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종(縱)으로 떨어진 검이 번쩍이는 불빛을 토하며 단숨에 승천(昇天)한다. 눈동자가 한 번 깜빡인다 생각한 순간에는, 누군가의 목을 베듯 길게 횡(橫)으로 그어진다. 검광이 번쩍인다.
하나 검의 주인은 검광이 길게 자리 잡은 뒤편에 위치해 있지 않았다.
이미 그 한참이나 앞.
검광을 남긴 채 섬광처럼 움직여 다음 초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으려 했다.
번쩍.
검과 주인의 몸이 동시에 번쩍이며 강기 다발이 유성우처럼 사방을 꽉 막고 있는 벽의 한 면을 향해 쏘아졌다.
콰과과광.
드넓은 밀실 내부를 떨게 만드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하나 벽이 무너지는 소리는 없었다.
“으으……, 이거 뭐야. 그새 검기가 더 예리해졌는데?”
대신해서 들려온 것은 중저음의 사내 목소리다.
“용 형께서 이곳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검을 휘두른 왜소한 체격의 외팔이 사내, 강호에서는 무패철황이라 불리는 철표가 겨누었던 검을 거두며 말했다.
“우리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지만 얼굴을 볼 사인가? 철 제(弟). 하하하!”
강기의 다발이 일으킨 먼지 구름을 뚫고 나온 거한, 용대언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
철표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말마따나, 꼭 이유가 있어야 볼 사이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의형제였다. 강호의 호사가들은, 정의맹을 쓰러트리기 위하여 만든 겉치장 같은 관계라고들 하지만, 실제는 꽤나 달랐다. 얼굴을 자주 보지 않는다 하여, 말을 많이 섞지 않는다 하여 형제가 아닌 것인가? 그리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었다.
철표는 진심으로 용대언을 좋아하며, 믿고, 따랐다.
또한 용대언 역시 과묵한 철표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애초부터, 진심으로 그를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겉치장뿐인 관계였다고는 한들 제라거나, 아우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아직 집 안에 있어서 다행이야. 혹시 기껏 달려왔는데 이미 다른 곳으로 샜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아무래도 다음 모임까지는 철가장에 있을 듯합니다.”
철표의 시선이 흘낏, 자신의 검을 향했다.
“역시…….”
그를 보는 용대언의 입에서 짧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검기가 예사롭지 않더라니, 무언가 보았나 보구나.”
“……아직은 멀기만 합니다.”
“하지만 방향은 찾아냈겠지.”
철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로는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는 채다.
“테무찬인가? 그 몽골 장수 놈하고 싸울 때 얻은 게냐?”
“……예.”
“것 참.”
용대언의 입가로 헛웃음이 떠올랐다.
“본래 장강의 뒷물결은 앞 물결에 밀려나는 법이라지만…… 같은 뒷물결끼리 이러는 건 너무하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와룡서원에 다녀오는 길이다.”
내내 담담하기만 하던 철표의 두 눈이 처음으로 이채를 띠었다.
“무곤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애들은 그럭저럭 다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더군. 무공도 진일보한 것 같고.”
“다행입니다.”
철표의 입가로,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천하의 무패철황도 한 아이의 아버지란 말이더냐.”
그에 용대언의 입가로도 즐거운 웃음이 떠올랐다.
“제우는 어땠습니까?”
“뭐, 말할 것 있나. 여전하지. 다행히 아직까지는 들통나지 않은 것 같은데…… 그 녀석, 겉보기와 달리 소심하고 귀여운 면모가 많지 않나?”
“……칭찬입니까?”
“용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욕이겠지. 아비 된 입장에서 보자면, 뭐 그런 자식 하나 있는 것도 좋아. 무조건 사내답다고 좋은 것만도 아니지 않나. 하하!”
“형님도 아버지십니다.”
“뭐, 부정할 수 없지. 그래서 말인데, 거기 가서 아주 재미있는 일을 겪었거든. 한번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데, 회포(懷抱)에는 역시…….”
용대언이 자신의 오른손을 술잔 모양으로 동그랗게 말아 뒤로 꺾었다.
“한 잔이지?”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철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전력을 다한 형님을 고전케 한 고수라고요?”
“심지어 놓치기까지 했지.”
중원강호, 그중 절반을 차지한 것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의 술상치고는 초라했다. 고작 전붙이 몇과 백주(白酒) 몇 병이 전부다. 딱히 식기가 화려한 것도 아니고, 방 분위기가 현란하지도 않았다.
소박하고, 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불만이 없었다. 표정이 풍푸한 용대언의 경우는, 오히려 정겹다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놀랍군요.”
“그렇지?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란 거지. 더 놀라운 건 따로 있는데…… 음, 역시 제수씨가 부쳐준 전은 언제나 최고야.”
해남도에서 자신을 고전케 한 고수, 추영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던 용대언이 술잔을 기울인 후, 큼직한 손으로 통째로 집은 전을 한입에 넣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그 해남도까지 왜 갔을까라는 부분이지.”
“……글쎄요.”
철표가 전혀 짐작도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말 몇 마디를 듣고 상황을 추론해내는 것은 반천뇌, 사마소의 전문이다. 철표는 그저 검을 휘두르는 한 명의 무인이었다.
“거, 무명와룡 선생을 따라간 거야. 이 두 발로, 뛰어서 말이지. 아, 물론 바다야 배 타고 건넜지.”
농담 섞인 용대언의 말에, 철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룡서원의 스승 말입니까?”
“그렇지.”
“어째서?”
아니, 그보다 먼저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무명와룡이 형님과 함께 뛰었다는 말입니까?”
아무리 칼 밖에 휘두를 줄 모르는 무부(武夫)라 한들, 머리가 달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눈앞의 용대언은 용제라 불리는 남자다. 경공이 주특기가 아니라 한들, 그의 무공은 초인지경. 한낱 서원의 선생 따위가 쫓을 정도가 아니었다.
“함께 라니, 뭔가 착각하고 있군. 철 제?”
“역시…….”
말도 안 된다.
분명 무언가 다른 사정이 있을 것이다.
철표의 안도하는 듯한 표정에, 짓궂은 미소를 그린 용대언이 술잔을 가득 따라 마셨다.
“내가 그를 쫓았어. 처음에는 등이 보였는데, 시간이 조금 흐르니 점으로도 보이지 않더군. 무슨 말인지 알겠나?”
“…….”
철표의 두 눈이 옅은 떨림을 표현했다.
“닿기는커녕, 쫓을 수도 없었어. 자네, 작금의 천하제일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무혈천마(無血天魔).”
“또는 화산검선.”
철표의 말을, 용대언이 받는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지만, 이미 알고 있는 이는 많다.
작금, 강호에서 수위를 노하는 고수 중 정녕 천하제일에 가까운 무인은 그 두 사람이다. 따지자면 용대언과 철표는 그 바로 아래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벌어진 결과라 한들, 두 사람은 그를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열심히 단련하고 뛰어가는 것이다.
천하제일(天下第一).
별것 아닐 수도 있으나, 오로지 한 사람만이 오를 수 있는 그 칭호를 쥐기 위해 말이다.
“그 둘이 달린다고 해서, 내가 닿지도 못할까?”
철표의 고개가, 냉정히 내저어졌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두 사람이 더 강하다 한들 종이 한 장 차이다.
용대언이 마음먹고자 하면 충분히 닿을 수 있었다.
상황과 여건이 갖추어진다면 능히 맞붙어 승리할 수도 있다. 닿지도 아니, 보지도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제 보니, 질문이 너무 협소했군.”
용대언의 얼굴이, 진지하게 굳어졌다.
“질문을 바꾸지. 고금제일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철 제?”
강호를 떠도는 무인과 강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호사가들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하고, 한 번쯤은 입을 열어 떠드는 주제다.
고왕금래(古往今來).
과거와 현재, 천지를 격동시켰다는 강호 역사(歷史)를 통틀어 최고의 고수는 누구일까?
“…….”
철표는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을 무인이라 생각하는 철표에게 있어, 너무나 무거운 주제인 탓이다.
또한 함부로 말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도 했다.
무혈천마와 화산검선.
두 사람의 경우 멀리서나마 지켜본 적이 있다.
또한 직접 그 신위와 맞서지 않았다 한들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를 통해 추측하고, 상상하여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하나 고금제일은 어떠한가? 먼발치에서라도 본 적이 없다. 들리는 이야기 역시, 말 그대로 헛소문과 같은 전설뿐이다.
“어려운 물음이지. 나 역시 얼마 전까지였다면 답하지 못했을 거야. 하나 지금은 확실히 말할 수 있네. 고금제일은 바로 무명와룡. 바로 그 사내야.”
용대언의 말이 무겁게 떨어진다.
어깨 위를 짓누른다.
철표는 감히 그 말에 부정할 생각조차 못 했다.
용대언은 호탕하지만, 무거운 사내다.
함부로 입을 열어 제일을 논하지 않는다.
용제의 시험이 괜히 생겼겠는가?
그런 용대언이, 장담코 말했으니 마현은 고금제일일 것이다. 하다못해 그에 가장 근접한, 현실에 실존하는 인물이었다.
“길을 보았다고 했지? 끝에 다다르면, 그에게 자네의 검이 닿을까? 나 역시 죽기 전에, 그의 발치를 볼 수 있을까? 궁금하네. 오늘 철 제를 찾아온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야. 강호가, 변할 준비를 하고 있네. 모두 그가 마음먹기에 달렸지.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용대언의 두 눈에, 뜨거운 불꽃이 이글거린다.
철표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꽉 쥔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고금제일.
함부로 논하기 어려운 말이다.
하나, 눈앞에 그에 가까운 사내가 있다면 한 번쯤 맞닿아보고 싶다. 감히 뛰어넘어보고자 한다. 작금의 강호가 정한 한계의 경계선을 잊어본다.
“한잔하자! 고금제일의 스승을 둔 우리의 아이들을 위하여. 또한, 변동할 강호에서 뒤처지지 않을 우리 장강의 뒷물결들을 위해!”
짠.
잔이 부딪치며, 맑은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 * *
“……하여, 해남파 사건은 큰 탈 없이 종결되었습니다.”
보고를 올리는 중년 사내의 눈이 더없이 신중하다.
눈짓 하나, 손짓 하나에도 조심스러움과 공경함이 깃든다. 그 누구도 감히 중년의 사내, 정의맹의 군사인 제갈천에게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지 못할 터였다.
오로지 단 한 명.
작금의 정의맹주.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사내, 화산검선 종선휘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큰 탈이 없다니, 다행이로군. 그래도 무탈(無奪)한 것만은 아니니, 해남파에는 위로의 선물을 보내도록 하게.”
보고를 듣는 동안 단 한마디, 입 한 번 떼지 않은 채 자신의 작은 정원을 가다듬던 종선휘가 길게 자라난 난초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 지시하였습니다.”
지시하겠다가 아닌, 지시하였다.
굳이 종선휘가 말하지 않아도, 그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꼬집고 있다는 뜻이다. 종선휘는 그러한 제갈천의 선 조치, 후 보고식의 일 처리를 싫어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을, 입 아프게 여러 번 말하는 것만큼 귀찮은 일도 없다 생각하였으니 말이다.
“한데, 아무리 들어도 기묘한 사건이로군. 탈도 많고, 일도 많았어. 의문도 남았지.”
종선휘의 말에, 제갈천의 입가로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계속하여 조사 중입니다. 특히 용제의 해남도 등장에 관해서는…….”
“용제가 누군가와 격전을 벌인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했나?”
“예…….”
난초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종선휘의 손이, 자신의 턱밑으로 향했다. 그 별호처럼, 마치 신선과 같이 곱게 자라난 턱수염을 몇 번이나 쓰다듬은 종선휘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격전, 격전이라…… 천하에 용제와 동수(同數)를 이룰 실력자가 누가 있겠나?”
묻고 있지만, 정작 답은 종선휘 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못해도 같은 십대고수.
그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인물 몇을 제외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 용제와 수를 나눌만한 고수들은 대다수는 자신의 영역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런 인물들에게는 언제나 정의맹의 시선이 따라붙어 있었다. 물론 엄청난 고수인 만큼 고작 시선 몇으로 그 뒤를 쫓을 수 있겠냐만은, 못해도 행적쯤은 짐작하고 쫓을 수 있었다.
개중에, 해남도라는 먼 길을 향한 고수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태을검선과 손속을 나누었다고 보기에도 어렵습니다. 용제가 격전을 벌인 흔적의 시각을 추정해보면, 태을검선이 해남무후와 함께 전장에 있던 시간과 일치합니다. 무엇보다, 격전에 사용되었던 검술은 종남파의 것과 전혀 상이합니다. 오히려 마도(魔道)의 검술에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흐음…… 해남파의 내전에서 처음 보는 무리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했지 않나?”
“예.”
제갈천의 눈이 밝은 이채를 발했다.
중원을 오가는 기묘한 단체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차였다. 하나 이렇다 할만한 확증이 없어 여태껏 보고를 올리지 못했었는데, 이번 해남도의 사건으로 확신이 생겼다.
무언가가 있다.
정도와 사도, 마도를 제외하고 또 다른 제 사(四)의 세력이 중원강호에서 암중(暗中)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과 연관성이 있을 확률은?”
“팔 할 이상입니다.”
제갈천이, 이제야 확답에 가득 찬 목소리로 답했다.
팔 할, 팔 할이다.
십 할은 아니라 한들, 제갈천이 이토록 확신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더 자세히 조사해보도록 하게. 또한 그들의 흔적이 밝혀지면 곧바로 나에게 보고해주도록 부탁하지.”
“그리하겠습니다.”
말을 끝마친 종선휘의 손이, 다시금 정원으로 향하는 것을 본 제갈천이 고개를 숙여 방에서 물러나려던 차였다.
“아, 그리고. 해남무후라 하였나?”
종선휘의 얕은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예.”
“이번에 새로이 십대고수의 좌(座)에 이름을 올렸다지?”
“예. 어머니인 해남검후를 대신하여, 해남파의 제왕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또한…… 십대고수 내에 전체적인 변동이 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또 누군가 있단 말인가? 흥미롭군.”
“그게…….”
여태껏, 단 한 번도 주저 없이 말을 하던 제갈천의 말문이 처음으로 막혔다.
자연스레, 종선휘의 시선이 제갈천에게로 향했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그 시선에, 정신이 번뜩 돌아온 제갈천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큼……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네. 계속 말해보게.”
“십대고수의 후보로 논의되고 있는 인물 중에, 무명와룡이 있습니다.”
“…….”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무명와룡?”
이후에야, 의아한 목소리로 입을 뗀 종선휘가 헛웃음을 흘린다.
“와룡서원의 선생 아닌가?”
“맞습니다. 과장된 소문이 포함된 것 같기는 하지만, 그가 십대고수에 버금가는 무인이라는 소문이 조금씩 나돌고 있습니다. 믿기는 어렵지만……, 전혀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확률은 얼마나 되나?”
“삼 할 정도입니다.”
“호오…….”
삼 할이란 수치는, 결코 적지 않다.
자그마치 십대고수라는 명함을 두고, 고작 서원의 선생에게 주어진 수치치고는 과분하다고 볼 수 있었다. 제갈천이 착각하고 있을 확률은 그보다도 더 낮았다. 결국, 무명와룡이라 불리는 마현에게 생각 외의 것이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직접 보고 싶군.”
“예?”
“무명와룡 말일세. 아니, 조금 더 넓게 말하자면 작금의 강호라고 할까? 너무 한 우물 안에만 갇혀 있던 게 아닌가 싶어.”
“맹주님.”
당장에라도 바람처럼 떠나갈 것 같은 종선휘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표정을 한 제갈천이 다급한 목소리를 흘렸다. 현재의 정의맹은 강하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감히 최강(最强)을 논할 수 있는 시기다.
그런 정의맹을 만들 수 있던 중심에는 종선휘가 있었다. 그는 특별했다. 가만히 있을 때는 신선처럼 허허롭기도 하나, 행동할 때에는 하늘을 누비는 비조(飛鳥)와 같이 날쌔고 재빨랐다.
언젠가 종선휘 역시 구심점의 역할에서 물러나야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제갈천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러한 종선휘를 말려야 할 책임이 있었다.
“허허, 그렇다고 바로 떠난다는 뜻은 아닐세. 그간의 정이 있는데, 내 어찌 자네를 곤혹스럽게 하겠나?”
“맹주님.”
“걱정 말게. 다만 흥이 붙어 며칠 정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너무 나무라지만 말아 달라는 뜻일세.”
“……알겠습니다.”
이조차도 말리면, 정말 떠나가 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종선휘의 마음은 맹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는 단지 자신의 어깨 위에 얹어진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뿐이다.
‘그 짐을 덜어 드리고 싶습니다.’
제갈천 역시, 그러한 종선휘를 돕고 싶었다.
하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언젠가, 누군가.
화산검선의 이름을 대신할 인물이 나타난다면야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만…….
‘그 사실 자체가 너무나 어렵구나.’
천하에서 가장 명석한 두뇌를 지니고 있다는 제갈천으로서도 너무나 힘든 문제였다.
* * *
쾅-!
와르르!
고작 일장(一掌)을 내질렀을 뿐인데 폭음이 일며 깊은 동공의 한 벽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지금 뭐라고 했나?”
“흑풍대주가 죽었습니다.”
장풍이 지나간 자리, 그 중심에 오체투지를 한 채 엎드린 인물이 동공에 도착하자마자 하였던 말을 다시금 반복했다.
“…….”
슈욱, 쾅-!
침묵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한 번, 큰 폭음이 일었다. 온몸을 휩쓰는 난폭한 바람 앞에서도 오체투지를 풀지 않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이의 등살이 갈가리 찢겨 허공에 흩날렸다.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했었던 건가?”
“……죄송합니다.”
“실패 이유는?”
“서원 내에, 엄청난 고수가 있습니다.”
“그를 몰랐던 이유는?”
“……죽여주시옵소서.”
쾅-!
또 한 번 폭음이 일며, 사내의 등을 물들인 붉은빛이 더욱 진해졌다. 핏물이 몸을 타고 흘러, 머리를 지나쳐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몸을 엎드린 이는 조금도 꿈쩍하지 않은 채였다. 마치 태어나기를 그리 태어났다는 듯, 아는 자세가 그뿐이라는 듯 조금의 변동도 없을 따름이다.
“정의맹이나 흉왕성이 참견했을 수도 있지 않나?”
“조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면 세작이 배신했을 확률은?”
“그는 그만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예상치 못한 고수 하나 탓에, 닭 잡는 일에 소 잡는 칼을 보냈더니 잃어 왔다?”
“……그렇습니다.”
뿌득.
어둠 속, 두 눈을 붉힌 사내의 양 이가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왕 둘, 아니, 셋을 보내라.”
“……예?”
엎드리고 있던 이가, 놀란 목소리를 흘렸다.
마왕이라 함은, 어둠 속에서 말하는 사내에게 있어서도 수족과 같은 초고수들이다.
고작 서원 하나에 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칼이라는 말이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보냈더니 고철이 되어 돌아왔다, 하면 호랑이를 잡을 각오로 손을 쓰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옳습니다.”
“당장 마왕 셋을 보내라. 만약 그들이 반박하거든, 내 이름을 읊어라.”
“…….”
“내가 누구더냐?”
“무혈천마.”
짧게, 어둠 속 사내의 별호를 부르는 이의 음성이 격동했다.
무혈의 천마.
기나긴 마교 역사상, 오로지 그밖에 없었다.
천마라는 지존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단 한 모금 피조차 보지 않은 사내.
“물러가라.”
“천세, 천세, 천천세. 무혈의 천마시여! 영원하라! 유일무이한 역천의 주인이시여!”
그 무서운 사내가 바로, 현재 천마신교의 지배자였다.
제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