 애써 돌렸다. 허나 계시자 요한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여전히 광기로 가득하구나.’
그는 천황과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오래 기다리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신시우 관련된 일인가?”
“예.”
요한의 대답에 천황의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다. 그리고 인간의 탈을 벗고, 그의 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붉은 눈동자에 백색의 피부. 흰빛이 나는 듯한 백발과 머리에 솟은 한 쌍의 뿔. 그리고 등에 돋은 한 쌍의 검은 날개.
본 모습을 드러낸 그가 히죽 웃었다.
“드디어 온다든가?”
“예. 홀로 이곳을 치려고 한다는 계획을 들었습니다.”
“계획?”
“예. 한국에 광해 길드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본래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조직인데, 이번에 신시우가 그 조직의 우두머리를 제거하고 조직을 먹었습니다. 이후 수뇌부를 모아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는데, 그걸 들은 첩자가 보내온 정보입니다.”
“호오. 언제 온다는데?”
천황의 얼굴은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것까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때 천황의 눈동자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다.
“지금 오는 모양이군.”
“예……?”
요한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그것은 그 뒤에 있는 열일곱 명의 얼굴도 같았다. 그러나 이내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결계……?’
일대에 쳐지는 결계를 느끼며 요한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귀환자 놈이… 왔다고? 그렇다면 내가 들은 정보는…….’
이내 그는 그가 들은 계획에 ‘시간’이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일부러…….’
광해 길드의 부마스터 방지산. 그는 마스터 조방인의 심복으로, 일본과 친해지지 못해 안달인 인물이었다. 하여 조방인이 죽고, 그에 반하는 성향을 가진 신시우가 눈엣가시였을 것이고, 분명 통화로도 그런 감정을 내비쳤었다.
‘그렇다면 이건 대체…….’
귀환자 신시우가 일부러 이런 판을 짰거나, 이후에 마음이 변해서 독단적인 행동을 했다는 추측밖에는 들지 않았다.
천황의 얼굴을 힐끗 살핀 요한은 한편으로는 안도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요한은 그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신시우를 경쟁자로 생각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천황은 오자마자 신시우라는 인물을 거론하며 그의 흔적을 찾았었다. 분명 우월감에 차 있는 그였지만, 요한은 그의 말속에서 경쟁자를 대하는 듯한 느낌을 읽었었다.
‘호각은 안 된다.’
본래 일본에 있던 귀환자를 일격에 식물인간으로 만든 천황은, 자신의 바람을 이뤄 줄 구원자니까. 절대 패배하고 죽어선 안 됐다.
‘정 안 되면… 도와야 해.’
만약에 신시우가 천황과 호각으로 싸우게 된다면, 그는 개입을 할 생각이었다. 멀리서 저격을 해서라도 빈틈을 만들 생각이었다.
“다 나가라.”
천황의 얼굴에 흥분감이 돌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천장이 부서지면서 문제의 그 존재가 등장했다. 그리고 천황의 입에서 지구상에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마법사면 마법사답게 등장을 해야지, 외래종.”
* * *
뭐지, 이 익숙한 느낌은……?
천황성이 있다는 산 근처로 다가가자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강한 마족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기운이었다. 마족 고유의 기파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이 느껴졌다. 그것도 아주 상위급 마족의 기운. 아주 농도가 짙은 느낌.
아니, 마족이 있을 리가 없잖아…….
마치 이건 내가 처음 한국에 돌아와 각성자들과 마주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이곳에 없어야 할 것을 마주한 느낌.
천황성 상공에 다다르자 그 느낌은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분명 이건… 마족의 감촉이다.
피부로 느껴졌다. 그 순도 높은 혈통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힘. 그리고 아래에서 느껴지는 그 힘의 규모에 피부가 저릿해져 왔다.
육황… 급인가?
그런 존재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강렬한 힘은 분명하게 피부에 와닿고 있었다.
마족으로 느껴지는 존재 외에 기에테나 1급 각성자로 보여지는 놈들이 함께 있는 것을 느낀 나는, 산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결계를 전개했다. 그리고 그대로 하강했다. 성의 가장 중심부 천장을 뚫고 들어가자 우습게도 자애로운 듯한 목소리의 ‘칼란’어가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마법사면 마법사답게 등장을 해야지, 외래종.”
칼란어는 대륙 ‘칼란’의 공통어로, 내가 마계에서 자유롭게 구사가 가능한 네 가지 언어 중 하나다. 그리고 바닥에 사뿐하게 착지한 내 눈앞에 있는 존재는, 과거 나와 맞붙었던 칼란 대륙의 최강자. ‘카리인 바루스 베라크리토’였다.
“신시우, 오랜만이구나.”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그의 얼굴과 모습을 찬찬히 뜯어봤다. 쥐색을 띠는 한 쌍의 뿔과 빠져들 것 같은 저 붉은 눈. 그리고 분을 처발라 놓은 것 같은 백색의 피부와 등에 돋은 새카만 날개. 분명히 그놈이 맞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왜 이놈이 이곳에 있는 것일까? 이놈이 천황인가? 그렇다면, 귀환자는 어디 있지? 죽었나?
순식간에 수도 없는 의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수많은 의문들은 그 무엇 하나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근데 이 새끼는 왜 아직도 저 바지를 입고 있는 거지?
뭐 이런 시답잖은 의문도 튀어나왔다.
“내가 맞는지 의심스러운가?”
마치 만물의 위에 있는 듯, 고고하고 오만한 목소리. 귀족수저로 태어나 평생을 고생 한번 안 해 보고, 무시 한번 안 당해 본 상판. 정말 그 재수 없는 놈이 맞다.
“아니.”
“애써 혼란스러움을 감추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외래종. 너같이 하찮은 종은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병신 같군.”
“뭐?”
“혹시 너도 균열 타고 여기 왔냐?”
이놈이 여기 있는 이유에 대한 답에 가장 가까운 것은 균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추측을 해 보자면, 놈은 나와의 결투 중 균열을 타고 넘어오게 된 것이다.
싸우는 도중에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게 바로 이 재수 없는 놈의 풀 네임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다. 육황이나 되는 자가 결투 도중에 도망치다니. 그처럼 꼴불견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놈은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랬기에 사라진 이유가 더욱더 오리무중이었다. 그의 측근들의 말도 하나같이 내가 비겁한 술수를 썼다며 욕했지, 녀석의 도망을 욕하는 자는 없었다.
“그래. 그 빌어먹을 균열이 네 같잖은 ‘대제행(大帝行)’을 방해했지.”
“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이곳에 너와 닮은 것들을 보면서 네 고향인가 싶어 너의 흔적을 찾았지만, 없더구나.”
“…….”
“동명이인밖에 없더군.”
듣자마자 놈이 왜 못 찾았는지 깨달았다.
이놈도 내 사진을 보고 못 알아봤군.
“하등한 종족이지만, 그래도 특출 난 놈들이 있어 마계로 가는 길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네가 균열을 타고 넘어왔다는 소식에 정말 놀라웠지.”
“어이가 없네.”
“자, 그럼 미뤄 뒀던 우리의 결투를 재개해 보자꾸나, 외래종.”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손을 들어 전투 준비를 하려던 놈을 막았다.
“그러면 혹시… 마계의 봉인이 풀린 건가?”
“아마도 그런 게 아닌가 싶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아주 높아졌다. 내 눈이 빛나는 것을 본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갈 희망을 갖는 것은 좋다만, 아쉽게도 여기가 네 무덤이다. 그래도 고향 땅에서 죽으니 감사하게 생각하도록. 내 부름에 응답하라. ‘브라빌란’.”
놈은 고고한 얼굴로 애병을 불렀고, 나는 반사적으로 이동 마법을 시전해, 놈에게서 떨어졌다. 한 줄기 빛이 하늘에서 내리꽂히며, 바닥이 내려앉을 정도의 강력한 힘이 일대를 짓눌렀다. 그러곤 빛 속에서 브라빌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베라크리토. 오늘은 타지에서 죽는 너를 위해, 특별히 내가 최선을 다해 주마.”
놈은, 강력한 힘을 내뿜는 검을 잡으며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러곤 여전히 고고하고 깔보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땐 고리 열한 개 정도로도 충분할 것 같아서 열한 개만 공명시켰지만, 이번엔 특별히 12개의 힘을 네게 보여 주겠다 이 말이야.”
놈의 고고한 얼굴에 금이 갔다.
“허풍이 심하구나.”
씨익 웃어 보였다.
“글쎄, 과연 허풍일까?”
“미천한 외래종이 감히 분수를 모르고…….”
눈매를 좁힌 녀석이 의지를 가지고 검을 치켜들자, 농도 짙은 붉은 마기가 맹렬한 기세를 품고 검에서 뻗어 나왔다. 그와 함께 강력한 힘이 내 전신을 옭아맸다. 공격의 의지만으로 대상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경지에 이른 상위 마족. 등줄기에 소름이 쫙쫙 뻗어 나갔다.
오랜만에 죽음의 문턱에 발을 들인 기분이구만.
나는 내가 내뱉은 말대로, 내 모든 마력을 혈맥을 따라 질주시켰다. 혈맥을 따라 질주하는 마력이 심장에 도달하자, 그 강대한 마력에 열두 개의 마력 고리가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