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年)
이른 새벽.
마현은 무명현 현판을 지나, 와룡객잔의 앞에 섰다.
“오셨어요?”
제자들을 떠나보내며, 어딘지 알 수 없는 무거운 걸음으로 집에 돌아온 마현을 제일 처음 반긴 것은 구혜린이었다. 기척을 숨기지 않고 왔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제자들을 완전히 떠나보내며, 왠지 모르게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왔던 탓일까?
변한 바 없이, 자신을 반겨주는 처(妻)를 보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배가 많이 불렀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다가가 묻자 자신의 큼직해진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구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우리 아이, 아주 건강하게 태어나려나 봐요.”
“하하…….”
우리 아이란 말에, 기분은 더욱 좋아졌다.
“현이 왔구나.”
마침 객잔 밖으로 나오던 마전이 마현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예, 아버지.”
“잘 다녀왔느냐?”
“예.”
“하면 됐다. 곧, 아침이니, 밥이나 같이 먹자꾸나.”
“그리하겠습니다.”
변할 바 없이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
무겁던 마음은 점점 더 짐을 덜더니, 이내 깃털보다도 가볍게 변하여 완전히 흩어졌다.
이곳이 마현의 집이다.
와룡객잔과 와룡서원.
변치 않는 모습으로 그를 기다리는 곳이 있음에, 안도하고, 따뜻함을 느끼며 행복에 젖어든다. 다른 것은 무엇도 필요 없었다.
명예도, 돈도, 모두 급하지 않았다.
‘이 행복만 계속해서 품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마현은 웃을 수 있었다.
* * *
마현이 돌아온 이후로, 시간은 또다시 흘렀다.
이른 여름.
조금씩 뜨거운 태양이 얼굴을 번쩍이며 열기를 달굴 때였다.
응애- 응애-!
와룡서원의 방 한편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문 앞에서 노심초사 걸음을 어쩔 줄 모르던 마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나왔나 보구나!”
함께, 자리를 지키던 마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드르륵-!
방문이 열리며, 늙은 산파와 함께 초이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축하드려요, 시형. 듬직한 사내아이네요.”
품에 이제 갓 태어나 털이 듬성듬성한 작은 아기를 안은 초이영이 말했다.
“오오……!”
그를 보며, 마현은 저도 모르게 큰 감탄을 흘렸다.
알고 있었다 한들, 실제로 그를 보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이 아이가…….”
가까이 다가가,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채 온몸을 꼬물거리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며, 마현의 두 눈이 감격에 젖어들었다.
“득남(得男), 득남이로구나!”
마전은 기쁨을 감추지 않고 소리쳤다.
“축하해, 형.”
마정도 옆으로 다가와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을 보였다.
“내 아들…….”
아들을 낳았다.
첫 자식을 얻었다.
방 안, 지친 얼굴로 땀을 흘리고 있는 구혜린과 아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마현의 얼굴에, 더할 나위 없는 밝은 미소가 크게 번졌다. 온몸에는 전율이 타고 올랐다. 생명의 탄생이란 것이, 이리도 아름다운 일이었던가?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을 아직은 다 모른다 한들, 피를 타고 난 아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무언가 알 수 없는 따뜻한 감정으로 묵직해지는 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하하……!”
입가로는 행복한 웃음이 크게 치솟았다.
칠월의 보름에 가까운 때.
짧지 않은 마현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날이 찾아왔다.
* * *
그 뒤로, 일 년이 더 흘렀다.
천하 무림은 수많은 사건으로 준동하고 있다지만, 무명현만큼은 세속을 초탈한 듯 변할 바 없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여전히 마현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제자들은 온 힘을 다해 그를 따랐다. 정과 사의 경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서원의 지붕 아래에서, 점점 더 서로를 향해 친밀감을 느끼며 가까워져 갔다.
학문도 익히고, 친구도 사귄다.
미래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있어, 서원 공부의 의미는 바로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자라는 자식을 보며, 최근 더 소소한 행복을 즐기고 있는 마현의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사건이 전혀 없던 것도 아니었다.
마현의 아들, 마초(馬超)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백산이 무명현을 찾았다. 완전히 여행을 떠나기 전 아버지인 백일과 마현에게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큰 사건은 아니었다. 하나, 굳은 다짐을 말하는 백산과 대화를 나누며 떠나보낸 일인 만큼 의미가 없던 사건도 아니었다.
‘모두 흘러가고 있구나.’
그렇게, 시간도, 삶도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 * *
“저…… 결혼하기로 했어요.”
갑작스러운 선언은,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던 가족들의 얼굴에 당황을 만들었다.
‘근래 들어 가장 큰 사건이로군.’
마현조차도 놀란 눈이 되어, 마연을 바라보았다.
옆에는 머쓱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 남우가 있었다.
“딱히……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만한 남자도 드물다 싶더라고요. 살다 보니까.”
툴툴거리며 말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전혀 다를 터였다. 남우가 너무나 좋지 않은 한 저 여아대장부인 마연이 먼저 결혼이라는 이야기를 꺼낼 리가 없지 않은가?
“뭐, 때가 되기도 했지.”
마전이,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확실히, 이제는 마연도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실상 강호의 여인만 아니었다면 이미 성혼은 물론이요, 아이를 낳고 기르고 있을 때였다.
“남우라고 했지?”
“예, 아버님!”
이미 몇 번이고 마연과 함께 객잔에 들른 바 있어, 얼굴을 트고 있던 남우가 큰 목소리로 답했다. 어딘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묘한 점이 즐거운 이 친구는, 다행히도 마전의 마음에 쏙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우리 딸을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잘하겠습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사연을 듣고자 하니, 남우는 고아였다. 어린 시절 역병이 나돈 마을에서 부모를 잃고,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당시 종남의 기둥이라 불렸던 도선(道善) 진인이 남우를 구했다. 이후 종남에 입문하여 검을 갈고 닦았고, 고련 끝에 종남제일검, 태을검선이 되었다.
강호에 있어서는 흔한 이야기였다.
부모를 잃은 고아가 은인을 만나 기연을 얻어 성장했다. 하나, 그런 고아가 천하십대고수 중 일인이 되는 이야기만큼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남우의 재능도 보통이 아니었겠지만, 그 역시 엄청난 노력을 하며 성장했다는 뜻이다.
고아라는 사실에 주눅 들지 않은 채 성장하여 갖춘 밝은 성정은 더욱 대단한 부분일지도 몰랐다.
“친아버지처럼 모시겠습니다.”
“그리할 필요까지는 없네.”
“아닙니다. 가족이 없는 저는,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마 소저, 아니 연 매와 함께하며 와룡객잔에 들르는 나날들은…… 지금의 저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때이기도 합니다.”
매일 장난스럽기만 하던 남우가, 진중한 얼굴이 되어 말한다. 가족들은 그 진심을 깊이 느껴 따뜻한 미소를 지은 채 웃음을 보였다.
“하면…… 동생처럼 대하도록 하지.”
마현이 그러한 남우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살짝, 놀란 표정을 한 남우가 마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역시 무림의 가장 큰 위기였던 마교 침공에서, 최악의 적이었던 천마신을 쓰러트린 이가 마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른 모든 부분을 벗어나서라도, 무인으로서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가 바로 마현이었다.
‘조금 겁도 나지만…….’
어쨌든, 든든한 형님이 생겼다고 생각해도 좋을 노릇일지 몰랐다.
“잘 부탁하네, 매제.”
“예!”
그렇게, 남우가 와룡객잔의 가족들 품으로 뛰어들었다.
마연은 그저 얼굴을 붉힌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러면 이제 남은 건…… 운이뿐인가.”
지켜만 보고 있던 마정이 딱딱한 표정이 일품인 동생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운 오라버니가 있었죠…….”
마연이, 조금 걱정된다는 음색을 흘렸다.
아무리 여아라지만, 동생인 마연이 먼저 출가(出家)하는 것이 마음에 전혀 걸리지 않을 리는 없었다. 겉으로 표출하지는 않아도 소식을 접한 마운은 내심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쓸 터였다.
“인연이 전혀 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데…….”
조심스럽게 읊조리는 마현의 머릿속으로, 한 여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여인이라 부르기는 묘한가?’
그래도 외모만큼은 젊은 여인 못지않으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랐다.
* * *
“누가 내 욕 하나?”
정의맹 맹주 집무실.
어려운 일은 제갈천에게 모두 미뤄놓고, 침상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던 주화화가 가볍게 귀를 후볐다.
“뭐…… 오래 살았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지.”
오래 살다 보면, 참 많은 인연을 품게 된다.
아무리 나름대로 잘 살았다고 해도, 모를 새에 욕할 이들이 한둘이 아니니 의미를 두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이었다.
“흐아암…… 그나저나, 이놈은 왜 안 오는 거야?”
똑똑.
“마운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범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였던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읊조리던 주화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 열렸다. 들어오거라.”
“예.”
문이 열리고, 조금 핼쑥한 얼굴이 된 마운이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내부로 들어섰다. 그를 본 주화화가 히죽거리는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요즘 많이 힘들어 뵌다.”
“……지금 정의맹 전체를 통틀어서 한가한 분은 맹주님밖에 없으십니다.”
그야말로 중원의 사방에서 난리였다.
북에서는 여진이, 남에서는 남만이, 바다에서는 왜적들이 침공을 시작했다. 중원이 무슨 제 땅인 것마냥 노니는 놈들을 다 막으려 드니 손과 발이 부족하다. 당연히 일거리도 그만큼 많았다.
“애초부터 넌 형식적으로 이 자리에 있기로 한 거잖아. 천이 녀석이 말 안 하더냐?”
중년이 넘은 정의맹 총군사를, 마치 동네 꼬마 부르듯 지칭한다.
주화화에게는 분명 그러한 자격이 있지만, 어지간한 젊은 여인보다 더한 미모의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 되기도 했다.
“알고야 있지요.”
“솔직히 내 나이 먹고 강호사에 이리저리 개입하는 것 자체가 추태야, 추태. 뭐, 진짜 막지 못해서 뚫린 상황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힘들어도 어찌어찌 버티고 있지 않으냐?”
“많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피를 흘리기 싫으면 강해지면 돼. 골방에 있을 늙은이를 끄집어내 억지로 자리에 앉히고 있을 필요가 없을 만큼.”
옳은 말이다.
하나 심정적으로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도 따질 바도 아니니, 마운의 입에서 늘어나는 것은 한숨이었다.
“어쨌든, 부탁한 건?”
“여기 있습니다.”
마운이, 품에서 서찰 한 통을 꺼내 주화화에게 건넸다.
서찰은 가벼웠지만, 결코 그 값어치마저 가볍지는 않았다. 모두가 바깥에 신경 쓰고 있는 이때, 중원 내부에 대한 개방의 조사 자료가 바로 주화화의 손에 쥐어진 서찰이었다.
한창 밖의 일도 바쁜 때에 어째서 주화화가 내부를 더 신경 쓰는지는 마운으로서야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주화화가 맹주령으로 지속적인 정보 전달을 명했으니 어길 수도 없었다.
“흐음…….”
신음을 흘리며, 보고 있던 서찰을 덮은 주화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봤다. 보름 뒤에 또 부탁하마.”
“……밖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바쁩니다.”
“몰라서 시키는 일 아니야.”
“물론 내부도 중요합니다. 하나 지금 밖에서는…….”
“운아.”
“예.”
“말하지 않았느냐? 밖은 밖의 사정일 뿐이다.”
“매정하십니다.”
결국, 참지 못한 마운이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매정하지. 한데, 매정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느냐? 내가 두 팔 걷고 전장에 직접 뛰어들랴?”
“……그런 뜻은 아닙니다.”
“녀석…… 답지 않게 여려서는. 어휴.”
한숨을 내쉰 주화화가,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언제 보더라도 놀라운 그녀의 폭발적인 몸매가 만천하에 여지없이 드러났다.
누가 그녀를 정의맹 맹주인 강호제일배분의 개방 태상장로라 여길까? 마운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회피했다.
“잘 듣거라, 운아.”
“……예.”
“사람에게는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있다. 너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결코 아니야. 분수(分手)를 아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그런 의미에 있어서, 난 내 분수를 알아. 운이 좋아 오래 산 덕이지. 그래서 정의맹주 자리도 그토록 거절하려 했다. 하나 어쩌겠느냐? 이미 맡았으니 책임은 져야지. 그런 상황에서, 내 분수에 맞게, 지금 당장 가장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일이다.”
주화화가, 품에서부터 한 통의 서찰을 꺼내 내려놓아 마운의 눈앞에 펼쳤다.
“읽어보았느냐?”
“……태상장로님께만 전하는 비서(秘書)라고 들었습니다.”
“읽어보아라.”
“…….”
“어서.”
주화화의 재촉에, 이기지 못한 듯 서차를 들어 올린 마운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대다수가 평안한 강호의 이야기를 적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굉장히 많았다. 심지어 알 수 없는 미지(未知)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는 것만 같은 흔적도 보였다.
“이건…….”
마운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강호는 조용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바야, 바깥의 일로만 소란스럽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여전히 중원 무림은 내부에서도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정의맹과 흉왕성이 손을 잡았다 한들, 그를 마뜩잖게 여기는 이들은 너무나 많았다.
내부도, 외부도 적으로 들끓는다.
“안이 무너지면, 바깥의 두꺼운 철벽도 깨지기 쉬운 유리만 못 한 것이 되는 게다. 결코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거라.”
“……맹주님.”
매일 놀고만 있다 생각한 주화화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본 탓일까? 마운의 눈에 옅은 감격이 깃들었다.
“아, 그리고. 그놈의 맹주님 소리 좀 그만하고. 내가 언제부터 네놈의 맹주였냐?”
“하면…… 태상장로님.”
“…….”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 말고…….”
“따로 더 있습니까?”
“…….”
주화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고개를 내저으며 바깥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나도 모르겠다. 이만 가보거라.”
“참, 심심도 하십니다.”
“요즘 조용하다 싶었더니, 또 대드는 거냐?”
“할 말 하는 것뿐이지요.”
“에잉, 됐다, 됐어. 어서 가 보거라.”
“알겠습니다.”
주화화의 축객령에, 웃음 지은 마운이 방문 바깥으로 향했다. 주화화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그 뒤를 섭섭하다는 시선으로 좇는다.
그러더니 이윽고.
“참.”
방문이 닫히기 전, 마운의 발목을 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밤에 들러라.”
“적적하십니까?”
“맞고 싶은 게냐?”
“쿡쿡,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못된 놈.”
진중한 이야기가 지나가자마자, 자신을 놀려 먹는 못난 사손에게 마뜩잖은 말투로, 웃음을 보인 주화화가 다시 한 번 크게 손을 휘저었다.
“가버려!”
“예, 예. 다녀오겠습니다.”
여전히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마운이 방문을 닫고 완전히 떠났다.
홀로 남은 주화화는, 마운에게 건넸던 서찰을 다시금 펼쳐 보이며 눈을 빛냈다.
‘대체 무엇이냐?’
겉으로 표가 나는 것은 없지만, 무언가 찜찜한 느낌.
그 감각이 계속해서 서찰을 통해 그녀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대체 무엇일까?
주화화의 의문은 해결되지도 않은 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만 갔다.
4. 의지
북에서는 여진족의 대족장(大族長) 라무찬이 중원 무림을 향한 진군을 선언했다. 단순히 무공 수준으로만 보자면 중원 무림에 비해 뒤처지는 여진족이지만, 그들이 가진 기마술(騎馬術)과 궁술은 가히 천하제일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해서 정의맹과 흉왕성에서는, 가장 발이 빠르고 날렵한 자들을 모아 북으로 보내 현무단(玄武團)을 구성해 방진(方陣)을 펼쳤다.
그렇다 하여도 말을 타고 날뛰는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무공으로 단련된 발 빠른 이들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해결책은 빠른 속도로 마련되었다.
현무단 일대주(一隊主)로 파견된 황금세가의 천재, 황여진이 만들어 낸 현무진(玄武陣) 덕이었다.
압도적인 기동력을 제압하는 포위 형식의 현무진을 활용하기 시작한 현무단의 분전(奮戰)은 여진족의 흉악한 말발굽이 중원 땅에 들어서는 것을 완벽히 차단하고 있는 중이었다.
동으로는 해적왕(海賊王)이라 불리는 레이쿠를 막기 위해 청룡단(靑龍團)이 파병되었다. 몇 되지 않는 범선을 가진 해적 떼에 비해 압도적인 숫자의 병력파견이었지만, 매일 물 위에서 살아온, 물길에 익숙한 해적을 상대하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나, 그 역시도 해남무후, 공서하를 필두로 한 해남파의 지원이 이어지며 큰 문제 없이 해결되었다.
평생을 섬에서 살며, 바다를 닮은 검을 갈고 닦은 해남파 무인들은 해적에 못지않은 물길 위의 전투를 보여주며 청룡단이 처해 있던 위기를 단숨에 타파(打破)했다. 해남무후가 수상비(水上飛)를 펼치며 달려나가, 해적왕 레이쿠의 왼쪽 팔을 자른 이야기는 동해 인근 부락에서는 전설처럼 울려 퍼지고 있을 정도였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북에서도, 동에서도 중원 무림은 승기를 잡았다. 오랜 세월 다투기만 했던 정, 사 두 세력이 손을 잡아 펼친 공동전선의 힘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훨씬 더 강력한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남측(南側).
남만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 * *
작금 남만(南蠻)의 지배자는 남만왕(南蠻王)이라 불리는 맹획(孟獲)이었다.
촉한(蜀漢)의 제갈공명에게 허망하게 당해,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수치를 당한 고대의 남만왕과 같은 이름인 그는 북과 동, 남을 통틀어 가히 최강의 적이라 불리는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고대의 맹획과 같이 용맹하고, 사나웠으나, 결코 어리석지는 않았다. 범의 용맹함과 뱀의 지혜를 갖추었다 하여 호맹사교(虎猛蛇狡)의 별명을 가진 그는 남만 특유의 복잡한 수풀 지형과 독을 이용해 정, 사 연합전선에서 남측으로 파병한 백호단(白虎團)을 철저히 유린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남만의 성세(聲勢)가 보통이 아님을 읽은 정의맹과 흉왕성에서는, 세 개의 단 중에 백호단에 가장 많은 힘을 실었다.
독에서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는 사천당가(四川唐家)의 이름 높은 독왕(毒王)과 흉왕성의 사천왕 중 일인인 염라귀왕이 함께 전장에 나섰으니, 나름대로 자신감도 있었다.
한데 전장의 상황은 세 방위(方位) 중 최악에 속했다.
남만왕은 사천의 독왕조차도 쉽게 해독하지 못할 독을 보름에 한 번꼴로 개발하여 살포했으며, 눈에 쉽게 보이지도 않는 독물(毒物)을 수풀 사이에 감춰 염라귀왕의 가마꾼들을 향해 풀었다.
두 초고수의 발목이 예측지 못한 남만왕의 독술(毒術)에 묶이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남만의 독인(毒人)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수풀 빛을 닮은 대롱을 이용해 풀 속에 숨어 독침(毒針)을 쏘아대며 백호단을 유린(蹂躪)하는 교활한 전법을 펼쳤다.
속이 답답할 일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큰 피해를 감수한 돌격 작전까지 감행한 적도 있었다. 하나, 남만왕과 독인들은 중원 무인들의 생각보다 몇 배나 교활했다. 그들은 결코 정면으로 백호단의 무인들과 싸우지 않았다. 숨어서 독침을 쓰다 위치가 발각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리 준비해 둔 땅굴 속으로 몸을 숨겼다.
남만인들만이 길을 아는 미로처럼 얽힌 땅굴 속으로 쫓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에 불과했다. 쫓아도 잡을 수 없고, 멀리 있으면 당하기만 하니, 그야말로 귀신놀음에 당하듯 백호단 무인들은 목숨을 내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끄으윽……!”
“크아아……!”
남만의 독인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온몸, 혹은 신체 일부에 독침을 맞고 비명을 내지르는 무인들이 주변에 한가득했다. 검이 아닌, 독에 당했다 보니 그 꼴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전신에서 핏물을 쏟아내는 이에서부터, 게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은 이, 온몸 구석구석 피어오른 고름에 기절할 듯 비명을 내지르는 이까지.
심지어, 독이 퍼져 새카맣게 죽기 시작한 자신의 신체 일부를 과감하게 잘라 내는 무인들도 보였다.
그런 무인들 사이로, 칙칙한 회색빛 무복을 입은 앳된 청년이 빠르게 뛰어다녔다. 양손에는 새하얀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는데, 그 빛에 닿으면 독으로 괴로워하던 이들의 상태가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고맙네, 소신의(小神醫).”
“덕분에 살았어.”
여전히 고통의 여운이 남은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하는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청년이 다시금 걸음을 바삐 뛰었다.
‘조금 더 빨리……, 더 많이……!’
부족하다.
아무리 온몸의 진기를 다 짜내어도, 한시가 급하다고 뛰어도 여기 있는 모두를 살릴 수는 없다. 알고 있다. 하나 조금 더 열심히 한다면, 한 명 정도는 더 살릴 수도 있었다.
그 한 명을 위해 청년, 백산은 뛰었다.
계속해서 뛰어다니며 쉴 새 없이 진기를 쏟았다.
이마 위로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땀이, 얼마 지나지 않아 비에 적신 듯 쏟아져 내릴 때쯤, 주변에 더 이상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백산의 무릎이 풀렸다.
털썩.
“괜찮은가!?”
놀란 무인들이 재빠르게 달려와 백산을 부축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힘겹게 열리는 입술 사이로는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리하지 말게. 한 사람 목숨도 귀하지만, 당장 여기서 자네가 쓰러지면 후일 수십, 수백의 목숨이 사라질 수도 있어. 이 지독한 남만 땅에서, 소신의 자네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지 않나?”
소매춤에 매화꽃이 그려진, 화산파 매화검수의 말에 주변 무인들이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신의, 백산은 지옥 같은 남만의 전장에 있어 몇 없는 희망이었다. 험난한 남만의 전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뛰어난 무력과 체력에, 지독한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의공(醫功)까지 익힌 몇 안 되는 희망!
그가 쓰러진다면 안 그래도 승산이 없는 싸움이 훨씬 더 힘들어지게 될 터였다.
주변 무인들의 걱정도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살짝 미소를 보인 백산이 다시금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한꺼번에 기력을 많이 소진한 탓에 잠시 탈진 현상이 찾아왔지만 이제는 괜찮다. 아직 그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남만왕의 교활한 계략에 넘어가, 지옥과도 같은 남만까지 뛰어든 수많은 백호단 무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힘을 내야 해.’
고작 이 정도 어려움조차 이겨내지 못해서는 역마왕, 그 무시무시한 사내를 뛰어넘을 수 없다.
‘아직 갈 길이 멀어.’
백산은 이를 악물었다.
떨리는 무릎을 부여잡고 앞서 걸어나갔다.
“……대단한 청년이야.”
모두가, 그런 백산의 뒷모습을 보며 감탄한 표정을 흘렸다.
큰 등이었다.
언젠가는 천하를 품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대한 등이 그들의 앞에서 나아가고 있다.
하기에, 지옥과도 같은 남만의 전장에서 그들은 힘을 내 다시금 싸울 수 있었다.
* * *
반가운 두 얼굴이, 와룡서원에 찾아왔다.
“오랜만이로구나.”
늦은 오후, 서원 내로 들어선 익숙한 두 사람의 얼굴을 마현이 반갑게 맞이했다.
“예, 스승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얼굴을 보지 못한 일 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꽤나 의젓한 표정을 보이게 된 정순욱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건강해 보이시네요.”
이제는 완연히 꽃이 핀 미모를 빛내는 소수린의 시선이, 마현의 뒤편에 자리한 구혜린과 그 품에 안긴 마초를 향했다.
“사내아인가요?”
“척 보아도 알 정도란 말이냐?”
마현의 웃음 지은 물음에, 소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을 닮았어요.”
“하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구혜린이, 웃는 마현을 잡아끌었다.
제자라고는 하지만, 오랜만에 집을 찾아온 손님이 아니던가?
언제까지고 앞에만 세워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예, 스승님.”
두 스승과 두 제자가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고 보니, 정말로 많이도 컸다 싶은 제자들의 모습에 마현의 얼굴에 다시금 웃음이 흘러나왔다.
“고작 일 년 못 본 새에, 많이도 성장한 것 같구나.”
“그, 그런가요…… 하하.”
어색한 웃음을 지은 정순욱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본인의 얼굴이야 매일 보아오다 보니, 크게 뒤바뀐 것을 느끼기 힘든 탓이다.
“몸은 다 나은 게냐?”
이어진 질문에는, 저도 모르게 웃고 있던 얼굴이 굳어졌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모두가 떠난 후, 한동안 정양을 결심한 이후에도 마현을 찾아오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 탓이었다. 괜히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마현이 심려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하나, 역시 부질없는 짓이었다.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라고 했던가?
마현은 제자들의 행방과 소식을 이미 모두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직 완전히 다 나은 건 아닙니다.”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수련을 한 탓이다.”
“하하…… 역시 스승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외상이야 약간의 흔적을 제외하면 모두 나았지만, 내상은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실상 살아남은 것만 해도 기적이었단 상황인 만큼, 지금의 몸 상태만 하여도 다행이라 볼 수 있었다.
“늘 말하고 싶었다만, 남과 경쟁하려 들지 말거라. 또한 조금만 급한 성격을 버린다면 훨씬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게다.”
정순욱의 약점이다.
언제나 남과 비교하기에, 저도 모르게 조급해진다.
그 덕에 더 노력할 수도 있지만, 과하기까지 한 급한 성장은 독이 되기 마련이었다.
“스승님의 말씀,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이미 자신의 약점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정순욱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문제를 알고 있어도, 고치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예쁜 아이네요.”
두 사제(師弟)가 대화를 하는 사이, 소수린의 눈은 계속해서 마초에게로 머물러 있었다. 마현의 아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유독 더 정감이 가고 관심이 갔다.
“와서 한번 만져 보려무나.”
구혜린이 그런 소수린을 향해 말했다.
“그,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지.”
망설이던 소수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마초를 향해 다가갔다.
“새하얗네요.”
“아직 아기니까.”
“작아요.”
“호호…… 아기지 않니? 그래도 처음 태어났을 때와 비교하면 엄청 큰 거란다. 산파 말로는 또래 중에서도 큰 편이라고 했고, 호호.”
새하얀 피부에, 앙증맞게 꼬물락 거리는 손발을 보며 감탄에 빠져 있던 소수린의 손길이 조심스럽게 마초의 볼가를 향했다.
“아앙……!”
“어멋!”
활짝 핀 웃음을 지으며 소리치는 마초 덕에 깜짝 놀란 소수린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다 이내 그 웃는 모습에 반한 듯, 감탄을 토한다.
“와…… 정말 예뻐요.”
“호호…… 우리 초아가, 수린이 네가 마음에 드는가 보구나. 한번 안아볼래?”
“아, 안는다고요? 제가?”
“어렵지 않단다. 자, 이렇게 해서…….”
마찬가지로, 두 여(女)사제의 대화도 부드럽게 흘러갔다.
선선한 가을의 바람이 서원 내부를 부드럽게 감쌌다.
* * *
“그래서, 전장으로 가겠다고?”
오랜만의 만남에 대한 해후(邂逅)를 푼 직후, 두 제자가 마현을 향해 한 말이었다.
“예. 남만의 전장이 굉장히 혹독하고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아이들은 불과 얼마 전, 전장을 겪었다.
스스로 나아가기 위한 힘을 기르기 위해서인 일이었지만, 혹독한 경험이었을 터다. 한데 또다시 제 발로 전장으로 향하겠다고 한다. 스승으로서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이었다.
“꼭 그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느냐?”
“……예.”
짧게 답하는 소수린의 목소리에,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꼭 갚아줘야 할 놈이 하나 있거든요.”
정순욱의 목소리에도 흔들림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렇구나.”
말릴 수는 없다.
이미 자신들의 갈 길을, 스스로 정하기 시작한 아이들이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성인(成人).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알며, 결정할 줄 아는 다 큰 제자들이다.
“그것이 너희의 뜻이라면 말리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스승님.”
“어차피 말린다 한들, 갈 것 아니냐?”
두 제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둘이서만 함께 지낸 기간이 꽤 있었던 덕인지, 꽤나 호흡이 잘 맞는 모습이었다.
“참…… 산이도 그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직후, 정순욱이 불현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백산이?”
“예. 남만에 소신의라고 하여, 덩치가 큰 곰 같은 청년이 하나 있다는데…… 아무리 들어봐도 그놈 같아요.”
“흐음…… 산이도 험한 길을 택했구나.”
“독한 놈이니, 어떻게든 살아남겠죠. 뭐.”
괜한 정순욱의 툴툴거림에서 친우를 향한 애정(愛情)이 느껴진다. 처음, 정순욱이 와룡서원에 들어올 때까지만 하여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하나 시간은 흘렀고, 많은 것을 바꾸었다.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백산은…… 강하니까요.”
소수린이,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아닌 척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이 굉장히 강한 그녀다. 그만큼이나 뛰어난 무공 실력과, 학문에 대한 깊이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도 백산을 인정하고 있다. 그의 강함을 알기 때문이다.
“쳇…… 분하긴 하지만, 대단한 녀석이니까요.”
정순욱도 그런 소수린의 의견에 동의했다.
‘정말 큰 산이 되었구나…….’
어린 시절, 백산을 바라보며 큰 산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늘 엿보았다.
시간이 흘러, 백산은 성장하였고, 뛰어난 친구들에게까지 인정받는 큰 사람이 되어다.
‘별호가 소신의라고 했나?’
아직 천하를 아우르는 거대한 산은 아니라고 한들, 이미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담고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제자의 별호가 유독 마음에 든다.
입가로 흘러나오는 뿌듯한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너희들을 응원하마.”
“감사합니다.”
두 제자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면 저희들은…….”
이만 떠나야 할 때다.
정순욱의 몸 상태 역시 아직 완전히 정상은 아니었지만, 머지않아 완벽히 회복할 테니 남만으로 출발하기에는 적절한 시기였다.
“아, 잠시.”
떠나려는 제자들을 향해, 손을 뻗은 마현이 고민 끝에 마황고를 열었다.
갑작스럽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거대한 검은 구멍이 생성되고, 그곳에서 물건이 나오는 모습에 두 제자를 비롯한 구혜린까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태껏 마현이 단 한 번도 남들 앞에서 마황고를 연 적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졸업 선물이라고 할 만한 것을 못 주었더구나.”
주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황고로부터 총 다섯 개의 물건을 꺼내놓은 마현이 말했다.
“가져가거라. 그리고 백산을 만난다면 이것을, 명이와 영령이에게는 이것들을 나누어 주거라.”
마현의 손가락이, 방 안의 마루에 놓인 다섯 개의 물건을 순서대로 가리켰다.
“마지막 이것이, 수린이 네 것이다.”
세 가지 보물을 지나쳐, 정순욱은 하나의 목걸이를, 소수린은 한 자루 검을 가지게 되었다.
“여태껏은 봉술을 펼쳤을 터나, 수린이 네 재능은 검술에 더 큰 힘을 발휘할 터다. 와룡강림공은 검술로 쓰기에도 부족함이 없으니, 가는 길에 단련해 둔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
척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보물들을 떠안게 된 두 제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자, 가거라.”
마현은 더 이상 두 제자를 붙잡지 않았다.
* * *
며칠 뒤, 한 장의 서신이 마현에게 도착했다.
스승님, 잘 지내고 계시지요?
명이옵니다.
이렇게 글로 연락을 드리는 것은 처음인지라, 괜히 어색해지네요. 하하…….
현재 저는 영령이와 함께 북경에서 회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시험에 합격한 이후, 당당하게 무명현으로 복귀할 때 연락을 드리려 했는데…… 그러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도 같고 하여서, 이렇게 서신을 보내게 되네요.
조만간, 못난 제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시험에 합격하고 두 발로 스승님을 찾아뵙겠습니다.
하니, 이번 한 번만 짧은 서신 한 통으로 용서해주시기를 바랄게요. 하하.
불초제자(不肖弟子) 양명 올림.
양명 특유의 밝은 분위기가 가득 느껴지는 서신이다. 그를 조심스럽게 접어, 품으로 갈무리한 마현의 입가로 따뜻한 웃음이 지어졌다.
‘모두가 나아가고 있구나.’
얼마 전에는 먼저 졸업했던 다섯 제자에게서 소식이 있었다. 제법 잘 나가는 상단을 꾸리게 된 녀석은 서원 운영에 보탬이 되라고 금자까지 더해 서신을 보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양명에게서도 연락이 온 것이다.
떠나간 제자들에게서, 기다렸다는 듯 속속 연락이 온다.
모두가 성장하여 각자의 의지를 품은 채, 새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정말 좋구나.’
어린 제자들과 함께했던 과거를 떠올린 마현의 입가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하나 부족함 없는 가을인 것만 같았다.
* * *
중원 무림은 환난을 앓고 있었다.
동에서, 북에서, 남에서, 모두가 중원을 먹잇감으로만 바라보는 짐승투성이다.
그런 와중에 다행인 점이라면 바로 서측의 침묵(沈黙)이었다.
서쪽에는 마교를 제외한 이후에도 아주 강력한 세외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장, 포달랍궁.
대라마 라흐마와 신녀를 필두로 한 포달랍궁의 전력은, 농담 삼아 마교에 비견될 정도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하나, 마냥 헛소리로만 취급할 일도 아니었다.
포달랍궁과 십만대산은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자리 잡고 있다. 호전적인 마인들이, 그런 포달랍궁을 지켜만 보고 있었을 리는 없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싸움이 있었고, 포달랍궁은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다.
건재(健在)한 채, 침묵하며 힘을 쌓았다.
포달랍궁의 침묵은 분명 중원 무림에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라 볼 수 있었다.
“……곧 때가 다가오는가.”
그러한 서장, 포달랍궁의 지하.
정좌(正坐)한 채, 투명한 기둥을 바라보고 있는 대라마 라흐마의 입이 열렸다. 갈라진 목소리에는 짙은 탄식이 담겨 있었다. 이 년 전, 추영을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그의 몸은 몇 배 이상 수척해져 있었다.
그 날 이후, 하루가 멀다고 번뇌(煩惱)에 빠져 매일 같이 자신을 스스로 시험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지금도 그는 정좌한 채 고민하고 있었다.
‘아직…… 아직……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막을 수 있다.’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혈세의 도래를 막을 수 있었다. 두 주먹을 움켜쥐고, 포달랍궁 특유의 뇌력이 흐르는 내기를 일으키며 숨을 몰아쉰다. 주먹을 내뻗기만 하면 된다. 단숨에 내질러, 기둥을 부수면 사자의 귀환은 모두 깨어진다.
하나 라흐마는 끝내 손을 뻗지 못했다.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하여 정신을 제압하려 하였지만, 결국 손을 내리고 만다.
“부처시여…….”
어찌하여 그에게 이런 큰 시련이 내려왔는지, 그저 마음이 무거움에 깊은 한숨을 내쉴 때였다.
쩌적-!
“……!!”
투명한 투명 기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라흐마의 뇌력이 닿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기현상(奇現狀)이다.
“서, 설마…….”
무언가를 떠올린 라흐마의 두 눈이 크게 떨렸다.
‘이, 이건 너무 빠르지 않은가!’
약조한 이 년.
사자의 생환에 필요한 최소 시간이다. 그 이상 단축을 하는 것은 아무리 사자의 의지가 강인하다 한들 불가능하다. 죽음과의 싸움이란 것이, 그리 쉬울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근 이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약속한 이 년을 꽉 채우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상황인 만큼, 라흐마는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쩌저적-!
하나, 눈 앞에 펼쳐진 현상은 조금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나아갔다.
“오, 온다…… 그가 와!”
쩌저저적-!
거대한 투명 기둥이 머리끝까지 균열을 나타내며, 천천히 무너져갔다.
구구구-!
타다다닥.
투명 조각이 허공으로 흩날리며 대지가 울음을 토했다.
쩌적-!
이내 거대한 짐승이 아가리를 벌리듯 투명 기둥의 중단이 크게 벌려졌다. 멈추어 있던 백천악의 육신이, 조금씩 꿈틀거리며 박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역동하기 시작한 심장 소리는 마치 거대한 울림과 같이 지하 내부를 가득 메웠다.
“아아아……!”
붉은 천으로 감춰진 라흐마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고 일어날 일들이 라흐마의 눈에는 선명히 보였다. 세상은 피로 씻길 것이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한다.
천상, 천하가 모두 붉은 빛으로 물들지니…….
“혈세의 마신이…… 오는구나!”
이제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번쩍-!
감겨 있던 두 눈이 열리며, 붉은빛이 장내를 휘감았다.
5. 마설과 모용청의 사정
와룡서원의 일기 제자들은 떠났지만, 여전히 와룡서원은 또 다른 미래를 품은 채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한 미래 중 하나.
마설에게는 최근 즐거운 일들이 가득했다.
본래 좋아하던 무공이야 말할 바도 없고, 싫기만 하던 학문도 조금씩 길이 보이고 있었다.
뿐만이랴?
친구들과도 눈에 띄게 확연히 친해졌다.
매일 밤 같이 잠을 자도 어딘가 어색했던 사이였는데, 그조차도 시간이 흐르며 너무나 쉽게 해결되었다. 오죽했으면 근래에는 자기 전에 수다를 떠느라 밤잠을 다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설아 너, 요즘 가슴이 꽤나 봉곳 솟은 것 같아.”
사마 가의 요녀라는 사마아현이, 진중한 눈빛으로 마설의 가슴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 정말?”
깜짝 놀란 마설이 자신의 양손을 들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자신의 가슴께를 주물럭거렸다. 매일같이 보고, 만져서일까? 그녀로서는 큰 차이를 느끼기가 힘들었다.
“헤에…… 그러면 설아가 우리 중에 무공도 제일이고, 가슴도 제일이 되는 거야?
남궁성아가, 감탄을 흘리며 박수를 친다.
“그런 셈이지.”
사마아현이, 팔짱을 낀 채 어딘지 모르게 중년 아저씨를 떠올리게 하는 표정으로 뿌듯한 미소를 그렸다.
“그만 놀려!”
그제야, 친구들이 자신을 놀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설이 버럭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인걸?”
남궁성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한다.
“맞아, 맞아. 진심이지만 놀리는 것뿐이니까!”
사마아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설의 말을 부정(?)했다.
“말이 이상해!”
“아하하.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남궁성아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중요해!”
“왜? 모용가의 차기 검왕님 때문에?”
사마아현의 눈이, 초승달처럼 크게 휘었다.
“……에?”
마냥 날뛸 것처럼 베개를 집어 들던 마설의 움직임이 멈춘 것도 동시였다.
“맞아, 맞아. 그러고 보니 중요할 수도 있겠네. 요즘 청이가 계속 설아를 찾아오잖아?”
“성아, 너도 느끼고 있던 거지? 벌써 며칠 째야?”
“보름이 넘었지?”
“아아니, 그건 말이지이…….”
“에헤이, 설아. 우리도 이제 알 것 다 아는 나인데, 모른 척하지 말자고.”
기껏해야 지학(志學)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의 기막힌 대화를 마현이 들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헛웃음을 짓고는 말문을 잇지 못했을 터였다.
하나, 그 또래에 속한 본인들의 입장에서야 나름 진지했던 것일까? 얼굴을 붉힌 마설이 어쩔 줄 모르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 그런 것 절대 아니라니까. 모, 모, 모용 소협하고는 그런 사이가…….”
“오오, 모용 소협이래. 꺄아! 들었어 아현아?”
“물론이지. 무언가 어색한 듯, 어색하지 않은, 두근거리는 사이. 최고지. 최고야. 연애소설에나 나올법한 감정 아냐? 꺄아!”
“저, 정말 너희들……!”
당황한 마설이, 베개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줄 때였다.
“……커흠.”
바깥에서부터, 커다란 기침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재잘거리던 세 여아의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약속이라도 한 듯 멎었다. 조용히 입가에 맴도는 웃음기는 여전했지만 말이다.
“너의 그, 모용 소협 오신 것 같은데?”
사마아현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마설을 향해 말한다.
“아니래도!”
“하긴, 모용 소협이 잘생기기는 했지~”
남궁성아까지 거들고 나서자, 마설의 머리가 또다시 팽팽 돌기 시작할 때였다.
“커험, 커험……!”
바깥에서, 한 번 더 커다란 기침 소리가 들렸다.
“……다녀올게.”
더 이상 기다리게는 할 수 없는 노릇인지라, 조심스럽게 베개를 내려놓은 마설이 자신의 봉을 챙겨 들어 방 바깥을 향했다.
“오늘은 꼭 손잡고 와야 해!”
“힘내!”
뒤편으로는, 사마아현과 남궁성아의 의미 깊은 응원이 이어졌다.
* * *
문 바깥에는 예상했던 대로 모용청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방 밖으로 나온 마설을 어딘지 모르게 차가워 보이는 눈으로 스쳐 바라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지.”
“…….”
마설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은 채, 그러한 모용청의 뒤를 쫓았다.
밤은 어두웠으며, 조용했다.
저벅, 저벅.
들리는 것은 두 사람의 걸음 소리뿐이었다.
서원을 조금 벗어나, 인적이 드문 숲길로 들어서서는 그러한 현상이 더 심해졌다.
저벅, 저벅.
들리는 것은 걸음 소리요.
‘자, 잘 생기긴 했지?’
보이는 건 모용청의 얼굴뿐이었다.
이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새하얀 피부와, 어딘지 모르게 무심하지만 반짝거리는 눈동자, 오뚝 솟은 코, 모용가 제일 기재라는 모용청의 외모는 분명, 서원의 사내들 전부를 통틀어서 제일 아니, 천하를 상대로 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멋진 얼굴이었다.
‘가, 갑자기 더 신경 쓰이게끔…….’
실상 모용청이 마설을 불러내는 이유는 언제나 한결같다.
무공 대련.
변수를 자주 만들어내며, 다양한 싸움 방식을 보이는 마설과의 대련은 수련에 큰 도움이 된다. 무공의 성장을 벗어나서라도, 실전 감각을 기르기에도 좋은 편인 탓이다. 마설 역시 모용청과의 대련을 통해 무공의 성장을 보고 있으니,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한데, 그런 평범했던 일이, 며칠 전 사마아현에게 들킨 이후 조금 변했다.
매일같이 놀리는 두 친구 탓일까?
어딘지 모르게 모용청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시선은 계속해서 그의 잘생긴 얼굴로 향하고, 이유 없이 얼굴이 붉어졌다. 혹여 그를 들킬까 조심스럽다 보니, 부끄러운 감정에 심장도 박동했다.
‘모용 소협은 그냥, 그냥 대련 상대일 뿐이야.’
사마아현의 말로는, 그냥 대련 상대로만 여기면 매일 밤 굳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마설의 생각은 달랐다. 차가운 눈동자 어디에도 감정이 비치지 않으니,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저벅.
수많은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두 사람의 느릿했던 걸음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모용청이 처음 와룡서원에 온 날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 매일 혼자 사용해 왔던 숲 속의 작은 연무장이다. 그곳에 선 두 어린 남녀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
“시작하지.”
기대할 바도 없이, 말은 짧았다.
마설은 굳이 실망하지도 않은 채, 등에 착용하고 있던 봉을 뽑아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로는 미소가 가득 머금어진 채였다.
어찌 되었든, 이 대련 시간은 그녀도 즐겁다.
연애(戀愛)에 관심이 생겼다고 한들, 그녀는 여전히 무공광인 것이다.
* * *
수풀 사이로 번쩍이는 기의 충돌이 쉴 새도 없이 서로에게 오가던 중, 먼저 무기를 놓치게 된 측은 마설이었다.
“아아…….”
허공을 회전하며 날고 있는 봉의 모습에, 안타까운 탄성을 흘린 마설의 두 눈이 바로 앞, 하늘 높이 검을 들어 올리고 있는 모용청에게로 향했다.
“제가 졌어요.”
그 짧은 말에, 조용히 검을 거둔 모용청이 포권을 취한다.
“좋은 대련이었다.”
“저도요.”
그를 따라, 포권을 취한 마설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이로써 오승(五勝) 십삼패(十三敗).’
첫 수석 제자 선발전에서부터, 여태껏 모용청과 마설이 쌓은 대련전적이다.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던 여아는 사라지고, 자신의 패배가 더 많음에 아쉬워하는 여무인이 그곳에 남아 한숨을 내쉰다.
그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용청은 묵묵히 검병을 강하게 쥐었다.
‘아슬아슬했어.’
아주 간발의 차이로, 힘겹게 승리할 수 있었다.
물론 고수의 승부란 종이 한 장 차이로 갈리는 것이라고들 한다. 하나, 그 종이의 두께가 조금씩 더 얇아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마설과 모용청의 무공 간격이 그러했다.
똑같은 종이 한 장이지만, 그 두께가 계속해서 얇아져 간다. 때로는 그 종이 한 장의 차이를 뒤집고 마설이 승리를 거머쥐기도 했다.
‘……뭐가 천재고, 뭐가 차기 검왕이냐.’
모용청은 이름이 드높은 오대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벌모세수를 받고 온갖 영약을 몸에 흡수하며 자랐다. 제일 처음 검을 쥔 나이는 세 살이었다고 들었다.
눈앞의 마설은 달랐다.
그녀는 오대세가도 아닌, 평범한 객잔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물론 와룡객잔의 식구들 면면을 살펴보자면 평범하지만도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도 그들은 무가(武家)가 아니다. 결정적으로, 마설의 몸에서는 어떠한 벌모세수의 흔적이나, 영약의 기척도 보이지 않는다.
먼저 무공을 익혀왔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몇 년 전.
놀랍도록 다채롭긴 하지만, 어설픈 면이 많았던 마설의 무공이었다.
하나,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무공은 빠르게 다듬어졌다. 최근 대련을 시작한 이후로는 그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모용청은 섬뜩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조금씩, 마설의 무공이 그의 검술과 닮아가고 있었던 탓이었다. 아니, 애초에 싸우는 방식 자체가 모용청 본인과 닮아가고 있었다. 본인의 것에, 모용청 특유의 싸움 방식을 통해 빠른 속도로 강해진다.
흡사 물을 흡수하는 솜을 보는 듯했다.
마설은 모용청의 무공을 흡수하여 아주 빠르게 무공의 깊이를 늘려갔다.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냉정(冷靜)의 극.
어떠한 혼돈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상황을 풀어간다 하여 재능에 대한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모용청이다. 그 무심에 가까운 냉정이,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된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었다.
오로지, 모용청만이 가능한 일이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감정을 죽이고 검극(劍極). 그 하나만을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나, 눈앞의 마설이 그러한 모용청의 냉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펼쳤다. 심지어 감정을 죽인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무공을 펼치는 그 순간에 집중하여 최대한의 냉정을 풀어낼 뿐이다.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살아 있는 냉정이다.
계속해서 싸운다면, 언젠가, 아니 이른 시일 내에 따라잡힌다.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모용청은 마설과의 대련을 멈출 수 없었다.
신비한 탓이다.
‘대체 너는 어떻게…….’
살아 있는 냉정이라는 모순적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호기심은 점점 더 진해져만 갔다. 답을 찾는다면, 벽을 뚫고 단숨에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강요에 의해 시작된 무공이지만, 모용청 본인 역시 무공을 좋아했다. 힘들고 고된 길이지만, 그 끝에 오는 성취감을 만끽할 줄 알았다. 어떻게든 답을 찾아 벽을 넘고 싶은 욕심은 무인인 이상 품을 수밖에 없는 감정이었다.
“……이만 갈까요?”
꽤나 생각이 길어졌던 것일까?
말없이 기다리고 있던 마설이 물어왔다.
“그러지.”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답한 모용청이 앞장서 걸어나갔다.
걷기를 잠시, 마설에 대한 생각을 이것저것 한 탓일까? 평소에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던 부분이 오늘따라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 보니…….”
“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