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章)
정의맹과 흉왕성의 동맹 이후, 무거운 엉덩이를 본격적으로 들어 올린 마교의 진격이 이어졌다. 첫 목표는 감숙과 사천. 두 개의 성으로 병력을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마교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나아갔다. 순식간에 감숙 공동파의 산문이 불타오르고, 사천 아미파와 청성파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독의 명가(名家), 사천당가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무혈천마는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파 중 삼파(三派)와 오대세가 중 가장 전쟁에 능숙하다는 당가가 순식간에 무너진 이유는 단 하나였다.
강시(强屍)!
오랜 과거, 마교와 함께 강호를 위협하였던 배교(拜敎)의 주술사들이 만들어 낸 최악의 악마가 다시금 부활(復活)하여 강호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시는 날래고, 도검이 들지 않을 정도로 몸이 튼튼하며, 어지간한 독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의 면역성까지 갖추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강시는, 독과 암기를 주요 무기로 삼는 사천당가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적이었다. 당가의 독을 믿고 배수의 진을 친 사천삼파(四川三派)는 결국, 강시의 존재를 모른 채 함정에 빠져 허망하게 패배했다. 이후 싸움의 기세를 잃은 삼파는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난파선 마냥 마교도들에게 쫓기다 끝내 봉문을 선언(宣言)해야만 했다.
성세(盛世)를 자랑하던 사천무림(四川武林)이 최소 오십 년 이상의 회복기를 필요로 하는 최악의 암흑기(暗黑期)로 빠져든 것이었다.
이후, 마교의 행보는 더욱 거칠고 빠르게 이어졌다.
감숙에서 섬서로.
사천에서 중경과 귀주로.
강시를 앞세운 마교에 패배란 두 글자는 존재치 않는 듯했다.
* * *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푸른 성(靑城)의 땅임을 증명하던 현판(懸板)은 검은 재에 휩싸여,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대신하여, 새로운 현판이 내걸렸다.
천마신교 사천본단(天麻神敎 四川本團).
그 가장 깊은 곳.
한때 청성파의 장문인이 머물던 장문전(將門殿)의 이름 역시 신마궁(神魔宮)으로 바뀌었다. 넓지만, 사치품 하나 보이지 않던 그 공간으로, 좌우로 타고 흐르는 흑룡(黑龍)이 새겨진 옥좌(玉座)와 붉은 융단(絨緞)이 들어섰다.
“지루하군.”
그러한 옥좌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한 장년인이 중얼거렸다. 부복한 채, 고개를 깊숙이 숙인 중년인이 머리를 융단에 내려찍는다.
쿵-!
“모든 것이 천마지존의 뜻대로 이루어질 뿐이옵니다!”
장년인, 무혈천마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조, 본좌는 그러한 사실이 지루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조금 놀고 있다 보면 무명와룡인지 뭔지 하는 서생 놈이 뛰쳐나오지 않을까 기대하였는데 너무나 조용하고. 정의맹이나 흉왕성도 너무나 미약하니…… 쯧.”
가볍게 혀를 찬 무혈천마가 입이 크게 벌어질 정도로 하품을 하였다.
“잠이 오는구나, 잠이 와. 직접 천산을 내려올 필요도 없었던 일이었나.”
마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만을 꿀꺽꿀꺽 삼켰다. 사실, 무혈천마가 천마삼재공을 대성한 순간 이미 강호는 마교천하(魔敎天下)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 싸움은 무의미하다.
그 어떤 적도 무혈천마의 상대가 되지 못할 터니 말이다.
설령 그것이 정의맹의 화산검선이라 한들, 흉왕성의 사대천왕이라 하여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말하자면…….’
무혈천마가 없이는 마교천하도 존재할 수 없다.
지금이야 강시의 힘을 빌려 파죽지세로 밀고 나가고 있는 마교이지만, 언젠가는 벽에 부딪힐 것이다. 화산검선의 위명과, 사대천왕의 명성은 괜히 멋을 부리기 위해 붙여진 과장된 호칭이 아니다.
그들은 강하다.
팔마왕과 강시 몇십구 정도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단지, 무혈천마가 압도적으로 더 강할 뿐이다.
그런 만큼, 어떻게든 무혈천마를 이 자리에 잡아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정말 지루해진 그가, 천산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마교는 큰 피를 본 채 퇴각할 수밖에 없을 터니 말이다.
‘어찌해야 한담.’
작금의 천마는 정말로 지루해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천마를 강제로 잡아둘 수 있는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 몇 마디로 잠시 걸음을 늦출 수야 있겠지만, 언제 그 변덕(變德)이 무슨 사건을 벌일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
해서 최대한 적은 피해로, 많은 적을 무릎 꿇리기 위해 작전을 구상하였던 마조였지만, 화산검선과 무패철황의 희생으로 인하여 그조차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는 정말 힘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때다.
하기에, 더욱 무혈천마가 필요하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적들이 천마의 변덕을 모른다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면 희망일까?
어찌 됐든 슬슬 정의맹과 흉왕성 측에서도 발악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무렵.
“비암각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문밖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왔다.’
마조는 본능적으로 기다리던 때가 다가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지?‘
천마의 나른한 물음에, 바깥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답변한다.
“검마왕(劍魔王)께서, 전사(戰死)하셨습니다.”
무혈천마와, 마조의 눈이 동시에 번쩍였다.
실망이나, 분노보다는 오히려 기대가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내부의 분위기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채, 바깥의 목소리가 다시금 침중한 음성을 흘린다.
“또한…… 귀주에서 전선을 펼치시던 흑마왕(黑魔王)께서도 전사하셨다고…….”
“푸하하핫!”
그 목소리에, 천마가 참지 않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누가 죽였다고 하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천마의 두 눈에 흥분이라는 감정이 번뜩였다.
천마삼재공을 대성한 이후, 알 수 없는 무기력이 전신(全身)을 지배하고 있었다. 무엇을 하든 흥미가 동하지 않고, 어떠한 일에도 재미를 느낄 수 없다. 그러던 차, 마현의 도발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천산 바깥으로 벗어나면, 그런 일들이 자신을 맞아줄 것이다.
하여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려 천산을 내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이 가시지를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갈증과 같았다.
어떠한 방법을 써도 채워지지 않는 지독한 목마름이다. 강호정복이라는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난제조차, 그에게는 너무나 간단한 일처럼 느껴졌다. 하기에, 오히려 패배를 기다렸다. 끝없는 갈증을 해소해줄 시원한 무언가를 바랐다.
목소리가 들뜨고, 안광이 빛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그게…….”
그러한 무혈천마의 목소리에, 문밖의 인물이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어서 고하라고 하지 않느냐!”
“거, 검마왕께서는 화산검선에게 전사, 흑마왕께서는 흉왕성의 사대천왕 중 용제에게 당했다고…….”
화산검선!
사대천왕!
기다리던 이름들의 등장에 천마의 입가로 진한 웃음이 머금어졌다.
‘어느 쪽이 더 즐거울까?’
말할 것도 없었다.
강호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자신과 비견되는 무인.
“화산의 검선이 보고 싶군.”
마음이 동했다.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그렇게 무혈천마가 모습을 감추었다.
옥좌 앞에 부복한 채, 한참을 기다린 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린 마조의 눈이 빛났다.
‘가셨군.’
행선지는 이미 알려둔 바였다. 화산검선의 목은, 이제 풍전등화(風前燈火)와 마찬가지인 신세다.
“하면 나는 귀주로 가야겠군.”
흑마왕이 죽었다면, 전선에 큰 구멍이 생겼을 터니 그를 메워줄 사람이 필요하다. 천마가 섬서로 향하였으니, 마조가 향해야 할 길은 분명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선다.
“나, 나오셨습니까.”
문 앞에서 보고를 마친 후, 물러나란 답이 없어 한참을 기다리던 마인이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많이 당황했나 보군.”
“아닙니다.”
솔직히, 천마의 흥분에 당황을 감추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름 아닌 아군의 패전 소식이었으니 말이다.
“너무 당황할 것 없네.”
툭툭.
마조의 왼손이, 사내의 어깨를 두들긴다.
푸욱-!
“꺽……!”
오른손은, 심장 언저리의 가슴을 꿰뚫은 채다.
“후우…….”
뚝뚝, 바닥으로 빗물처럼 떨어지는 붉은 피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마조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저 보아선 안 될 것을 본 것뿐이야.”
털썩.
마조가 손을 뽑아 올리자, 사내의 몸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 * *
다섯 제자를 이끈 마현은 광동을 벗어나 광서를 지나고 있었다. 그간 제자들이 가장 빠르게 실력이 늘어난 무공은, 다름 아닌 경공술이었다.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제자들의 수준에 맞춰 쉴 새 없이 경공을 펼쳤다. 하루를 쉬지 않고 매일같이 달리니 절로 경공의 경지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 속도에 비례해, 눈 밑의 검은 그림자는 더욱더 짙어져만 가고 있다고 한들 말이다.
달리던 도중.
마현의 두 눈이, 아직 아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흠…….”
입가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다음 마을에서 쉬어 가겠다.”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린 마현이 말한다.
“알겠습니다.”
선두에서 달리던 백산이 답했다.
다른 아이들 역시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최근 마현의 뒤를 쫓으며, 꽤나 지쳐있는 제자들이었다. 이전까지와는 다르다고 할까? 그간 마현은 나름대로 제자들을 배려한 움직임을 많이 보였다. 힘들면 쉬어 갈 줄도 알고, 굳이 급하게 달리지도 않았었다. 하나 작금의 마현은 계속해서 달린다. 쉬어 가지 않는다. 오히려 쉴 새 없이 제자들을 한계로 몰아넣고 있었다.
마치 자식을 절벽에서 떨어트리는 사자(獅子)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러던 차, 꿀 같은 마을에서의 휴식이 찾아온 것이다.
반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마을로 달려가 객잔으로 뛰어들었다. 마을은 작았지만,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만도 않았다. 간만에 단잠을 잘 수 있겠다 생각하며, 식사를 위해 객잔 일 층으로 내려가려던 제자들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끈적한 살기가 마을 전체를 뒤덮는다.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마인(魔人)들이로군.”
마현이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귀주를 침공한 마인들 중 일부가, 광서까지 내려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마현은 이미 멀리서부터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마을로 향하자고 하였다. 이곳에서 쉬자고 말했다.
꿀 같은 휴식을 선물한 것이 아니었다.
마현이 제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첫, 마인과의 실전이다. 이미 쉴 새 없이 달려 지칠 대로 지친 제자들의 얼굴에 무거운 피로와 알 수 없는 흥분, 분노라는 감정이 얽히고설켜 동시에 피어올랐다.
“가만히 앉아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다녀오겠습니다.”
마현의 물음에, 입을 열어 답한 다섯 제자가 객잔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강해져야 한다.”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굳은 눈빛의 마현이 읊조린다.
곧 마을에서는 비명과 괴성, 기이한 울음소리가 한데 뒤섞여 피어올랐다.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 * *
마인이 내뿜는 기운은, 흔히들 말하는 일반적인 인간이 가진 기운과 천양지차(天壤之差)다. 똑같은 형식으로 배출하지만, 몸에 감기는 감촉은 훨씬 더 불쾌하다. 끈적끈적하고, 늘어진다. 그래서일까? 괜히 신경이 예민해지고, 몸은 더욱 둔해진다.
광기에 휩쓸린 표정으로 마을로 뛰어든 마인들과 격전을 펼친 제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아마 마현은 이러한 감각을 알려주고자, 자신들에게 첫 실전을 겪게 했으리라.
알고 있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불타오른 마을의 정중앙, 마을회관으로도 쓰이던 큰 건물에 마현과 제자들을 안내한 촌장 역시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늦지도 않았다. 제자들의 등장 덕에, 마을의 위기를 면하게 된 촌장의 입장에서야 감사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대우가 극진하게 변할 것도 당연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대표로 나선 백산이 답은 그리했지만, 마음 한편에 남은 찝찝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워낙 외진 곳인 데다 가난한지라, 드릴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우리는 괜찮으니,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십시오.”
자그마한 감자 몇 덩이를 내미는 촌장에게, 고개를 내저은 백산이 말했다. 가진 자 입장에서는, 정말 별것 아닌 보상이지만, 이들에게 있어서는 저 감자 몇 덩이가 그 어떤 보물보다도 귀중한 식량이다. 아마 본인들은 정작 감자는커녕 칡뿌리조차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겁니다. 굶주리고, 마음고생이 심할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세요.”
백산의 고집에, 몇 번이고 망설이던 촌장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말마따나, 갑작스러운 마인들의 습격에 당황해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게다가 다섯 아이의 손으로 열이 넘는 마인을 막으려다 보니, 피해자가 하나도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감자 몇 덩이는 그런 사람들의 피땀이 녹아 들어간 귀중한 보물이다. 그런 만큼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분명 옳다.
“그럼, 대협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현실이 그러하기에 호의(好意)를 무시할 수 있는 노릇만도 아니었다.
“내가 미운 게냐?”
촌장이 물러난 자리.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채, 제자들을 지켜보고만 있던 마현이 물었다.
“아닙니다. 어찌 제자 된 도리로서 스승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백산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아이들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현을 원망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보며, 마현의 입가로 쓴웃음이 번졌다.
“너희들의 생각이 옳다. 마인들이 공격해 왔을 때, 내가 나섰다면 그 누구도 피해가 없었겠지.”
“…….”
그 정도가 아니다. 마현의 능력이라면, 능히 화(禍)가 닥쳐오기 전에 막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마인들의 행태를 보며 느꼈을 분노라는 감정을, 애초부터 느낄 필요도 없었을 터다. 그 사실을 알기에, 감사를 받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의 찝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끈적거리는 오물탕에 몸을 담근 것만 같은 불쾌감을 아직까지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단순히 마기(魔氣)의 영향 탓만은 아니었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힘으로 해내었을 때다.”
“…….”
“산아, 순욱아, 수린이, 그리고 명이와 영령이.”
“예, 스승님.”
다섯 아이가, 같은 목소리를 내뱉는다.
매일 함께 붙어 있어서일까? 조금씩 더 닮아가는 다섯 제자다. 그들을 보며, 쓴 감정을 감추지 못한 마현이 다시금 입을 연다.
“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느냐?”
“……능력의 한계.”
소수린이, 작은 목소리로 답한다.
“옳은 답이다.”
마현이 말했다.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하나 언제까지고 너희들이 내 손을 빌려서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마현의 냉정하다면 냉정한 말에, 아이들의 얼굴 위로 곤혹이 떠올랐다. 언젠가 그런 날이 다가올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나름대로 준비도 하고 있었다. 하나 막상, 마현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들으니 가슴 한편이 아파온다. 허전함을 느끼고 만다.
“살다 보면 말이다. 꼭 가지고 싶은 것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지켜야만 하는 것을 잃을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
마현의 말에, 다섯 제자의 얼굴이 각기 다른 표정을 짓는다. 하나 떠오르는 감정은 공통적이었다.
분하다.
미력한 두 손으로 큰 세상을 품기에는, 너무나 벅차다.
그 사실 자체가 분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 보았을 감정일 터였다.
또한 그 속에서, 답을 찾아낸다.
대부분의 경우, 선택하는 답은 외면이다.
초탈(超脫)한 듯,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충분히 옳은 답이라 말할 수 있었다.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능력의 영역이 아닌 기적의 영역에 속할 테니 말이다.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奇蹟). 한없이 일어날 수 없는 일에 가깝기에 기적인 것이다. 그보다는, 자신을 명확히 알고 스스로 믿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대다수의 사람이, 분명 그리 살아간다.
또한 일부, 다가올 확률이 한없이 공(空)에 가까운 기적을 바라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다.
바꿔 말하자면, 그 반대급부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다.
“능력만 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분함을 감추지 못하는 제자들 중, 두 주먹을 꼭 쥔 채 아무런 말이 없던 백산이 앞으로 나서며 말한다. 두 눈에서는 광명(光明)이 쏟아져 나온다. 다른 제자들은, 그런 백산을 놀란 눈빛으로 쳐다본다.
“저 하나의 안위(安慰)도 중요합니다. 하나, 저 하나만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안고 싶습니다. 못해도, 손길과 눈길, 발길이 닿는 곳에 있는 사람만큼은 안아 가고 싶습니다. 가진바 손이 작고, 발이 좁고, 식견이 얕다면, 더욱 키우겠습니다.”
온몸을 떨며 말하는 백산을 보며, 마현의 입가로 미소가 번진다.
‘백산.’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마현이 알아온 백산이란 아이는 분명 이런 제자였다. 맑고, 밝다. 또한 남을 위할 줄 아는 선인(善人)이다. 그 마음의 크기는 정녕 바다를 품을 수 있는 거대한 그릇이다.
학문을 통해, 의술을 통해 인의(仁義)를 배우고,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 대협(大俠)의 길에 대한 신념(信念) 역시 새겼을 터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찾아오게 되리라 생각했다.
백산은 그런 아이였으니 말이다.
또한 마현도, 그리되기를 언제고 바랐었으니 말이다.
“이런 제가…… 오만합니까? 스승님.”
하나, 걱정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힘든 길이다.”
“알고 있습니다.”
“해낼 수 있겠느냐?”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 최선을 다해보고 싶습니다.”
“너도, 그리고 모두가 보았다시피, 이 스승은 그리 큰 사람이 되지 못한다.”
애초에 큰 사람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작은 사람으로 만족했다.
가족을 품고, 내 사람을 끌어안는다.
그조차도 벅차 고민하고, 번뇌하며, 힘겨운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 마현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제자들보다도 오히려 더 가장 범인(凡人)에 가까운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 가족, 내 가정 하나 지키기도 벅차다.
그리고 그것을 해냈을 때,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며 어깨를 편다.
즐거워한다.
그야말로 범인이다.
하기에, 자신이 손을 쓰지 않아 죽어가는 마을 사람을 보며, 가슴앓이했다. 슬픔을 느꼈다. 죽음을 알고도 방관(傍觀)하였다는 무거운 죄악감이 심장을 짓눌렀다. 하나, 다시 또 같은 상황이 돌아온다 한들 마현의 결정은 변하지 않았을 터였다.
“어쩌면, 악인(惡人)일지도 모른다.”
책임과 각오, 그리고 능력적 한계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제자들이 전장에 사는 광기라는 괴물에 잡아먹히지 않은 채, 살아 돌아올 수 있다. 전쟁은 결코 쉽지 않다. 아무리 온갖 각오를 하고 간다 한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적을 알아야 한다.
손자의 병법서에도 나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옳다.
하나 적을 알기는 쉬워도, 나를 알기란 어려운 법이다.
아직 어린 제자들은, 분명 그런 자신을 아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하여 가르쳐야만 했다. 알려주어야 했다. 이는 큰 아픔과 고통 없이는 배울 수 없는 공부(工夫)다. 마현은 그 아픔을 스스로 끌어안았다. 제자들의 매도하는 눈초리를 떠올리면서도, 두 주먹을 움켜쥔 채 불타는 마을을 지켜보았다.
‘강해져야 한다.’
객잔 밖을 뛰쳐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마현이 읊조렸던 말이었다.
단순히 무공의 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강함이 필요하다.
사람 자체가 강해져야 한다.
이번 일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충격을 주며 그러한 사람의 강함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터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죽음을 방관하였다.
다섯 제자를 위하여 라는 명분으로 누군가의 가족이었음이 분명한 사람을 죽였으니, 지옥의 나찰과 다름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마현이라는 인간이었다.
사람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모두를 구하며 제자들이 홀로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는 법까지 알려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지 못하다.
“…….”
마현의 엄숙한 표정에, 백산의 입이 닫힌다.
다른 제자들의 얼굴에는 각기의 표정이 오간다.
“손을 보여주겠느냐?”
마현이, 백산을 향해 말했다.
“예.”
답을 한 백산이, 손을 내민다.
굳은살이 가득 배인 큰 손이다.
마현이, 그러한 백산의 손바닥 위로 자신의 손바닥을 가져다 댄다.
마현의 손은 작았다.
백산의 것보다 배는 작았다.
“어느덧 이 못난 스승보다 손이 커졌구나.”
“…….”
어렸을 적부터, 제법 큼직한 손을 가지고 있던 백산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때까지만 하여도 마현보다는 작았다.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니, 어느덧 백산은 마현보다 훨씬 큰 손을 가지게 되었다.
굳이 따지자면, 마현의 손이 작은 것이 아니었다.
백산의 손이 남달리 큰 것이었다.
“이 손만큼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너는 해내야 할 것이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기대하겠다.”
웃음을 보인 마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이뿐만이 아니라, 너희들 모두가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
제자들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는다.
하나 복잡한 감정을 두 눈에 가득 담고 있는 것은 어느 하나 다르지 않았다.
“동행(同行)은 여기까지다.”
“……!!”
마현의 선언에, 아이들의 눈이 더욱 커다랗게 변한다.
“……나는 지금부터 천마를 만나러 갈 것이다. 예측건대, 짧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 같구나.”
“스승님.”
“너희들은 이 길로 곧바로 귀주로 향하여, 용제를 찾아가라. 그가 전장에서 해야 할 일을 일러줄 터다.”
“스승님.”
“마음이 약해 여태껏 모두를 돌보려 했으나, 시기(時機)란 것을 놓치면 후회만 남는 법. 졸업시험이다.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각자의 답을 찾아라. 이미 답을 찾았다면 신념을 더욱 공고히 세워야 한다.”
마현의 눈이 정순욱, 소수린, 양명, 화영령을 거쳐 백산에게로 이른다.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향시에 합격하기까지 가르침을 주기로 한 약조도 있으니, 돌아와도 좋다. 결정은 너희의 몫이다. 단. 부탁하건대, 자신의 길을 찾았다면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나아갔으면 좋겠구나.”
“…….”
입을 다문 아이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담담한, 소수린의 목소리가 들린다.
“스승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뒤를 이어 백산이 고개를 숙인다.
“정말…… 가만히 보면…… 스승님이야말로 제멋대로 아닙니까.”
정순욱이 투덜대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따라야지요.”
양명이 말을 받았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화영령마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섯 아이의 시선이 어느덧 돌아선 마현의 넓은 등을 향했다.
“누가 뭐라 해도, 무명와룡은 우리 모두의 하나뿐인 스승님이시니까요.”
시선이 오간 후 이어진, 백산의 마지막 말에 뒤돌아선 채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은 마현이 입술을 달싹였다.
“또 보자꾸나.”
직후, 마현의 모습이 마을회관 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이미 제자들은 짐작지도 못할 만큼 멀리 나아갔으리라.
함께 남은 다섯 제자는 서로를 바라본다.
“조금 갑작스럽지만…….”
정순욱이 어깨를 으쓱이며 입술을 열었다.
“이제 정말 우리만 남았네.”
“아아, 아직 내주신 숙제 못 끝냈는데.”
양명과 화영령이, 아쉬운 음색으로 말을 잇는다.
“……이별은 아니야.”
그 뒤를 따라, 침착한 표정의 소수린이 말했다.
“그래. 스승님은 언제나 와룡서원에 계실 테니까.”
백산은 웃어 보였다. 소수린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현은 말했다. 각자의 길을 찾아 나가라. 그중에서 마현의 길은, 와룡서원의 스승이다. 하니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 떠나간 듯하지만, 매일 한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뒷모습을 보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원한다면 언제든 찾아가 볼 수 있다.
마음의 안식처다.
여정 중에, 힘들고 지칠 때 언제든 찾아가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집과 같은 존재다.
마현은 본인이 한없이 작은 사람이라 하였지만, 제자들의 시선에 그는 충분히 큰 대인(大人)이었다.
* * *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가르침은 무겁고, 또한 어려웠다. 그런 만큼, 아주 조금 불안했었다. 실망의 눈빛을 받을 것이다. 어쩌면, 경멸(輕蔑)의 눈초리를 받을지도 모른다.
마계에서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당연했다.
너무나 자주 겪은 사람의 죽음이 마현을 마모시킨 바도 없지 않아 있을 터다. 가슴이 아프다 한들, 그를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마현이 행한 행위는 악에 가까운 행위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각오했지만, 두렵기도 했다.
마현 역시 제자들 앞에서는 평범한 한 명의 스승이기에, 냉정한 듯처럼만 보였지만, 아무런 걱정이 없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제자들은 마현을 밀어내지 않았다.
원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현의 가슴앓이를, 함께 끌어안으려 하였다.
자신들의 책임으로 다 같이 통감하려 했다.
그런 제자들이 있어 가슴 한편이 든든해진다.
너무나 고맙다.
‘하나…….’
죄를 범한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
덕분에 마현 역시 한 가지를 배웠다.
부족한 방법으로 가르침을 줄 수밖에 없던 상황.
그러한 사실이 어떠한 무게감을 가져다주는지 가슴 한편에 얹을 수 있던 것이다.
뒤를 이을 제자들과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아픔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 고통을 나누기보다는, 행복을 더하고 싶다.
부족함 많은 스승인지라 일기 제자들에게는 혹독한 세상의 맛을 보여주어야만 했지만, 결코, 다음에는 그럴 일이 없게끔 하고 싶었다.
‘나 역시 갈 길이 멀구나.’
배울 것이 많다.
조금 더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어리석음을 통감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마현의 몸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제십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