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귀환-63화 (64/83)

(第九章)

강초의 이름 변화는 분명 큰일이었다.

자신을 낳아준, 석가장을 버리는 일에 해당하였으니 말이다. 하나 강초는 거짓이 아닌, 진실로서 당당히 그러한 시선에 맞섰다. 자신은 본래부터 석가장 출신이 아니다. 사정이 있어, 거짓 이름을 사용해 왔고 이제야 진실된 이름을 밝히게 되었다.

모두가 욕하고, 경멸한다 한들 그조차 떠안으려 하였지만…… 다행히도 그럴 일은 없었다.

오히려 제자들은 그런 강초를 응원할 정도였다.

물론, 대다수가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로 대응한 것이 크지만, 어찌 됐든 반응을 보인 이들은 모두 강초의 솔직함에 박수를 보냈다.

평소 그의 소심하던 모습에서 볼 수 없던 기개를 보았던 탓일지도 몰랐다.

‘그, 그럼 이제 보고서 같은 건 정말 작성 안 해도 되겠지?’

물론 그렇다고 하여 강초 특유의 소심한 성격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나 이제는 분명 마현을 믿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강초를 지탱했다.

어려울 일은 없었다.

* * *

신강, 십만대산.

드높게 솟은 십만여 개의 봉우리와 그를 가리는 운무, 또한 그 속에 숨은 마인들까지.

그야말로 복마전(伏魔殿)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땅 위에는 수많은 마인들과 마두들의 지지를 받는 팔대 마왕과, 가장 최정상에 군림하는 무혈의 천마가 있었다.

그 힘은 단일 세력이라 믿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천하(天下)급!

하기에 마왕들과 천마가 군림하는 신교는 언제나 모든 중원의 경계 대상이었다. 하늘이 직접 내렸다는 천자조차도 두려워하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세력이라는 명호는 오로지 천마신교의 것이다.

그런 천마신교의 근간이, 어이없는 일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흑귀에 이어…… 삼마왕까지 연락이 끊어졌다고?”

어둠 속, 나지막이 들려오는 무혈천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여느 때와 같은 격동은 없지만, 아주 크게 분노했다. 바닥으로 얼굴을 박은 채, 등만을 내보이고 있던 사내는 그런 무혈천마의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하나, 떨지도 않고 있었다. 그저 묵묵히,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진심으로 분노한 무혈천마는 오히려 보이는 화를 내지 않는다.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만한 이유를 찾아 나서는 편이었다.

“마졸 팔호가 임무에 나선 장소, 와룡서원이라고 했었나?”

“……예.”

“서원, 서원이라…….”

아주 낮게, 무혈천마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무명와룡이라는 학사가 대사부고, 소사부가 둘 있다고?”

“예. 확인결과, 소사부 둘 중 일인이 팔대마왕에 못지않은 무력의 소유자라 들었습니다.”

“조화경이란 말이냐?”

“예.”

놀라운 일이다.

고작 서원에 그 이름만으로 천하를 논할 수 있는 초인 급의 고수가 머물고 있다니 말이다. 하나, 그렇다고는 해도 팔대 마왕 중 세 명의 마왕이었다. 자격 미달이지만, 마땅히 인물이 없어 어수룩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던 수마왕이라면 모를까 폭마왕과 귀마왕이었다.

그런 마왕들이 고작 한 명의 초인에게 전멸했을 리가 없다. 그 말은 곧, 서원에 또 다른 힘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나머지 소사부와, 대사부에 관해서는?”

“……확실한 일반인입니다.”

“장담할 수 있나?”

“비암각(秘暗閣)이 조사한 것입니다.”

비암각이라 하면, 현재 천마신교 전체를 중원의 정보에 대해 가장 깊숙이 파악하고 있는 집단이다. 비암각이 모르면, 천마신교의 그 누구도 모른다. 결국 그만큼이나 믿을만하다는 정보란 뜻이었다.

“…….”

그에 무혈천마는 침묵했다.

눈앞의 사내를 추궁해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일이라면 따로 있었다.

“……마조(魔組). 분명 귀마왕에게서 연락이 끊겼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

마조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일말의 거짓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애초부터 그가 아는 마조는 거짓을 말할 인물이 아니었다.

“하면,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저 흉물(凶物)은 무엇일까?”

흠칫.

엎드려 있던 마조의 몸이, 강한 떨림을 보였다.

무혈천마 앞에서는 고개를 들면 안 된다.

한데도 방금, 처음으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뻔했다.

무혈천마의 말이 의미하는 것이 너무나 확실한 탓이었다.

‘지금 내 뒤에…….’

연락이 끊긴 귀마왕이 있다.

한데 어째서?

그가 제 발로 이 금역에 들어왔다고?

심지어 무혈천마의 말로 짐작건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미친 짓이다. 귀마왕이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크르르륵…….”

“이제 보니 귀마왕이 아니로군. 그냥 짐승일 뿐인가?”

기묘한 울음소리.

그를 들은 무혈천마의 조소가 이어졌다.

이어서.

펑-!

강대한 장력이 엎드려 있는 마조의 등 위를 쓸고 지나갔다. 애초부터 목표는 마조가 아니었다. 그 바로 뒤편에 위치한 귀마왕의 모습을 한 짐승이 분명했다.

‘끝났다.’

팔대마왕과 무혈천마.

고작 한 계단 차이지만, 실제 가진바 무력의 차이는 그 격이 다르다. 수많은 마교의 역사상,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천마의 위에 오른 이는 눈앞의 존재가 유일하다. 그만큼 압도적인 무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고작 귀마왕 따위가 그 공격을 견뎌낼 리…….

“크아앙-!

울음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광포한 울부짖음이다.

슈욱-!

등 뒤를 할퀴는 바람이 다시 한 번 지나갔다.

이번엔 무혈천마의 것이 아니었다.

귀마왕이 마조를 무시한 채 무혈천마를 향해 달려든 것이다.

“감히…….”

무혈천마의 목소리에 진득한 살기가 감돌았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붉은빛이 좌우로 번뜩였다.

“크륵……!”

목줄을 잡힌 듯, 귀마왕의 괴로운 신음이 들렸다.

“배짱도 좋구나. 처음부터 이 몸을 노리고 만든 인형이라 이거지?”

귀마왕의 상태는 누가 보아도 이상했다.

평소의 그라고 생각하기 힘든 저돌적인 행동에, 독특한 음성, 분명 이성을 잃은 것이 분명하다. 아니,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심령(心靈)을 제압당했다. 어이없게도, 귀마왕 본인이 가장 자랑하는 술수에 스스로가 걸려든 것이다.

어둠 속, 무혈천마의 두 눈에 붉은 기운이 불꽃처럼 피어오를 때였다.

“크, 크르륵…… 겨, 경고…….”

“……음?”

마지막 음성은, 여태껏 흘리던 짐승과 같은 울음소리가 아니다. 거칠고, 뒤틀리기는 했지만 분명 사람이 발현하는 언어다.

“마, 마지막 경고. 더, 더 이상 서원을 건드린다면…… 처, 천산을 멸(滅)할 것이다.”

“…….”

“나, 나, 나는 무, 무, 무명와룡 히이익……!”

이성을 잃은 듯했던 귀마왕의 온 얼굴에 짙은 공포가 어렸다. 새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변해 비명을 내지른다. 그가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존재, 무혈천마를 보고도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반응이었다.

“요, 용서, 제발 용서를……!”

그것으로 끝이었다.

귀마왕의 육신은 숨을 거두었고, 곧 엄청난 기운이 그의 몸으로 몰려들었다.

고오오-!

자연의 기운을 한 인간의 몸에 가득 담고, 그것을 있는 힘껏 역으로 풀어 폭발시킨다.

벽력탄 따위는 우스울 시한폭탄의 발현이었다.

콰아앙-!

어둠 속 동굴 전체와, 그 바깥까지 뒤흔드는 커다란 폭음이 일었다. 하나, 폭발의 범위는 넓지 않았다. 귀마왕의 목줄을 움켜쥐고 있던 무혈천마의 새하얀 손 위. 그 위로 검은 기운이 한데 뭉쳐 회오리치고 있었다. 폭발하지 못했다. 무혈천마의 강제력에 사로잡혀, 한 인간의 손아귀만 한 공간에 묶여버린 것이다.

“와룡서원, 무명와룡…….”

그 폭발의 잔재를, 무심히 바라보던 무혈천마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피시식-!

손아귀를 움켜쥐는 순간에는, 엄청난 폭발의 힘이 담겨 있을 기운이 모닥불 짓밟히듯 사그라진다.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어둠 속, 조금도 거동하지 않고 있던 무혈천마의 무거운 몸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구구구.

그저 엉덩이를 뗐을 뿐인데, 마치 거산이 움직이는 듯한 압력이 주변으로 뻗어 나왔다.

“음…….”

엎드려 있던 마조의 입에서는, 절로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도 마왕급에는 미치지 못하나, 초절정에 오른 고수다. 한데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 앞에 엎드려 있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을 받고 있었다.

천마의 움직임이, 이러한 무거운 압력을 더한다는 것은 단 한 가지의 의미를 갖추고 있었다.

“천마삼재공(天魔三才功)의 대성을 경하드립니다!”

오로지 초대 천마밖에 이루지 못했다는 이적(異蹟)!

천마삼재공의 대성이다.

이제 무혈의 천마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이 되었다.

그 누구도 그를 막지 못할 터였다.

설령 화산검선이라 한들, 아니, 천하의 모두가 그의 적이라 한들!

세력이 아닌 일인이 천하에 비견되는 급!

그야말로 하늘을 누비는 진정한 마(天魔)가 깨어난 때였다.

제십장(第十章).

저 멀리 십만의 대산에서 하늘을 두렵게 떨 마가 역동(逆動)하기 시작하였을 때, 귀주의 일각에서는 두 남녀가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봐주지 않기다. 약속했어?”

여인의 차가운 목소리에, 새하얀 피부에 헤실거리는 인상의 남성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전 언제나 마 소저를 향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요.”

사내의 말이, 여인의 심기를 건드렸음일까?

양미간을 크게 찌푸린 여인이 진각을 밟으며 단숨에 앞으로 나아가며 검을 날카롭게 휘둘렀다.

“쓸데없는 최선 말고, 무공이나 제대로 보여 달란 말이야!”

그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휘둘러진 검에.

“히이익……!”

괴상한 비명을 내지른 사내가 아슬아슬하게 검을 피하며, 거리를 벌렸다.

“바, 방금 정말 죽이시려고!”

“제발 죽어줬으면 좋겠네!”

“그런 취향이셨던 겁니까! 마 소저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제발 입 다물고 대련하자, 남우!”

검과, 검이 날아든다.

그 속에서 남녀의 말이 서로에게 마치 화살처럼 빗발친다.

“하, 하지만 전 원래 적하고 싸울 때도 떠드는데요?”

“그건 싸울 때고, 대련할 때랑은 다르잖아!”

“하지만 마 소저가 최선을 다해달라고 분명히…….”

“문답무용!”

다시 한 번, 살기 어린 검기가 남우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자칫해서 살짝 스치기만 했어도 치명상이 될 일격이었다.

“정말 죽일 셈이군요!”

“…….”

마 소저, 마연은 더 이상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빠르게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입을 열기 싫은 탓이 아니었다.

‘고작 몇 수를 섞었을 뿐인데…….’

채 백 초도 되지 않는다.

한데 그사이 기력이 모두 빠져버렸다.

이제는 입을 열기에도 힘이 벅찼다.

남우가 사용하는 무공, 태을심공(太乙心功)의 특성 탓이었다. 태을심공은, 그야말로 우주적(宇宙的)인 무학의 이치를 그대로 갖춘 무공으로서, 주변의 자연지기, 넓게는 상대의 내기까지 끌어들여 자신의 힘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성을 갖추고 있었다. 하기에 남우와 검을 나누는 적은, 시간이 더 지날수록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속전속결! 빠른 승부를 보는 방법이 가장 좋았다.

‘그것도 검이 닿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지!’

여유 있게 검을 받아내고, 밀쳐내는 남우와 다르게, 마연은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나 닿기는커녕, 그 근처도 가지 못하고 있다.

남우는 아슬아슬한 듯 말하지만, 실상 그에게 위협이 될 만한 공격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참으로 분한 일이다.

“후아…… 후아……!”

오십 초를 겨루었을까?

그런 분한 마음에 이를 악물어가며 검을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지쳐버렸다. 이제는 검을 제대로 들고 있을 기력마저 없었다.

“오늘은 이쯤 하죠.”

그런 마연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그린 남우가 검을 집어넣었다. 더 이상의 대련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시, 시끄러…….”

“이러다가 마 소저 조만간 쓰러져요. 장인어른이랑 형님들 뵈러 가는 길인데 기왕이면 건강한 모습이 좋잖아요?”

“검 뽑아.”

“……무리에요.”

“난 괜찮아.”

“제가 아니라 마 소저가 무리란 뜻이에요.”

“너 진짜……!”

화가 난 마연이 검 대신 발을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태연스럽게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뎌, 뻗어지는 발을 피한 남우가 빠르게 우수를 휘둘렀다.

픽-!

동시에, 수혈을 짚인 마연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어이쿠……!”

그런 마연을 한쪽 팔로 가볍게 받아낸 남우가 곤란하다는 듯 자신의 왼쪽 볼을 긁적였다.

말로는 안 통하니 어쩔 수 없이 이런 거친 방법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이지…… 고집불통이라니까요.”

도대체 어쩌다 이런 여자에게 반해 버린 건지.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다.

“어쩔 수 없지.”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성질 내다가 잠든 모습조차도 예쁜데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핫핫핫.”

어색한 웃음으로, 감정을 무마하는 남우였다.

* * *

당연히, 눈을 뜬 마연은 난리가 났다.

곧바로 검을 뽑아 들고 덤벼든 것이다.

하나 그 역시 대련의 연장선.

남우는 조금도 봐주지 않고 여전히 마연을 압도했다.

마연의 입장에서야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그런 나날이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파바바밧-!

빠르고, 변칙적으로 휘몰아치는 마연의 검술에 남우의 입가로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제대로 성장하고 있네.’

마연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의 검술은 날이 갈수록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조만간 정말 정식으로 검을 맞대야 할지도 몰랐다. 어중간하게 피하는 것만으로는 압도하기 힘들 테니 말이다.

‘응?’

그러던 차, 다수의 기척이 인근으로 따라붙은 것이 느껴졌다. 제대로 기척을 감추지도 못한 데다, 움직임도 조잡하다. 그나마 칭찬해줄 점이라면 숲 속에 몸을 숨겨 매복하는 것만큼은 제법 봐줄 만하다는 것? 결국 쉽게 말해…….

‘기껏 해봐야 산적 집단이네.’

검을 나누고 있는 무림인들에게 접근해서 무슨 득을 보겠다고 접근한 건지. 어지간히도 보는 눈이 없거나, 최근 들어 수익이 없어 급한 녀석들이라고 생각한 남우가 쓴웃음을 흘렸다.

‘상대를 잘못 건드렸어.’

그나마 남우 혼자 있을 때였다면 평범하게 팔 한 짝 부러트리는 거로 끝을 맺었을 수도 있었다.

하나 지금은 마연이 있다.

남우에 비해 부족한 솜씨를 가지고 있어 당장이야 힘이 달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초절정의 고수였다. 이런 어설픈 산적들의 접근 따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심지어 그녀는…….’

“방해하지 말고 꺼져!”

성격이 더럽기까지 하다.

산적들 입장에서는 재수가 없기로는 최악이 된 셈이었다.

“빠, 빨라!”

그래, 빠르지.

적어도 일반인의 기준에서 보자면, 그녀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신출귀몰했으니 말이다.

“으아악, 도망가! 마녀(魔女)다!”

그렇다고 해도 마녀라니…….

“오호호홋! 어디 한 번 도망가 보시지! 한 놈도 놓치지 않고 다 잡아주겠어!”

백번이고 아니, 천 번이 넘어도 산적들의 심정을 납득할 수 있는 남우였다.

* * *

“후우…… 어디서 신성한 대련을 훔쳐보려고.”

그 불쌍한 산적들은 절대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그리 생각한다 한들, 남우가 그들을 대변해줄 이유는 없었다.

어찌 됐든, 마연의 매타작에 그야말로 곤죽이 된 산적들을 뒤로한 남우와 마연이 다시금 길을 나섰다. 서신을 받기로, 마운과 주화화 역시 무명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였으니 걸음을 재촉할 필요가 있는 탓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산적들과 격전(激戰)을 벌이던 중에 깨닫게 된 사실인데 말이지. 나, 검이 가볍게 느껴지더라고. 확실히 대련을 시작한 이후로 실력이 늘었나 봐.”

우선 절대 격전은 아니었다.

하여튼, 그 부분만을 제외하자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그녀의 검술이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사실만은 남우가 아닌 천하의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터니 말이다.

“뭐, 어찌 됐든, 네 덕이니까 말이지. 고마워하고 있어.”

얼굴을 살짝 붉힌 마연의 말에, 작은 미소를 그린 남우가 담담히 말했다.

“그런 감사인사쯤은 조금 솔직해지셔도 괜찮지 않아요?”

“누, 누, 누가 솔직하지 않다는 거야! 분명히 고맙다고 말하고 있다고!”

“굳이 말투가 그렇게 부정하는 듯 공격적일 필요가 없다는 뜻인데요.”

“잘난 체하지 마! 그거 고작 몇 번 도와줬다고 의기양양하고 있는 것, 꼴 보기 싫거든?”

“……딱히 의기양양하지는 않았는데요.”

게다가 고작 몇 번이라니.

나름대로 마연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게끔 성심성의껏 대련에 나섰다. 정말로 전력을 다한 싸움은 아니었다 한들, 최선을 다한 것만은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남우의 얼굴이 시무룩한 검은 빛으로 변해버렸다.

“누가 그런 얼굴 하면 신경 쓸 줄 알고? 어차피 또 금세 장난이었다고 헤벌쭉 웃을 거면서.”

“……!! 벌써 들킨 건가요!?”

“그렇게 쉽게 변하지 말란 말이야, 도대체가!”

사람이 진득한 꼴을 못 보겠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마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마 소저를 향한 마음만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느끼해.”

“진심이라고요. 게다가 제가 마 소저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잖아요?”

물론 그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또, 또 의기양양. 애초에 네가 없었어도, 수련은 여전히 열심히 했을 거거든? 실력이야 느는 것도 당연하고 말이지.”

말하고 보니, 이건 조금 심했나? 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한들 천하십대고수에 꼽히는 남우가 도와주는 것만큼 좋은 효과를 보기는 힘들 터니 말이다.

그런 생각에 남우를 바라보았더니, 확실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시선은 하늘에 두고는,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술을 닫고 있다.

단언컨대, 마연으로서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사람이 진득한 모습이 없다고 생각했더니 곧바로 이런 모습이라니, 무언가 마음이 심하게 찔릴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아무래도 이번 일은 사과를 해야겠다.

마연 역시 자신이 조금 과도하다는 생각쯤은 매일 하고 있었다.

“마, 말이 좀 심한 것도…….”

하나 역시 늘 퉁명스럽게 말하던 버릇만은 고치기 어렵다.

하여 말이 좀 늘어지던 차였다.

“일단 빨리 마을로 가죠.”

얼굴을 굳힌 남우가, 빠르게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아……?”

마연은 그런 남우를 향해 저도 모르게 손을 길게 내뻗었다, 곧바로 팔을 접었다. 딱히 붙잡을 수는 없었다. 마연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남우는 이미 한참이나 앞서 나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 * *

결국, 그때 이후로 남우와 온종일 말을 섞지 못했다.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내내 얼굴을 굳힌 채 깊은 고민에 빠진 듯한 표정을 하고 있고, 마을에 도착해서는 잠깐 어디 좀 다녀온다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걱정이 첩첩산중(疊疊山中)이었다.

갑작스럽게 얼굴을 굳힐 만한 큰일이 있나?

아니면, 자신이 한 말에 진짜로 기분이 상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남우가 고작 그 정도로 상처 입을 남자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그간의 심한 말이 쌓이고 쌓여, 흉이 베였을지도 몰랐다.

‘……돌아오면 사과해야겠다.’

아무래도 역시, 자신이 잘못한 것이 맞다.

남우한테는 유독 투정이 심해진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쯤은 알고 있었다. 하니, 이번에 남우가 돌아오면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밤잠에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퉁명스럽지 않고, 친절하게. 한 번쯤은 분명 가능할 것이다.

한데, 다음날이 되어도 남우가 돌아오지 않았다.

‘뭐지? 일이 굉장히 바쁜가?’

하루를 더 기다렸다.

여전히 남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딱히 소식도 없었다.

‘……설마 그 상태로 그냥 가버린 거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능성이 없지도 않은 가설도 떠올랐다. 그렇게도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죽도록 걷어찼으니 이제는 질려서 떠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 없어.’

사흘이 흐르고, 나흘이 지났다.

그때쯤 되자 마연도 화가 났다.

‘그렇게 나왔다 이거지?’

화가 나서, 더 이상 같이 못 다니겠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되지! 애매모호한 태도로 훅 떠나버릴 건 뭐란 말이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진심으로 좋아한다느니 했던 말도 역시 헛소리였다.

“흥…….”

마연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마을을 떠났다.

가족 모임까지도 얼마 남지 않아, 정말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도 없었다. 남우도 그 사실을 잘 알 테니, 아직까지 오지 않는다는 것은 함께 갈 생각이 없다는 뜻일 터다. 그렇게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혼자여도 무리는 없었다.

그녀는 여인의 몸이었지만 초절정 내에서도 상위에 꼽히는 고수였다. 산적이나 도적단 따위가 두려울 리는 없었다.

“크하하…… 본좌께서 다시 강호로 돌아온 걸 하늘에서 환영이라도 하는 것 같구나!”

어지간한 미친놈이라 해도 다를 것은 없다.

길을 가로막고 선, 민머리의 거구를 혐오스러운 눈동자로 올려다본 마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눈앞에서 꺼져줘. 나 지금 기분 매우 안 좋거든?”

검을 뽑아 들고 싸우고 싶은 심경마저 들지 않을 정도다. 하여 답지 않게 자비를 베풀려 했는데, 눈앞의 민머리 거구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더니 등 뒤에 메인 도를 뽑아 든다. 동시에 종(縱)으로 내리치는데, 그 기세와 속도가 가히 벼락이 떨어지는 속도에 못지않았다.

“……!!”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놀란 마연이 빠르게 보법을 펼쳤으나, 민머리 거구의 도는 집요하기까지 했다. 바닥에 닿기도 전에, 미꾸라지처럼 휘어져 그녀의 가슴을 노리고 매섭게 파고든 것이다.

파앗-!

옷의 앞섶이 갈라지고, 부푼 가슴을 받쳐두었던 속곳마저 벌어지며 새하얀 속살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스레 얼굴을 크게 붉힌 마연이 왼손을 이용해 빠르게 자신의 가슴을 감췄다.

“이 색마(色魔)……!”

조금 전 일격은, 절대적으로 고의적이었다.

단숨에 가슴을 벨 수 있음에도 일부러 옷소매만 갈랐다. 이후로는 뽑아 든 도를 바닥에 슬그머니 기울인 채, 팔짱을 끼고는 감상하듯 그녀의 온몸을 훑어본다. 검 한 자루를 통해 강호를 누비는 여 무인에게 있어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으리라.

“크흐흐…… 이 지경이 되어서도 발톱을 세우다니. 굉장히 성질이 사나운 암고양이로구나.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아. 아주 귀엽구나. 이 탁탑도마(卓榻刀魔)께서 강호에 재출도 하는 기념으로 곧바로 죽이지는 않으마. 아주, 오랫동안 끌고 다니며 맛을 봐야겠어.”

긴 혀를 내밀어, 거친 입술을 음흉하게 훔치는 탁탑도마의 두 눈 위로 정욕(情慾)이 떠올랐다. 그는 순종적인 여자를 보아서는 그리 흥분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오히려 발톱이 날카로운 살쾡이일수록 더욱 좋다. 고집 강하던 암고양이가 자신의 무릎 아래로 굴복해가는 모습을 보는 쾌감이야말로, 탁탑도마가 원하는 색욕이다. 눈앞의 마연은 그러한 조건에 딱 부합하는 여인이었다.

“이 미, 미친놈…….”

욕지기를 내뱉은 마연의 얼굴이 시간이 갈수록 창백해져 갔다.

탁탑도마라니!

상대가 만만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전대에 활약했다던 십대고수 중 일인(一人)일 줄이야. 처음부터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다한다 한들 어려운 상대였다. 한데, 남우에게 정신이 팔려 그런 빈틈을 보였으니, 어떠한 꼴이 된다 한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검을 든 무인으로서 자격 박탈이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남우 때문이야!’

끝까지 걱정만 끼치더니, 결국 마지막에는 자신을 이런 비참한 꼴로 만들었다. 코끝이 찡해지는 감각에, 작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어 보았지만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망울에 물기가 차오른다.

그렇게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우는 건가? 우는 거로군! 크흐흐. 나는 그 눈망울을 아주 좋아하지.”

탁탑도마가, 그런 마연을 보며 기쁨의 웃음을 흘렸다.

비통에 잠긴 여인의 눈물이야말로, 탁탑도마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단 꿀물이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혀끝으로 그 투명한 꿀을 훔치고 싶다.

“곧 그 눈물을, 기쁨에 찬 환호성으로 바꿔주지. 너무 걱정 말라고. 흐흐흐.”

탁탑도마의 입에 걸린 웃음이 더욱더 징그럽게 벌어졌다. 아니, 벌어지려고 하던 중이었다.

파앗-!

한 줄기 푸른빛이 허공을 가르고 탁탑도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여유 가득하던 탁탑도마의 표정이 곧바로 딱딱하게 굳어지며, 거대한 도가 거칠게 휘둘러졌다.

카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커다란 울음을 토한다.

이미 전대에, 십대고수에 꼽혔던 탁탑도마의 도가 파르르 떨리며 어떠한 충격이 오갔는지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허공으로 날아오른 푸른 빛줄기, 한 자루의 검을 공중에서 낚아챈 신형이 지상으로 내려서며 딱딱한 목소리를 흘렸다.

“……남우?”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마연이 듬직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며 그 이름을 부른다. 그에, 살짝 고개를 돌려 마연에게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남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본인이 맞는다는 뜻이다.

이후, 그의 시선은 눈앞의 강적인 탁탑도마에게로 돌아갔다.

“나의 마 소저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하다니, 열 배 아니, 백 배, 천 배 이상의 피눈물을 흘릴 각오는 해뒀겠지?”

남우가 웃는다.

보이지 않지만 알 수 있었다.

목소리는 딱딱하지만,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탁탑도마에게 향한 것이 아니다.

마연을 향한 웃음이었다.

안심해도 좋다.

이제 그가 왔으니, 믿고 의지해도 좋다.

남우의 목소리와 뒷모습은 분명 그리 말하고 있었다.

마연은, 그 안도감에 저도 모르게 이번에야말로 정말 왈칵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느, 늦었잖아…… 바보.”

얼마나 기다렸는데.

없어진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마연의 울음 기 가득 섞인 목소리에, 길게 검을 내뻗은 남우가 다시 한 번 읊조린다.

“한 방울이 아니네? 아무래도 너, 죽을 정도로 피눈물 뽑아야겠다.”

“감히…… 애송이 따위가, 이 탁탑도마에게, 건방지게!”

동시에, 온몸을 거칠게 떤 탁탑도마가 노호성을 내지르며 지면을 박찼다. 도 끝에 서린 것은 무엇이든 베어낸다는 강기다. 그에 맞서는 남우의 검 역시 짙은 검강을 토해낸다.

강기와 강기!

초인의 격전이 펼쳐지며…….

쾅-!

커다란 폭음이 일대에 울려 퍼졌다.

* * *

격전의 흔적이 여실하게 남아 있는 소로(小路).

“아, 아야야, 아야야야……!”

“가만히 좀 있어 봐 좀!”

“아, 거기. 거긴. 진짜 안 된다고요! 아흐흑……!”

“오해할 만한 소리 내지 말고!”

“하, 하지만…… 진짜 아픈데…….”

온몸을 붉은 피로 물들인 남우가 고통에 가득 찬 표정으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마연은 그런 남우의 상처 부위에 금창약을 발라주며 인상을 잔뜩 굳힌 채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남우의 옷 위에 묻은 붉은 피 대다수가 그의 것이 아닌 탁탑도마의 혈흔이라는 점이었다.

남우는 선언했던 대로, 마연이 흘린 눈물의 몇 배나 되는 피를 뽑아 끝내 탁탑도마를 쓰러트렸다. 당연히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탁탑도마는 전대의 십대고수라는 걸 증명하듯, 뛰어난 무공과 엄청난 경험을 살려 쉴 새 없이 남우를 위협했다.

오히려 초반에는 남우가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한 위태로운 모습도 많이 보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나 남우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견뎌냈고, 끝끝내 승리했다. 장기전으로 갈수록 유리한 태을심공의 효능 덕이었다.

“정말, 정말이지…….”

너무 많이 걱정했다.

갑작스럽게 짧은 말만 남기고 사라졌을 때도, 탁탑도마와의 아슬아슬한 격전 속에서도, 정말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간다는 심정이 무엇인지 절실히 겪어보았다. 혹시라도, 만약에 눈앞에서 남우가 죽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 그녀는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죽을 각오로 탁탑도마에게 달려들었을 테고, 분명 철저하게 유린당했을 터다.

물론 탁탑도마의 최후도 곱지만은 않을 터였다.

‘내가 죽는다면…….’

탁탑도마도 죽는다.

천하를 벗어나, 하늘 뒤에 숨는다 한들 그를 잡아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게 죽여줄 수 있는 인물이 그녀의 뒤에 존재했으니 말이다.

“으으으…… 진짜 아프네요.”

“일단 내상을 다스릴만한 약은 없으니까, 상처 부위만 봉합하고 바로 의원으로 가자. 바보같이…… 왜 괜히 나서서…….”

물론 이유야 알고 있었다.

남우의 입에서 나올 말도 안다.

한데도 이런 투정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뭘 물어요. 당연히 으으…… 아프다. 좋아하니까죠.”

헤실거리는 웃음을 흘린 남우가 오른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정말이지, 언제나 그렇듯 끝까지 진지하지 못하는 사내다.

하나 그런 남우가 싫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그녀 역시 남우를 걱정했다.

왜?

‘좋아…… 하니까.’

매일 같이 가볍기만 한 그를 보며, 도저히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다며 몇 번이나 걷어찼는데,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파고들었던 것일까? 뜨거운 피를 흘리며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그를 껴안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좋아한다.

남우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그를 좋아했다.

하나 역시 그러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기에는 아직 미숙하기만 한 마연이었다.

“바보, 멍청이, 조심 좀 하지.”

안다. 조심해서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애초에 남우가 이렇게 된 이유도 굳이 따지자면 마연 본인에게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조금만 더 주의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강호의 일이란 본래 수많은 우연의 중복으로 벌어지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으으…… 그래도 좋네요. 조금 다쳤다고 이렇게 마 소저한테 간호도 받아보고.”

“이게 조금이야?”

“마 소저 눈에서 눈물 뽑았으니까요. 그에 비하면 싸죠.”

그 값이라면 이미 탁탑도마에게 충분히 넘치고도 남을 만큼 받았다. 하나 남우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다시금 눈물이 그렁거리는 마연의 눈가를 훔치며, 해맑게 웃고는 말한다.

“눈물 값, 지켜주지 못한 저도 같이 치러야죠.”

“이 바보, 정말 바보.”

“미안해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그러고 보니 의문이기는 했다.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 사라지더니, 며칠 동안 코빼기조차 안 보이다니.

“대체 뭐하러 다녀온 거야?”

“사문의 소환령이 내려졌었거든요. 크으으, 거기 아프다니까요.”

“조금만 참아! 근데 언제?”

“으으, 하늘에…….”

“하늘?”

그러고 보니, 종남파의 문인(門人)들은 천조(天鳥)라는 영특한 새를 길러 연락수단으로 긴급 상황에 이용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한데 설마하니, 그녀가 보지 못한 새 천조가 왔다 갔던 것일까?

“보통…… 하늘에서 신호를 보내고 사라지거든요.”

“아…… 그래서…….”

그렇다고는 해도 마연은 전혀 눈치조차 못 챘었다.

셋 중 하나일 터였다. 천조가 그만큼 은밀하거나, 남우가 너무 예민하거나. 아니면, 둘 다이거나, 어찌 됐든 종남파의 천조가 소문 이상의 능력을 보여준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뭐, 그런 셈이죠. 아, 거기, 거기. 진짜 아파요!”

“됐어. 이제 다 끝나 가니까.”

“진짜죠? 으으…….”

“응. 끝났어.”

끝났다. 하나 의원으로 가야 되는 것은 여전했다. 상처가 깊어 보이는 부분에 금창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은 정도가 전부인 응급처치다.

“이리 좀, 팔 좀 들어봐.”

“네?”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반쯤 일으키던 남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묻는다.

“기대기 편하게 하려고 그러지. 설마하니 그 부상을 입고 네 발로 가려고 하는 거야?”

“그, 그야 당연하지 않나요? 어찌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좋아하는 여인의 몸에 기대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시끄럽고, 맞기 싫으면 이리 팔 내놔.”

“……끄응.”

마연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신음을 흘린 남우가 팔을 내뻗었다. 그를 자신의 목에 두르고, 남우의 몸을 일으켜 세운 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예.”

남우는 답지 않게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마연은 그런 남우를 이끌며,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춥…… 네요.”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남우가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고 보니 계절도 가을의 막바지.

이제 곧 겨울이다.

그런 상황에 피를 많이도 쏟아냈는데, 여태껏 투정 한 번 안 부린 게 오히려 신비할 정도였다.

“조금만 참아.”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는 덕에, 마을이 멀지는 않았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그리 생각하며 남우의 몸을 더욱 자신에게 밀착시키는 마연이었다. 그렇게 걷고 있자니, 확실히 몸에 조금씩 열기가 올랐다. 귓가로는 남우의 옅은 숨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더, 덥네.’

힘을 쓰고 있는 덕일까?

이상할 정도로 더웠다.

심장은 박동하고, 얼굴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개진다.

“마 소저.”

그런 마연의 귓가에, 남우의 조용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왜, 왜?”

“환자, 때리지는 않겠죠?”

그러고 보니 남우의 숨결도 무언가 이상했다.

왠지 모르게 깊고, 거칠다.

“무, 무,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냥요. 정말 도저히 못 참겠어서…….”

“으…… 읍!?”

의문은 더 필요 없었다.

남우의 고개가 천천히 틀어졌고,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감촉이 마연의 입술에 와 닿았다. 달콤하다. 정신은 멍해지고, 다리에 힘이 순간적으로 풀릴 뻔했을 정도로, 황홀했다.

“헤헤…….”

그 짧고도, 깊은 시간이 지나가고, 남우의 헤실거리는 소리가 다시금 돌아왔다.

“너, 너……!”

화를 낼 틈은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떨어트리고 의식을 잃어버리는 남우였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당했다.

당해 버리고 말았다.

한데도 더 이상 아무런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좋은 피할 수 없는 인연이 다가와 버린 가을의 막바지, 겨울의 초입이었다.

제십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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