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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좀 더 세게 눌러.”
조수석에 앉은 근육질의 남자가 위협적으로 말하자, 뻣뻣한 운전수가 힘껏 경적을 눌렀다. 누가 봐도 교통정체 현상으로 인해 꼼짝도 못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경적을 이렇게 공격적으로 누른다는 것은 고의적인 시비였다.
주한 일본 대사의 호위 중 하나인 ‘요시다 리쿠’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마치, 재밌는 사냥감을 발견한 듯한 얼굴. 상대 차에서 누군가 내리자 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좀 놀아주고 오겠습니다.”
“적당히 하다 길 뚫리기 전에 오게.”
뒷좌석에 앉은 나이가 지긋한 주한 일본 대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차 문을 열고 나간 리쿠는, 불쾌한 얼굴을 한 채 큰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왜 길을 막고 지랄이야. 이 쥐새끼 같은 년아.”
한껏 성난 얼굴로 다가간 그는, 상대가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그러곤 상대의 모가지를 틀어쥐고 들어 올렸다. 모가지를 잡힌 상대는, 발버둥 치며 뭐라고 했는데, 역시나 리쿠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새끼들이 미쳐 가지고. 감히 일본 대사의 차를 막아?”
그러는 사이 한 놈이 더 튀어나와서 뭐라고 시부렁거려 대는데, 그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말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걸린 그때. 상대 차에서 또 한 명이 내렸다.
‘뭐야 저 새끼는.’
부스스한 긴 백발을 한 남자. 한껏 가라앉아 있는 인상이었지만,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런 그 백발의 남자는 차를 빙 둘러 다가오더니. 그에게 다짜고짜 명령했다.
“내려놔라.”
입에서 나온 것은 한국말인데, 그 뜻이 분명하게 머릿속으로 전달되는, 신기한 방식의 대화에 리쿠는 잠시 멈칫했지만, 그를 그저 잔재주를 부리는 놈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강자들은 그들마다 풍기는 기세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지금같이 한껏 도발한 상황이라면, 그 기세가 일대를 휩쓸고 있어야 할 터. 그러나 상대는 조용했다. 그에 리쿠는 확신했다. 잔재주를 부리는 놈이라고.
판단을 마친 리쿠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만개했다.
“그래.”
그렇게 말하곤 손에 쥐고 있던 여자를 그대로 아스팔트에 처박았다. 상대도 각성자였지만, 그걸 감안한 리쿠의 공격이었기에, 타격이 상당히 들어갔다.
“좋아.”
또다시 머릿속에 박히는 기이한 대화법에 고개를 쳐든 그는, 허리를 쭉 펴고 서서는, 거만한 눈으로 상대를 아래로 봤다. 그 순간. 백발의 남자의 몸에서 반짝이는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고, 뭔가 대비를 하기도 전에 그 남자의 모습을 놓쳐 버렸다.
‘무슨……!’
그의 인지를 벗어난 움직임에 당황한 찰나의 순간. 뒤통수에서 기척이 느껴졌고, 마치 머리통이 뽑히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의 몸이 돌아갔다. 그리고 그가 기력을 움직일 틈도 없이, 그의 얼굴은 단단한 무언가와 부딪혀야 했다.
찰나의 순간 기력을 얼굴로 끌어올리려 했지만, 큰 소용은 없었다.
“커……!”
안면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감각. 순간 정신을 잃었던 그는, 다시금 정신을 되찾자 이상해진 얼굴 감각과 숨구멍을 막는 핏덩이에, 단단히 잡혀 있는 머리채까지. 자신이 손을 쓸 틈도 없이 박살이 났다는 것을 뼛속까지 깨달을 수 있었다.
숨쉬기도 벅찬 그였지만, 분한 마음에 기력을 끌어올렸다. 이 주변을 초토화시켜서라도 어떻게 해 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너무 감정적으로 판단했던 것일까? 상대는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기력을 끌어올리자마자 강력한 힘이 팔다리를 붙잡더니, 거꾸로 꺾어 관절들을 부숴 버렸다. 엄청난 격통에 목을 막고 있던 핏덩이가 입으로 뿜어져 나왔고, 발버둥 쳐 보려는 그의 마음은 완전히 꺾여 나갔다. 그저 머리채를 잡힌 채 무력하게 질질 끌려가야만 했다.
* * *
돼지 멱을 따는 소리가 일대를 울리고 지나갔다. 대상을 움켜쥐는 마법. ‘그립(Grip)’을 이용하여 놈의 팔다리를 잡고 비틀면서 반대로 꺾어 버렸다.
그러니까 단순히 관절만 꺾어 부수는 것이 아니라, 내부 근육과 인대를 모조리 파괴해 버리는 방식이었다.
“새끼가…….”
내게 머리채를 잡혀 쿨럭거리는 놈을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힘으로 찍어눌러, 한 줌의 핏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직접 타격을 해야 재미를 보는 스타일. 내 손으로 상대의 뼈와 관절을 파괴하고, 피떡으로 만드는, 다소 지저분하고 잔혹하지만, 그 무엇보다 마계다운 방식이었다.
물론, 아무나 그런 식으로 진행하진 않는다. 내 판단하에 악하다고 판단되는 놈이나 건방진 놈에게 그런 퍼포먼스를 보여 준다.
팔다리가 기이하게 꺾여 핏물을 질질 흘리고 있는 놈의 머리채를 잡고, 놈의 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별로 걸을 것도 없었다. 코앞이었으니까.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차의 뒷문 두 짝이 열리며 두 남녀가 급하게 내렸다. 그중 왼쪽에서 나온 늙은 놈이 잽싸게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그리곤 의외로 또박또박한 한국어로 말했다.
“귀인을 몰라 뵙고,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어떻게 날 알아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누군지 대충 눈치를 챈 것 같았다. 내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놈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합당한 보상을 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
“대가리 박아. 그리고 사죄해라.”
놈의 커진 동공 너머에서 불길이 지나가는 듯했다.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
“보상은 내가 아니라 저 녀석한테 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고. 내 명예를 더럽힌 죗값은 따로 치러야지?”
상대를 깔보고 행패를 부렸으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맞다. 그것이 내가 수십 년간 지내 온 마계에서의 암묵적인 룰. 주둥이로 하는 사과와 성의 없는 보상 같은 것은 그 뒤의 일이다.
“그…….”
“내가 오늘 기분이 아주 안 좋거든? 그런데 오늘은 내가 돌아온 첫날이라 특별히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바닥에다 대가리를 피나도록 처박고, 한국말로 사과해. 그럼 눈감아 주도록 하지.”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놈은, 내 눈치를 한번 보더니 처음과 같이 또박또박 한국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호오?
그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그리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엎드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그대로 머리통을 아스팔트에 세 번 처박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 모습과 목소리에서 진한 굴욕감과 분노가 느껴졌다. 그런 놈을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어나.”
일어난 놈의 눈빛 너머로 강렬한 불길이 보였다. 마치, 나를 찢어먹기라도 할 듯 강렬한 맹수가 있었다. 그에 피식 웃었다.
네 연륜이 널 살렸구나.
혹여나 그 속내가 조금이라도 겉으로 드러났다면, 나는 가차 없이 놈을 찢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 꼬라지는 못 보니까.
놈의 찢어진 이마에서 핏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가도 좋다. 단, 네가 말한 그 보상이라는 건, 저 친구한테 확실하게 하도록 해.”
그 말과 함께 손에 쥐고 있던 머리채를 들어 올려 차를 향해 던졌다. 묵직한 놈의 무게가 차의 금속 철판을 때리며 깜짝 놀랄 만한 소리를 냈으나, 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녀석이 분을 못 이겨 눈 밑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 난 뒤 발걸음을 돌렸다.
“남 비서.”
“이, 예. 예!”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굳어 있던 수행비서 녀석은, 내 부름에 말까지 더듬으며 긴장감을 표출했다.
“다시는 저런 병신들한테 굽신거리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녀석의 떨림이 눈에 보였다.
“그 정도도 못하면 비서 짓 때려치워.”
“아, 아닙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콧김을 뿜어 화를 한 단계 누른 나는, 차로 걸어가며 얘기했다.
“김 비서 빨리 병원으로 이송시켜.”
“아까 신고했으니, 곧 올 겁니다.”
내가 차로 들어가자 근처에 숨죽이고 있던 각성자들이 하나둘 튀어나와 경찰들과 함께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꼴에 조사랍시고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꼴이 꼴불견이었다.
치안을 담당하는 새끼들 숨어서 지켜보는 꼴이라니…….
그들을 보니, 내가 지배하던 대륙 ‘아킬라’가 떠올랐다. 그곳의 치안관들은 하나같이 저승사자 같은 놈들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좋지만, 범죄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변한다.
주변을 기웃거리는 이런 배짱도 없는 찌꺼기 같은 놈들과는 정신부터 차원이 다르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구급대로 보이는 이들이 김 비서를 옮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남 비서가 운전석으로 들어왔다.
“남 비서.”
“네?”
“저 늙은 일본 놈은 뭐하는 놈이냐?”
“아, 일본 대삽니다.”
“대사?”
“네.”
“대사라는 놈들은 원래 이렇게 남의 나라에서 행패를 부리나?”
“그게… 지금 한국의 사정이 영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남 비서에게서 한국의 현주소를 들을 수 있었다.
디멘션 쇼크 이후 펼쳐진 새로운 세계에서 강자로 발돋움하지 못했던 한국은, 기존에도 강대국이었지만 엄청난 각성자 전력까지 보유하며 초강대국이 되어 버린 러시아, 중국, 일본. 그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갈기갈기 찢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대충 남 비서의 설명을 듣고, 한국이 X됐다는 것은 알았는데,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었다.
“미국은?”
“아, 사실 원래 미국을 포함하여 4국이었는데, 7년 전에 ‘애틀랜타 차원 균열’ 때문에 각성자 전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어서, 지금은 그리 입김이 있지 않습니다.”
“미국이 밀려났다고?”
내 기억 속의 미국은, 전 세계를 주무르는 전무후무한 초강대국이었다. 그런 미국이 밀려났다니. 대체 차원 균열이 얼마나 강력하기에 그런 건지 호기심이 일었다.
“네. 본래 각성자 전력으로만 5위였는데, 지금은 10위권 후반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일반 군사력이 막강해서 입김이 아예 없는 편은 아닙니다.”
“차원 균열인가 뭔가가 그렇게 심각한 타격을 주는 현상인가?”
“네. 충분히 한 나라를 괴멸시킬 수도 있는 현상입니다. 거기서 나온 놈들은 거의 귀환자에 견줄 정도로 강한 놈들이라서, 이긴다고 할지라도, 각성자 전력에 엄청난 타격을 입거든요. 그중 애틀랜타 균열은 역대급이었구요. 귀환자가 있어서 나서 준다면 다행이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은 귀환자를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가 막심했죠. 그때도 동맹국인 일본이 재빠르게 도와줘서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거예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강력한지 한번 보고 싶구만.
강한 것에 대한 호승심이 일었지만, 어차피 이곳은 잠시 머무를 곳. 다른 데에 신경을 쓸 겨를은 없다. 돌아갈 방법을 찾는 데에도 얼마나 시간이 소모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애초에 갈 수나 있으려나.
아깐 의욕이 막 솟았지만, 사실 마계는 전방위로 차원이 봉인된 상황. 내가 들은 정보로는 마계는 과거 전쟁에서 패하고 차원을 봉인 당했다 들었다. 워낙 강력한 봉인이라 오랜 세월에도 굳건하다고.
그러나 그건 안쪽에서 풀지 못할 뿐. 바깥에서 접근하면 또 다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희망을 갖는 것이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어느덧 꽉 막혔던 도로가 슬슬 풀리며 차가 이동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는 바깥 풍경을 눈에 담으며, 집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