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곤륜파와 일대의 정도문파의 봉문 소식에 강호가 술렁이고 있듯, 와룡서원 역시 이기 제자 최고를 뽑는 결승 대련에 시선을 쏟고 있었다.
지나가던 호사가가 이러한 풍경을 보았다면, 분명 한 번쯤은 읊조렸으리라.
강호에서 떨어져 나온, 또 하나의 작은 강호로구나.
천하가 뒤흔들리듯, 와룡서원도 뒤흔들린다.
서로의 무와 재치, 지혜를 겨루며 성장하고 있다.
여태까지의 무림이 그래 왔듯 말이다.
“드디어 마지막 대련이로군.”
마현의 말에, 마설과 모용청의 표정에 얹힌 긴장감이 더욱 강해졌다.
마지막.
여기서 승리한 이가, 와룡서원 이기 제자 최강이다.
정작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단어가, 가까이 다가오니 탐이 난다. 그것이야말로 무인의 본질, 명예욕(名譽慾)에 가까운 것이리라.
‘욕심이 전혀 없는 것도 좋지만은 않지.’
몇몇 도가에서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논하지만, 무를 익힌 한 명의 무인(武人)으로서 어찌 이름값을 높이는 것을 마다하랴. 학문의 가르침이 사람의 깊이를 더한다 한들 욕심을 모두 버리라고는 하지 않는다. 과욕은 독이 되지만, 적당한 욕심은 사람의 인생에 도움이 되곤 한다. 마현은 아이들의 명예욕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스스로 절제하는 것.’
만약 아이들이 그러한 절제를 벗어나, 옳지 않은 길을 간다 하면 마현이 잡아주면 될 뿐이다.
결국 삶이란 방향을 따름이니 말이다.
“선수를 양보하지.”
모용청은, 황여준에게 했던 것과 같이 마설에게 선수를 양보했다. 단순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었다. 선수를 양보하면서 상대의 움직임과 무공을 꿰뚫는다. 타고난바, 제공권과 감각도를 함께 가지고 있는 모용청은 첫 움직임으로 상대를 꿰뚫는다. 그것은 분명, 모용청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한발 앞서나갈 수 있는 이유였다.
‘하나…….’
같은 재능을 가진 마설에게도 그것이 먹힐 것인가?
마현의 눈가가 호선을 그렸다.
용담호혈(龍潭虎穴).
작금의 와룡서원을 표현하는 데 있어 조금도 과하지 않은 단어다. 아이들 하나, 하나가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데다 올바른 길로 향하고 있다. 마현으로서는 가슴 한편이 뿌듯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한 용의 연못과, 호랑이 동굴에 사는 용봉(龍鳳)이 격돌한다.
여전히 느리게 움직이는 마설이 모용청에게로 다가가 봉을 내뻗는다.
모용청은 침착한 눈으로 봉의 움직임을 제한할 방법을 떠올리려 했다.
‘……떠오르지 않아.’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매일같이 누군가와 대련할 때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지던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움직이려는 순간, 상대도 따라와 오히려 역으로 당할 것 같은 기분이다. 분명 그리 빠르지만도 않은데, 계속해서 위협적이다.
‘이, 이런…….’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식은땀이 등 뒤를 적시기 시작한다. 선수를 양보한 것이 큰 실수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크읏……!”
퍼벅-!
결국, 불가피한 움직임을 통해 첫 일격부터 어깨를 허용한 모용청이었다. 동시에 제자들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여태껏 대련을 지켜보아 왔지만, 모용청이 아무런 손도 써보지 못한 채 부상을 입는 것을 지켜보는 건 처음이었던 탓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해.’
자신이 오만했다.
자신의 잘못을 빠르게 이해하고, 인정하며, 동시에 마설의 약점을 떠올린다. 마설의 공격은 분명 위협적이지만 느리다. 이미 뺏긴 선공권에 당한 바는 어쩔 수 없지만, 빠르게 움직여 공세(攻勢)를 취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역전(逆戰)할 수 있었다.
파바밧-!
“어라?”
빠르게 지면을 박차며 모용청이 거리를 벌리려 하자, 기묘한 신음을 흘린 마설이 특유의 동작으로 봉을 길게 내뻗는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봉을 놓아버린다. 화살을 쏘듯, 내 던진다.
휘이익-!
“크흣!?”
그 예상치 못한 일격이 아슬아슬하게 모용청의 가슴에 닿지 못한 채 허공에 멈춘다. 봉을 내던진 듯하였던 마설은 어느덧 몸을 낮추어 땅으로 떨어지는 봉을 받아든 채였다. 그 놀라운 움직임에, 모용청마저 입을 쩍 하니 벌리고 말았다.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신병일체(身兵一體)인가?’
모용청 역시 철무곤과의 대련에서 망설임 없이 병기를 버리는 모습으로 충격을 안겨주었다. 하나, 모용청은 직후 병기를 회수할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여 꽤나 애를 먹었었다. 반면 마설은 무기를 내던진 후, 자신이 받아내는 동작까지 완벽하게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느리지만 확실하다. 정말로 봉과 한몸이 된 듯한 엄청난 재주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터였다.
“아깝다. 이길 수 있었는데…….”
나름대로 준비해 두었던 비장의 수였던 것일까?
마설이 갚은 탄식을 토했다.
확실히, 조금만 더 빨랐다면 당했다.
모용청으로서는 이 대련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등골이 서늘해지며 패배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공격이었다.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해주는군.”
입술을 깨물며, 분한 표정을 보인 모용청이 빠르게 움직였다. 선공을 양보한 덕에 잃었던 공세로 들어간 것이다.
“엇!?”
그에 당황한 마설이 빠르게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검기까지 이용하여 휘몰아치는 모용청의 공격을 오래 버티지는 못하였다.
타당-!
결국 모용청의 검에 의해 마설의 봉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아…….”
마설의 입에서 안타까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졌네…….”
봉이 없이는, 모용청의 검에 대적할 수 없다.
머릿속에 당장에 떠오르는 그림에 마설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용청이 겪었던 바와 같이, 수세에 몰리면서부터 어찌 반격해야 할지를 떠올리지 못한 탓에 생각보다 훨씬 쉽게 패배해 버렸다. 아쉬운 감정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용청의 최종 승리군.”
그 감정을 뒤로한 채, 마현의 선언이 울려 퍼졌다.
그 말대로였다.
모용청의 승리, 우승이다.
결국 무공으로서는 와룡서원 이기 제자 중 최강임을 확실하게 입증한 셈이었다.
“…….”
하나, 승리한 모용청의 입맛은 그리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만약 마설이 조금 더 빨랐다면?’
아직 무공을 익힌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내공이 미약하고 덕분에 움직임이 제한되고 있다. 만약 마설에게 그러한 약점이 없었다면 승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떠오르는 단어는 두 글자뿐이다.
‘패배했겠군.’
선공을 양보했던 탓만이 아니다.
분명 마설은 모용청 본인보다 더 병기와 가까워져 있었다. 자신이 익히고 있는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몇 배는 높았다.
‘자칫하면…… 곧 따라잡히겠군.’
등 뒤에서부터 돋아난 소름이, 온몸을 뒤덮는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에서는 전율이 인다.
그런 모용청을 보며, 빙그레 웃은 마현이 입술을 달싹인다.
“이제 마지막 관문만 남았구나. 청아.”
“예, 스승님.”
전율에 잠긴 채, 마현의 목소리에 답한다.
어떠한 학문 문제가 나올 것인가?
굳이 수석 제자라는 자리에 욕심이 없다 한들, 무에서 제일이 된 이상 책임을 지고 싶다. 또한 여태껏 익혀온 학문의 깊이가 어느 정도 일지 가늠하고도 싶다.
배운 바를 시험하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라도 같은 마음일 터다.
그것이 설령 검의 천재라 불리는 모용청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여태껏 내가 느낀 바와, 학문의 가르침이 준 깨달음을 더하여 답하였으면 좋겠구나. 청아, 벗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마현의 질문에, 모용청의 몸이 크게 떨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하나, 분명 수많은 서책과 경서 속에, 군자 된 도리로서 벗을 대하는 법에 관한 이야기는 분명히 적혀 있었다.
마현이 원하는 바가 그러한 대답일까?
책을 읽는 것과 같이, 뻔한 말을 원하는 것일까?
그럴 리 없다.
마현은 질문했다.
너, 모용청이 생각하는 벗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잠시 후 멀리 갈 것 없이, 주변을 떠올리게 된다.
와룡서원의 수많은 제자들.
친우나, 벗이라고 생각했음인가?
말 한 번 제대로 섞지 않았지만 분명, 마음속에 그리 여기고 있었다. 하나 그를 인정하기만은 쉽지 않았던 점도 분명 존재했다.
매일 같이 천재로만 떠받들어졌다.
크면 분명 검왕이 될 것이라며 모두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늘 스스로 제일이라 여겼다. 남과 비견하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자신은 늘 제일이고, 최고였으니까.
남과 어울릴 필요도 없었다.
최고에게, 또 다른 최고는 불필요했으니 말이다.
분명 그러했음인데, 와룡서원에 와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수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한 이번 자유대련의 몫이 컸다.
대련 끝에 자신은 분명 제일이 됐지만, 언제까지나 제일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모든 방면에서 자신이 최고가 아니란 사실 또한 배웠다. 언제부터였을지 모르게 방심(放心)이란 감정이 깃들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평안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모두가 대단해.’
굳이 마설뿐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호적수였던 철무곤도 강하다.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간신히 이겨낼 수 있을 정도였다.
황여준은 어떠했던가?
눈이 멀어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한 탓일 뿐이지, 진심전력을 다해 싸운다면 그리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똑같이 기를 유형화 시킬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면, 글쎄……. 패배를 떠올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모두가 범상치 않다.
뛰어나고, 엄청나다.
이러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친구들이라, 너무나 기쁘다. 대화보다, 검을 더 많이 나눈 기분이지만 그것만으로 마음이 유쾌해지는 느낌이었다.
즐거웠었다.
그 감정을 되감으며, 미소를 그린 모용청이 입술을 달싹였다.
“저에게 있어 벗이란 즐거움입니다.”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느냐?”
“말이 없어도, 딱히 보지 않아도, 늘 함께 있습니다. 서로를 의식하고, 단 한 번도 잊지 않습니다. 관심 없는 척하였지만, 그들이 좋았습니다. 함께 공부할 때, 다툴 때, 한 시도 빼놓지 않고…… 즐거웠었습니다. 제가, 알지 못했던 그 감정을 처음으로 전해준 이들이 벗이기에, 저에게 있어 벗은 즐거움입니다.”
두 눈을 반짝이며, 마현을 직시한 모용청이 온 힘을 짜내듯 말했다.
그리고 그 날, 모용청은 와룡서원의 수석 제자가 되었다.
참고로 말하여 삼일 뒤 벌어진 일기 제자, 정순욱을 향한 보복전에서는 처참하게 참패를 당했다.
어쩔 수 있으랴?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너무나도 먼 일기 제자와 이기 제자의 격차였다.
* * *
정의맹에 사신(使臣)이 찾아왔다.
일반적인 사신은 아니었다.
맹주인 종선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다급히 뛰어나왔을 정도의 거물(巨物)이 맹을 방문한 것이다.
“허허…… 설마하니 진짜 무패철황께서 오셨을 줄이야.”
무패철황!
수많은 정도인들이 위치한 정의맹의 중심, 그 대전의 한복판에 홀로 고고히 선 철표의 고개가 가볍게 숙여졌다.
“따로 연락이 없이 찾아와, 무례를 범하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정중하다.
단 한 번도 무릎을 꿇은 적이 없다는 무패의 철황에게 있어서도 천하제일을 다투는 화산검선은 충분히 공경(恭敬)을 받아 마땅한 대상이었다.
“아니오, 오히려 손님을 이런 자리에 마주하게 되어 본도가 더 송구할 따름이오.”
본래라면 사신이 찾아올 경우, 접객당으로 인도한 후 충분한 대우를 보여주는 것이 알맞음이다. 하나 철표의 경우에는 입맹(入盟)한 직후, 곧바로 정의맹 간부들이 모두 모인 대전으로 소환(召喚)되어 자리에 앉아 보지도 못한 채 수많은 시선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러한 시선이 가진 감정의 대부분은 적대감(敵對感)이다. 벌써 십 수해를 넘는 세월 동안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눴던 사이다. 무슨 이유로 찾아왔을지 짐작이 간다 한들, 당장 웃는 얼굴로 흉왕성의 사대천왕 중 일인을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급한 사안인 만큼 최대한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돌아가는 측이 더 좋지요.”
적진에 혈혈단신으로 동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음에도 불구하고, 철표는 당당했다. 쏘아지는 기운을 별다른 대처 없이 받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어린 위엄(威嚴)은 줄어들지 않는다.
‘여전히 대단하군.’
적으로 맞서온 지 십수 년, 철표를 직접 대하는 것은 오늘로 두 번째다. 처음에 그를 보고 느꼈던 감탄은, 몇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변함이 없다. 여전히 대단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큰 인물이 되었다. 입가로 미소를 그린 종선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무슨 일로 직접 본 맹까지 방문하신 겁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본인은 이 자리에, 정사동맹(正邪同盟)을 제안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철표의 짧은 발언으로, 대전에 웅성웅성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정사동맹!
말 그대로, 서로 어울릴 수 없을 것만 같은 두 세력이 손을 잡는 행위다. 전 무림 역사를 뒤져도 손에 꼽을 정도로 특별한 동맹인 만큼,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철표 정도쯤 되는 거물이, 직접 정의맹에 방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리라.
“정사동맹이라…….”
기다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종선휘의 두 눈이 감겼다.
분명, 작금의 강호는 대위기라 볼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
무혈의 천마가 직접 천산을 내려와 구대문파 중 일문인 곤륜파를 봉문 시켰다. 직후, 천산 인근에만 머물고 있던 수많은 마교도들이 청해로 내려와 진영을 갖추고 구주(九州)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무혈천마의 엄명(嚴命)으로 인하여 마인의 본성을 누른 채 피를 참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법이었다.
언제 떨어져 내릴지 모르는 천벌보다는, 당장의 배고픔이 더 급한 것이 인간의 욕심인 법이니 말이다.
‘하나 무혈천마가 그때까지 기다리지만은 않겠지.’
마인들의 본성이 가진 피에 대한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굳이 약탈(掠奪)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욱 확실하고, 명확한 방법이 존재하고 있었다.
전쟁(戰爭).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은 마인들이 억지로 씹어 삼키고 있는 피에 대한 굶주림이 가진 욕구를 가득 채워줄 터였다.
여태껏 피를 보지 않았기에 무혈의 천마라 불린 그도, 이제는 피를 볼 수밖에 없다.
먹이는 확실할 터였다.
정의맹과 흉왕성.
각기 정도와 사도에서 정점을 찍고 있는 두 세력이 바로 무혈천마의 무혈전설의 종지부를 찍게 할 제물이 될 것이야 뻔했다.
이러한 상황에 있어, 두 세력이 손을 잡는 것은 나쁜 방도는 아니다.
오히려 상책(上策)이라 볼 수 있을 터였다.
하나 그것이 말처럼 쉬우랴?
“말도 안 됩니다. 저 흉악한 흉왕성 놈들과 동맹이라니요! 언제 배신을 하고 검을 들이밀지 모릅니다.”
“저 역시 믿을 수 없습니다. 그간 놈들의 검에 쓰러져간 젊은 영웅들의 피를 떠올려 주시옵소서, 맹주!”
한참 전부터 귀를 때리는 소란에, 종선휘의 입안에 머금어지는 침음성이 몇 배는 길어졌다.
이미, 십수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이고, 또 쌓인 원한이다. 고작 말 몇 마디와 성의 표현 정도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걱정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두 세력은 물과 불이다. 하나로 합쳐질 수도 없으며, 만날 경우 서로를 모두 죽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표는 정사동맹이라는 패를 들고 이 자리에 섰다.
무언가 복안(腹案)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조용히 하시오.”
침묵 끝에, 어렵사리 입을 연 종선휘의 선언에 철표와 흉왕성을 향해 쏟아지던 비난이 일시간 사그라진다. 하나, 말 그대로 잠깐의 침묵일 뿐이다. 내키지 않는 말이 들린다면 다시금 소리가 터져 나올 것이다.
‘대체 어쩔 생각이오?’
종선휘의 두 눈이, 대전 아래의 철표에게로 향했다.
불가침조약(不可侵條約) 정도의 적당한 선에서 그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종선휘 역시, 이번 일에 맞서기 위해서는 정사동맹이 필수불가결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나 정의맹의 이 시끄러운 입들을 어찌 봉한단 말인가? 아무리 종선휘의 권한이 전무후무하다 하여도, 결국 정의맹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은 저 수많은 입들이었다.
명분(名分)이 필요했다.
저 저들밖에 모르는 시끄러운 입들을 다물 수 있게 할 만한 중요한 명분 말이다.
“후우…….”
한숨을 내쉰 철표의 손이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에, 깜짝 놀란 주변의 무인들이 빠르게 자신의 병장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움직임을 보인 철표가 자신의 애병인, 무적도로 손을 가져다 댄 탓이다. 본래라면 대전에 들어설 때 빼었었어야 할 무기였으나, 상대가 누구던가? 무패철황이다.
적이라 한들 존중할 만한 사내인 만큼, 비겁한 일은 벌이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만한 예우를 보일 인물이라 여긴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번쩍-!
빛이 번뜩인 것은 순식간이었다.
장내의 인물 중 대다수는, 그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조차 못하였다.
깜짝 놀란 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는, 이미 대전 바닥이 붉은 피로 물든 뒤였다.
“아, 아니…….”
“이, 무슨…….”
그러한 대전 위, 아직까지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한 장내의 인물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다리다.
사람의 다리.
가늘고 긴 그 다리의 모습에, 모두의 얼굴에 경악(驚愕)이 어렸다.
“이 정도면 되겠소?”
담담히,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묻는 철표의 무릎 밑으로는 아직까지도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외팔의 무인으로, 무패를 자랑하던 철황이 자신의 다리마저 베었다.
외팔에, 외발.
신체의 반을 잃은 단 한 번도 지지 않은 무패의 철황의 두 눈에서 광망(光芒)이 길게 늘어진다.
“이 정도면 되었냐고 묻고 있소.”
장내를 훑는 그 시선에, 침을 꿀꺽 삼킨 수많은 입들이 눈을 몇 번이고 껌뻑인다.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무림의 긴 역사상, 또 하나의 전설을 남긴 무인이 자신의 무(武)를 버린 것과 다름없는 행위를 하였다.
“내가 원하는 대답은 하나뿐이오. 불(不)이 아닌 가( 可)! 그대들의 대답은 언제쯤……!”
툭.
큰 목소리로 외치는 철표의 앞으로, 뜨거운 피가 흐르는 무언가가 던져졌다.
그를 마주한 장내가 다시 한 번 술렁이다.
철표의 붉어진 두 눈에는 뜨거운 감정이 차오른다.
“이것이 우리의 대답이오.”
정면.
펄럭이는 빈 소매를 흩날리며 대전 아래로 내려온 화산의 검선이 말한다.
“미안하오. 본도가 내건 것이 우수가 아닌 좌수라. 남은 우수는, 전 강호를 위해 싸우며 산화시키겠소.”
정의맹이 가진 흉왕성에 관한 원한이 있다면.
흉왕성 역시 마찬가지.
작금의 정사동맹은 이루어진다면, 다시는 볼 수 없는 끈끈한 신뢰관계로 맺어져야만 할 터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의를 주어야 한다. 그에 관한 답으로, 철표는 자신의 한쪽 다리를, 종선휘는 한쪽 팔을 내걸었다.
껑충이 발로 다가가, 아직까지 열기가 식지 않은 종선휘의 팔을 집어 든 철표가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크게 외쳤다.
“고맙소! 나 역시, 남은 이 반쪽 몸뚱이가 활활 타올라 조금도 남지 않을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소.”
더 이상 반대할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정과 사.
각자의 위치에 선, 정점들이 서로의 신체 일부를 내걸고 한 맹약이다.
어겨질 수는 없을 터였다.
목표는 하나.
마교타도(魔敎打倒)!
제팔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