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章)
무혈천마는, 무서운 적이다.
굳이 종선휘의 생각뿐이 아니었다.
정의맹과 흉왕성, 각 세력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제갈천과 사마소 역시 같은 생각을 하였다. 그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곤륜파를 굴복시킨 후, 더 이상 난폭한 행동을 하나도 보이지 않음으로써 주변의 문파들까지 모두 문을 닫게 하였다.
이는 전 무림에 굉장한 심리적 압박을 행사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항하지만 않으면,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교도란 이들이 그렇게 생각만큼 나쁜 이들은 아니지 않을까? 굳이 목숨을 걸고 강호를 수호(守護)하기 위해 검을 뽑을 필요가 있을까?
자신도 모르는 새, 전 무림인의 마음에 파고든 그 어떠한 독보다도 치명적인 맹독(猛毒)이다.
곤륜파를 봉문 시킨 무혈천마가 굳이, 청해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숨을 죽이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맹독이 더욱 지독하고, 깊게 퍼져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두 사람은 단순히 강한 무공만을 앞세운 것이 아닌 무혈천마의 심계(心界)에 치를 떨어야만 했다.
이런 때에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심계를 읽고, 움직일 수 있는 든든한 동료.
그리고 그 방심을 긴장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 법한 큰 사건.
제갈가의 신뇌(神腦)와 사마 가의 반천뇌가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희생자가 철표다?”
화가 난 표정의 용대언이, 사마소의 멱살을 강하게 움켜쥐며 눈을 붉혔다.
“어쩔 수 없어요. 철 가주쯤 되는 인물이 아니라면, 정의맹 측도 납득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하면 철표는!? 철표는 무인이다. 한쪽 팔은 몰라도, 한쪽 다리까지 잃은 그가 더 이상 도를 휘두를 수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용대언은 진심으로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이미 철 가주가 허락한 일이에요.”
“허락은……! 허락은 개뿔! 흉왕성이 언제부터 자기들끼리 모여 단독으로 일을 결정하는 세력이 된 거지?”
정의맹처럼 수많은 입을 모아 일을 번잡하게 만들지는 않아도, 흉왕성을 세운 네 명의 인물만큼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힘을 합쳐왔다.
한데 이제 와서 이런 독단적인 행동이라니?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 용서할 수 없었다.
용대언의 단전에서 거대한 기운이 꿈틀거리며 흉포한 기세가 마구잡이로 솟아났다.
당장에라도 손에 잡힌 사마소를 양 갈래로 찢어 버릴 듯한 무서운 기세였다. 비교적 무공이 약한, 사마소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해갔다. 하나, 두 눈빛만은 여전히 침착하기 그지없다. 자연스럽게 들어 올린 손으로 용대언의 한 손을 잡는 동작에도 무거움이 없었다.
“침착해요. 어차피 마음먹은 대로 하지도 못할 거잖아요?”
“뭣?”
“죽이겠다고 마음먹어도 당신이, 저를 죽일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사마소의 맑은 두 눈이 용대언의 분노로 가득 찬 검은 눈을 향한다. 그가 분노하고 있는 것은, 순수하게 철표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관해서다. 근원을 따지자면, 용대언이 믿는 의리가 깨어진 탓이다. 흉왕성은 시시콜콜 재고 따지는 정의맹과는 다르게 각자 간의 신의와 우정으로 맺어진 집단이었다.
굳이 철표를 향한 마음만이 아니다.
용대언은 철표만큼이나, 흉왕성의 다른 사대천왕들 역시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마소를 향해 분노한다 한들, 그녀의 목을 칠 수 있을 리가 없다.
“크으…….”
분노로 떨리는 손끝을 천천히 풀어내며,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문 용대언이 눈을 붉혔다.
“대책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철표 보고 무인으로서 죽으라 한 것은 아닐 테지? 만약, 그리 말했다면 아무리 너라 하여도 내 손에 무사하지는 못할 터다.”
“후우…… 이제야 조금 대화가 가능하겠군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호흡을 가다듬은 사마소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귀흉 가주께서 수하들을 보내 철 가주의 신체가 가장 잘 맞는 다리를 구하고 있는 중이에요.”
용대언의 양미간이 구겨졌다.
“그 무슨……?”
“때가 때인 만큼, 누군가를 죽여 구할 수는 없어요. 해서 묘(墓)를 파는 중이죠.”
“설마…….”
용대언의 두 눈이, 크게 껌뻑였다.
“애초부터 철 가주를 무인으로서 죽일 생각은 없었다는 뜻이에요. 사대천왕 중 일인(一人)을 그리 쉽게 버릴 리가 없잖아요?”
“하면 철 아우도 이 사실을 알고……?”
“아뇨. 그에게는 비밀로 했어요. 알고 행했다면, 정의맹에 무거운 긴장감을 전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럼 그 미친놈은, 정말 자신을 버릴 각오로 갔다는 말이군.”
용대언의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왜 나에게는 말하지 않았지?‘
듣고 보니, 용대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 일에 관련되어 있었다. 철표도, 사마소도, 초주도. 한데 그만 몰랐던 것이다.
괘씸할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닌가?
“말했다면, 말렸을 거잖아요?”
“…….”
다시 다리를 붙일 수 있다 한들, 초주의 능력의 한계가 그곳까지 닿아 있다고 한들, 말렸을 터다. 차라리 본인이 간다며 나섰을 게 분명했다.
“철 가주와 달리, 일반인들과 구조가 다르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용 가주의 신체에 맞는 시체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워요. 귀흉 가주는 시술(施術)을 해야 하고, 머리를 쓰는 제 팔이나 다리는 의미가 없을 테니, 결국 철 가주가 적임자가 될 수밖에 없었죠.”
“하……!”
“죄송해요. 사과는 할 생각이었어요.”
하긴, 그럴 터다.
그렇기에 제 발로 먼저 찾아와, 이러한 일의 경위를 말했을 테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 철 아우는, 어디에 있지?”
“선물을 가지고 돌아온 직후, 귀흉 가주와 함께 귀흉가로 들어갔어요.”
“선물?”
“생각 외의…… 선물이죠. 이로써 무혈천마가 심어 놓은 맹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힘을 얻었다고 할까요? 만약의 때에, 그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검도 잃은 느낌이지만요.”
사마소의 입가로, 쓴웃음이 졌다.
* * *
비선(秘線)으로부터 전해진 소식에, 제갈천의 입가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결국…….”
무혈천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해에서만 머물던 그가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린 이유야 간단했다.
“심어 놓았던 독이 효력을 잃었다, 이건가.”
사대천왕 중 일인인 철표의 다리와, 정의맹주인 종선휘의 좌수.
서로를 향해 신의의 증표로 신체 일부를 내던진 두 사람의 이야기는 호사가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또 하나의 전설로 치장되었다.
무림을 피로 물들이기 위한 속내를 숨긴 채, 암계(暗計)를 꾸미고 있는 무혈천마에 대항하기 위한 두 영웅의 선택이 고민하던 강호에 긴장감과, 의지라는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원하던 결과다.
아니, 예상치 못한 종선휘의 행동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볼 수 있었다. 강호인들의 마음속에, 마교도와 대적하기 위한 굳건한 검이 올바르게 섰으니 말이다.
“하나…….”
몇 번을 생각해도 종선휘의 좌수를 잃은 것은 좋지 않은 실책(失策)이었다. 설마하니 그 자리에서 종선휘가 한쪽 팔을 내던지며 나설 줄은 정말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맹주님은 대체 어쩌자고 그런 일을 하셨단 말인가…….”
곧바로 치료를 받고, 지혈을 받은 덕에 큰 내상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양팔이 모두 달려 있을 때와 몸의 균형감은 분명히 달라졌을 터였다. 종선휘쯤 되는 고수에게 있어, 그러한 문제점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돌아올 것이야 뻔했다.
“하아…….”
생각이 짧았다.
종선휘의 과감성도 염두에 뒀어야 하는데, 너무 소홀했다.
“한숨이 깊군.”
자신을 자책하고 있던 차, 부드러운 목소리가 제갈천의 귓가에 들려왔다.
“맹주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느새 집무실의 안으로 들어온 종선휘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한쪽 팔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는 정의맹주다. 제갈천이 삶을 살아오며 유일하게 존경하며, 따르는 인물인 것이다.
“밤이 깊은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군사도 요즘 걱정이 많나 보군.”
“마교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뿐인가?”
자연스럽게, 조금 전까지 제갈천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비선에게서 전해진 서류를 훑어본 종선휘가 묻는다.
“…….”
제갈천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갑작스럽게 팔을 내던져, 당황하지는 않았고?”
“…….”
“어찌 대답을 못 하는고?”
종선휘의 시선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갈천에게로 향했다.
“……솔직히 답하자면, 그렇습니다.”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제갈천도, 사마소도 바라지 않은 일이었다.
“허허……. 역시 그랬군. 군사.”
“예, 맹주님.”
“나도 솔직히 말해, 군사의 생각을 모두 짐작하기가 어려워. 혹시 나 몰래 행한 일이 있다면, 말해줄 수 있겠나?”
종선휘의 질문에, 제갈천의 두 눈에 갈등이 어렸다.
하나 그도 잠시일 뿐이다.
누구 앞이라고 거짓을 고할쏘랴?
말하지 않을 것이면 모르되, 이미 물은 이상 감출 수는 없었다.
“마교 출두 이후, 사마 가의 반천뇌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갈천의 이야기가 길게 늘어졌다.
무혈천마가 뿌려놓은 맹독에 관한 이야기, 그를 이겨내기 위한 비장의 수. 강호를 하나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까지.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종선휘의 표정에 웃음기가 어렸다.
“군사는 늘 내 생각을 조금 더 앞서가는군.”
“……송구할 따름입니다.”
“나 역시 무혈천마의 계책은 아주 무섭다고 생각했네. 하나 그를 타파할 복안이 없어 속이 상하는 중이었지.”
“…….”
“이번 일로 무혈천마도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직접 검을 뽑을 수밖에 없게 됐어. 전 강호는 그런 무혈천마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대항할 테지. 잘해주었네. 아주 잘해주었어.”
“하나, 맹주님…….”
“자네는 무패철황의 한쪽 다리를 회생(回生)시킬 수 있기에 희생(犧牲)시켰다고 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제 몸만 하겠나? 또한 그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나?”
“…….”
“그 눈빛을 기억하나? 대전의 중앙에서, 망설임 없이 자신의 다리를 벤 후 주변을 오시(傲視)하던 그 광망이 어린 눈빛 말일세.”
“……기억합니다.”
무패철황의 전설을 듣기만 했을 뿐, 그를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적이 존경스럽다는 감정을 가져 볼 수 있었다. 무패철황은 진짜 사내다. 또한 진정한 무인이다. 비록 가는 길이 다르다고 한들, 그를 모욕(侮辱)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서로가 신의가 필요한 때이네. 내 팔 한 짝보다 더 귀중한 것이 마음을 하나로 묶는 것이야.”
“맹주님…….”
“화살 하나는 쉬이 부러져도, 열 화살은 쉬이 꺾이지 않는 법이네. 내 작은 손 하나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 한들, 수많은 손이 함께한다면 하늘의 전경(全景)을 잠시나마 감출 수 있겠지.”
종선휘가 웃었다.
“걱정 말게, 어차피 검을 쓰던 손은 우수. 조금만 수련한다면 금방 감각을 찾을 것일세.”
“…….”
“정의(正依)란, 혼자서 세우는 것이 아닐세. 군사. 잊지 말게. 정의란 하나 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때 생기는 것일세.”
“익히…… 명심하겠습니다.”
“밤이 늦었군.”
끙차, 라는 오묘한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종선휘가 달빛이 내리쬐는 집무실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좋은 달빛이로군.”
직후, 작은 목소리로 감탄을 토한다.
“예.”
제갈천이 답했다.
“군사.”
“예?”
“그러고 보니 말이야. 잊고 말하지 않은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열 화살이 아니라, 백 화살조차 쉽게 부러트리고, 마음먹고자 하면 태양이나 달조차 떨어트릴 수 있는 사람이 있네.”
“…….”
“자네는 나를 강호의 희망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만약 진짜 희망이 있다면…….”
종선휘의 입가로 짙은 미소가 번진다.
“그런 인물이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있다면 당장에 초빙해 도와달라고 구걸하고 싶다.
무혈천마가 움직이며 일으킬 파란(波蘭)을 생각한다면, 무릎이라도 꿇고 부탁해야 할 터다.
“나서 줄지는 모르겠다만…… 너무나 힘들면, 무명현에 은거한 용을 찾아가게.”
“예?”
무명와룡이라니?
익숙한 그 이름에, 제갈천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하아암…… 잠이 쏟아져.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더니, 다 헛소리란 말이지. 허허. 좋은 꿈 꾸게, 군사.”
“맹주님?”
당황하여 다시금 종선휘를 불렀지만, 이미 그의 신형은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무명와룡이라니…….’
와룡서원의 선생.
‘분명 마현…… 이라고 했지?’
몇 해 전부터 강호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신묘(神妙)한 인물의 이름을 떠올린 제갈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붓을 들었다.
‘맹주님이 그저 헛소리를 하실 리만은 없을 터.’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때에, 그보다 더한 물건이 걸려들었으니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과연 지푸라기로 그칠지…….’
아니면 짚섬이나 될지.
운이 좋아, 황금 궤짝을 집어 든 것일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겠지만 말이다.
제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