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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백발의 남자가 붉은 카펫이 깔린 황승단(皇陞段)을 오른다.
빡빡한 머리숱.
허리 위까지 내려왔지만, 차분하지 않고, 삐죽삐죽 제멋대로인 머리칼.
그리고 호전적인 눈빛.
야인 같은 느낌이 있지만, 복색은 그렇지 않다.
마나를 따라 살랑살랑 움직이는 붉은 털이 뒤덮인 망토.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마법으로 제련된 가죽 예복.
걸을 때마다 발자국에 붉은 마기를 피워 올리는 마력 신발까지.
얼추 황제로 즉위하는 사람 같은 모습이다.
그 얼추 황제로 즉위하는 것 같은 사람이 바로 나. ‘신시우’다.
“저런 쓰레기 같은 새끼가 감히 황제의 자리에 오를 줄이야.”
“외래종 따위를 ‘칠대제(七大帝)’의 자리에 올리다니… 마계도 끝물인가.”
“분노 조절도 못하는 격 떨어지는 새끼.”
“아무리 강자 숭상이라지만…….”
“쯧쯧쯧쯧. 명색이 대륙의 황제라는 것들이 처발려 놓고서는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꼴이라니.”
“그러게 말이오.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일부의 질타에 욕을 하던 ‘육황(陸皇)’들은 발끈했으나 이어지는 한 육황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놈이 황좌에 오르고 나면 무슨 보복을 당하려고 그렇게 주둥이들을 놀리는지 모르겠군.”
육황. 대륙의 황제라 불리는 그들은, 마계에 있는 72개 대륙을 각기 지배하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은 지금 황승단을 오르는 남자가 어떤 존재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 모두를 꺾고, ‘칠대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니까.
오래도록 마계를 지배하는 강자 숭상의 율법에 따라 지배자의 자리는, ‘종’에 관계없이 오직 강자만이 오를 수 있다.
그중 칠대제의 자리는 마계에서 ‘신’이 되지 않고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로, 마계를 통틀어 가장 강한 자들만이 오를 수 있는, 마계에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다.
그런 자리에 마계에선 처음 보는, 말 그대로 ‘외래종’이 앉았으니 충분히 배가 아프고도 남았다.
그러나 뭐 어쩌겠는가? 처발렸으면, 찌그러져 있어야지.
“쯧.”
‘데아’ 새끼, 말은 잘하네. 명색이 육황이라는 새끼들이 발려 놓고 아가리 터는 꼬라지라니.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오늘은 날이 날이니 봐주마.
평소에 저런 뒷담화를 씨불였다가 내 귀에 들렸다면, 놈들은 지금쯤 강냉이 수습하고 있을 것이다. 허나 오늘은 내 생의 가장 특별한 날. 오랫동안 기다려 온 날인 만큼. 마음을 너그러이 가지기로 했다.
감동적인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오르니, 이곳까지 오기 위해 거쳤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나를 건져 주었던 ‘외뿔 할배’와 그에게 얻었던 수많은 것들. 홀로 세상에 던져져 겪었던 고난과 역경들. 그리고 기막힌 순간에 만난 기연들까지.
고개를 들어 가까워진 식단(式段) 위를 바라봤다. 그곳에 즉위식을 돕는 이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며 내 얼굴에 미소가 짙어지는 그 순간이었다.
쩌적.
쇠가 갈라지면 그런 소리가 날까?
땅이 갈라지면 그런 소리가 날까?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금이 갔다. 그와 함께 우뚝 멈춰선 내 얼굴에도 금이 갔다.
이, 시발. 이거 뭐야
나는 본능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아니, 한참 모자란 놈이라도 그걸 잊을 순 없을 것이다. 나를 이 마계에 데려다 놓았던 기(奇)현상.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어떤 것을 타 차원으로 날려 보내는, ‘차원 균열’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쩌적.
아, 안 돼. 잠깐만. 야……! 시발! 안 돼!
뭔가 속에서 울컥하는 것은 있는데, 입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뒤늦게 움직여 보려 했지만, 이미 그 강력한 힘이 전신을 휘감고 있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억울했다.
분했다.
쩌저저적.
시커먼 균열이 나를 집어삼킬 만큼 커지자 순식간에 시야가 사라졌다. 마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 몸이 늘어지는 기분도 들었고, 빙글빙글 도는 느낌도 들었다. 이어서 속이 뒤집히는 듯한 느낌이 한차례 전신을 강타하고 나자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어디 붙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이상했던 감각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았다. 어지러움이 가라앉고, 내가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고, 눈을 떴다.
“하아…….”
어디선가 봤던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우습게도 그 풍경은 내 고향이었다. 마치 이전까지 겪었던 일들은 모두 꿈이라는 듯, 고향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금니가 꽉 깨물려졌다. 이어서 분노가 치솟기 시작했다.
“이…….”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기 시작했고, 심장을 감고 있는 열두 개의 마력 고리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고리의 힘으로 증폭된 마력이 폭발하듯 혈맥을 따라 온몸을 질주했다.
통제를 벗어난 내 마력이 주변을 초토화시킬 것이란 걱정은 있었지만, 그것은 내 머릿속에서 극히 일부분일 뿐이었고, 날뛰는 마력에 제동을 걸 수가 없었다.
구구구구…….
대기가 진동하며,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에 열기가 가득 차며 머리가 시원해졌다. 통제를 벗어난 강력한 마력에 반응한 마나들이, 일대를 미친 듯이 휘젓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강력한 마나 폭풍이 일대를 휩쓸기 시작했고, 결국 몸속에서 들끓던 분노가 고삐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뻗어나갔다. 그와 함께 내 입에서도 한 가지 단어가 튀어 나갔다.
“씨바알-!”
* * *
재해. 차원 균열을 넘어온 존재가 내뿜는 힘의 파동은, 그야말로 재해 수준이었다. 그걸 정면으로 받은 이들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맙소사…….’
‘디멘션 쇼크’ 이후 가장 심각한 차원 현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차원 균열’. 그것을 온몸으로 체험한 방위청장은, 전신이 뻣뻣하게 굳은 채 앞으로 뻗은 두 팔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존재가 등장과 동시에 뻗친 살기는, 뱀처럼 실드를 뚫고 기어들어 와 피부를 긁어 댔고, 급작스럽게 변한 기이한 기류가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폭발하듯이 퍼져 나간 힘의 파동은 주변의 모든 것을 부숴 버렸다.
도로 위에 선 청장과 그 부하직원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자욱한 먼지 속에서,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더욱 공포로 몰아넣는 것은, 이것이 고작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모두 무사합니까?”
청장은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이어폰 너머 각성자들을 불러봤다. 그에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각 지청 소속 각성자들의 보고가 이어졌는데, 생각보다 피해는 경미했다.
“모두 일단 물러나서 전열을 추스릅시다. 곧, 각 길드에서 지원을 올 겁니다.”
그렇게 후퇴를 하려는 찰나. 이어폰 너머에서 들려온 말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저… 혹시 욕설 못 들으셨습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말들이 청장의 눈이 번뜩 뜨이게 만들었다.
[어……! 저도 들은 것 같습니다.]
[그… 큰 소리로 시발… 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분 탓이 아니었나?’
사실 청장도 그 비슷한 것을 들은 것 같긴 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워낙에 주변 기류도 거셌고,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기에, 그냥 기분 탓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모두의 말을 종합해 보니 자신이 들은 것이 맞았다.
“그럼 균열을 넘어온 것이, 귀환자… 라는 겁니까?”
가장 신빙성 있는 추론. 그러나 그 추론에 대한 답을 듣기도 전에, 일이 일어났다. 자욱하던 먼지가 강력한 풍압에 순식간에 걷혀 나가더니, 이내 무지막지한 힘이 일대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흣……!”
그에 청장은, 앞을 볼 틈도 없이 바닥에 손을 짚고 엎드려야 했다. 그리고 결국 그 힘을 견디지 못한 그는, 배를 바닥에 대고 납작 엎드렸다.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지는 압력 속에서, 무방비 상태로 숨만 겨우 쉰 지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덧 그 존재가 그들의 앞에 도달했고, 익숙한 언어가 들려왔다.
“늬들은 뭐냐?”
* * *
그런 사람이 있다. 뭘 해도 운이 없는 사람. 태어나면서부터 운이 없어서, 왜소하고, 얕잡아볼 수밖에 없는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고, 학창 시절에는 그 때문에 왕따와 괴롭힘을 당했다.
사회에 나가 해방되었다는 생각을 가지자마자 직장 폭력이라는, 또 다른 괴롭힘이 시작됐다. 그 모든 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왜소하고, 힘없이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직장 내외부에서 지속적인 괴롭힘을 일삼았던 놈을 감옥에 처넣긴 했지만, 그는 직장을 잃어야 했다. 그 사건은 그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게 되었고, 학창 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진지한 자살 계획도 세우게 된다.
그렇게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갑작스럽게 다른 세계에 내던져졌다. 정말 운이 없게도 그곳은 강자만이 존재의 의미를 가지는 ‘마계’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강해지기 위해 무술을 갈고닦으며, 마나 수련과 기순환을 통해 마력과 기력을 쌓는다. 그런 곳이 바로 마계였다. 그런 곳에 던져진 남자는 당연히 벌레보다 못한 목숨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생에 다시없을 최고의 운을 맞게 된다.
그에게 엄청난 조력자가 나타난 것이다. 바로 퇴역한 ‘육황(陸皇)’. 한때 대륙의 황제였던 그 노인은, 그의 재능을 보고, 거두어 주고 키워 주었다. 그리고 그에 내재된 잠재능력을 끄집어내기 위해, 진귀한 영약으로 그를 환골탈태시켜 주기까지 했다.
그 결과 남자는 자신도 몰랐던 엄청난 재능을 각성하게 되었고, 그 재능은 그를 육황을 넘어, 스승이자 은인의 바람이었던 칠대제의 자리까지 올려다주었다.
비록 자리에 앉아 보지도 못했지만.
불끈. 그 X 같은 균열 때문에 칠대제의 자리에 못 오른 것을 생각하니, 주먹이 꽉 쥐어졌다.
“후…….”
그런데 저놈들은 뭐지? 뿌연 먼지 너머. 다수의 인간들이 느껴졌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하나같이 ‘기력’이나 ‘마력’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한국이라면 없어야 할 것들에, 순간 이질감이 느껴졌다.
혹시 한국이 아닌가?
20년을 넘게 살아온 한국. 지구라는 행성. 그곳에 저런 존재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곳은 순수하게 과학이 지배하는 곳이니까. 그러나 도착 직후 눈에 들어왔던 광경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물어봐야겠군.
원활한 질문을 위해 먼저 녀석들을 제압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일단 마력을 끌어올렸다. 단전에서 시작된 마력이 혈맥을 타고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력이 심장으로 모여들자, 심장을 감싸고 있는 열두 개의 마력 고리가 공명하며, 강력한 파동을 주변으로 쏘아냈다.
그에 근처에 있던 마나들이 내 강력한 마력에 반응하며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불같이 일어난 바람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한 먼지를 순식간에 걷어냈다. 이어서 눈앞에 폐허가 드러났다.
파괴된 수많은 건물들과 그 잔해들. 그리고 내 앞쪽 멀리 보이는 ‘그’ 놈들.
나의 강력한 마력 공명은, 넓은 범위의 마나들을 내 통제하에 끌어들였고, 머릿속에서 완성된 마나 조작 마법을 이용하여, 넓은 공간에 있던 마나들을 모조리 내 쪽으로 끌어들였다.
일대에 마나 농도가 급격하게 치솟기 시작했다. 몸이 살짝 무거워졌다. 라고 할 정도로 마나 농도를 높이고서야 멈췄는데, 마나를 통제하고 있는 내게는 살짝 무거워진 정도지만, 아마 놈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숨쉬기도 힘들 것이다.
일대를 짓누르는 마압은, 앞쪽에 있는 놈들뿐만 아니라, 사방에 퍼져있는 힘을 가진 놈들 모두를 무력화시켰다.
주변을 빙 둘러 있는 것이…….
아무래도 내가 균열로 넘어오는 것을 알고 있던 것 같았다.
물어볼 게 많겠군.
마나 필드를 펼쳐 주변을 분석하며, 천천히 걸었다. 마침내 넙죽 엎드려 헉헉대고 있는 그들 앞에 도달한 나는, 꽉 잡아 두고 있던 마나들을 풀어줘 마나 농도를 낮추며 물었다.
“늬들은 뭐냐? 왜 한국에 너희 같은 놈들이 있는 거지?”
농도가 거의 정상으로 돌아오고 난 이후에야, 맨 앞에 있던 놈이 겨우 몸을 추스르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황당함이 어린 눈빛을 내게 보냈다.
“그건… 우리가 묻고 싶은…….”
“되물어?”
섬뜩. 순간 놈의 얼굴에 섬뜩함이 지나가며 그대로 굳었다. 마계에선 내 질문에 되묻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반사적으로 나간 말이었는데, 그것이 놈의 혓바닥을 굳혀 버렸다. 그러자 눈치 빠른 옆에 놈이 물어왔다.
“당신께서 궁금하신 것은… 왜 이곳에 마력과 기력을 사용하는 자들이 있느냐는 것입니까?”
“그래.”
“설명을 드리자면 좀 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