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귀환-58화 (59/83)

(第四章)

무언가에 집중할수록,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흐른다.

그 말이 옳았다.

‘벌써 가을인가.’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또다시 새 계절이 찾아왔다.

마현은 온몸을 훑는 선선한 바람에 저도 모르게 즐거운 미소를 흘렸다.

“하늘은 높고, 마음은 평온하니. 그야말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는 말이 딱 옳군.”

“하지만 현 가가는 그 높은 하늘을 보며, 살찔 틈이 없지 않나요?”

뒷짐을 진 채 느긋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마현에게 다가온 구혜린이, 편안하게 머리를 기대오며 물었다.

“회시 말이지?”

“예. 요즘 밤마다 매일 늦게까지 서책만 훑으시고, 늦게 들어오시니까요. 언제쯤에나 예전처럼, 서책을 훑듯 제 몸을 훑어주시려나요?”

“……쿨럭. 리, 린 매.”

“설마 임신해서 배부른 아내라고 하여 돌덩이 취급하시는 건가요?”

“그, 그럴 리가…….”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

임신을 했다고는 하나, 몸매에 큰 차이가 안 보인다고 해야 하나? 구혜린의 경우가 딱 그러했다. 벌써 삼 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는 차, 살짝 아랫배가 불러오기는 했지만 자세히 본다 한들 그 차이를 알기 힘들 정도였다.

“농담이에요. 호호. 그냥 밖에서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것도 오랜만이어서요.”

“확실히…….”

서원 학생들 가르치랴, 밤에는 공부하랴, 또 이것저것 신경 쓰랴. 부부 두 사람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마현은 임산부인 구혜린이 자주 움직이는 모습에 걱정도 많이 했지만, 본인이 그편이 오히려 좋다 하니 마냥 말릴 수만도 없었다. 일단은, 현재까지도 몸에 큰 문제가 보이지 않았고 말이다.

오히려 그녀의 말마따나 몸을 움직일수록 배 속의 아이도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걱정은 되지만 이래서야, 어쩔 수 없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배 속의 아이를 느끼면서도, 아직까지 실감 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따지자면, 실질적으로 걱정이 되는 사실은 따로 존재했다.

“그나저나 괜찮겠어?”

“뭐가요?”

마현의 팔을 양팔로 감싼 채, 온몸을 편히 기댄 구혜린이 두 눈을 감고서는 물었다. 편안한 기분이었다. 햇볕은 따뜻하고, 마음도 풍족하다. 그런 구혜린을 보며 부드러운 웃음을 흘린 마현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열었다.

“한동안 혼자 있어야 하잖아.”

“아…….”

가을이 되었으니, 조만간 회시가 열릴 터였다.

향시까지와 다르게 회시부터는 성도가 아닌, 수도인 북경에서 치르게 된다. 심지어 시험 자체가 삼 일에 걸쳐 진행되니, 아무리 마현이라 하여도 짧은 시간 내에 오가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뭐, 며칠이나 된다고요.”

“보름쯤은 걸릴 거라고.”

“괜찮아요. 그쯤은. 제가 무슨 제 할 일 못 하는 애도 아니고…….”

“하지만 애도 함께 있잖아?”

“푸훗, 그러네요?”

웃음을 터트린 구혜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괜찮아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준비한 회시를 포기할 수도 없잖아요.”

“삼 년 뒤에 치러도 돼.”

“진심이에요?”

“……삼 년 뒤에도 애는 애겠지?”

“당연한 말씀을. 뭘 이제 와서 망설여요. 현 가가답지 않게.”

“나답지 않기야 하지만…….”

홑몸도 아닌 부인을 내버려 두고 떠나는 남편의 마음이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걱정 말고 다녀와요. 조만간 이러다가 제자들한테 따라잡힐지도 모른다고요?”

“음…….”

그 말마따나, 최근 향시 준비를 시작한 일기 제자들의 학문도 일취월장(日就月將)하고 있었다. 이러다 조만간 제자들 중 하나라도 향시에 합격한다면, 마현과 같은 거인이다. 물론, 그때가 되면 졸업을 하기로 하였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스승 나름의 체면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정말 큰 걱정 안 해도 되겠지?”

“어휴, 애가 있다고 하니까 정말 철부지 아빠가 다 됐어. 걱정 마요. 그런 말 몰라요?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해요. 별 탈 없을 테니까, 마음 푹 놓고 어서 다녀와요. 기왕 갔다 오는 거 시험 꼭 합격할 생각 하시고요.”

“고마워, 린 매.”

정말 좋은 여자다.

몇 번이고 느꼈지만, 언제나 새삼스러운 사실이었다.

구혜린을 아내로서 택한 것은 매우 옳았다.

크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현을 덮고 있던 마계에 대한 어두운 기억도 그녀 덕분에 하나, 둘씩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마음이 연해지고, 기분은 풀어진다. 이전의 예리한 감각이 너무 많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들었지만, 괜찮았다.

‘아무려면 어떨까.’

이제는 예전과 같을 필요 없다.

굳이 날을 세우고 살 필요도, 언제나 주변을 경계하며 모든 행동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지 않아도 괜찮다. 충분히 튼튼한 방벽이 세워졌다.

평화롭다.

그 사실이 마현의 마음을 더욱 풍족게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 뒤.

마현이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 * *

마현은 시끌벅적하지 않게, 조용히 와룡서원을 떠났다. 제자들과 가족에게 가벼운 인사를 했지만 성대한 배웅 행사는 거절한 것이다.

“합격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짧은 한마디에, 이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마현의 손을 잡은 마전이 입가로 부드러운 호선을 그려 보였다.

“잘할 수 있을 게다.”

마현을 믿는다.

노쇠(老衰)하였지만, 여전히 반짝이는 두 눈을 한 마전의 그 말이면 충분했다. 어느덧, 마현이 귀환한 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변화는 더욱 많았다.

마현이 불어넣은 기운에도 불구하고 세월의 흐름을 막지 못해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나기 시작한 아버지와 눈가에 주름이 막 지기 시작한 동생과 제수씨. 여전히 귀엽지만 훨씬 더 크게 자라난 조카와 성장한 제자들. 아내, 그리고 배 속의 아이까지.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떠나는 마현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즐거워 보일 뿐이었다.

* * *

마현이 떠나갔지만, 와룡서원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늘 같은 일과가 변할 것 없이 반복된다. 하나 일기 제자들의 입장에서야, 나름의 큰 변화가 존재했다.

“허전하네…….”

“그러게 말이지.”

마현이 어딘가 먼 길을 떠날 때면, 항상 함께였던 일기 제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바로 곁에 마현이 없는 상황에는 꽤나 익숙지 않았다. 아마 저도 모르게 마현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을 터였다.

“스승님이 없다고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애는 아니니까. 흐아암. 그나저나 가을이라 그런가, 되게 늘어지네.”

소룡원, 일기 남성 제자들의 방 내에서 읽고 있던 서책을 덮은 백산이, 길게 하품을 하며 큰 기지개를 켰다.

“그치? 나만 잠이 오는 거 아니지?”

그 말에 잇따라 반응하는 것은 양명이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함께 서책을 덮은 양명이 곧바로 바닥으로 드러누워 버린다.

“흥, 게으른 것들. 스승님이 없다고 곧바로 늘어지다니.”

그리 말을 하면서, 책을 덮는 것은 정순욱도 마찬가지다. 어느새 방 안에 나란히 누운 세 청년이 서로를 향해 웃음 지었다. 말하는 바는 다르지만, 생각하는 바는 같다.

“허전하고, 늘어지네.”

“뭔가 재미있는 일 없나?”

백산의 말을, 양명이 받는다.

“최근 근방에 설치는 흑도 녀석들이 많아졌다던데, 어때. 오랜만에 방망이나 좀 휘둘러볼까?”

정순욱이 웃음기 섞인 말을 건네며 양팔을 허공으로 휘젓는다. 마구잡이로 휘젓는 것 같아 보이지만, 분명한 규율이 존재하는 와룡강림공이었다.

“아서라. 남아 있는 흑도라고 해봐야 다 삼류 잡배에, 배포도 없는 어수룩한 녀석들이야. 우리가 나서봐야 관병들 입장에서도 참견 정도밖에 안 될걸?”

“그냥 해본 말이다. 해본 말.”

의미 없는 잡담.

그 늘어지는 분위기가 좋다.

“후아암.”

덕분일까?

잠이 쏟아진다고 생각한 양명이 하품을 길게 하며 눈을 감았다.

드르렁.

이내 얕게 코 고는 소리가 방 내부를 가득 채운다.

백산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잘 자네.”

“흥, 아직까지도 어린 아이인 줄 아는 녀석이니까.”

“좋게 보자면 순수하다는 의미잖아?”

정순욱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순수하다는 말은 곧 우둔하다는 말과 같지.”

“우와, 넌 정말 가끔 보면 세상을 너무 비뚤어지게 보고 있는 것 같다니까.”

“비뚤어지게 보는 게 아니다. 현실을 직시할 뿐이지.”

“니예, 니예. 그러시겠지요.”

백산의 장난기 가득 섞인 목소리에, 정순욱이 이를 아득, 하고 갈며 웃음 짓는다.

“……이 빌어먹을 곰탱이 자식이. 요즘 대련을 안 했더니 이 형님의 매서운 봉 맛을 잊었나 보구나.”

“음? 맛이라고 해봐야…… 맞아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당장 따라 나와라.”

말로는 투덕거리고 있지만, 입가에 걸린 것은 미소다.

서로에게 머물고 있던 어둠을 거둬내고, 밝음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두 사람은 이제 마냥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자존심이나, 쓸데없는 고집, 단순한 우직함 외에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이였다.

그렇기에 여유가 밴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하나, 모든 것에 여유가 생긴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래서 말인데…… 수린이하고는 어떠냐?”

움찔.

여유롭게 누워 말장난을 치던 정순욱의 몸이 살짝 떨려왔다.

“그, 그, 그게 지금 왜 여기서 나오는 거야!?”

“왜는. 너희들 아직까지도 분위기가 좀 그렇잖아.”

“……알아서 잘할 거다. 신경 꺼.”

“그럴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정순욱이 보지 못한 새, 백산의 입가로도 옅은 쓴웃음이 지나갔다.

“너 혹시, 수린이 좋아하냐?”

이후 입 바깥으로 나온 말은, 정순욱의 심장 한복판을 크고 빠르게 뒤흔드는 종소리와 같다.

“무, 무, 무, 무, 무슨…… 헛소리란 말이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정순욱이 붉어진 얼굴로 백산을 향해 쌍심지를 돋웠다.

“있는 그대로를 물은 거다. 네 마음속에 수린이가 서원의 친구가 아닌, 남매 같은 존재가 아닌, 한 명의 여인으로서 자리 잡혀 있냐고 말이다.”

백산의 부드러운 눈초리에, 강한 힘이 실려 정순욱을 향했다.

“누, 누가 그런 계집애를…….”

그 눈빛에 맞서, 한참 쌍심지를 돋우던 정순욱의 눈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알고 있었다. 부정하려 하고, 아닌 척해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소수린의 눈이 스승인 마현에게 향해 있는 것이 너무 싫다. 하나 그보다 더 싫은 것은, 그녀 앞에 미력한 자신이었다.

하여 남들에게도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감정을 감추어 두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었으니 말이다.

“어, 언제부터 안 거냐?”

“해안가에서, 너희 둘이 싸우던 때부터?”

“…….”

하긴, 겉으로 보였다고 한다면 아마 그때가 분명했을 터였다.

“지금 네 심정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만은, 우선은 화해가 먼저 아니냐?”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겠나!”

울컥한 표정을 한 정순욱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화해?

당연히 하고야 싶다.

하나 무슨 방법으로?

싸웠을 당시보다야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소수린은 여전히 정순욱을 향해 싸늘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잘 해봐야 말 한마디 건네는 게 전부. 화해는커녕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다.

“뭘 어렵게 생각해. 그냥 가서, 미안하다고 말하면 되지.”

“그렇게 쉬운 방법으로 끝날 일이었다면…….”

“그 쉬운 방법을 시도해 본 적도 없잖아?”

“말이야 쉽지!”

하나 쉬운 방법이란 게, 어찌 그리 말처럼 간단하기만 하던가? 정순욱에게 있어 감추고, 싸우는 일은 굉장히 익숙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화해를 하는 행위는 너무나 어색하다는 말이었다.

어렵다.

백산에게 있어 간단하고 쉬울 수도 있는 일이, 정순욱에게는 너무나 어려웠다.

“알고 있어. 너한테 힘든 거.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떠올려 본 적조차 없잖아?”

“…….”

“복잡한 일일수록, 간단하게 생각하는 게 오히려 답에 가까워지는 길일지도 몰라. 조금 부끄럽고, 민망한 거야 뭐 어때? 어색해도 괜찮잖아? 일단 지금 그 상태로 보다는 나을 테니까 말이다.”

“네, 네깟 놈이…… 네깟 놈이 뭘 안다고!”

버럭, 화를 낸 정순욱이 걸음을 크게 옮겨 방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나섰다.

어지간히도 성이 난 모습이었다.

그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 뒷머리를 긁적거린 백산이 눈을 감았다.

“그래도 뭐…… 바보는 아니니까.”

아마, 잠깐 머리를 식히고 나면 곧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터였다.

“오히려 바보라면…….”

백산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렀다.

* * *

“빌어먹을 곰탱이, 감히 누구한테 충고를 하고 있는 거냐? 건방지다고, 재수 없고. 네깟 놈이 그런 말을 한다고 내가……!”

파밧-!

무작정 방을 박차고 나와, 공터에서 마구잡이로 무공을 펼쳐 보이던 정순욱의 양다리가 지면을 강하게 박찼다. 신형은 공중을 날 듯 떠올라, 거칠게 허공을 격한다. 그 탓일까? 지면으로 다시금 떨어지는 자세조차 불안해, 몸을 살짝 비틀댄 정순욱이었다.

“빌어먹을!”

뜻대로 되는 게 없다.

그리 생각하며 죄 없는 땅을 거칠게 발로 긁은 정순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옳다. 흥분해서 마구잡이로 몰아붙였지만, 백산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먼저 솔직하게 사과를 건넨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왜?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소수린 앞에만 서면 자신이 미약하다고 느끼고 있는 정순욱이었다. 나이가 들며, 많이 유순해졌다고는 해도 기본적인 기질이 반골인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한 생각이, 괜한 저항심을 만들어낸다.

하여 먼저 다가가 사과를 건넨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가장 간단하고 쉬운 해결책이란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해볼까.”

하나 자존심을 조금만 굽히고 생각해본다면, 역시 그편이 옳았다.

백산의 말대로다.

정순욱은 어느 순간부터, 소수린을 여인으로 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매처럼 서원 내에서 커 온 사이라 한들, 그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대놓고.

‘그래, 까고 말해서.’

예뻐도 너무 예쁘다.

보고 있으면 심장이 미칠 듯이 쿵쾅거리고, 시선을 뗄 수가 없다. 그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도 좋다. 냉정한 척하는 주제에, 밤하늘의 별을 닮은 듯한 반짝이는 눈동자는 더욱 좋았다. 한 떨기 붉은 꽃을 닮은 입술은 어떻던가? 고혹적이다.

억울하고, 엄청 자존심 상하는 말이지만, 먼저 반한 측은 분명 정순욱이었다.

아니, 소수린은 아직까지 그에게 관심조차 없을 터였다.

‘자존심…….’

오로지 그것 하나만 생각하고 살았다.

스스로에 대한 콧대가 어지간히도 높았던 정순욱이었으니 말이다. 하나, 자존심이 득(嘚)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해(害)가 될 확률이 높았다.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황여준.’

어린 시절 자신의 판박이나 마찬가지인, 아니 그보다도 더한 이기생 제자다. 참 묘한 말이지만, 황여준을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배움을 얻는 측은 정순욱이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그중에 스승이 있다고 했던가.”

옛 성현들의 말씀 중, 틀린 것이 없다더니 그 말이 옳은 셈이었다.

“그래, 가자. 쳇.”

가벼운 몸풀이로 조금 착잡하던 기분까지 떨쳐낸 정순욱이 결심을 하며, 등을 돌린 때였다.

“……어?”

익숙한 얼굴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빛만 흘리고는 지나쳐간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깜짝 놀란 정순욱의 심장은 미친 듯이 박동한다.

얼굴이 붉어지고, 시선은 저도 모르게 지면을 향한다.

작금의 정순욱에게, 이러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사람이야 굳이 말할 것이 있겠는가?

소수린이었다.

“어, 어…….”

그렇게, 잠깐 망설이는 사이에 소수린은 조금씩 걸음을 옮겨 나아갔다. 지면과 점점 더 멀어져가는 소수린의 등을 번갈아 바라보며 묘한 신음(?)만을 흘리던 정순욱의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어이……!”

소수린이 걸음을 멈추어 고개를 돌린다.

다행히 정순욱을 무시하려던 것만은 아니었던 듯했다.

“……?”

“어, 어디 가냐?”

아니, 이런 걸 물으려 한 건 아닌데, 또 묻고 보니 궁금하다. 알 수 없는 심경에 정순욱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말해야 할 이유가 있어?”

없다.

그래도…….

“마, 말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잖냐.”

정순욱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소수린의 시선이 서원 바깥을 향했다.

“해안가.”

“너…… 바다 정말 좋아하는구나.”

소수린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고 보니, 소수린은 혼자 말없이 자리를 비울 때가 많았다. 그냥 마냥 걷는 것이 좋아서라고 생각했는데, 늘 어딘가 목적지를 두고 있었던 듯했다.

“가, 같이 갈래?”

“……?”

“할 말도 있고.”

소수린의 눈에 잠시 고민이 깃들었다.

“뭐, 뭐. 네, 네가 싫다면 억지로 따라가겠다는 뜻은 아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아니. 잘 됐어. 마침 나도 할 말이 있었으니까.”

“어? 진짜?”

정순욱의 얼굴이 당장 화색이 되어 밝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양 볼과 귀는 새빨갛게 변한 채였다. 너무 대놓고 감정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차오른 탓이었다.

“…….”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소수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등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정순욱은 빠르게 뛰어 그 뒤로 따라붙었다.

“천천히 좀 가라. 무슨 애가 이렇게 성미가 급해.”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야.”

“그 말은 내가 성격이 급하다는 뜻이냐?”

“아니야?”

“……끙.”

부정은 하지 못하겠다.

신음을 흘린 정순욱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그건 뭔데?”

“……너는?”

정순욱의 질문에, 역으로 되묻는 소수린이다.

“어, 나야 뭐…….”

사과하려고 했다.

생각은 그리했지만, 입 바깥으로 나오기까지는 어렵다. 우물쭈물한 정순욱의 태도를 잠깐 바라보던 소수린이, 다시금 입술을 뗐다.

“미안해.”

“……어?”

독심술이라도 한 것일까?

자신이 하려던 말을 똑같이 읊은 소수린의 음성에 정순욱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미안하다고.”

소수린의 말은 길지 않았다.

태도는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하나 그 진심만은 분명했다.

양 볼에, 귀까지 붉어진 채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그녀는 진심으로 정순욱을 향해 사과하고 있었다. 이유야 물을 것도 없었다. 해안가 사건 이후 서로 간에 어색해진 데에 대한 것이다. 정순욱이 고민했듯, 소수린 역시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 아니. 그거야 뭐…… 오히려 내가 미안할 일이니까.”

따지자면, 먼저 사과해야 할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소수린의 상처가 될 지도 모를 부분을 먼저 후벼 판 것은 본인이었으니 말이다.

“…….”

소수린은 그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저 계속해서 해안가를 향해 걸을 뿐이다.

“……그래.”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입을 연 소수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으로 전부라는 듯한 태도였다. 사과를 했고, 사과를 받았다. 무감정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정순욱의 입장에서야 그편이 편했다.

‘뭘 잘못했고, 어떻게 미안하고 그런 것 비는 건 자신 없었는데 말이지…….’

세간에서 말하기를, 여자라는 동물과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사내는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미안한지, 정말로 골머리 썩는 일이다. 하여 정순욱도 그러한 말을 어찌 해야 할지 내심 깊이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한데 소수린이 그냥 편히 받아주었다.

분명히 말해, 그것으로 끝날 일이었다.

딱히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본래 이쯤 되면, 정순욱의 마음은 편안해야만 했다. 한데, 묘한 감정이 가슴 언저리에 걸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심장 주위를 무언가가 간지럽게 긁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숨은 벅차고, 가슴 언저리 중심에는 무언가 묵직한 게 얹어진 듯 턱 막힌 기분이었다.

따지자면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 않아 망설일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했다.

아니, 그것이 확실했다.

‘말하고 싶어.’

무언가를?

단순히 소수린과의 대화를 원하는 것일까?

정순욱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보다 조금 더 본질적이고, 직설적인 감정의 토로를 원한다. 단순히 사과를 하고, 괜찮다는 말 정도를 듣고 싶던 게 아니었다. 감정의 격동이다. 전하고 싶은 말이 생겨버렸다.

‘이게 다 그 미련 곰탱이 녀석 탓이다.’

그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물어와, 직시하게 해버렸으니.

모두 백산 탓이다.

그리 생각한 정순욱이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부풀어 오르려는 호흡을 깊은 한숨으로 털어낸다.

“…….”

소수린은 그런 정순욱을 향해 조금도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앞으로 걸어나갔다. 할 말은 끝났다. 단지, 굳이 보내야 할 이유도 없으니 함께 걷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야, 소수린.”

“……?”

정순욱의 부름에, 시선만을 살짝 돌리는 소수린이다.

“그…… 뭐냐. 그…….”

“…….”

말을 늘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린은 정순욱을 재촉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상태로 입을 닫아도 굳이 관심이 없을 듯한 태도였다. 정순욱의 입장에서야 영 내키지 않는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넌, 그 뭐냐……. 내가 말하는데 전혀 호기심이 안 드냐?”

“잘 듣고 있어.”

“그 뜻이 아니라…… 뭐랄까. 그냥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랄까.”

“……딱히.”

“절대 그렇게 보이거든.”

“절대 딱히.”

“말꼬리 잡는 거냐?”

정순욱의 말에, 피식하는 웃음을 흘린 소수린이 시선을 다시금 정면으로 돌렸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모습이지만 굳이 더 물을 필요야 없었다.

“하…… 오랜만에 화해했다고 해서, 이 몸을 도발하는 거냐? 소수린.”

정순욱의 눈이 반짝 빛났다.

‘누구 말마따나, 성격이 비뚤어진 걸지도.’

이런 대화라면, 내키지는 않아도 편안하다.

참으로 묘한 일이지만 부정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려던 말은?”

“…….”

기껏 풀어놓고, 이제 와서 다시 잡는 걸까?

의도적이었다면 아주 정확하게 먹혀들었다. 의기양양하던 정순욱이 살짝 어깨를 움츠리며 얼굴을 붉혔다.

하나, 그도 잠시일 뿐이다.

‘까짓거, 뭐 어렵다고.’

그냥 조금 더 솔직해지면 될 뿐이다.

애초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혼자 마음속으로만 연모(戀慕)하다니, 자칭 천하의 정순욱이라 부르는 자신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살짝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당당히 펴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소수린의 옆모습을 직시한다. 이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입 바깥으로 마음을 내뱉는다.

“나, 너 좋아할 수도 있다. 아니,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 아니, 좋아…… 한다.”

당당했던 마음과 다르게, 참으로 중구난방으로 날뛰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과는 확실했다. 정면만을 보며 묵묵히 걷던 소수린의 고개가, 느릿한 속도지만 정순욱을 향한다. 두 눈에는 정순욱으로서는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역동하고 있었다.

‘무(無)감정이 아닌 게 어디야…….’

태연한 척 내심 읊조렸지만, 사실 당장 가슴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크게 심장이 박동했다. 일단 말을 내뱉고 나면 조금 나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머리는 새하얗게 변하고, 손끝은 제멋대로 떨린다.

“미안.”

그런 정순욱을 향해, 돌아온 소수린의 대답은 간결했다.

“……뭐, 짐작하고 있었다만은.”

정순욱의 두 눈과 입가로 웃음이 떠올랐다.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일 터다.

하나 분명, 예상했던 대답이다.

덕분일까?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더 이상 입을 열기 힘들지만도 않았다.

“그래 뭐. 나도 지금 당장 마음을 받아주길 바라고 한 말은 아니니까. 단지, 스승님만 보지 말고 주변도 좀 둘러봐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 멍청아.”

“…….”

“그래서 묻는 거지만 꼭…… 스승님이어야만 하냐?”

“……적어도 아직은.”

소수린의 대답에, 정순욱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뭐랄까, 생각했던 것보다 완고하지 않은 대답이다.

우습지만 희망이 생겼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입가로는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은, 이라는 건 나중에는 나한테도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네?”

소수린의 큰 눈이 정순욱에게로 향했다. 이어서, 얼굴을 붉힌 정순욱의 이마 위로 소수린의 검지가 다가와 가볍게 퉁겨졌다.

딱.

“아! 뭐, 뭐야!”

그리 아프지도 않았거늘, 괜히 과장하여 이마를 짚은 정순욱이 헤실거리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흔히들 콩깍지라 말하던가? 인정하고 나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기분 좋은 정순욱이었다.

“꿈 깨라고.”

“꿈일지 아닐지는 두고 봐야 알 일 아냐?”

“자신만만하네?”

“잊었어? 나 정순욱이야.”

소수린의 입가로도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알고 있어. 멍청이 정순욱.”

“……너 진짜 다시 한 번 붙어볼래?”

“사양할게. 이번에 붙으면 진짜로 기절시킬 것 같거든.”

“쳇…….”

정순욱이 가볍게 혀를 찼다.

인정할 건 인정해서, 소수린의 무공이 더 뛰어난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하여튼, 바라지 마.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널 좋아해. 그리고 그만큼, 백산도 좋아해.”

“거기서 그 곰탱이 이름이 왜 나오는 건데?”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에, 반색했던 정순욱이 입술을 삐죽였다.

“우리는, 남매 같은…… 뭐 그런 거란 말이야.”

“하아……?”

“미안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남자로 볼 수는 없을 거란 거지.”

소수린의 두 눈은 냉정했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가망이 없는 만큼, 차갑게 잘라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나 상대를 한참이나 잘못 골랐다.

“남매 같은 거라고? 너 스승님한테도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하지 않았었냐?”

“……그것과는 달라.”

남매라고 말할 만큼, 가깝게 지낸 사이다.

소수린이 했던 말, 행동,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를 게 뭐 있어. 그리고 말이지…….”

애당초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 하여도 포기할 리가 없다. 그리 말하려던 정순욱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부터 두고 보자고. 말보다는 행동. 미래는 모르는 거니까.”

환하게 빛난다.

정순욱이 이토록 밝은 모습이었던가?

무언가가 달랐다.

소수린이 알고 있던 정순욱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하나 그 빛이, 또 싫지만도 않다.

아니, 오히려 보기 좋다.

정순욱의 성장이 분명할 터니 말이다.

‘그래도…….’

마음만은 받아 줄 수 없다.

하나 물러나라고 하여도, 물러날 줄 모르는 그를 어찌 더 말리겠는가?

“마음대로 해.”

변할 것은 없다.

그리 생각한 소수린이 고개를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두고 봐.”

정순욱의 의기양양한 음색이, 그 뒤를 곧장 따랐다.

제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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