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四章)
마현과 구혜린이 성혼하기로 한 이야기는 다음 날, 마전에게 곧바로 전해졌다.
“드디어 우리 큰아들이 장가가는 모습을 보는구나!”
마전은 숨길 것 하나 없이 크게 기뻐했다.
구혜린을 염두에 두고, 은근슬쩍 두 사람의 결혼을 밀어붙이는 와중에도 꿈쩍도 않는 마현 탓에 말 못할 속을 썩이고 있었던 것이 사실.
그러던 차 이렇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니 마전의 입장에서야,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디, 우리 새아가는 지금 어디 있느냐?”
“아직 자고 있어요.”
마현도 기왕 정한 거, 소식을 전하고픈 마음에 새벽녘부터 마전을 찾아온 터라 동도 트기 전이었다. 당연히 아침 일찍 조식을 준비하는 마전과 마정 외에는 모두 잠들어 있는 시간.
“아차차, 그럴 테지.”
이제는 서슴없이 구혜린을 새아가라고 부르게 된 마전의 얼굴은 여느 때와 달리 들뜬 듯했다.
‘진즉에 결심을 내릴 걸 그랬나?’
오랜만에 마전이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자, 마현도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진작 결정할 걸이라는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축하해.”
“고맙다.”
마정 역시 환한 얼굴로 그런 마현의 결정을 축하해주었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그 역시 나름대로 마현의 결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저녁 시간대가 되어 다시 한 번 솜씨를 크게 발휘한 마전이 공표하듯 말했다.
“그래서, 날짜는 언제로 잡을 생각이냐?”
마정과 본인들(마현과 구혜린)을 제외하고는 전혀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던 초이영, 그리고 뜬금없이 식당 내부까지 초대되어 진수성찬을 먹고 있던 제자들의 눈이 동시에 크게 뜨였다.
모두가 마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숨에 깨달은 것이다.
“새 제자들 모집 건도 있고, 조금은 여유를 두고 생각 중입니다.”
“하여 언제쯤을 생각하고 있는 게냐? 새아가 생각도 따로 있고?”
마전은 들뜬 만큼, 평소답지 않게 꽤나 성급해 보였다.
그 익숙지 않은 모습에 가족들 모두 입가로 떠오르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년 봄 막바지쯤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아가씨나 도련님한테 기별도 넣어드려야 하고, 서원도 안정되어야 하니까요.”
“으음…….”
살짝 얼굴을 붉힌 구혜린의 대답에, 턱을 쓰다듬은 마전이 고개를 주억인다. 확실히 시기를 따진다면 그때쯤이 결혼을 하기에 딱 좋았다. 날씨도 선선히 풀리며 분위기도 왠지 모르게 훈훈하게 흐를 때니 말이다.
“두 분 축하드려요.”
그렇게 마전이 안타까운 얼굴로 입을 닫자, 웃는 얼굴의 초이영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축하해요, 큰아버지!”
마전에 이어 제자들, 이제는 제법 아름다운 소녀로 자라나, 충분히 분위기를 눈치챌 수 있게 된 마설의 축하까지 빠르게 이어졌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이후로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말은 안 했지만 가족들을 포함해, 제자들까지 모두 두 사람을 응원하고 있던 차였다.
아니, 굳이 응원이랄 것도 없었다.
둘은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는 확신이라 불러야 됐을 터다.
하나 아직 서로 간에 말이 없으니 함부로 입을 열 수만도 없었다.
결국 마현이 전한 두 사람의 성혼 소식은 가족을 포함해, 와룡서원의 울타리 내에 있는 식구들 모두를 기쁘게 한 소식이 된 셈이었다.
그렇게, 웃고, 떠들고, 먹었다.
마현도 들떴고, 쑥스러워만 하던 구혜린도 즐거운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하면…… 자식 계획은 어떻게 되느냐?”
아까부터 말하고 싶던 듯, 고민만 하던 마전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어 질문했다.
구혜린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붉어지게 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었다.
“아, 아버님 그게…….”
“뭘 그리 부끄러워하느냐. 나이도 찰 대로 찼는데, 가능하면 빨리…….”
“아버지.”
정말 오늘 하루 사이에 마전답지 않은 모습을 몇 번이나 보는지, 다시금 식구들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게 한 마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보였다.
“아니 난 뭐, 그냥 새 손주가 빨리 보고 싶어서…….”
이후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말은 모두의 입에서 박장대소를 뿜어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푸하하하……!”
즐거운 시간이었다.
* * *
그야말로 웃고, 떠들고, 즐겼다.
최근 들어 그 어떤 때보다도 즐거운 하루였다.
분명 그러할진대…….
‘뭔가…… 묘하네.’
늦은 밤, 혼자 산책을 나선 소수린은 알 수 없는 감정에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바라던 일이야.’
분명 소수린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그렸었다.
마현과 구혜린.
구혜린과 마현.
두 사람이 정답게 손을 잡고 걸어나가는 그 뒤로 자신과 다른 와룡서원의 제자들이 있다. 충분히 아름다운 그림이다. 한데 정작 꿈꿔왔던 일이 현실이 되니, 뭔가 마음 한편이 허전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사실 알고는 있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잖아.’
가슴 한편이 찡하고 아려온다.
정말 말이 안 된다.
어째서?
그토록 바라던 일인데, 떠나가는 마현의 뒷모습을 몇 번이고 생각했는데. 가슴이 너무 아프다. 무언가 크게, 허전하게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나…… 욕심쟁이인가…….’
언제고 말했다.
마현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며, 존경하고, 늘 따르고 싶다 했었다. 그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어머니를 되찾고, 마음속 한편의 허전함을 채웠지만 여전히 마현이란 존재는 그녀에게 너무나 컸다. 다른 사람으로 대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로 마음속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그런 마현이 이젠 모두의 것이 아닌, 구혜린의 남편이 된다. 얼마 뒤에는 자식을 낳고, 실제로 누군가의 아버지가 될 터다.
‘늘 성숙하게 굴자고 했는데…….’
어린아이의 치기와 같은 것이다.
아버지를 남에게 빼앗기는 심정.
솔직히 편안한 기분만은 아니었다.
분명 축하한다. 그리고 기쁘기도 하다. 하나 또 슬프다. 수많은 감정이 복합되는 가운데, 왠지 모르게 눈물도 왈칵 쏟아져 나왔다.
“쳇…….”
입가로 가볍게 혀를 차며, 눈물을 훔칠 때였다.
“뭐야, 너 우냐?”
등 뒤로부터 익숙한, 건방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깜짝 놀라 등을 움찔한 소수린이 재빠르게 감정을 잡아냈다.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는 무슨, 목소리 자체가 젖어있구먼. 어울리지 않게 귀엽게 나오기냐?”
어느새 소수린의 앞으로 불쑥 지나쳐 온 정순욱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그린 채 놀리듯 말한다.
“……별로 상대하고 싶은 기분 아니야.”
소수린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부터 쉬이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이미 몇 해고 겪었지 않던가?
그냥 백산처럼 무시하는 게 해답일 수도 있었다.
“기분 구리냐? 나도 마찬가지야.”
“……뭐?”
“네가 느끼는 감정. 아마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 느꼈을걸?”
“똑같이 취급하지 마. 불쾌하니까.”
분명 상대 안 하려 했는데, 말을 섞다 보니 울컥하고 감정이 튀어나온다. 정순욱은 그런 소수린을 재미있다는 듯 흘겨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왜, 너는 뭐 조금 다르다. 특별하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냐?”
“…….”
“모두 똑같아. 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스승님은 늘 그 자리에만 있을 것 같았거든. 아니냐?”
“……달라.”
“고집부리기는. 뭐가 다른데. 너나 우리나 입장은 똑같아. 설마, 스승님을 연모(戀慕)라도 한 거야?”
그렇지는 않다.
분명 마현을 존경하고, 그 누구보다도 우선으로 하며, 너무너무 좋아하지만 연모라는 감정과는 다르다. 입술을 깨물며 외치려던 소수린의 볼가 위로, 눈물이 다시 한 번 크게 쏟아져 내렸다.
‘어, 왜 그러지?’
본인도 모를 눈물이다.
“……뭐야, 너 왜 울어?”
당황한 것은 정순욱 역시 마찬가지였다.
“몰…… 라. 이 멍청한…….”
정말 모른다.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슬펐다.
“야, 그…….”
소수린을 보며, 당황한 표정이 된 정순욱은 어찌할지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서로 기분이 안 좋은 김에, 대충 이야기나 하고 투덕거리면 풀릴 줄 알고 시작한 대화인데, 끝내 소수린을 울려버리고 말았다.
‘나 아무래도 잘못 밟은 거 같지?’
아무리 뻔뻔한 정순욱이라 하여도, 눈앞에서 여자가 우는데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울린 것 아닌가?
“야, 음……. 그 뭐냐, 울지마. 야.”
“…….”
정순욱이 달래 보았지만, 소수린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소리가 있는 울음은 아니었지만, 슬픈 표정으로 계속해서 흘러내린다.
끝내 정순욱은 망설이고 망설이다, 그런 소수린의 얼굴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딱히 반항할 생각이 없는지.
아니면 힘이 없는 건지.
생각보다 그녀의 몸은 정순욱에게 쉽게 건네어졌다.
“흑…….”
그 뒤에야, 작은 울음소리가 정순욱의 귓가로 들렸다.
“우, 울지 말라니까.”
나름대로 남자답게 품에 안긴 했지만, 그 뒤가 왠지 모르게 어색해진 정순욱은 조심스러운 말로 그런 소수린을 달래며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슴을 적시는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이거 참, 곤란하잖아…….’
정말로 곤란하다.
그렇게 몇 번이고 되새긴 정순욱은 바라고 또 바랐다.
제발 어째서인지 이유도 알 수 없게 힘찬 박동을 하고 있는 심장 소리가 전해지지 말라고.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젠장, 부끄럽잖아!’
정순욱에게 있어, 붉어진 얼굴을 가려주는 밤의 장막이 고맙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온다.
그동안 제자들과 마현의 관계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
그저 모두 한 단계씩 진일보해 나아갔다.
크게 눈에 띄지 않던 양명은 학문 측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이며 다른 아이들을 앞서갔으며, 어느 순간부터 무공에 미칠 듯이 몰두하기 시작한 소수린이 절정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성장! 아마 조만간 그녀는 벽을 만나게 될 듯했다.
백산은 이제 혼자서 의료봉사활동에 나설 수 있을 만큼 의성활생심공의 경지가 올랐다. 또한 의성활생심공을 이용해 스스로 육체 능력을 증강하는 법에 대해서도 꽤나 많은 연구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로 인해 인체에 대해 알게 되면 더 많은, 힘든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다 여기는 것 같았다.
그에 자극을 받는 것은 정순욱이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마현과 구혜린의 결혼 발표 이후.
가장 큰 분위기 변화를 가져온 인물은 바로 소수린과 정순욱이었다.
소수린은 처음부터 그야말로 무공에 미친 듯 열중해 실력을 늘렸다.
반면 정순욱은, 한동안 정순욱은 답지 않게 어디 하나가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덤벙대는 경우도 생기고, 실수도 많이 했다.
그러던 차 백산과 소수린의 성장이 눈에 띄고, 양명마저 학문에서 앞서 나가는 게 보이니 눈에 불이 난 듯 학문과 무공 양측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자극을 받은 것이 분명하니, 다행이었다.
화영령의 경우는 어느 측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이지는 않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현이 더 이상 그녀의 재능에 관련된 무공을 안 가르쳤다는 것이 옳을 터다.
‘영령의 경우는 분명 무재(武才)지…….’
북해에서도 증빙됐듯, 그녀는 잠형술을 비롯한 몇몇 무공에는 분명 특출한 재능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그 몇몇 무공이 은신이나 암살, 잠형에 특화된, 이른바 어두운 특성을 지닌 종류라는 것이었다.
따지자면 무재보다는, 반쯤 농담 삼아 암재(暗才)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영령이 그 정도도 조절하지 못할 정도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당연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원의 스승 된 입장으로서, 제자를 살수로 키우는 느낌이 마냥 편치만은 않고 말이다.
‘생각을 좀 해봐야겠지.’
그렇게 제자들도 성장해 나가고.
마현 역시 다음 제자들을 선출하고, 회시를 준비한 공부를 이어나가며 흐른 시간이었다.
‘조만간인가…….’
아이들의 미래와 현재까지의 모습.
또한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서책을 읽던 마현이 묵묵히 책을 덮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햇살이 내리쬐는 맑은 하늘이 그런 마현을 맞이했다.
이런 나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몇 주야가 더 흐른 후.
“새 시작인가.”
또다시 시작될 새 인연들을 기대하며 마현의 입가로 웃음이 그려졌다.
* * *
몇 개월 전.
추운 한 겨울밤, 서로의 체온을 나눈 후 잠에 빠져들던 중, 구혜린이 물어왔다.
“그런데 참, 새로 받을 제자들은 다 정했어요?”
“응.”
“어때요?”
“……재미있는 아이도 있고, 묘한 인연이 느껴지는 녀석도 있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나 봐요?”
마현은 그저, 묵묵히 웃음을 그려 보일 뿐이다.
“이번에도 열 명?”
“아니, 아홉 명.”
“한 명은요?”
“내년이면 설아도 열한 살이잖아.”
“아…….”
그러고 보니 마설 역시 언제까지고 와룡객잔에서 초이영의 옆에 달라붙어 지낼 수만은 없었다. 이제 스스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 마냥 애기처럼 편하게 지내던 시간은 끝났다.
“새 제자들이 들어오면 더 바빠지겠네요.”
“……아마?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만, 어째선지…… 이번에 들일 녀석들은 더 사고뭉치일 것 같단 느낌이 드네.”
“그런데도 뽑은 거예요?”
“마음이 가니까.”
“피, 결국 마 가가 제멋대로란 말이네요?”
마현은 부정하지 않은 채 작게 미소를 그려 보인다.
‘이미 당시에 입원 서찰은 모두 보냈으니.’
무명현 내에서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도 분명히 권고한 만큼 아마 준비를 탄탄히 하고 오고 있는 중일 터다. 이번에 뽑은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하지만, 와룡서원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인물은 마설이었다.
그녀는 어깨에 백묘를 얹은 채 즐거운 표정으로 곧이어 올 자신의 친구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제대로 된 글공부를 시작한다는 사실에도 꽤나 마음이 들뜬 모습이다.
미야옹-!
그러한 마설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친구는 다름 아닌 검은 고양이, 흑묘였다.
백묘를 보고 반갑다는 듯 지붕 위에서 울부짖는 흑묘의 모습에 마설의 눈이 반짝 빛난다.
“백묘 친구야?”
미야옹-!
대답하듯, 백묘가 울부짖자 지붕 위에서 쳐다보고만 있던 흑묘가 지면을 향해 뛰어내린다. 도도한 걸음이 향하는 곳은 마설의 바로 앞. 애교를 부리듯 마설의 옷자락에 볼을 비빈 흑묘가 다시 한 번 울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마설이다.
“안녕. 네 이름은 흑묘니?”
미야옹-!
동의하는 듯, 활기차게 답한 흑묘가 눈을 반짝인다.
마설은 신년 이후 처음 사귀게 된 친구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듯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웃음을 터트리며 서원을 뛰어다녔다.
“정말 귀엽네요.”
마현의 옆에서, 그런 마설을 지켜보는 구혜린의 말대로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흑묘도, 백묘도, 함께 뛰어노는 마설도 너무나 보기 좋았다.
마현 역시 즐거운 미소로 그 모습을 지켜보길 잠시.
다그닥, 다그닥.
와룡서원의 맞은편, 넓은 길에서부터 화려한 사두마차가 느릿한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두 고양이와 함께 뛰어놀던 마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현과 구혜린의 시선이 동시에 마차를 향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누가 타고 있을지는 뻔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수.
마차의 정면에 쓰인 황(黃)이라는 글자.
그 위엄 있는 마차의 등장에, 조금은 어이가 없어 보이는 표정을 지은 구혜린이 마현을 바라본다. 왠지 사고뭉치일 것 같다더니, 이런 말이었던가?
“맞아. 가장 처음으로 고른 제자지.”
“……첫 번째부터 골칫덩이라는 느낌을 가득 주네요.”
마현은 부정을 하지 않은 채,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큰 골칫덩이일 터다. 하나 분명 첫 만남부터 알 수 없는 인연이 느껴진 만큼, 좋은 미래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하나가 아니네요?”
왠지 창백해진 표정을 한 구혜린의 말대로 그 뒤를 이어, 줄줄이 나타나는 이두, 사두마차의 등장에 마현 역시 조금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게 하나같이 똑같군.’
정말이지.
첫 시작부터 평탄하지 않을 것 같은 새 학기의 시작이었다.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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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귀환 6권
제일장(第一章).
작금의 강호는 의심할 바 없는 그야말로 대평화(大平和)의 때다.
피바람 그칠 날 없던 강호사(江湖史)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신묘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터, 하나 이러한 평화가 폭풍전야(暴風前夜)의 고요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현재 전면에서 강호에 군림하고 있는 세력은 분명 구대문파와 개방, 거기에 더해 오대세가를 필두로 한 정의맹이었다.
하나 조금 더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드넓은 중원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북해와 남만, 서장 등의 세외를 제외한다고 해도 강동 일부 지역과 호남 아래에 위치한 지방에는 정의맹이 외치는 질서(秩序)가 없었다.
그걸 대신하여 사대흉가에서 발언하는 강호의 자유(自由)만이 있을 뿐이었다.
두 세력이 각각 지향하는 강호의 도(道)는 달랐다.
태생부터 끊임없이 부딪칠 수밖에 없는 두 세력은, 강호의 암중에서 소리 없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두 세력은 때가 오면 언제든지 상대방과의 전면전에 나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하나의 강호에 두 명의 패자(覇者)가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지금쯤이면 가문의 자제들이 모두 와룡서원에 도착했겠군.”
현 정의맹주(正義盟主).
화산(華山)의 검선(劍仙)이라 불리는 종선휘(宗先輝)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야. 강호의 패자를 가리는 일에 무림 문파도 아니고, 일개 서원이 끼어들어 버렸으니…….”
생각을 할수록 종선휘의 쓴웃음은 더욱 짙어져만 갔다.
“어쩔 수 없습니다. 무명와룡 본인은 크게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나, 와룡서원의 졸업생들 중 일부는 강호의 내로라하는 후기지수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기재(奇才)들입니다. 거기에 아직까지 서원에 남아 있는 제자들은 그들보다 더욱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셔야 합니다. 분명 무명와룡이 제자를 키우는 솜씨는 탁월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계속해서 같은 방법으로 수많은 기재들을 키워 내고, 그 기재들이 세상에 나와 와룡서원의 이름을 드높인다면…….”
예상되는 미래를 채 입에 담지 못한 정의맹의 군사, 제갈천(諸葛川)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지금 그들이 논하는 대상은 구파일방이 아니었다. 오대세가도 아니었다.
중원의 어느 성에서 이름을 날리는 중소방파 또한 아니었다.
종선휘의 말마따나 한낱 서원이었다.
글방이라 불려도 부족하지 않을 곳에 강호의 기재라 불려도 부족하지 않을 어린 잠룡(潛龍)들이 숨어 있었다. 개중 몇몇은 정의맹에서도 대놓고 손을 쓰기 곤란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까지 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무척 곤혹스런 일이었다.
“구대문파라는 이름이 우스워질 수도 있겠군.”
제갈천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한 말을 종선휘가 대신 말하자, 묵묵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주변 인물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고작 서원 아닙니까?”
커다란 덩치에 펑퍼짐한 옷을 아무렇게나 걸친 중년인이 두 눈을 부릅뜬 채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제갈천의 흐릿한 웃음이었다.
“고작 서원에 불과한 그곳에 자제들을 넣고자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친필로 서신을 작성하였지요.”
“……지금 군사께서는 우리 팽가를 무시하시는 게요?”
중년인, 하북팽가(河北彭家)의 삼장로이자 한때는 참악도(斬岳刀)로 이름을 날렸던 팽둔우(彭屯優)의 두 눈이 제갈천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었다.
“진정하시지요. 이번 와룡서원의 입원에서 탈락한 가문은 팽가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제갈가 역시 좋지 않은 결과를 통보받았고, 그러므로 와룡서원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해야 하기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현실이란 것이 증명된 것은 겨우 한 번뿐이잖소? 항상 말만 내세우는 군사의 생각은 어떠할지 모르나, 나 팽 모는 이 두 팔과 양다리로 강호를 헤쳐온 몸이외다. 직접 부딪쳐 겪어보기 전에는 그 무엇 하나 믿을 수 없다는 말이오!”
“팽 장로, 우선 진정하게.”
한 손을 든 종선휘가 두 사람의 언쟁을 말리고 나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흥분한 팽둔우의 열기를 식히려 한 것이다.
“맹주님, 이 팽 모에게 사신단(四神團)의 이대(二隊)만 내주십시오. 제가 직접 광동으로 가서 놈에게 으름장을 놓고…….”
“팽 장로!”
“…….”
종선휘의 목소리가 크게 높아졌다.
딱히 기세를 내뿜지는 않았으나, 그 음성에 담긴 웅혼함 자체가 이미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힘을 보여 줬다.
화산검선.
드넓은 강호에서 십대고수(十大高手)의 첫손가락에 늘 거두 되는 초인의 기개였다. 또한 종선휘는 전대까지의 정의맹주들과 다르게 결단력이 강하기로도 유명했다.
우유부단, 유야무야.
명분과 질서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졌던 쓸데없는 행위의 절반 이상을 근절시킨 이가 당대의 정의맹주 종선휘였다.
그런 그가 두 번의 경고를 했다. 세 번째에는 경고가 아닌 직접적인 제재가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으니 직접 검을 뽑지는 않겠지만, 팽가에 좋지 않은 소식을 전달하는 일쯤은 종선휘에게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큼…… 그럼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적막을 헛기침으로 깬 제갈천의 음성이 다시금 이어졌다.
“다들 아시겠지만…… 황금세가의 대공자가 전해 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제외하고, 개방의 태상장로께서 말씀하신 것들만 봐도 와룡서원을 굳이 적대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결론이 이미 오래전 회의에서 내려진 바가 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껄껄, 스스로 적을 늘리는 것만큼 멍청한 행동도 없지 않겠습니까.”
자리에 앉아 있던 황금세가의 황충(黃忠)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제갈천의 이야기에 동의하고 나섰다. 그에 반응한 것은 이번에도 역시 팽둔우였다.
스스로 나서 적을 만든다.
마치 조금 전까지 그가 보였던 행동을 타박하는 것만 같지 않은가?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 감히…….’
팽둔우는 온몸이 분노로 떨려왔지만 종선휘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더 이상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언제나 주변은 안중에도 없었던 그였지만, 종선휘만큼은 무서웠다.
이 판단에는 종선휘의 소속이 현 구대문파 중에서 가장 큰 성세를 누리고 있다는 화산이라는 사실 역시 한몫 거들었다.
오묘한 점이 있다면, 그러한 화산의 성세를 일구어낸 인물 역시 종선휘라는 점일 테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속세의 일에 비교적 자유로운 오대세가가 모두 서신을 작성하였고…… 나름대로 긍정적인 결과를 끌어냈습니다.”
팽가와 제갈가.
두 가문의 자제들은 와룡서원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하나 나머지 삼대세가는 모두 그 벽을 넘었다.
오대세가 중 제일가라는 남궁가에서는 자그마치 두 명의 자제가 문턱을 넘었다. 제갈천의 말마따나, 나름대로 긍정적인 결과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무명와룡 역시 정의맹의 눈치를 전혀 안 보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겠지요?”
진중한 음색을 흘린 이는 무당파의 장로이자, 정의맹 무인들 사이에서 신선(神仙)으로 통하는 청선(靑鮮) 진인이었다.
“아직 확답을 내릴 수는 없을 듯하지만…… 그도 정의맹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요.”
제갈천이 작은 웃음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자신들이 속한 정의맹에 대한 자부심을 보이는 것이다.
물론 마현이 들었다면 코웃음 칠 일이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느낌대로 뽑았을 뿐이었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량수불. 그나마 다행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제가 오늘 이야기 드리고 싶은 문제는…… 그 와룡서원에 들어간 것이 삼대세가의 자제들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잠시 입을 닫은 제갈천의 눈이 옅은 빛을 발했다.
드디어 본론에 들어섰다.
매번 회의 때마다 느끼지만,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다.
그나마 종선휘가 제멋대로 날뛰려는 팽둔우를 막아서서 이 정도인 것이지, 과거엔 회의 시간이 지금의 배에 달했다고 들었다.
하나 이 모든 것이 정의맹이라는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절차였다.
‘어쩔 수 없는…….’
생각해보면, 때에 따라 참 편히 쓰이는 말이다.
그 매섭다는 종선휘마저도 다 잘라 내지 못한 쓸데없는 규율들.
작금의 정의맹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러한 수많은 ‘어쩔 수 없는’ 것들이리라.
‘쓸데없는 생각이지.’
그는 상념을 잘라 냈다.
정적 속, 자신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느낀 제갈천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기 시작했다.
“다들 아는 이름입니다. 벌써 소문으로 접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그들…….”
* * *
사대흉가.
정의맹과 함께 강호를 양분하는 흉왕성의 주축인 거대 가문의 네 가주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다들 오랜만이군.”
왼쪽 눈에 긴 자상이 난 중년 사내, 천중용가(天仲龍家)의 가주, 용제(龍帝) 용대언(龍大言)의 입이 가장 먼저 열렸다.
“이 년 만인가.”
큰 표정의 변화 없이 답변을 한 이는 왜소한 체형의 장년인이었다.
장년인의 신장은 오 척이나 될지 의문스러울 정도였고, 딱히 살집이 많지도 근육이 특출하게 발달해 있지도 않았다.
심지어 넉넉하게 차려입은 무복의 오른쪽 옷소매는 허전하게 펄럭이고 비어 있다.
안 그래도 작은 체격에, 외팔이다.
하나 강호의 그 누구도 외팔의 장년인을 무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감히 시선조차 마주기를 두려워했다.
그가 바로 천하제일의 외팔 무인이자 십대고수의 수위를 다투는 무패철황(無敗鐵皇), 철가장주(鐵家場主) 철표(鐵慓)였으니 말이다.
철표가 강호에 나선 이후, 그의 몸에 상처를 입힌 무사는 많았다.
심지어 그의 팔을 앗아 간 대적(大敵)도 있었다.
하나 그는 결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로 사용하던 오른팔을 잃은 이후 좌수도(左手刀)의 길을 걸어 초인의 경지에 들어섰고, 무림의 중심에 우뚝 섰다.
걸어오는 싸움은 한 번도 피하지 않았으며, 그 모든 싸움을 이겨냈다.
그렇기에 무패의 철황.
철표는 사도 계열의 문파에 몸담고 있는 모든 무인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우상이었다.
“정확하게는 이 년 하고도 삼 주야, 그리고 여섯 시진 이 각쯤 지났지.”
건방지다면 건방지게도, 그런 철표의 말을 걸고넘어진 여인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중달(仲達)의 재림이라 불리며 천기(天氣)마저도 읽어낸다는 사마세가(司馬世家)의 가주, 반천뇌(反天腦) 사마소(司馬炤)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모인다는 것은 언제나 번거로운 일이니까.”
마지막으로 느릿하게 입을 뗀 권태로운 표정의 사내는 비대했다.
어찌나 비대한지, 앞의 세 사람이 모두 옆으로 붙어 선다 한들 그의 몸을 다 가리지 못할 듯했다.
그는 유일하게 회합의 장소에 혼자가 아니라, 그가 몸을 기대고 있는 권좌(權座)를 받치는 다섯 노예와 함께 들어섰다.
그가 바로 귀흉가(鬼凶家)의 가주이자 염라귀왕(閻羅鬼王)이라 불리는 초주(初主)였다.
왼손으로 산 자의 명을 관리(管理)하며 오른손으로 죽은 자의 넋을 부린다 하여 염라귀왕이라 불리는 초주는, 비대한 덩치와는 다르게 아주 무서운 사내였다.
그 이유를 멀리서 찾을 것도 없었다.
이 자리에는 분명 사대흉가의 가주들을 제외한 외인(外人)은 참석할 수 없어야 한다. 하나 그의 노예들만은 허락됐다.
이유는 무척 간단했다. 노예들에겐 사물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염라귀왕이 그의 오른손으로 직접 도려낸 탓이다.
또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도 없었다.
이 역시 그가 직접 주도한 일이다. 뿐만이랴. 음식을 맛볼 수 있는 혀조차 뽑아 버렸다.
또한 염라귀왕의 비대한 체중을 받치기 위해 몸은 단련시켰지만, 혹여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과 발가락은 모두 잘라 버렸다.
노예들은 처음엔 걷는 것조차 힘들어했지만,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가마를 어깨에 걸친 채 걸어 다녔다.
초주가 그리 만들었다.
혼이 기억하는 육신의 형태를 변형시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하였고, 그것이 당연한 인간의 삶인 것처럼 세뇌하고 굴복시켰다.
노예들은 살아 있되,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주인이 이동할 때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산 자의 목숨을 제멋대로 다루고, 감히 관리한다고 천명했다.
다른 사대흉가의 가주들조차 초주의 행동에는 가끔 혀를 내두르곤 하였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래도 다들 이렇게 살아서 또 얼굴을 보게 되니, 반갑구먼.”
용대언이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시원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지만, 그의 말에 담긴 감정은 진심이었다.
천하에서 손으로 꼽히는 고수라 한들 어찌 목숨의 위협이 없겠는가?
늘 선두에 나가 싸우고, 목숨을 내놓고 단련하다 보면 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매일같이 사선(死線)을 넘나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용 가주는 지난번과 다르게 눈에 흉터를 달고 왔네요?”
“하하…… 부끄러운 일일세.”
용대언이 쑥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자신의 왼쪽 눈 위에 새겨진 흉터를 쓰다듬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천하에 누가 있어 용제라 불리는 용대언의 왼쪽 눈에 검을 그을 수 있단 말인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굳이 그러한 일이 가능한 이를 찾자면 십대고수라 불리는 이들 중 가장 상위에 있는 두 무인뿐이었다.
철표와 종선휘.
하나 철표와 용대언은 싸우지 않는다.
정의맹이 무너질 때까지, 서로에게 검을 겨누지 않기로 약속한 의형제 사이였기 때문이다.
하면 종선휘? 그 역시 아니었다.
종선휘와 용대언이 서로 검을 겨누었다면 그야말로 정사대전이다.
이미 정사대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하나 작금의 강호는 여전히 조용하다.
별 소란이 없었다는 뜻이다.
“……팔 개월 전, 남만의 오독궁에 용제와 닮은 무인이 다녀갔다는 소식을 들었지. 하나 그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미약하였다던데…….”
염라귀왕 초주의 눈이 으스스한 청광(靑光)을 흘렸다.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사실이었나 보군.”
“아하핫! 거참, 벌써 소문이 여기까지 난 겐가.”
“설마 거기에 제약단(制約團)을 먹고 들어간 건가요?”
“푸하하핫!”
놀란 표정의 사마소가 되묻자, 머쓱한 표정을 지은 용대언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제약단이 무엇이던가?
그녀가 직접 제조한, 초인이라 불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무인들의 양팔마저 묶어 버릴 수 있는 금제(禁制)를 걸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단약이었다.
그것은 자그마치 내공의 팔 할을 쓸 수 없게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 날이 갈수록 몸이 무기력해지며, 때때로 몸에 마비 증상까지 일으켰다.
그런 것을 복용하고 남만의 제왕이 산다는 오독궁에 단신으로 뛰어들었단 말인가?
이제 보니 눈 한쪽에 흉터 정도는 아주 애교였다. 죽지 않고 살아 나온 게 용했다.
“뭘 이 정도로…… 듣자 하니 철 제(弟)는 제약단을 먹고 십장(什長)직을 맡아 북적과의 전쟁터에서 놀다 왔다더군. 거기에 아주 무서운 몽골 장군이 하나 있다던데…… 그 이름이 뭐라더라?”
“테무찬.”
철표의 말에, 주먹으로 손바닥을 강하게 내리친 용대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놈 화경이었다며? 한데 철제 이 녀석이 놈의 목을 따 버렸단 말이지. 자그마치 제약단을 먹고 말이야. 푸하하. 그런 놈이 있는 줄 알았으면 나도 전쟁터로 가볼 걸 그랬어.”
용대언의 말에, 사마소가 다시 한 번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정말이지 싸움에 미친 양반들이다.
어떻게 제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른단 말인가?
“살아 돌아올 확률은 삼 할이 채 안 되네요. 그런데 해냈다니, 진짜로…….”
용대언의 말마따나 다들 살아서 보게 되어 반가울 정도였다.
그녀도 나름대로 뼈를 깎는 고련과 노력을 하였다 여겼지만, 아무래도 머리를 쓰는 것이 특이기다 보니, 직접 목에 칼이 닿은 적은 없었다.
“에이, 뭘 모르는 척하고 있어. 사실 사마 가주도 다 알고 있었잖아?”
“…….”
“반천뇌, 사마 가주가 알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무슨 말일까?”
용대언의 입가가, 큰 미소를 그렸다.
“우리가 죽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지. 확률이 삼 할이었다고? 사마 가주가 말했었잖아. 확률이란 건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고.”
맞다.
사실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
용대언이 어떠한 방식으로 움직였는지, 무슨 수로 오독궁과 싸워 살아남았는지, 철표가 어떻게 테무찬의 목을 땄는지.
자세히 듣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성공 확률은 지극히 낮지만, 두 사람이라면 능히 가능한 방법이다.
‘어차피 확률이란 건 숫자에 불과하니까.’
결국 그 확률 속에서도 답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
사마소는 그러한 답에 더욱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계획을 짜는 인물이었다.
초주라고 다를까?
그는 가장 권태로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지만, 걷는 것조차 번거로워 노예를 부리는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귀와 영을 소환하여 자신의 의지하에 놓고 조정하는 법을 단련 중이다.
그의 몸은 비대했지만, 그는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그가 노예를 부리고, 몸을 움직이지 않는 건 그 짧은 시간조차 수련에 쏟기 위함이었다.
“하여튼, 다시 한 번 반갑다.”
용대언의 말에 모두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번져간다.
이것이 정의맹과 흉왕성의 차이점이었다.
정의맹에 속한 안정을 취하는 위선자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이들의 삶은 매일이 투쟁(鬪爭)의 연속이었다.
더욱 나아가기 위해,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매일 싸우고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것이 고작 네 개의 가문만으로 엄청난 역사를 가진 세력들이 규합된 정의맹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흉왕성이 가진 진정한 힘이었다.
“다들 어찌 지냈는지는 이따 다시 한 번 풀기로 하고, 오늘의 가장 중요한 명제는 따로 있지 않나?”
“예. 다들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와룡서원에 도착했어요.”
사마소의 말에, 세 가주의 눈이 동시에 번뜩였다.
와룡서원.
최근 들어 정의맹과 함께 그들의 귀를 자극하는 이름이었다.
“난 그 무명와룡인가 하는 녀석이 꽤 마음에 들어. 지 고집대로 잘 밀어나가고 있잖아? 정의맹 녀석들이 꽤 수작을 부렸을 텐데도 딱히 꿈쩍하는 모습도 없고…… 우리 제우가 그런 뚝심을 좀 배워 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용제우(龍諸宇).
강맹한 용가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은 자신의 넷째 아들을 떠올린 용대언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용대언의 기대가 담긴 말을 들은 철표의 머릿속에도 자신을 닮은 무뚝뚝한 얼굴의 소년이 떠오른다.
‘잘 해내겠지.’
철무곤(鐵武坤).
다소 여색을 밝히는 용대언과 다르게, 철표는 오로지 단 한 명의 아내만을 두었다. 또한 대부분의 시간을 도법 연습하는 데 투자하느라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오래 가지지도 못했다.
그 탓에 지천명이 넘어가는 이때까지 이제 갓 열 살이 된 자식 하나밖에 얻지 못했다.
그 자식이 바로 철무곤이었다.
걱정도 되지만, 곧 그러한 마음은 사그라졌다.
철무곤이라면 잘해낼 것이다.
철표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현(娥賢)이는 조금 애답게 놀다 왔으면 좋겠네요. 어린 게 벌써부터 은근 표독스러워서는…….”
“엄마를 닮아서 그런 거 아니야?”
“용 가주…….”
“푸하핫, 농담이야.”
“…….”
사대흉가의 자제들 중 세 아이가 와룡서원에 입원했다.
자식이 단 하나도 없는, 아니 성혼하는 시간조차 아까워 수련에만 시간을 쏟고 있는 가주를 둔 귀흉가의 입장에선 좀 아쉬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정의맹의 아이들이 넷. 그리고 강호에 몸을 담지 않은 아이가 셋, 혹은 둘 정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더군요.”
“으잉? 셋 혹은 둘은 무슨 말이야?”
“그게…… 어젯밤 천기를 보았는데, 별 하나가 애매해요.”
“또 말 어렵게 하네.”
“……저도 아직 정확하게 결론이 안 나서 그래요.”
“뭐, 아직 정확하게 결론이 안 났으면 중요한 일은 아니네.”
중요해질 수도 있지만, 아직은 중요하지 않다.
용대언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하여간에…….’
사마소도 그러한 그의 성격이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하나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곤란할 수도 있다는 사실쯤은 알아주었으면 했다.
기껏해야 일이 년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지는, 함께라는 명목뿐인 흉왕성이라지만 그래도 거대 집단으로서의 도의라는 게 있지 않던가?
‘뭐, 이런 말을 해 봐야…….’
그런 일은 잘하지 못하니까 사마 가주한테 부탁한 것 아니겠냐는 이야기나 들을 터였다.
결국 그녀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정의맹 위선자 녀석들의 자제가 넷이라…… 오대세가 놈들이겠구먼. 아, 혹시 그놈도 있나?”
“네?”
“모용청(慕容淸).”
“아…… 포함되어 있어요.”
“호오…….”
고작 열한 살의 나이에 벌써 차기 검왕이란 소리를 듣는 어린 소년이 있다. 그 앳된 얼굴을 떠올린 용대언이 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는 왜요?”
“아니, 제우 녀석…… 은 무리려나. 워낙 마음이 약해서.”
용대언의 입가에 잠시 쓴웃음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쨌든, 제우한테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그를 봤어요?”
“우연히. 지나가다가.”
“소문대로죠?”
“어. 분명 무시무시하게 클 거야. 빌어먹을 위선자 녀석들 사이에 굉장히 쓸 만한 놈이 났어.”
“역시…….”
애초부터 타고난 별 자체가 다른 아이다.
그 빛이 완전히 발하기 위해서는 향후 십수 년 이상의 시간을 더 필요로 하지만…….
‘장성하면 우리에게도 위협이 되겠지.’
싹을 자를까?
아직 고작 열한 살. 타고난 운이 강하다지만 고작 어린 아이일 뿐이다.
그녀가 마음먹고 명을 앗아 가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으니 지금이 기회였다.
모용세가의 울타리가 아닌 와룡서원이라는 낮은 벽에 갇혀 있는 때!
사마소의 머릿속으로 무서운 귀계가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하나 그녀의 심계는 문득 떠오른 무언가에 모두 막혀 버렸다.
‘뭐지?’
무명와룡.
그 이름이 묘하게 사마소의 신경을 건드렸다.
무명와룡이 현 강호에서 제일가는 스승이라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다.
그가 타고난 운도 뛰어난 스승의 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왜지……?’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타고난 운이 뛰어난 스승이자, 학사이기는 하다.
하나 그녀가 읽은 무명와룡의 운엔 무에 대한 재질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익힌 무공에 대해서도 회자가 되는 것일까?
와룡서원의 제자들이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뛰어난 무공을 가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그녀가 오래전부터 의문을 가졌던 일이다. 물론 타고난 운을 거스르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천명(天命)을 넘어섰다……?’
하나 그것이 어디 말처럼 쉽던가?
특히 타고난 바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별과 하늘이 없는 세상에서 살지 않고서야…….’
절대로 불가능하다.
생각 외로 인간의 운명(運命)이란 것은 굉장히 강한 힘으로 사람을 속박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신경 쓰지 말자.’
하나 그래도 다시금 신경 쓰인다.
그런 사마소를 보며, 작은 미소를 그린 용대언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마 가주, 우리 아이들이 서원에 있는 동안은 어른들이 나서지 말고 지켜보자고.”
“하나…….”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또래의 아이들끼리 모여서 경쟁하고, 성장하고.”
“용 가주.”
“게다가 사상이 전혀 다른 두 집단 수장들의 자제라…….”
“……용 가주, 자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겐가?”
지켜보기만 하던 초주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그와 동시에 으스스한 귀광이 용대언의 몸을 빠르게 휩쓸고 지나갔다.
용대언의 심중을 꿰뚫어보고자 하는 깊은 눈이었다.
“하하, 일단 내버려 두자는 거지. 아이들의 문제에 어른들이 끼어드는 건 너무 추잡하잖아? 우리가 언제부터 치졸하게 애들 목숨 가지고 장난쳤나?”
“…….”
용대언의 당당한 말에 번뜩이던 초주의 눈이 다시금 스르륵 감겼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저희는 흉왕성이니까요. 어디의 위선자 놈들처럼 치졸하게 놀 수는 없죠. 일단은 용 가주의 말대로 할게요.”
“좋은 생각.”
암, 좋다마다.
“자자, 그럼 아이들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나머지 이야기들을 마무리 짓고 술이나 한잔 거하게 하러 가자고. 오랜만에 만났잖아?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사지(死地)에서 돌아온 형제들과 축배를 들 시간을 소중히 보내자고.”
용대언의 말에 모두의 고개가 짧게 끄덕여졌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
사대흉가.
흉왕성이라는 이름을 강호에 우뚝 세우기 위해 투쟁하듯 삶을 살았다.
하나, 그들이 살아온 삶이 과연 정답인가? 설령 어른들의 삶이 옳다고 해도 자식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만의 길을 갔으면 좋겠다.
비록 그것이 어른들이 원하던 모습과 다른 그림일지라도…….
마음속에 숨긴 용대언의 작은 바람이었다.
* * *
어둠 속.
깊은 적막만이 가득한 칠흑의 공간 내에 두 사람이 있었다.
“……그 아이는?”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이상은?”
“없습니다. 교육도 무사히 마친 뒤입니다.”
서로의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든 그 어둠 속에서, 둘은 서로를 명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오가는 대화는 간결하지만, 필요한 정보는 모두 오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어둠보다 더 깊은 곳에 웅크린 사내의 눈이 가볍게 껌뻑였다.
“긴장하라 일러라.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테니.”
“예.”
“역천(逆天)의 때가 머지않았다. 그대 역시 실수 없이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거야.”
바깥쪽에 있던 이의 두 눈이, 역천이라는 단어에 빠른 속도로 떨려왔다.
이 한마디를 위해 얼마나 참아왔던가? 어찌나 이 말을 기다렸던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의 인생 전부를 바쳐 준비해 온 일이 드디어 코앞으로 다가왔다.
“역천을 위하여……!”
그는 설렘을 담아, 굳은 의지로 답했다.
“물러가도록.”
깊은 어둠 속 사내는 답하는 이를 바라보며 어둠에 묻혀 누구도 보지 못할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혼란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이장(第二章).
이기 제자들이 무명현에 들어선 첫날.
와룡서원과 와룡객잔의 앞은 그야말로 호황이었다.
아니, 무명현 전체가 호황이었다. 난데없이 찾아온 많은 손님들 덕분이었다.
그도 그럴 게 사두마차, 이두마차는 기본이고 호화롭게 호위까지 대동한 꼬맹이들만 아홉이었다.
물론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역이 다르고, 세력이 다른 이들이 무명현이란 좁은 땅에 뭉쳤다.
말만 섞여도 시빗거리요, 어깨라도 부딪치면 당장에 검을 뽑아야 할 일이다.
하나 이 역시도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종식되었다.
와룡서원의 스승인 마현이 현 내에서 소란을 일으킬 경우 그들이 속한 가문 자제의 입원을 취소하고 당장 귀가시키겠다고 단언한 덕이었다.
덕분에 일개 학사 주제에 횡포를 부린다며 불만을 표하는 이들은 늘어났지만, 함부로 검을 뽑거나 주먹을 휘두르는 일은 없어졌다.
마현의 말이 아니꼽고,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나 실제로 귀가 조처를 당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사태를 일으킨 무인에게 돌아가게 된다.
좁은 땅 내에 수많은 가문의 시선이 몰렸다는 것도 문제였다.
자칫하면 수많은 가문 사이에서 경거망동했다며 가문의 이름에 먹칠까지 하게 될 상황. 그쯤 되면 단순한 추궁으로 끝나지 않는다.
심지어 자칫하면 각 가문의 높으신 이들의 스승이 될 이에게 검을 겨눈 묘한 꼴이 될 수도 있다. 덕분에 대다수 인물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무명현에 머물다 길을 떠났다.
물론 어딜 가나 그런 이들이 있긴 했다.
그런 자잘한(?) 것에 개의치 않고 사고를 벌이는 이들.
복면을 쓰고서, 학사 주제에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마현에게 가벼운 협박이나 하고 가자고 뭉친 몇몇 사내가 그랬다.
아니, 그랬었다.
그들은 담장을 넘자마자 마현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그 제자들에게 두들겨 맞아 쫓겨나 별 보복다운 보복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사라져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어찌 됐든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나날이 지나고, 와룡서원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제자들을 맞을 준비가 모두 끝난 것이다.
“쳇……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부르지나 말든가. 하여간에 마음에 들지 않아.”
황여준이 가장 먼저 서원의 입구에 도착했다.
어제 무명현에 도착해 마현의 얼굴만 보고 마지막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객잔에서 하루를 묵게 된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활짝 열린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맞아. 감히 우리를 뭐로 보고.”
그러한 황여준의 옆에 선, 또래의 어린 소년이 얼굴을 붉히며 발을 굴렀다. 하나 황여준에 비해서 무언가 미약했다.
진짜로 화가 났다기보다는, 그냥 듣고 보니 그렇다는 듯한 소극적인 태도였다.
소년은 바로 남궁세가의 소공자인 남궁성호(南宮盛豪)였다.
“전 괜찮은데…… 오랜만에 나들이하는 기분도 들었고, 이제 안으로 들어서면 답답한 공간에서 글공부를 해야 되잖아요.”
그러한 남궁성호의 바로 옆에 선 작은 여자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읊조렸다.
“새, 생각해보니 성아(盛雅)의 말이 맞네? 역시 우리 성아는 천재야!”
“오라버니도 참…….”
“너 뭐야? 남궁세가의 소공자란 놈이 줏대도 없는 거냐?”
두 남매의 대화에, 황여준이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남궁성호를 향해 혀를 찼다.
“줏대도 없다니. 우리 성아가 하는 말은 늘 옳거든? 네가 뭘 알아?”
“지금 덤비는 거냐?”
황여준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분명 건방진 모습인데, 워낙 그 외모가 뛰어나니, 보기 싫지도 않고, 위협적이지도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말이다.
“뭐? 덤비는 거냐고? 너 정말 혼나고 싶구나?”
“하…… 남궁가의 둘째 아들이 멍청이란 소문이 있더니 사실이었나.”
“너 이 자식, 장사치 주제에 운이 좋아 오대세가의 축에 꼈다고 우리랑 같은 급으로 놀려고 하나 본데…… 한번 뜨거운 맛을 봐야겠구나?”
“장사치? 네놈의 뱃속에 들어가는 밥 한 끼가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 잘난 듯이 차고 있는 검은? 네 추악한 몸뚱이를 가리고 있는 옷을 사기 위한 돈은 또 어디서 났을까?”
“너…….”
두 아이의 눈에서 참지 못할 불똥이 튀어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오라버니!”
“……어? 성아야?”
“그만해요. 아빠가 싸움은 나쁜 사람들하고만 하는 거랬어요.”
쌍심지가 돋은 남궁성아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들 것 같던 남궁성호의 표정이 단숨에 수그러들었다.
하나 그의 표정 어딘가에는 여전히 분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하, 하지만 이 녀석은…….”
“같은 오대세가의 사람이잖아요.”
“끄응…….”
알고는 있다.
그래도 기분 나쁜 말투부터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아버지가 말한 나쁜 사람이 눈앞의 황여준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가득했지만, 역시 남궁성아의 기분을 나쁘게 하면서까지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멍청이.”
그런 남궁성호를 보며, 차가운 조소를 남긴 황여준이 먼저 앞장서 걸어간다.
더 이상 상대를 하지 않겠다는 듯한 그 태도에 다시금 발끈한 남궁성호였으나 슬며시 그의 손을 잡는 남궁성아의 행동에 화를 식혔다.
“참아요.”
“……알겠어.”
그러고 보니 둘을 바라보고 있는 주변의 시선도 어지간히 많았다.
사대흉가라고 하였던가?
남궁성호는 어른들이 늘 말하던 무시무시한 악당 가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