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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즉위식 날 균열을 만났다-10화 (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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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등급 규모의 몬스터 풀 이후 나름 조용한 며칠이 지났다.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그 노인은 이후로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결계에 손도 대지 않고 아무런 느낌도 없이 나갔는지 아직도 의문이었지만, 딱히 내 앞을 막아서지만 않으면 별 상관 없는 존재이기에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중국 쪽에서도, 청와대에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이 조용했고, 내게 작업을 하려는 놈들도 붙지 않았다. 일본 천황의 성가신 편지가 한 번 더 내게 전해진 것 말고는 특별한 일 없는 며칠이었다.

하여, 그동안은 온전히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최근 삼 일간은 수락산 차원 관문에 처박혀 관문과 씨름을 했는데, 관문이 대체 어떤 형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얼마나 큰 힘이 들어갔는지 알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하여 마법 술식들을 해석했다.

그러나 관문에 걸린 마법들은 그 수준이 매우 높고, 술식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복잡하고 방대했다. 그렇기에 하루 이틀 가지고 어떻게 해 볼 수준이 아니었다. 앞으로 몇 날 며칠을, 아니 수개월, 수년이 소모될지 모를 연구과제였다.

“가자.”

귀환 7일 차인 오늘은, 다른 차원 관문을 탐구해 보기 위해 거창군 차원 관문으로 가 보기로 했다. 그렇게 집을 나서던 그때. 희미한 살기가 마나를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홱 돌린 나는, 그 찰나의 순간 한 여인을 떠올렸다. 한없이 공허하고 슬픈 존재.

“마나의 선택을 받은 자…….”

뭔가에 홀린 듯, 나는 그길로 내달렸다. 내 달림과 동시에, 강화 마법과 가속 마법의 술식들이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그려졌고, 금세 건물 위로 뛰어올라 지붕 위를 날 듯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나를 타고 전해져 오는 분노를 따라 진원지를 쫓았다. 마나 그 자체가 분노라는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나의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가진 특수한 능력.

점점 갈수록 그 분노는 짙어졌고, 멀리 거대한 화마(火魔)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폭발하듯 불기둥이 솟아오르며, 더욱 그 세를 키웠다.

소름 끼치는 분노로군.

* * *

어느 주택가의 으슥한 주차장. 열 명 정도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가운데 속옷 차림의 여학생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미안.”

“이야- 우리 수연이 기억력이 많이 떨어졌네?”

“악!”

한 남학생이 수연의 머리채를 확 잡아챘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스마트폰을 보다가 키득거렸다.

“그러게 미친 년아, 한번 말할 때 잘 들으라고 했지? 쯧쯧쯧쯧… 머가리에 든 게 없으니 원…….”

“우리 수연이 안쓰러워서 어떻게 해?”

“븅신. 안쓰러우면 네가 가서 대신 처맞던지.”

“디질래?”

주위에 포진하고 있는 학생들은, 그렇게 서로 티격태격하며, 마치 지금의 상황이 ‘놀이’인 듯 가벼운 분위기였다. 심각한 것은 오직 괴롭힘의 대상인 속옷 차림의 여학생뿐.

“시발 년이…….”

짝!

뺨을 때리는 소리가 주차장을 울렸다.

“힘을 주고 지랄이야. 아~ 시발 진짜. 존나 빡돌게 하네. 야. 그거 줘 봐.”

“어? 이거?”

한 여학생이 구석에 있던 시멘트 벽돌을 집어 들었다.

“어. 줘 봐. 이년 이거 오늘 안 되겠다. 사람 말을 한두 번 까먹어야지. 그 쓸모도 없는 머리통 오늘… 조져 버리자.”

“야, 성진아. 레알 치게?”

성진이라 불린 남학생이 잔뜩 흥분한 채 벽돌을 움켜쥐자, 뒤에서 담배를 태우던 한 학생이 그를 불렀다.

“뭐… 이런 경험 한 번쯤은 괜찮잖아?”

씨익 웃는 성진의 얼굴은 이미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사인은… 자기비관에 의한 분신자살. 증거 인멸은 우리 비서가 다 해 줄 거고. 니들은 그냥 좋은 구경만 하면 돼.”

이 일대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바로 현 여당인 ‘사기당’의 전 2선 의원이자 대한민국 3대 각성자 집단. 길드 ‘광해’의 수장 ‘조방인’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강이라 불리는 2등급 각성자 다섯 중 하나에다가, 여당의 뒤를 봐주며,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 대한민국에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세 손가락에 꼽았다.

“어쭈. 왜? 해 볼라고? 해 봐도 돼. 오늘은 마지막이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마치 자비를 베푸는 적국의 왕과 같은 얼굴로 여학생을 쳐다봤다. 그러나 여학생은 그저 째려보는 것 이상을 하지 못했다. 워낙 이들에게 고강도의 괴롭힘을 받으며, 큰 트라우마가 생긴 탓이었다.

퍽퍽 소리가 주차장을 울렸다. 조성진이 여학생을 때리기 시작했다.

“해 보라니까. 왜. 왜 기회를 줘도. 써먹지를. 못해. 응?”

복부, 가슴, 얼굴, 다리 어디 하나 빼놓지 않고 주먹과 발길질이 가해졌다. 벽돌은 마지막에 쓴다며 옆으로 치운 지 오래였다. 실컷 때려 놓고 주변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야. 이 븅신 이거 맛이 갔는데?”

맞던 여학생은 결국 정신을 잃었고, 이상한 현상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어우… 아까부터 왜 이렇게 더워……?”

여학생이 기절하기 얼마 전부터 다들 더워서 겉옷을 벗어던졌고, 여학생이 기절하고 나서는 남학생들이 웃통을 까기 시작했다.

“후우… 어우. 지구가 멸망하려나.”

“아니, 시발. 야, 이건 아니지 않냐? 지금 몇 돈데?”

“지금… 19돈데?”

“그래. 시발 오늘 딱 적당한 온도였다고. 지금 이건… 후우…….”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열기가 오른 남학생 하나가 숨을 몰아쉬다가 어지러운지 휘청거렸다. 그러던 그때였다.

화륵. 불꽃이 일어나는 소리가 모든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어서 비명 소리가 주차장을 메우기 시작했다.

“아! 아아아앍!”

조성진이라는 학생의 몸에 불이 붙은 것이다. 그 불길은 마치 살아 있는 듯 넘실거리며 그를 집어삼켰고, 그 절규에 가까운 비명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도움을 애원하며 다른 학생들에게 접근했으나 그들은 모두 혐오감이 서린 얼굴로 그를 피해 다녔고, 심지어는 다가가는 그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는 학생까지 있었다.

“헉… 헉… 시발. 혼자 뒤지지 미친 놈이 붙고 지랄이야…….”

다들 너무나 뜨거운 열기에 헉헉댔다. 그리고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한 학생들이 하나둘 그 주차장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는데, 이미 주차장 여기저기서 불길이 일고 있었고, 불길이 마치 살아 있는 듯 넘실거리며 그들의 길목을 차단했다.

“시, 시발……! 아… 아아앍!”

그리고 이어서 다른 학생들의 몸에도 불길이 일었고, 처참하게 익어 가기 시작했다. 조성진 학생을 비롯한 열 명의 학생들 모두 재가 될 때까지 불길은 멈추지 않았고, 그들이 한 줌의 재가 되었을 때쯤, 일대가 전부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삽시간에 거대한 화마(火魔)가 수십 개의 건물들을 집어삼켰고, 그것은 더욱 그 세를 불리며 주변 건물들을 집어삼켜 갔다.

긴급 출동한 소방대원들은 불길에 손도 대지 못하고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바빴고, 근처에 있던 각성자들의 마법 또한 무용지물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화재를 진압하러 왔다가, 살기마저 느껴지는 거대한 화마를 보는 각성자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 * *

물 같은 것으로는 끌 수 없는, 마나 그 자체가 의지를 가지고 일으키는 화염. 건물을 넘어 아득히 높은 곳까지 솟아오른 거대한 화마는, 마치 내가 이 정도 화가 났다. 라고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일렁이는 불길을 바라보며, 그녀를 떠올렸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마나의 선택을 받은 존재를.

마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마나에 관해서는 가히 사기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이들이다.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마나를 통제하고, 생각과 의지만으로 마나를 다루며, 거의 신과 같은 능력을 보여 준다.

그것은 너무 사기적인 능력이기에, 마계에서는 일찍이 제거되기 십상이다. 어쩌다가 운이 좋아 살아남는 이들이 있더라도, 세상의 눈을 피해 깊숙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 들어간다.

한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문 재능임에도, 그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속으로 숨어들어야 하는 슬픈 운명. 그녀는 그런 운명을 짊어진 존재였다.

우연히 희귀한 마법 재료를 찾기 위해 거대 산맥의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갔을 때였다. 순간 마나를 타고 전해지는 슬픔에 가슴이 저려 오는 것을 느끼고는 천천히 그 느낌을 따라 들어갔고, 더욱더 깊숙한, 아무도 안 올 것 같은 곳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마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마나와의 친화력이 너무나 높은 나머지 그들의 감정에 마나가 반응할 정도다. 그렇기에 그녀의 꽉 차오른 감정들이 마나를 타고 흘러 주변을 배회했는데, 그것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공허함과 슬픔, 괴로움뿐이었다.

도저히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크기의 감정에, 울컥, 내 안에서도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렇게 그녀와 대화를 하며, 마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마계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생존을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했는지 알아갔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지며 다짐했다. 만약, 이후에 내가 마나의 선택을 받은 존재와 만나게 된다면, 그 존재를 지켜 주겠다고. 그녀처럼 그렇게 슬프고 외롭고, 공허하게 살아가도록 두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 다짐을 이런 곳에서 지키게 될 줄은 몰랐지만.

화아아악!

강렬한 불길이 또 한 번 거세게 솟아오르며, 그 세를 불려 나를 집어삼켰다. 이곳에 온 순간부터 내 오른손에 낀 반지가 자동으로 실드를 전개하고 있어, 거센 불길 속으로 들어갔음에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된 나는 화염의 진원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강렬한 화염의 속은 마나의 폭풍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마나를 따라 누군가의 감정과 기억의 조각들이 흘러 다녔는데, 마치 화염 속 전체가 누군가의 마음속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 이것이 바로 마나에게 선택을 받은 자의 능력이지.

마나 전체가 그 존재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폭주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이렇게 온통 그 감정과 기억의 조각들로 도배가 되어 있는 것이 이해가 됐다.

진원지를 향해 걸어가며 점점 더 묵직한 감정들과 기억의 조각들이 내게 밀려들었다. 그리고 진원지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아이는,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여학생은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 매일매일이 고통스럽고, 죽음을 생각했다. 지켜 줄 부모마저 없어 슬픔과 고통은 배가 됐다. 누구 하나 편들어 주거나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없는 학교생활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끝내 그 고통스러움이 사라졌다. 감정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학생에게 남은 것은 그저 ‘공허함’뿐. 가슴이 저려 왔다. 잊으려 노력했던 과거의 그 기억들이 새록새록 샘솟아, 너무도 닮은 이 학생의 기억과 뒤엉켰다.

가까이 다가가자 속옷만 입은 여학생의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전신이 피멍투성이었다. 그런 그녀를 안아 들었다.

“이제 괜찮다.”

그러고는 나의 사명과도 같은, 옛 다짐을 꺼내 들었다.

더 이상 슬퍼 말아라. 이젠 내가 널 지켜 줄 테니까.

심장의 마나 고리들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열두 개 중 아홉 고리가 공명하며, 강력한 마력과 반응하여 일대를 휘몰아치던 마나를 휘어잡기 시작했다.

이 학생은 신기(神技)와 같은 재능을 가졌지만, 아직은 폭주하더라도 내가 쉽게 잠재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

휘몰아치던 마나들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미친 듯이 타오르던 화염도 점차 그 기세가 잦아들더니, 정상적인 수준의 화염으로 변했다. 더 이상 이 여학생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눈을 감고 마나 감지망을 펼쳤다. 아홉 고리가 공명하며 광범위한 지역으로 감지망이 뻗어 나갔다. 그러곤 이내 나의 집을 찾아냈다.

“시우 님……!”

공간이동 마법으로 집 마당으로 오자마자 김 비서가 나를 맞았다.

“남 비서는?”

“시우 님 찾으러 나갔습니다.”

“이 아이 옷 좀 입혀 줘.”

“아… 예. 그런데…….”

“화재 현장에서 데려온 아이다.”

김 비서는 입을 아, 하고 벌리더니 이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아무 데나 지낼 곳을 마련해 주고… 깰 때까지 옆에서 보살펴 줘. 거창군 차원 관문은 좀 늦게 가도 되니까.”

“옙.”

마당으로 나아가 착잡한 마음에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곤 담뱃갑을 꺼냈다. 마계에서는 마법 처리 된 연초를 종종 태웠었는데, 그게 생각나서 며칠 전에 구입했다.

“후-”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처음 이곳에 와서 열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칠대제 즉위식의 진행 중에 납치되어 버린 그 분노. 그것으로 시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었다. 그만큼 칠대제 자리에 대한 나의 간절한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반드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겠노라고 다짐도 했다. 그런데 이쪽 세계의 일에 신경을 쓰게 되더니, 어느새 이런 인연까지 생겨 버렸다.

그러나 돌아가야 하는 건 변하지 않아.

나는 되뇌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돌아가는 것은 변함없다고. 내 자신에게 잊지 말라고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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