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귀환-68화 (69/83)

(第三章)

“후우우…….”

깊은숨을 내쉰 모용청이 온몸에 힘을 풀며 곧바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된 것은 비단 발목을 접질린 철무곤뿐만이 아니었다. 모용청 역시, 막무가내로 내지른 발차기 덕분에 발등이 반쯤 아작이 난 상태였다. 솔직히 말해서,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이쯤에서 누가 대련을 걸어온다면…….’

분명 모용청은 탈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래 자유대련이란 그런 특이점을 지닌 대련법이니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몸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용청도 굳이 대련을 이어나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괜한 무리에 어린 몸이 상하면 훗날 더 큰 차질이 생길 수 있을 터니 말이다.

“……다음은 없나?”

흠칫.

자리에 주저앉은 채, 호흡을 가다듬은 직후 모용청이 내뱉은 말에 장내의 분위기가 다시 한 번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구혜린조차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에는 그저, 둘 만의 승부로 만족하려는 것일 줄로만 알았다. 하기에 가장 먼저 둘이 붙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 아이들…….’

생각보다 오만함이 더 극에 달해 있었다.

수석 제자의 자리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승부를 낸 직후, 다른 제자와의 대련에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하나 그 오만이 나쁘지는 않다.

‘물론 좋기만 한 건 아니지.’

잠깐의 승리욕 때문에, 평생을 망친다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와룡서원의 입지(立地)나 평판도 한없이 밑바닥으로 추락할 일이다.

아니, 그런 것을 제외하고서라도 스승으로서 제자의 몸이 망가지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누군가 대련을 요청한다면 적당한 시점에서 모용청의 패배를 선언할 생각이었다.

‘한데…….’

생각보다 조용하다.

그 누구도 먼저 나서지 않는다.

분명 자유대련의 규칙에는 지친 상대와 싸워도 좋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작금은 기회였다. 최고의 우승후보라 볼 수 있는 모용청을 떨어트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

‘자존심이란 건가?’

모용청이 승부욕을 자극했다 한들, 지친 상대와 싸워 이겼다는 불만족스러운 명예를 얻고 싶지는 않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기준이 굳건히 선 제자들인 탓이다. 주변을 감도는 분위기에서 그러한 감정을 읽은 구혜린의 두 눈이 반짝일 때였다.

뚜벅, 뚜벅.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가득 지은, 황여준이다.

두 눈은 붉게 붉혀진 채 부릅떠졌으며, 씰룩이는 입가에는 큰 분노가 느껴진다.

“그런 병신 같은 몸으로 도발 넣어봤자,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까. 며칠만 기다리시지. 조만간 내 검이 네 목 바로 앞에 놓일 테니까 말이야.”

“…….”

“병신을 싸워서 이긴, 병신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지금은 보내 주겠다는 말이다. 잘난 체하지 마. 최고는 너희 둘이서 가리는 게 아니니까. 흥.”

콧바람을 크게 내쉰 황여준이 등을 돌린다.

그 뒤를 따라, 지켜보기만 하던 제자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아무도 모용청에게 다음 대련을 걸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둘씩, 자리를 비우고 공터에 남은 것은 구혜린과 모용청 둘뿐이다.

오묘하게도, 두 사람은 어딘가 닮은 미소를 짓고 있는 채였다.

* * *

첫날의, 첫 승부가 끝난 직후.

마현을 찾아간 구혜린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철무곤과의 대련에서 모용청이 승리했어요. 그리고…… 현 가가의 말대로 되어버렸네요.”

읽고 있던 책을 조심스럽게 덮은 마현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분명, 그렇게 될 거라고 했잖아.”

자유대련의 취지는 분명, 실전과 같은 승부다.

언제 어디서 어떤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냉혹한 강호의 세계. 그런 만큼, 자만과 방심은 금물이다. 하나 와룡서원의 제자들 사이에 필요한 것이 분명 그러한 경계심일까? 아니었다.

와룡서원의 제자들은 분명 출신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지만 모두 또래의 아이들이다.

따지자면 친구인 것이다.

그런 친구 사이에, 가장 중요한 감정은 무엇일까?

“결국 승리라는 목적이 아닌, 승부라는 수단을 통해 신뢰를 쌓게 되겠네요.”

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역시……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는 거죠?”

구혜린이 입가를 가리며 웃는다.

자유대련을 구상하며, 마현은 아이들이 승리가 아닌 승부에 집착할 것을 확신했다.

해서 자유대련을 구상했다.

이미 말한 바 있듯 자유대련은 대련 후 지친 상대에게 다음 대련을 요청할 수 있다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규칙이 존재한다. 하나 와룡서원의 이기 제자들 중 누구도, 그 규칙을 이용하지는 않는다.

서원은 단순히 학문을 갈고닦는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다. 함께 성장(成長)하며 우애를 다지고, 신뢰와 마음을 쌓아가는 그야말로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세상이다.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어 위로 치고 올라가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비참한 세상이 아니다.

“짐승처럼 서로를 물고 뜯는다면, 독기는 강해지고 무공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겠지. 학문 역시 그만큼 빨리 발전할 테고…… 하나 만사 빠른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야.”

“때로는 느린 것이 빠른 것을 이긴다. 후발선제(後發先制)죠?”

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기 제자들은 너무 서로의 경쟁심에만 도취되어 있어. 거기에만 빠져 있다 보면, 앞은 봐도 뒤와 옆은 못 보게 될 테니까. 이번 자유대련은 그러한 점에 있어서 분명 서로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거라 생각해.”

“만약 아이들이 현 가가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면요?”

누군가 승리에 욕심을 품고, 비겁을 무릅쓰고 나섰다면? 질문을 던진 직후, 곧바로 허탈한 표정을 지은 구혜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겠네요.”

비록 각자 개성은 다르지만, 모두가 아직 순수하고 착한 아이들이다. 그 사실을 믿는다. 남들이 아니라 한들, 와룡서원의 울타리에 함께하는, 가족이자 식구인 스승들이 아이들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믿는다.

대답 없이 다시금 서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마현을 보며, 또 다른 배움을 얻은 구혜린이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참으로 멋진 남편을 얻은 것 같다.

매일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 * *

모용청과 철무곤은 몸의 상태가 좋지 않다 하여 서원 수업을 하루 거르게 되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런 몸으로도 수업에 나오겠다고 떼를 썼지만 마현이 말렸다. 쉬어 가는 법 역시 배울 줄 알아야 한다는 마현의 조언에 두 아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유대련 이틀째.

오전 학문 수업이 끝나자마자, 몸을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용제우였다. 거대한 신장을 앞세워,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용제우의 시선이 천천히 자리에 앉은 아이들을 훑어, 한 제자에게로 향한다.

“어?”

남궁성호.

처음 강초와의 대화로 자유대련을 끌어낸 아이다.

그를 바라보는 용제우의 입가로 진한 미소가 그려질 때였다.

“선생님.”

오전 수업을 끝내고, 일기 제자들에게로 이동하려던 마현을 붙잡는 높은 목소리가 있었다.

“할 말이 있는 게냐?”

마현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예. 대련 신청을 하려고 합니다.”

남궁성아.

작은 소녀가 힘찬 목소리로 말한다.

손가락은 어느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는 용제우를 향한 채였다.

“용 소협에게요.”

“나, 아니, 저…… 말입니까?”

당황한 용제우가, 자신을 검지로 가리키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오늘쯤, 대련을 시작하려고는 했다. 대상을 황여준으로 할까, 남궁성호로 할까. 고민도 하였다. 그 끝에 결론을 내려 남궁성호를 지목하려는 순간, 남궁성아가 먼저 나섰다.

당황을 감출 수가 없었다.

“흐음…… 지금 곧바로 말이냐?”

“예. 스승님.”

남궁성아가, 똑 부러지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옆에 앉은 남궁성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옷깃을 잡아끌었지만, 이미 선언은 끝난 뒤였다.

자유대련의 특성상, 도전을 받은 이는 거부할 수 없다.

결국 두 사람은 대련을 하여, 승부를 갈라야만 한다.

장내의 상황을 눈빛으로 짐작한 마현이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도록 하자꾸나.”

그렇게, 두 번째 대련이 시작되었다.

* * *

전날, 모용청과 철무곤이 대련한 바 있던 넓은 공터.

이번에는 그 자리에 용제우와 남궁성아가 마주 보게 되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협.”

“나, 나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소. 소, 소, 소저.”

아직 서로 친하지는 않은지, 높임말을 쓰며 조심스럽게 포권을 한 두 아이가 기수식을 취한다. 용제우의 병기는 다름 아닌 권(拳). 예로부터 용가의 두툼한 주먹은 어지간한 흉기보다 위협적인 무기로 취급되어 왔다.

아직 기를 다루지 못해 미숙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의 주먹이 위협적이란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남궁성아의 손에 들린 것은, 역시나 남궁세가의 자제답게 검(劍)이었다.

‘천풍검법(天風劍法)인가?’

남궁세가의 무공들 중에서도 강호에 가장 널리 알려진, 남궁가의 기초 검공(劍功)이 바로 천풍검법이다. 천풍검법을 어느 정도 이상의 성취라 볼 수 있는 소성(小成)까지 익힌 후에야, 남궁세가의 식솔들은 다른 무공을 배운다. 따지자면, 아직 남궁성아는 남궁세가 검법의 기초조차 제대로 닦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터였다.

‘훌륭하군.’

그런 남궁성아를 보며, 마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기초조차 제대로 닦이지 않았다고 할지 모른다. 하나, 남궁성아의 천풍검법은 적어도 기수식 면에서만큼은 완벽했다. 소성이 아닌, 대성(大成)을 이루었다고 하여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천풍검법을 고집하고 있다.

나름의 사정이 존재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결과가 어찌 나올지는, 두고 보아야 알 일이겠지만 말이다.

“바람이다만, 전날과 같은 큰 부상자는 없었으면 좋겠구나.”

서로의 승리욕에 크게 불타오른 덕이라지만, 전날의 대련은 확실히 과격했다. 매일 같이 그런 대련으로 이루어진다면 자유대련 기간에는 서원 내 제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제자들 숫자가 반 이하로 확 줄어들 터였다.

“시작해도 좋다.”

짧은 바람을 말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대련의 시작을 알리자 두 아이의 눈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아랫입술을 굳게 깨문 남궁성아의 두 눈에는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켜 보이겠다는 눈빛이다.

‘오빠보다 나은 여동생이란 건가?’

그를 보며 마현의 입가로 다시금 미소가 번진다.

나쁘지 않을 터다.

한쪽이 서로를 아낀다면, 분명 다른 반쪽도 그 마음을 확실하게 인지하는 날이 올 테니 말이다.

‘반면…….’

용제우 측은 문제가 많아 보였다.

“으음…….”

두 주먹을 꽉 쥐고 기수식을 취했지만, 입가로 흘러나오는 것은 신음이다. 양팔은 떨리고 시선은 오갈 데를 잃고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도 그럴 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 젠장. 너무 귀엽잖아.’

작은 체구에, 새하얀 피부, 흑단목 빛을 띠는 검은 머릿결, 순수하고 어여쁜 사슴을 닮은 초롱초롱한 두 눈망울까지.

‘어디 하나 손댈 곳이 없잖아!’

공격을 하려면, 때려야 한다.

당연하지만 아플 것이다.

한데 저 작고, 귀여운 아이를 큼지막한 주먹으로 때린다고? 말도 안 된다. 어려서부터, 용제우는 늘 생각했었다. 작은 것은 지켜주어야 한다. 아껴야 한다. 사랑받아야 마땅하다. 본인이 또래에 비해 머리 하나는 더 큰 커다란 덩치를 자랑해서였을까? 어찌 됐든 작고 귀여운 것에 대한 보호본능이 유난히도 강한 용제우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 새끼사슴과 같이 조그맣고, 순진한 눈망울을 한 남궁성아는 분명 최악(最惡)의 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가, 갈게요!”

용제우의 굳은 표정을 보며 다른 오해라도 한 것일까?

잔뜩 긴장한 표정을 보인 남궁성아가 빠르게 일보를 내뻗으며 검을 내질렀다.

“에잇!”

기합소리는 또래에 어울리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느낌이다. 하나, 날아오는 검은 결코 그렇게 아기자기하지만은 않았다.

‘뭐, 뭐가 이렇게 빨라!’

화들짝, 놀란 용제우가 재빨리 뒷걸음질을 치며 남궁성아의 검을 피했다. 하나, 본디 초식이란 것은 일격이 아닌 연계로 이어지는 법이다. 빠르게, 또한 집요하게, 그야말로 천풍이라는 이름을 따르듯 바람과 같이 남궁성아의 검이 용제우의 뒤를 따른다.

휘리릭-!

검이 바람을 타고 흘러 용제우의 목젖을 향해 길게 내뻗어졌다.

“으음……!”

신음을 흘린 용제우가, 몸을 비스듬히 틀며 그러한 남궁성아의 검을 살짝 밀쳤다.

‘이 정도로…….’

생각보다 빠른 일격에 당황했지만, 검을 밀어 넘어트린 후 위압적인 자세로 항복 선언을 받아낸다면 문제가 없다. 굳이 남궁성아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되니 불편할 것은 없었다.

하나, 그러한 생각은 그야말로 착각.

“……!!”

밀쳐진 남궁성아의 검이, 그에 탄력을 받아 더욱 빠르게 선회하여 용제우의 반대편 목을 노리고 번개처럼 날아든다.

두 눈을 부릅뜬 용제우의 눈이 번뜩 빛을 흘렸다.

몸은 빠르게 아래로 숙여지고, 하반신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어깨가 앞으로 내밀어 지며, 오른손은 언제든 검을 쳐올릴 수 있도록 허공을 향한다.

시선은 정면.

적, 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제, 제길……!’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머릿속에 상정되었던 적은 단숨에 사라지고 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새하얗고 작은 아기 사슴만이 눈앞에 남는다. 자연스레 몸에 힘이 빠지고 움직임은 둔탁해졌다.

그래서일까?

한번 허공을 벤 후, 다시금 내뻗어진 남궁성아의 검이 목덜미에 닿을 때까지 조금도 반응하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놀란 측은 용제우뿐만이 아니었다.

“어, 어라?”

몰아치는 와중이었지만,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적은 없었던 것일까? 남궁성아가 당황한 기색을 흘리며 화들짝 검을 들어 올렸다.

“죄, 죄송해요.”

대체 상황이 어찌 된 건지, 전혀 영문을 모르는 듯한 표정의 남궁성아가 갑작스럽게 사과를 건넸다. 무언가 대련 중에 문제가 발견되어 용제우가 멈췄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제는 없었다.

아니, 따지자면 문제야 있었다.

하나 대련의 과정이나 승부를 가르는 형식에서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아, 아니오. 소저.”

단지 남궁성아를 향해 도저히 주먹을 내뻗지 못한 용제우 본인의 성격 탓이다. 딱히 변명할 거리도 없었다. 제 성격이 유약(幼弱)한 것 역시 본인의 약점(弱點). 결국 패배는 패배였다.

“성아가 이겼구나.”

지켜보던 마현이, 작게 웃으며 말한다.

용제우의 움직임이 이상했던 점이 한둘은 아니나, 정황을 보자면 승리자는 명확히도 남궁성아였으니 말이다.

“제, 제가요?”

남궁성아가 얼떨떨하게 답하자, 이번엔 용제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소저가 이겼소. 나의 패배를 인정하는 바이오.”

아마 다시 대련을 한들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을 보고, 또 보아도 도저히 남궁성아에게 주먹을 내뻗을 자신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포권을 한 용제우가 물러났다.

굳이 남궁성아뿐이 아니라 주변 모두가 조금 얼떨떨한 분위기였지만 이미 결과가 나온 판에 무슨 말인들, 상황인들 의미가 없다.

“흥…… 멍청한 놈.”

대신해서 한마디를 던지는 것은 황여준이다.

하나, 그 한마디가 끝은 아니었다.

“저도 대련을 요청하겠습니다.”

앞으로 나선 황여준의 눈이 번쩍이며 대상을 향한다.

“나, 나?”

그에, 당황한 남궁성호가 자신을 검지로 가리킨다.

황여준의 입가로는 작은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겁쟁이. 여동생 뒤에나 숨어 병신같이 꼬리나 말고 있을 거면, 계속 그래도 되고.”

“누, 누가 겁쟁이란 거야!”

울컥한 표정의 남궁성호가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오, 오라버니.”

방금 막, 대련을 끝낸 남궁성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런 남궁성호를 말렸지만 이미 불은 붙은 뒤였다.

“덤벼, 이 개자식아! 누가 더 센지 한번 붙어보자!”

두 눈에 불을 붙인 남궁성호가 검을 뽑아 든다.

황여준의 도발에 제대로 걸려든 모습이었다.

“흠……. 시작하거라.”

마현은 굳이 그런 둘을 말리지 않은 채, 대련 시작을 선언했다.

두 번째 대련에 불이 붙었다.

* * *

덜그렁. 덜컹, 덜컹. 턱.

땅바닥으로 떨어진 검이, 몇 바퀴를 회전해 지면에 박혀 든다.

털썩.

비참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는 것은 남궁성호 측이었다.

“이, 이럴 수가…….”

검이 닿지조차 못했다.

아니, 십 수가 서로 오가지를 못했다.

고작 세 합.

세 번 검이 맞닿았고, 남궁성호는 처참한 고통을 느끼며 검을 놓쳤다.

“네 패배다. 애송이.”

황여준의 비웃음에, 두 눈시울이 붉어진다.

분한 마음에 온몸이 빠르게 떨렸다.

분명, 서원에 처음 들어섰을 때까지만 하여도 이 정도 격차는 아니었다. 제법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황여준 정도라면 큰 차이가 없을 거라 여겼는데. 대체 언제, 어디서 이만큼이나 격차가 벌어졌단 말인가?

‘내가…… 내가 부족해서야.’

매일 같이 남궁성아의 손을 잡고 놀러 다니기만 하였다. 모두가 뼈를 깎는 노력을 할 때 따뜻한 땡볕 아래 웃음 짓느라 정신없었다. 굳이 남 탓을 찾을 것도 없었다. 황여준의 말대로, 그는 자존심만 강한 겁쟁이에 애송이였다.

분하다.

억울하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남궁성아의 걱정 가득한 시선을 마주 볼 용기도 없었다. 고개는 그저 하염없이 지면을 향할 뿐이었다.

“흥…….”

콧방귀를 뀐 황여준이 그런 남궁성호에게서 등을 돌렸다.

“……결과가 나왔군. 여준의 승리다.”

묵직한 목소리로 내뱉은, 마현의 선언은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졌어.’

그것도 처참하게 졌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몇 번을 생각해도 본인 탓이라 여긴다. 끝에 남는 감정은 단 하나뿐이다.

“다, 다음에는…… 다음에는……!”

분해서, 눈물을 한없이 쏟아내며 뒤돌아선 황여준을 향해 외친다. 다음번엔 지지 않겠다. 꼭 이길 테다. 비웃는 건 내가 될 것이다. 길게 말하고 싶었지만, 턱 끝까지 차오른 가파른 호흡이 목소리를 막는다.

하나, 그 의지만은 분명 전달된 듯하였다.

“가능하다면 말이지.”

비웃음이 섞이지 않은, 진중한 목소리로 답한 황여준이 멀어졌다.

매일 게을리 살던 남궁성호의 가슴에, 한없이 크고 무거운 감정이 얹어지는 순간이었다.

제사장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