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귀환-61화 (62/83)

(第七章)

“사부님!”

“소사부!”

구혜린의 등장에 제자들의 얼굴에 단숨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이 아는 구혜린은, 서원 내에서 마현에 버금가는 초고수다. 그녀라면 눈앞의 삼마왕을 상대로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여긴 탓이었다.

하나 실상만 따지자면, 그리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조금 전, 폭마왕의 두 손가락을 베어간 일격은 그녀의 절초라고 할 수 있는 유성섬이었다. 한데 손목을 벤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손가락 몇 개만을 가져올 수 있었다.

‘조화경의 고수.’

폭마왕뿐만이 아니다.

바닥에 쓰러진 수마왕을 제외한, 귀마왕 역시 조화경의 고수다. 작금의 상황이 즐겁다는 듯 웃고 있지만 실처럼 가늘어진 두 눈 속에 담긴 섬뜩한 살기는 그녀조차도 버거울 정도였다.

두 사람이 끼어든다면, 수마왕 때와 경우가 달라진다.

아이들은 도움조차 되지 못한다.

괜히 초절정 이후, 화경의 고수를 초인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이들이었다. 두 눈을 감고, 짧은 생각에 빠졌던 구혜린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스승으로서의 숙제야. 백산.”

“……예.”

“아이들을 데리고 최대한 멀리 달아나. 시간은 이 각 이내다.”

구혜린의 말에, 화색이 돌던 제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백산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 수 없다면, 도주도 병법 중 하나다. 괜히 손자의 삼십육계에 주위상(走爲上)이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 여의치 않다면 피할 줄도 알아야 한다. 결정을 내린 백산이 주변을 향해 시선을 돌린 후 손짓했다.

“도망가자.”

주춤거리며, 엉성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들이 망설일 때였다.

“어서!”

구혜린의 목소리가 드높이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서진 소룡원의 벽 바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괜찮으시겠어요?”

아이들이 모두 나간 마지막.

끝까지 상황을 지켜보며 남아 있던 소수린이 구혜린을 향해 물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다. 이른바 천재다. 하기에 이 싸움이, 구혜린에게 큰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 무조건적으로 진다.

도주도 쉽지 않을 터였다.

“걱정 마. 죽을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그런 소수린을 향해, 활짝 핀 미소를 보여준 구혜린이 답한다.

“……믿을게요.”

구혜린이 죽는다면 마현이 누구보다 슬퍼할 테니까.

하기에 그녀는 무사해야 한다.

아니, 그런 점을 제외하고라도, 소수린 역시 구혜린을 좋아했다.

여인으로서의 마음과는 별개였다.

그렇게 마지막 남았던 소수린마저 떠나간 자리.

“흘흘…… 흑귀를 죽인 흉수(兇手)가 누군가 했더니 이리 어여쁜 여인이었구먼.”

작은 웃음을 흘린 귀마왕이 으스스한 눈을 빛냈다.

여태껏 팔짱을 낀 채 상황만을 지켜본 것은 여유를 부리는 것도, 도주하는 아이들을 사로잡을 가치를 못 느낀 탓도 아니었다.

“대단한 실력이야. 움직였다면 둘 중 하나는 죽었겠지.”

폭마왕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아이들이 물러나는 자리에 고고히 서 있던 그녀의 검은, 그 긴 시간 동안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누군가 아이들을 붙잡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필살(必殺)의 살수(殺手)를 펼치기 위함이다. 물론 그로 인해 구혜린조차 위험해지는 것쯤은 부담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마왕들 역시 먼저 목숨을 내놓고 싶지는 않았다.

하기에 아이들을 보낼 때까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먼저 움직이는 측 하나는 베인다.

단 한 수이지만, 그녀의 유성섬을 직접 보았기에 알 수 있던 사실이었다.

‘무서운 쾌검이다.’

손가락 두 개 잃은 것쯤은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로, 아주 무서운 검술이었다. 조금만 실수했더라면 손목이 아닌 목이 날아갔을 터였다. 다시 한 번 그런 행운이 따라 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나, 시간은 분명 두 마왕의 편이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지는 모르겠네만, 저기 넘어져 있는 친구. 슬슬 일어날 때가 된 것 같은데 말이지. 흘흘.”

소수린의 일격에 큰 충격을 받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수마왕의 몸이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작금의 상황은 그야말로 백중세다. 서로의 목숨을 건 치명적인 도박판 위에 세 사람이 오른 것이다.

그런 판에 또 한 사람이 끼어든다면 당연하게도 상황은 바뀌게 된다.

힘의 균형이 기우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선 구혜린의 검극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두 눈동자에도 조금의 두려움이 비치지 않는다. 물러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죽음을 각오했군.”

폭마왕이, 그런 구혜린을 향해 짧은 감탄을 터트렸다.

여인의 몸으로서 드높은 무위를 이룬 뛰어난 오성.

거기에 배짱과 목숨을 걸 줄 아는 무인의 기개까지.

적이 아니었다면 고작 서원의 사부로 남아있게 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아쉽다. 여러모로 입맛이 다셔졌다.

“누가 죽는다고 했나?”

구혜린이, 그런 폭마왕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죽는다니.

말도 안 된다.

그녀는 이 방에 들어선 순간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죽음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소수린에게 했던 약속 그대로다.

살아남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다.

그것이 현재 구혜린의 의지였다.

‘혼자가 아니니까.’

뱃속에, 묵직한 고동이 느껴진다.

마현의 아이다.

또한 자신의 자식이다.

여자는 약하다 한들, 어머니는 강하다.

죽을 수 없다.

두 눈에 의지를 불태운 그녀를 보며, 폭마왕의 눈에 다시금 이채가 감돌았다.

“강하군. 정말 강해.”

그 무공도.

의지도.

감탄이 나오는 적이다.

얕은 방심이라도 마음에 깃드는 한, 패배하는 측은 오히려 삼마왕이 될 것이다.

“흘흘…… 정말 대단해.”

귀마왕 역시 그러한 사실을 느낀 것일까?

감탄을 하며 구혜린의 전신을 훑는다.

“으음…….”

직후.

바닥에 쓰러져있던 수마왕이 짧은 신음을 토하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쿨럭……!”

짧게 토해내는 검은 핏물은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그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다면 구혜린의 필패(必敗). 하기에…….

슈각-!

망설임 없이 검극에 담아두었던 유성섬을 날린다.

“커어억-!”

서걱.

“기다렸다.”

목이 베이는 소리와 함께, 두 명의 마왕의 신영이 동시에 구혜린의 코앞으로 치달았다.

‘살아남을 거예요. 지켜봐 줘요. 현 가가.’

강하게 검을 움켜쥐는 구혜린의 뇌리로, 활짝 웃는 표정을 한 마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 * *

콰앙-!

등 뒤로부터 커다란 폭음이 들려왔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뛰어가던 와룡서원 제자들의 걸음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함께 멈추었다.

시선을 돌리니, 저 멀리 와룡서원으로부터 피어오르는 커다란 화염이 보였다.

퍽-!

“빌어먹을…….”

움켜쥔 주먹으로, 옆에 위치한 나무의 기둥을 강하게 내려친 정순욱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와룡서원이 불타고 있다. 그들의 어린 시절부터의 추억이 남아있는 소중한 장소가, 매일같이 함께 학문을 익히고 수련해오던 ‘집’이 침략당하고 있다. 분하고, 억울했다. 힘이 없는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우, 우리 큰아들 서원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백산의 등에 업혀, 영문도 모른 채 함께 도주하고 있던 마전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마현이 회시를 치른 사이 떨어진 날벼락은, 그야말로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사실 도주하고 있는 지금까지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어쩌면, 와룡서원뿐만이 아니다.

와룡객잔까지 함께 불탈지 모른다.

아니, 저 정도로 큰 소란을 벌였다는 것은 애초부터 일을 어지간히 처리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어쩌면 무명현 전체가…….

“……아버지.”

백산이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무명현에는 와룡객잔과 와룡서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 백일도 있다.

어지간해서는 마을 전체에 피해가 번질 일은 없다 생각하였는데,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저들이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일부러 일을 크게 보여, 걱정에 가득 찬 제자들이 돌아오게 만드는 것. 알면서도 피하기 어렵다. 걸음이 저도 모르게 마을을 향하려 한다.

‘하나 그래서는…….’

구혜린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

아무런 의미가 남지 않는다.

백산의 두 눈동자에 고민이 가득 차올랐다.

철컥.

그 순간, 먼저 움직인 것은 자신의 검을 강하게 움켜쥔 모용청이었다.

“모용의 검은 적을 두고 달아나지 않습니다.”

백산을 향해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죽더라도 나가서 싸우다 죽겠다. 과연 차기 검왕이라 불리는 인물이랄까? 그 기개가 다르다.

하나…….

“기개와 오만은 별개야.”

툭.

소수린의 날카로운 손날이 방심한 모용청의 뒷목 위로 떨어졌다.

“스승님은 살아남으실 거야. 마을도 무사할 거고. 백산,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뭐지?”

그녀의 단호한 두 눈동자가 백산을 향한다.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검은 눈.

그를 마주한 백산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해야 할 일?

그야 뻔했다.

‘믿는 것.’

믿어야 한다.

조금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가자.”

무거운 얼굴을 한 백산이 걸음을 돌렸다.

제자들과, 와룡객잔의 식구들도 어두운 표정으로 그 뒤를 따른다.

하늘에서는, 그러한 아이들의 등 뒤를 밝히는 둥근 보름달이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 * *

“하아…… 하아…….”

첫 일격으로 수마왕의 목을 벤 후, 짓쳐 드는 공격에 구혜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도주를 택했다. 그로 인해 어깨와 허벅지에 부상을 얻기는 했지만 상관없었다.

‘일단 살았어.’

거기에 복부 역시 무사하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조금 힘들겠지만, 제발 견뎌줘.’

배 속의 아이를 향해,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부드럽게 배를 쓰다듬는다. 그사이에도 달리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두 개의 기척이 빠른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서원을 벗어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날린 유성섬에 꽤나 자극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놈들의 생각이야 뻔했다.

아이들이야 마음먹고 찾으면 언제든 찾아내 죽일 수 있다. 하나 구혜린은 살려두었다가 후환(後患)이 될 근심이 있다.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목을 베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생각은, 구혜린이 바라고 있는 바였다.

‘잡히지 않아.’

구혜린의 시선이 잠시 밤하늘에 뜬 밝은 보름달을 향했다.

유난히도 달이 밝은 날이다.

주변을 둘러싼 어둠이 그리 무섭지 않을 정도로, 좋은 날인 것이다.

‘왜 하필 이런 날…….’

저런 마인들이 무슨 목적으로 와룡서원을 침공한 것일까? 사실 그 근본이야 깊게 고민할 필요 없었다.

‘석구억.’

어린 제자는 마기를 품은 마졸이다.

분명 그와 연관이 있을 터다.

의아한 점이라면, 여태껏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던 것과 다르게 초고수들이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었다. 이리된다면 애초부터 석구억을 보낸 의미가 없지 않은가?

‘자신감이 있다 이건가?’

하긴, 초절정의 고수 하나에, 화경의 고수가 둘이다.

어지간한 중소문파 하나도 하룻밤 사이에 몰살시키고도 남을 힘인 것이다. 어중간한 일 처리가 답답하여, 큰 칼을 썼다. 와룡서원에 대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면, 제자 몇몇과 스승 하나쯤 사로잡아 강제로 알아보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운이 좋네…….’

만약 마현이 있었다면, 우습지도 않았을 이야기다.

한데 작금의 서원에 마현은 없다.

하기에 저 세 명의 마왕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뛸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운이 좋았다.

와룡서원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때인 셈이다.

‘현 가가.’

그 얼굴을 떠올리자, 마음이 약해지려 한다.

하나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다시금 마음이 강해진다.

조금씩 무거워지는 다리에 다시금 힘이 들어간다.

‘계속해서 나아가면 돼.’

북쪽으로, 조금이라도 북쪽으로.

마현이 귀환할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흘흘, 잡았다.”

“……!!”

뒤에서 쫓아오는 기척이 옅어졌다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앞으로 나아갔었단 말인가? 달리는 구혜린의 정면으로 모습을 드러낸 귀마왕의 손에서 음산한 검은 기가 흘러나와 구혜린을 향해 쏘아졌다.

마현의 흑결과 비슷한 듯하지만, 그보다 형태를 분간하기가 쉽다. 또한, 더 끔찍하다. 보는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듯한 독특한 기운이었다.

곤란한 점은, 저 기운은 단순한 내기로도 가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로지 강기로만 벨 수 있다.

형체를 본 것만으로 그 본질을 파악한 구혜린이 검에 강기를 일으켜 휘둘렀다.

“칫……!”

끼야악-!

그러자 고막을 찢어놓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진다.

동시에 몸 내부에서부터 오묘한 진동이 일어 속을 뒤흔들었다.

“쿨럭……!”

구혜린의 입가로 검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안색은 단숨에 새하얗게 변했다.

죽은 피를 토한 것만큼, 생각보다 내상이 심각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처럼 내부가 진동되면 배 속의 아이가 어찌 될지 모른다. 머리가 아찔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만 보고 짐작한 것일까?

아니면 조금 전 몸속을 뒤흔든 기운을 이용한 것일까?

“호오…… 자네, 홑몸이 아니군. 흘흘흘.”

음산한 눈빛을 흘린 귀마왕이 즐겁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구혜린의 입장에서야 최악에 직면한 셈이었다. 하나 그를 굳이 표정으로 드러낼 필요는 없다.

“개소리.”

가볍게 욕지기를 내뱉으며, 달아날 구멍을 찾는다.

하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장군이다.”

어느새 바로 뒤까지 쫓아온 폭마왕이 달아날 수 있는 공간을 모두 장악했다.

갇혔다.

당장은 뚫고 나갈 길이 없었다.

이런 때에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힘으로 길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유성섬을…….’

조금 무리긴 하지만, 아직 몇 번 정도는 문제없다.

그리 생각한 구혜린이 유성섬의 기수식을 취하려는 순간이었다.

“그건 안 되지. 너무 위험하다고.”

바로 뒤로 쫓아온 폭마왕의 손에서부터 넘실거리는 불길이 쏘아졌다.

놀란 구혜린이 지면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콰앙-!

폭음과 함께 조금 전까지 구혜린이 서 있던 자리 위로 작은 구멍이 형성되었다. 단순한 열강지기가 아닌, 폭발력을 가진 화염이라는 뜻이었다.

‘다시 한 번…….’

검을 쥔 손에 힘을 쥘 때였다.

“안 된다고 하지 않나. 흘흘.”

구혜린의 등 뒤에서부터 귀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라!’

아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구혜린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또한 그녀가 어찌 움직일지 예측하고 있다. 최대한 그 움직임을 봉쇄해 유성섬을 발동조차 못 하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슈각-!

공중에서 몸을 회전해, 빠르게 검을 휘두르지만 가른 것은 아까와 같은 검은 영혼뿐이다.

끼아악-!

다시 한 번 비명이 구혜린의 고막을 강타했다.

‘…….’

온몸이 진동되는 그 충격은, 그야말로 최악.

고통을 삼킨 채, 지면으로 착지하려는 구혜린의 가슴께로 다시 한 번 뜨거운 화염이 쏘아졌다.

피할 길은 없었다.

이번에도 부딪쳐야만 한다.

“하앗!”

기합과 함께, 내지른 일격이 뜨거운 염구(炎球)를 반으로 가른다.

퍼엉-!

동시에 엄청난 폭발이 일며 열기의 후폭풍이 구혜린의 전신을 덮쳤다. 물러선다면 큰 피해는 없을 터다. 하나 구혜린의 선택은 회피가 아니었다. 오히려 앞으로 나아간다.

‘물러나면 또다시 뒤를 잡힐 뿐이야.’

뜨거운 열기 사이를 가르고,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폭마왕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는다.

‘유성섬.’

준비 시간은 끝났다.

‘이제 휘두르기만 하면…….’

섬뜩한 감각이, 머리끝에서부터 쭈뼛 솟아났다.

그 감에 따라, 저도 모르게 준비하고 있던 유성섬의 목표를 돌린다.

목표는 지면!

파앗-!

유성처럼 쏘아진 구혜린의 검극이, 지면에 거대한 상처를 남긴다.

“크흠……!”

그러자 지면 아래에서 짧은 신음이 들려오며 붉은 핏물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허공으로 붉은 피로 물든 손이 거칠게 치솟는다. 지면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귀마왕이었다. 만약 그대로 폭마왕의 심장을 노리고 뛰어들었다면, 지금 바닥에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 것은 구혜린, 그녀였을 게 분명했다.

“이거 참, 젊은 아가씨가 감이 좋군.”

괴이하다.

폭마왕의 무공도 곤란하지만, 귀마왕의 무공은 너무나 괴이했다. 대체 이 격전 와중에 언제 땅속으로 파고들었단 말인가?

“이제 보니, 주공이 토분공(土蚠功)인가보군.”

구혜린의 비아냥거림에, 입가로 비웃음을 띄운 귀마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나 아가씨, 내기가 슬슬 바닥을 보이나? 조금이라도 시간이 더 필요해?”

“…….”

“미안하지만 이 강호에서 노닌 것만 해도 반평생이 넘는 몸일세. 어지간한 어설픈 수작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구혜린을 향해 다음 공격을 쏘아내려던 귀마왕의 두 눈이 기묘하게 찌푸려졌다.

‘뭐지?’

아니, 대체 언제부터였던 것이지?

구혜린의 등 뒤, 처음 보는 문사 차림의 사내가 보였다.

두 눈을 감았다가 떠보아도, 잘못 본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학사 같아 보이는데,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의 눈을 속이고 이곳에 있었단 말인가? 역시 말이 안 된다. 하나 그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경우는…….

‘설마 방금 이곳에 도착했다는 건가?’

한데도 몰랐다고?

이곳까지 굉장한 속도로 달려왔을 텐데?

그야말로 반평생을 강호에서 노닐었다.

하나 이처럼 섬뜩한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다.

위험하다.

귀마왕의 감각이 최악의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꽤나 무심한 눈동자로 주변을 훑어볼 뿐이다. 이후로는, 긴장한 표정으로 정면만을 노려보고 있는 구혜린을 향해 천천히 팔을 들어, 어깨 위로 손을 올린다.

“……어?”

그 부드러운, 익숙한 느낌에 긴장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구혜린이 뭔가 바람 빠진 목소리를 흘린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뒤에는 두 눈에 눈물을 고여낸다.

왔다.

그가 왔다.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

천하를 통틀어, 그녀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명.

“현 가가…….”

마현의 등장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마는 구혜린이었다.

“미안해, 많이 고생시켰구나.”

그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품으로 끌어안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준 마현의 두 눈동자가, 무심한 기운을 품은 채 긴장한 표정을 드러내고 있는 두 마왕을 향했다.

“명한다.”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다.

두 눈동자에 담긴 분노는 감히 인간인 주제에 마왕이라는 칭호를 달고 있는 허약한 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귀기(鬼氣)다.

“삼계(三界)를 통틀어, 가장 극악한 공포를 떠올리며 영멸(永滅)하라.”

진정한 마왕의 언령(言靈)이었다.

* * *

죽음이 다가온다.

하나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이다.

자신의 아혈을 짚고, 오로지 순수한 근력만을 이용해 한쪽 팔을 잡아 뜯는다.

뿌득, 뿌드득.

살이 찢기고, 근육이 파열되며, 뼈와 혈관이 뜯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틀어박힌다.

‘아, 안 돼…….’

죽기 싫다.

이러한 끔찍한 고통, 느끼고 싶지 않다.

너무나 괴로운데, 비명조차 낼 수 없는 끔찍함에 홀로 남아있다. 몸은 이미 주인의 의지를 거부한 지 오래다. 천하를 통틀어, 가장 지고한 왕의 명 앞에, 한없이 복종할 뿐이다.

죽기 싫다.

아니, 이제는 죽고 싶다.

그래, 차라리 죽고 싶었다.

팔이 뜯어지고, 귀가 찢기고, 코를 드러내고, 손톱을 뽑아 드는 순간순간,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죽고 싶어.’

괴롭다.

너무나 괴롭다.

차라리 죽고 싶어 미치겠다.

하나 죽음까지는 아직도 너무나 멀어 보였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무모한 행위를 벌였던 것이란 말인가……?

후회조차도 사치일 뿐인 고통의 연속이었다.

제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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