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三章)
가을의 막바지.
겨울이 다가오며 날씨가 슬슬 다시 얼어붙기 시작하는 무렵이었다.
“하나도 안 춥군.”
“북해의 바람에 비하자면 우습지.”
그러한 추위 속, 아주 당당하게 짧은 소매의 옷들을 챙겨 입은 와룡서원의 세 남성 제자들이 팔짱을 낀 모습으로 당당히 무명현을 거닐었다.
북해의 한파는 무공을 익히며 몸이 건강해진 아이들도 방한복을 입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곳에서 한동안 지낸 덕일까?
아직 가을밖에 되지 않은 중원의 날씨는 아이들에게 오히려 덥다고까지 느껴질 정도의 형태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이들이 겨울이 다가오는 가을에 짧은 소매의 옷만을 입고 나선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장작을 캐다 보면 땀이 잔뜩 나겠어.”
그 말대로, 아이들은 한 손에는 장작 패기용 도끼를, 등 뒤에는 커다란 봇짐을 멘 채 걷고 있었다.
“어찌 됐든 승부다.”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너야말로 나중에 딴말하지 마시지.”
무공 수련이나 글공부와는 하등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장작 패기에 아이들이 나서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백산과 정순욱. 한동안 부딪칠 일 없이 지내던 둘의 승리욕 격돌 탓이었다.
첫 시작은 마현의 가벼운 한마디로부터였다.
‘산에 장작을 캐러 다녀와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겠느냐?’
세 사내 제자는 망설일 것 없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경험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세 제자가 함께 길을 나섰다.
문제가 터진 것은 마현이 장작 패기용 도끼 제작을 부탁했다는 석 노인의 대장간에 들렀다 나온 직후였다.
“어이 곰탱이, 누가 장작 많이 패나 내기해볼까?”
정순욱의 도발에,
“……쓸데없는 짓을. 혼자 해.”
백산은 언제나 그렇듯 유야무야 넘어가려는 태도를 보였다. 딱히 의미가 없는데 심력을 쏟기 싫다는 모습이었다.
하나 오늘은 정순욱이 평소보다 훨씬 더 끈질겼다.
“왜, 겁나나 보지? 하긴, 무언가를 배우면 바로 소화해버리는 이 몸과 대적하는 것은 겁이 나고도 남을 일이지.”
“마음대로 생각해.”
“내기 내용은 이기는 측을 칠 주야 간 형님으로 모시는 거다. 어떠냐?”
“할 생각 없…….”
그때였다.
거절할 것만 같던 백산이 눈을 빛내며 말을 멈춘 것은 말이다.
“그러면 칠 주야 간 형님이 하는 말은 모두 따르는 거야?”
“……당연하다.”
갑자기 당당하게 되묻는 백산의 말에 당황했지만, 끝내 고개를 끄덕인 정순욱이 눈을 빛낸다. 한동안 백산이 요리조리 피하는 덕에 승부를 가른 것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수를 잡은 것이다.
“좋아, 해보자.”
이후로는 현재 상황이었다.
서로를 향해 이를 내보이며 으르렁거리는 둘의 모습에, 방관자가 된 양명은 혼자 즐거울 뿐이었다.
‘이게 바로 강 건너 불구경이란 건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볼거리 중 하나가 싸움 구경이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산에 올랐고.
내려올 때는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지쳐 말 한마디 못할 정도가 되어 수척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마현의 질문에 말할 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세 아이는 곧바로 침상으로 향했고.
다음날이 되어 자신들이 패온 장작의 수를 확인한 후 또 한 번 희비가 엇갈렸다.
“이, 이 몸이 지다니……!”
정순욱의 얼굴에는 절규가,
“자, 할 일이 많다. 순욱아.”
백산의 얼굴에는 큰 미소가 어린 순간이었다.
덕분에 그로부터 칠 주야 간, 백산과 함께 무료 의료봉사에 나선 정순욱은 구제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깨달으며 이를 갈았다고 한다.
* * *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었지만, 첫날을 제외하고는 마현이 여유를 즐길 틈은 없었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우선 확장 공사에 들어선 이후,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 서원에서 부족한 시설이나 예상치 못했던 문제를 모두 정리해야만 한다.
사실 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무명현 일대에서 가장 일 처리가 확실한 목수, 금주역이 맡은 일인 만큼 부족한 부분은 빠르게 수습할 수 있게 준비가 된 상태였다.
예상외의 부문이었기 때문에 주인인 마현의 허락 없이 공사를 진행해나가지 못하고 있었을 뿐.
큰 문제는 다름 아닌 와룡서원의 다음 기수 제자들을 받는 일이었다.
마현이 자리를 비운 긴 시간 동안, 제자가 되길 요청하는 서신이 정말 엄청난 높이로 쌓였다. 반쯤 농담 삼아 서원 내에 창고라도 만들어 서신만 따로 보관해야 할 정도였다.
그 수많은 간청 섞인 서신을 읽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나, 하나 정성이 담겨 온 서신인 만큼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의 몇 날 며칠을 정신없이 제자리에 앉아 서신만을 읽었다.
이후 답신을 작성하려고 보니…….
‘또 까마득하군.’
머리가 아찔해진 것을 느낀 마현이 방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들어가도 돼요?”
방문 앞을 서성이던 인영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꼭 허락이 있어야지만 들어올 것 같은 말투네?”
마현이 피식, 하고 웃으며 답하자 어느새 활짝 열려버린 문 바깥에서 고개만 살짝 내민 구혜린이 배시시 웃음을 흘린다.
“그건 아니지만요.”
“어서 들어와.”
마현의 말에 왠지 모르게 쑥스럽다는 듯, 조심스럽게 내부로 들어선 구혜린이 방문을 닫았다. 북해로 떠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꽤나 능글맞아졌던 그녀답지 않은 태도에 마현의 입가로는 웃음이 머금어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래? 어색해 보이네.”
“그야 뭐…… 당연한 것 아닌가요?”
사실 마현은 모르고 있겠지만, 몇 날 며칠을 고민한 구혜린이었다. 할 말도 많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다. 한데 돌아오자마자 이 일, 저 일에 치여 다니는 마현을 보며 함부로 찾아올 수가 없었다. 사실 속이 조금 상하기도 했다.
‘첫날 몇 마디 나눈 것 빼고는…….’
벌써 며칠째, 그럴싸한 대화조차 못 한 둘이다.
마현이 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구혜린의 입장에서야 섭섭할 만도 한 일이었다. 하나 그 속내를 털어내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에, 괜한 투정을 부리는 모습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심통이 난 얼굴이네?”
“……네?”
꽤나 티 나지 않게 잘하고 있다 여겼는데, 마현에게 단박에 꿰뚫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구혜린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마현은 가볍게 말을 이어나갔다.
“린 매 표정은 꽤나 솔직한 편이라서 말이야.”
“……그런가요.”
“요즘 들어 주변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데다 말이지.”
사실 표정에 드러났다기보다는, 처음 방문 앞에서 서성일 때부터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걸음이 왠지 모르게 힘이 없고, 호흡은 어쩐지 불규칙하다. 게다가 그 상대가 구혜린이다.
어쩌면 쓸데없는 습관이 생긴 걸지도 몰랐다.
‘그 재미있는 녀석과 한동안 지낸 덕일까?’
황여진.
쉽게 잊히지 않는 청년의 얼굴을 떠올린 마현이 속내로 쓴웃음을 흘렸다. 어지간히도 독특하고, 뛰어난 녀석이었다. 어찌 되었든 마현 본인의 행동 역시 몇 번이나 읽혔으니 말이다.
“뭐, 그냥…… 저, 원시 합격했다고요.”
“아, 그러고 보니…….”
마현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불과 얼마 전이 원시였다.
알아서 잘해내리라 믿고 있던 덕일까?
돌아온 이후 결과도 묻지 않았었다.
‘이거 정말 미안한걸.’
입가로 어색한 웃음이 흐른다.
“제수씨도?”
“네, 둘 다요. 정말 관심이 없으셨군요.”
“……티 나나?”
“마 가가도 표정에 잘 드러나는 편인걸요.”
“음…….”
어쩌면 황여진이 대단한 게 아니라, 내가 단순한 게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을 했던 마현이 피식하는 웃음을 흘렸다.
어찌 되었든 인정할 건 하고, 할 말은 해야 했다.
“미안. 너무 신경 쓰지 못했네. 그리고 축하해. 이제 문무겸비의 린 매가 된 거네? 하하.”
“……쳇, 입으로만요?”
“음…….”
옆머리를 가볍게 긁은 마현이 이제는 대놓고 심통 난 표정을 짓는 구혜린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댄다.
“입으로도 꽤나 만족스럽지 않아?”
이후로는 능청스러운 농담을 건넨다.
“혼날래요?”
“……조금은 부끄러워할 줄 알았는데.”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반응에 어색한 웃음을 흘린 마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애도 아니고, 지금 우리 나이를 생각해봐요.”
“……하긴.”
확실히, 고작 입맞춤 정도로 부끄러워할 나이는 이미 십수 년도 더 물 건너간 뒤였다. 따지자면, 방에 들어서며 부끄러운 표정을 보인 구혜린의 태도만 해도 지금 나이에 할 짓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이, 나이라…….’
그러고 보니 마현의 머릿속을 문득 스치는 생각은 역시 결혼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면 한 해가 또 흐른다.
눈 깜빡할 새면 어느덧 불혹도 거뜬히 넘어설 터다.
“그럼 우리 결혼할까?”
“……네!?”
이번에는 놀랐다.
그것도 아주 크게 놀랐다.
입을 떡 벌리다 못해, 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큰 목소리로 외친 구혜린의 눈빛이 빠르게 흔들렸다.
“언제까지 망설일 수만은 없다고 생각해서 말이지. 당장 내년에 애를 낳는다고 해도 이순(耳順)이나 되어야 다 클 테고…….”
마현의 진지한 목소리에, 당황을 천천히 가라앉힌 구혜린이 묘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마현의 의도는 분명히 파악했다. 농담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다. 지금 마현은 정말로 성혼을 논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상황을 인지하고 나니, 또 다른 생각에 당황이 치밀어 오른다.
“서, 설마 이게 청혼이에요?”
“설마라니. 그럼 우리 나이에 뭐 거창하게 기대한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생에 한 번뿐인 청혼인데, 조금은 특별하기를 바란 것이 없다면 거짓일 터였다.
“게다가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그래서 싫어?”
“……대답 안 할래요.”
“흐음…….”
확실히 너무 갑작스럽고, 대충인 것은 분명하다.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마현의 결정은 간단했다.
너무 평범하고, 대충인 것만 같으면 그렇지 않게 바꾸면 된다. 마현에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잠시만.”
대답은 하지 않은 채, 괜히 심술이 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구혜린을 단숨에 번쩍 들어 올린 마현이 곧바로 방 바깥으로 향했다.
“내, 내려줘요.”
혹여나 누가 볼까, 주변을 빠르게 훑은 구혜린이 속삭이듯 작게 말한다. 목소리를 듣고 사람이 몰려올까 또 걱정하는 것이다.
“린 매는 은근히 귀여운 게 매력이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살짝 웃어 보인 마현이 단숨에 지면을 박차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말 그대로였다.
뛰어오른 것도 아니고, 날아올랐다.
허공을 몇 번이나 박차 구혜린으로서도 상상할 수 없는 높이까지 단숨에 뛰어오른 마현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자, 발밑으로 형성된 것은 구름 뭉치였다. 다만, 여태껏 마현이 자주 애용하던 흑운이 아닌, 달빛을 받아 신비한 빛을 은은하게 뿌리는 백운(白雲)이었다.
“놀라지 마.”
이후 마현은 망설임 없이,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구혜린의 몸을 허공에 그대로 놓았다.
“꺄악……!”
지상으로 급추락하는 감각에 놀란 비명을 내지른 것도 잠시.
푹신.
등 뒤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구혜린의 눈이 다시 한 번 동그랗게 뜨였다.
“어…… 이거, 구름…….”
“맞아, 구름. 근데 이렇게 탈 수 있는 구름이지. 크기도 자유자재로 조절 가능한…….”
놀라는 구혜린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마현이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백운의 크기가 단숨에 커다랗게 늘어나 와룡객잔 하나가 위에 올라서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그야말로 하늘 위에 구름으로 형성된 푹신한 땅이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어때? 마음에 들어?”
“……네에.”
놀란 구혜린이, 자신의 손으로 넓어진 백운을 더듬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신선이 학을 타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야 있었다. 구름을 타는 신선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하나 세상에나, 살아 있는 사람이 진짜 하늘 위의 구름을 타고 있는 모습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본인이 직접 겪게 될 일이었다니!
“신기하고, 예쁘네.”
은은하게 달빛이 내리쬐는 새하얀 구름의 대지 위는 그야말로 절경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심지어 구름 아래로 보이는 세상은 또 어떠한가? 너무나 작고 오밀조밀하여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조약돌 같아 보였다.
‘이런 모습이었구나.’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무명현 근처의 풍경을, 한눈에 담게 되며 새삼스레 다시 한 번 감탄을 터트린 구혜린의 눈이 반짝인다.
자신하건대, 천하 어디를 뒤져보아도 이러한 풍경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특별하고, 엄청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면 이제 대답해 줘도 되지 않을까? 린 매. 나랑…… 결혼해줄래?”
그러한 기적과 같은 풍경 위.
마현이 조금은 쑥스러운 듯, 하나 진지한 표정으로 구혜린을 향해 다시금 묻는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네. 당연하죠.”
구혜린은 제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가듯 마현의 품으로 뛰어들어 환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고마워요.”
“나도 고마워.”
두 사람 모두에게, 일생에 한 번뿐일 특별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제십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