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귀환-51화 (52/83)

(第十一章)

대공녀가 쓰러진 이후 아니, 외인인 와룡서원의 일행들과 황금세가의 인물들이 들어선 직후 끝없이 들썩이던 북해의 격동이 멎었다.

대신해서 북해를 찾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북해에 살아가는 주민들,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탓이었다.

‘서로의 식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던 일. 슬픔이 먼저인 건 어쩔 수 없나.’

대공녀 아니, 이제는 북해빙궁주가 된 냉설하는 마음이 유약한 편이지만 머리가 좋고 통솔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혼란 속, 한동안 찾아올 수 있는 혼란을 방지하고자 빠르게 빙궁주의 위(位)에 올라 체제를 정비했다. 또한 실제로 가족이나 형제, 자매를 잃은 이들의 돌발행동을 막기 위해, 빙궁 전체를 침묵시켰다.

서로 싸워야만 했던 형제 자매간의 합동 장례식을 열어 본인이 직접 참가하여, 슬픔의 분위기를 일깨운 것이다.

덕분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분위기는 없어졌다. 모두 새 빙궁주인 냉설하와 함께 슬픔을 나누며 마음의 무거운 짐을 덜어내는 과정인 것이다.

물론 그러한 냉설하의 행동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무리도 있었다.

혼란을 잠재우고자 펼치는 일종의 정치 놀이.

연기가 아니냐는 의견이었다.

물론 현재 빙궁의 분위기에서는 전혀 먹히지도 않을 반박이었다. 강력한 적이었던 이공녀를 무릎 꿇리고, 젊은 나이에 궁주에 오른 냉설하의 직권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상황. 소수의 반발은 우스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궁주께서 그럴 리가 없지.’

백서향은 이 빙궁 내에서, 냉설하라는 여인을 그나마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이 연약하고 빙궁에 대한 애정이 많던 아이다. 거짓이 아니라, 정말로 식솔들끼리 싸우다 죽어 나가야만 했던 이 싸움이 너무나 슬플 터였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러한 모습을 연기로, 거짓을 지어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면 애초부터 백서향이 빙궁으로 돌아와야 할 필요도 없었을 터였다. 아직 전대 빙궁주가 정정하던 시절, 속에 어둠을 품고 있던 천화향을 진즉에 알아보았던 냉설하였으니 말이다.

“허어…….”

생각을 정리하며, 소비와 무해가 정리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백서향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태 각주와 상 각주가…….’

갑작스럽게 나타나 전황의 분위기를 휘어잡은 마현의 등장 이후, 군소리 없이 포박을 받았던 두 각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 안타까움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두 각주는 오랜 시간 능구렁이라 불릴 만큼 각자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해내 왔다. 아마 냉설하였다면, 그러한 점을 내세워 두 각주의 목숨을 빼앗지만은 않았을 터. 한데 그 무엇조차 결정이 나기 전에 두 각주 모두 목숨을 끊었다.

‘두려움 탓은 아니겠지.’

그저 허망해진 것뿐이다.

나름의 목표를 향해 미친 듯이 살아왔다.

달리는 마차 위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달렸을 터다.

한데 이제 그 마차는 멈추어야만 한다.

인간은 미래를 보고 살아간다.

하나 두 각주에게는 더 이상 미래가 없었다.

‘남은 시간도 얼마 없다 여겼던가.’

안타깝지만, 빙궁의 운영에 있어서는 나쁘기만 한 소식도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이 이끌던 빙퇴각과 빙왕각 역시 인원 개편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상황. 두 각주가 살아 있는 상태였다면, 새 각주를 추대한다 한들 윤활성 있게 조직을 굴리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또한 그것을 알면서도 두 각주를 죽이지 않았을 인물이 냉설하고 말이다.

‘결국 어떻게든 정리는 될 터니…….’

보고서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짧은 한숨을 내쉰 백서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됐든 냉설하는 잘해나갈 터다.

‘언제나 그래 왔듯 말이지.’

오히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제는 내가 정리를 해야 할 차례네.’

깊게 호흡을 내리 쉬며, 몸을 일으킨 백서향은 자신의 집무실 창문을 가린 장막을 거둬 익숙한 북해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내가 나고 자란 땅…….’

반면 자신의 자식은 이 땅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

‘하나 지금은 이곳에 있지.’

죽음의 위기를 느꼈던 마지막 순간, 당시를 떠올린 백서향이 입가로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결심을 굳혔다.

“약조를…… 지켜야겠지.”

모든 것을 이야기해 줄 터다.

마현에게 약속했던 대로.

이후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소수린의 몫.

백서향의 걸음이 집무실 바깥을 향해 이어졌다.

* * *

황금세가의 인원들은 밀궁 바깥으로 나가, 외부 생활을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외부 활동이 잦을 수밖에 없는 황여진의 입장에서야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약조대로 정의맹과 북해빙궁은 이제 긴밀한 협력 관계가 될 터였다.

서로의 문호를 개방해 협조적인 연합전선을 구축해 나가는 것은 물론, 물심양면으로 원활한 거래를 이어나가게 된다.

기본적인 구성만 따지자면 분명 그랬다.

하나 한 세력의 일이란 게 어디 그리 쉽기만 하던가?

애초부터 황여진,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의맹이 원하던 구도를 완벽하게 잡아내기 위해서는 또 외교 싸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빙궁 내부에서도 양보하지 못하거나, 꼭 얻어야 할 부분은 분명히 존재할 테니 말이다.

결국 한 싸움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싸움이다.

그러한 사실을 가끔 찾아오는 황여진에게 전해 듣는, 밀궁에 남은 와룡서원 제자들의 표정은 아주 크게 질린 채였다.

“정말이지, 요즘에는 무언가를 책임진다는 일이 얼마나 무거운지 깨닫게 된다니까. 뭐가 이렇게 복잡한 게 많은지…….”

“산다는 게 그리 쉽지만 않다는 거지, 어휴.”

백산의 말에, 나란히 앉아 서책을 보던 양명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하, 당연한 걸 이제야 깨닫다니. 역시 우둔한 녀석들이로군. 공자께서 말씀하시는 군자의 삶을 지켜나가기란 그래서 더 어려운 법이다. 탐을 가지고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복잡한 일에 얽혀드는 경우도 많게 될 터니…….”

팔짱을 낀 채, 당당한 표정으로 그러한 둘을 향해 훈계를 하던 정순욱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뭐, 뭐냐, 그 표정은……!”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토로했던 두 아이, 백산과 양명의 입가로 떠오른 묘한 웃음 탓이었다. 둘은 마치 맞추기라도 한 듯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댄 후,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정순욱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그냥, 네가 자랑스러워졌다.”

“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란 말이다.”

“그냥 산이 말 그대로인데? 있는 대로 고얀 말만 붙일 줄 알던 정순욱이 군자의 도리를 논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보려니까…… 킥.”

명백히 놀리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정순욱이었다.

그도 그럴 게, 예전의 정순욱은 분명 입가로 고약한 말을 담은 도발 밖에 할 줄 몰랐다. 아니,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한데 조금 전에는 꽤나 점잖은 말투로 군자와 탐에 대하여 논하였으니…….

“네, 네놈들이 미성숙한 것 같아 한 가지 가르침을 주었을 뿐이다! 함께 학문을 배우며 나누는 사이일진대 다, 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지. 하하하!”

“그렇지, 함께 학문을 배우며 나누는 사이. 하하하!”

당황한 정순욱이 큰 웃음을 흘리자, 백산이 그 뒤를 따라 마찬가지로 웃음을 터트린다.

“푸하하하!”

양명은 아주 박장대소를 하며 마루를 굴렀다.

그렇게 한참이나 어색한 웃음과, 호탕한 웃음이 이어질 것만 같던 때였다.

“해가 지기 전까지 시(詩)와 서(書)를 하나씩 적어보라 하였는데, 여유가 많은가 보구나.”

방문을 열며 나온 마현의 질문에 잠시도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세 아이의 웃음이 동시에 뚝, 끊겼다. 웃던 표정은 간데없이 진지해지고 어느새 바로 잡은 자세로 서책을 내려다보는 표정에는 그야말로 어린 군자들의 근엄함이 어린다.

“어렸을 때 스승님에게 듣기를, 군자의 공부란 쉬어 갈 줄도 아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작은 휴식을 통해 즐거움을 얻었으니, 마침 다시 글에 매진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해가 지나면서 늘어난 게 무공 실력이랑 글재주뿐인 줄 알았는데, 얄미운 재치도 늘어났구나.”

“하하하.”

어색함 가득한 백산의 큰 웃음에, 입가로 작은 미소를 그려 보인 마현이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밀궁의 입구 측으로 향했다.

“손님이 올 것 같구나. 내어준 숙제는 나중에 꼭, 따로 검토할 터이니 방에 들어가 고심을 해보도록 하거라.”

“그리하겠습니다!”

마현의 말에, 힘찬 목소리로 답한 세 아이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총을 쏜 후 함께 방으로 들어선다.

‘아마 안에 들어가서도 말이 많겠지.’

누가 잘했니, 괜히 혼났느니.

‘너무 아이들답지 않아 걱정될 때도 있는데…….’

서로 친분이 두터워지며 생기는 저러한 모습들을 볼 때면, 절로 근심이 덜어지는 느낌이다. 야단치듯 말하였지만 입가로 미소가 떠오르는 것도 분명 그 탓일 터고 말이다.

“나와 계셨군요.”

그러한 마현을 향해 밀궁의 입구에서부터 순식간에 다가온 손님, 백서향이 포권을 취해 보였다. 마현을 바라보는 두 눈에는 극도의 존경심이 담겨 있는 상태.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날의 전장에 있었던 이들 모두, 심지어 빙궁주인 냉설하마저 마현을 대할 때면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북해빙궁은 분명 누군가가 살아가는 터전이다.

하나 또한, 무인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전장이기도 하다. 그러한 전장 위에, 압도적으로 군림한 무신(武神)이 나타났다.

무후라 불리던 백서향조차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절대의 무신.

모두가 인정하는 그러한 인물일진대 마현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자신을 내세워 자랑을 하지도 않았으며, 무언가를 바라며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다. 와룡서원의 스승. 그 이름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천빙각의 밀궁에 은거해 조용히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릴 뿐이다.

냉설하가 애써 내민 대부분의 선물들도 거절하고, 일부 귀금속만 챙겨 서원 운영비로 쓰는데 보태겠다고 말하였을 정도다.

무신이라 불리는 인물이 자신을 스스로 자중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며 살아간다.

그야말로 선인이고, 기인이며, 고인(高人)이 아닌가?

무인들의 존경심이 올라가는 것이야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저를 보러 온 것이 아니란 것이지요?”

조심스럽게, 마현의 눈치를 보며 말하던 백서향이 작은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예. 수린이를…… 딸아이를 보러 왔습니다.”

백서향의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를 들었음인가?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여제자들끼리 따로 공부하던 방문을 열고 나선 소수린이 문 앞에 선 백서향을 바라본다.

“…….”

“…….”

마주하고도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던 두 모녀.

“……잠시 이야기를 해보지 않겠느냐?”

끝내, 먼저 입을 연 것은 백서향이었다.

소수린은 굳이 고개를 끄덕이지도, 내젓지도 않았다.

“…….”

그저 묵묵히, 마루를 나와 신발을 동여매며 백서향의 옆에 설 뿐이다.

‘충분해.’

그것만으로 되었다.

만족한 미소를 그린 백서향이 앞으로 나아간다.

바로 옆에 선, 이제는 적어도 신장만큼은 비슷해진 소수린이 함께 걸음을 옮긴다.

‘할 이야기가 많겠지.’

그 뒷모습을,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본 마현은 뒷짐을 진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였다.

남은 것은 두 사람의 몫.

‘곧…… 떠날 때인가.’

북해와의 작별도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다.

* * *

“미안하구나.”

백서향의 첫 말은 무거울 수 있으나, 그리 육중하지만도 않게 시작되었다. 소수린은 그런 백서향을 그저 묵묵히 올려다보았다. 단순히 사과나 하고자 했다면, 그녀가 이 자리까지 찾아오지 않았을 터다.

“너도 알다시피, 또한 보다시피. 이 어미…… 는 그리 훌륭한 어머니…… 가 아니란다.”

어미, 어머니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조심스럽게 소수린의 눈치를 본 백서향이, 빠르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다행…… 인가.’

어쩌면 격렬한 반응이 돌아올 수도 있겠다.

그리 걱정하고 있던 백서향의 마음에 작은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이후부터는 말을 하기도 조금씩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소수린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듣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명확히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네 아버지…… 라 불릴 만한 잡놈이 떠난 이후, 나도 고심이 많았단다. 나 혼자서 아직 어린 너를 키워야 한다 생각하니, 덜컥 겁도 나더구나. 그래도 해야지. 내가 어미니까. 내 배 아픈 낳은 자식이니까…… 힘을 내려 했었다. 그래, 그랬었다. 이것만은 정말 내 진심이란다.”

“…….”

“한데 나쁜 일이란 게, 본래 그렇듯 하나만 오는 게 아니더구나. 얼마 안 있어 내 고향 이곳, 북해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어머니…… 너에게 있어서는 할머니가 될 분이 임종 직전에 급히 날 찾는다는 소식이었다. 충격이었지.”

처음 듣는 이야기다.

‘할머니…… 라고?’

분명 어머니가 있다면, 그러한 어머니를 낳아준 분 역시 존재할 텐데, 너무나 생소한 말로만 들렸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치 않던 단어를 갑작스럽게 배운 느낌이었다.

“아버지도 없는, 어린 너를 두고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에 고민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하나 결국 이 어미는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너는 중원에서 나고 자라 모르겠지만, 이 북해는 어미의 고향이란다. 내가 태어나고, 커 온. 나의 땅. 그러한 곳에서 네 할머니가 나를 찾고 있을진대, 그 역시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느냐?”

백서향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가볍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래서…… 잠시만, 아주 잠시만 너를 두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네 유모…… 연아에게 부탁한 후. 금방 돌아오리라 약속하며 북해로 돌아온 것이다.”

“…….”

백서향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떠날 당시, 그녀의 마음이었다. 금방 돌아올 것이다. 어머니의 임종만 지켜본 후, 다시금 중원으로 돌아와 소수린을 찾을 것이다. 혹여 북해에서 자신을 원한다면 자신의 딸을 북해에 데려와 기를 결심까지 했었다.

하나 세상 모든 일이란 역시 마음먹은 대로만 되지는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 네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본 후, 곧바로 중원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나 천빙각을 물려받을 사람이 필요했고, 이미 장로회에서는 나를 추대한 뒤더구나. 당시에는 그리 생각했지.”

각주에 오른 후.

취임식이 끝난 뒤 곧바로 소수린을 찾아갈 것이다.

“그 역시 이루지 못했다. 각주의 위치에 오르고 나니 정말 정신이 없더구나. 한동안 떠나있던 북해에서 일어난 일들을 정리하고, 수습하고…….”

그렇게 일 년이란 시간이 훌쩍 흘렀다.

당시까지만 해도, 간간이 전서를 통해 소수린의 소식을 주고받았었다. 어찌 지내고 있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없는지, 어미를 원망하지는 않는지. 소수린의 유모, 연아와는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 어느 날 갑작스레 소식이 끊겼다.

당연히 큰 걱정이 들었다.

하나 당시의 그녀는 북해에 묶인 몸.

이미 암중 다툼을 이끌어가던 이공녀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던 시절인 만큼, 함부로 북해 바깥으로 이동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그저 바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소비의 말을 믿으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더 이상은 소수린을 찾을 수도 없었다.

수하를 보내 몇 번이고 본래 지내던 곳 인근을 수색했으나 흔적조차 잡을 수 없던 것이다.

직접 나서야 했다.

하나 그러기에는 어깨 위에 얹어진 천빙각주라는 짐이 너무나 무거웠다.

세월이 흐르며, 마음속에는 무거운 짐이 쌓여갔다.

죄책감이 커져, 가슴 한편을 크게 짓눌렀다.

그럴수록 더욱 소수린을 찾아야 한다고 여겼다.

무릎 꿇고 사과한다 할지언정, 어떻게 해서든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하나 끝내 그럴 틈은 없었다. 북해는 폭풍전야(暴風前夜)와 같은 상태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을 한가득 품에 안고 있는 상태에서, 천빙각주인 그녀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끝내, 백서향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소수린, 자신의 딸인 그녀가 직접 제 발로 북해에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던 것이다.

“……미안하구나.”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마현과의 약속대로 아니, 그저 무거운 짐짝마냥 마음에 담고 있던 모든 것을 덜어내듯 풀어내고 나니 그저 변명처럼만 들릴 뿐이었다. 누가 뭐라 하여도, 그녀는 분명 소수린의 어머니였다. 부모의 일인으로서, 끝까지 자식을 지키지 못하고 방치한 것은 분명한 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에 휘둘려, 찾아온 자식을 매몰차게 쳐내려고까지 했다.

어떠한 이유를 댄다 하여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연아가…… 죽기 전 남긴 말은 없었느냐?”

그녀의 죽음은 백서향에게 있어서도 분명 큰 충격이었다. 소비와 함께,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왔던 연아는 백서향에게 있어 자신의 딸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신의가 깊은 인연이었다.

한데 소식도 전혀 알리지 못한 채, 저 먼 타지에서 죽고 말았다. 이 역시 자신의 책임이다. 어떠한 생각을 하든, 고개가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노릇이다.

“……유모는, 걱정 말라고 했었어요.”

아교(阿膠)라도 붙은 듯, 입을 꼭 다문 채로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소수린의 입이 열린 것은 잠깐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당신…… 어머니…… 가 금방 찾으러 올 거라고, 약속하셨으니 꼭 돌아오실 거라고요.”

“…….”

“유모는 죽는 순간까지 믿고 있었어요. 평생 지켜지지 않을 그 약속을요.”

“…….”

백서향은 묵묵히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입을 연다고 한들 달리 할 말이 무에 있으랴?

그저 민망한 사과가 전부일 뿐이다.

소수린의 목소리에서 은은히 느껴지는 원망도 모두 납득할 수 있었다.

유모라 부르던, 천하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사람이 죽어가던 당시, 그 심정은 어찌하였을까?

어린아이 혼자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상상을 하기만 해도, 눈앞이 먹먹해질 일. 그 최후의 최후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는 부모를 생각하며 얼마나 속이 썩어들어 갔을까.

아마 마음 온통 쉽게 떨어지지도 않을 진흙탕이 가득 흘러내렸으리라.

“저도…… 믿고 싶었어요.”

“…….”

“하나 기다릴 수만은 없었어요. 난 혼자니까.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없으니까. 다행히 머리는 나쁘지 않게 낳아주신 덕에, 세상 살아가는 법은 빠르게 깨우쳤어요.”

“…….”

“하나 평범하게 살아갈 생각은 없었어요. 부모도 없는 고아라 하여, 비루먹은 인생으로 썩어 진창을 구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조금 추잡해도 좋았어요. 손가락질당해도 상관없다 여겼죠. 언젠가 당신들이 나를 찾아왔을 때, 잘 먹고 잘살고 있는 떵떵거리는 모습으로 대면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된다 여겼으니까요.”

“……수린아.”

“운이 좋았죠. 스승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지금의 저는 아마…….”

소수린의 입가로, 쓴웃음이 진다.

마현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잘은 모르지만, 두 눈에 꽤나 깊은 어둠을 담고 살지 않았을까? 스스로 상처 입히며 세상을 원망했을 것이 분명하다.

“북해에 찾아올 수 있던 것도, 스승님이 용기를 주신 덕이에요. 대면하여 맞서 본 것도, 모두 그분 덕이고요.”

“좋은 분이시구나.”

또한 멋진 사람이다.

여러 가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북해를 구했어.’

어쩌면 마인의 땅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자신들의 터전을 지켜주었다. 북해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목표를 위함이었다 한들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내 딸 아이도 지켜주었구나.’

평생을 그의 시종이 되어 산다 한들 갚지 못할 큰 은혜를 입었다.

가슴 한편에 또 다른 짐이 얹어지는 기분이다.

하나 마냥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따뜻하고, 든든한 짐이다.

책임감이 아닌, 진정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정이다.

소수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터다.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지고 있다.

그녀가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 그 감사, 진심.

두 사람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감정을 되새긴 채 한동안 입을 닫고 있었다.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서로 풀어낼 말은 모두 풀어냈다.

구차한 감정적 연설도, 쓸데없는 자기 보호도 의미가 없었다. 그저 알게 되었다. 아직은 많이 어색하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길에 한 걸음씩 다가간 것이다. 백서향도, 소수린도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아직은, 아직은 말이지…….’

마음을 되새긴 백서향이,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며 입을 연다.

“……하나만 물어도 되겠니?”

“말씀하세요.”

“얼마 전, 전장에서 말이다…….”

운을 띄웠을 뿐인데, 소수린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백서향이 무엇을 묻는지 곧바로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당시 죽음의 위기에 처한 백서향을 향해 몸을 날린 것은 그야말로 본능이었다. 이성적인 판단도, 딱히 다른 생각도 없었다. 단지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무언가 결정을 내릴 틈도 없이 날아간 몸이었다.

‘걱정은 이미 그 전부터…….’

큰 싸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전장의 중심에 어머니, 백서향이 있다고 하였다.

혹여나 하는 걱정이 들 때쯤, 마현이 물었다.

지켜보러 가겠느냐?

거절치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도착한 전장.

위기에 처한 백서향을 본 순간 절로 몸이 움직였다.

그 마음을 어찌 표현하란 말인가?

분명 무관심이라 생각했을진대, 더 이상 없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하다못해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당시에는 정말, 잃고 싶지 않은 어머니였다. 어떻게 만났는데, 드디어, 어렵게 대면했는데. 긴 시간을 뛰어넘은 해후 끝에 보는 것이 어머니의 죽음이라니. 끔찍한 일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지…….’

처음부터 어머니, 백서향을 지워낸 적은 없다.

아니, 부모란 존재 자체를 잊지 않았었다.

늘 품에 안고 있었다. 언젠가 그들이 돌아왔을 때,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부모란 존재는 소수린에게 있어 큰 원한의 대상으로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를 외면했을 뿐이다.

자신의 유치하고 모자란, 어린아이의 반항이나 다를 바 없는 고집이 싫어서 모른 척했다. 그렇기에, 결국 끝까지 속이지 못했다.

그렇게 얼굴이 붉어진 소수린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그린 백서향이 계속해서 말문을 이어나갔다.

“네가 어떤 마음이었어도 좋다. 하나 다시는, 혹여라도 또 한 번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그러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

“내 입으로 말하기 참으로 부끄럽다마는, 나는 네 어미란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백서향의 얼굴 역시 점점 붉어져만 갔다.

“어울리지 않는단 것 알고 있다만은, 그…… 뭐라 해야 할까…….”

“말씀하세요.”

“……자식을 지키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 하지 않더냐? 되레 반대가 된다면야 그 무슨…….”

이제 와서 할 말은 아니다.

그쯤은 백서향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부끄러웠다.

여태껏 단 한 번 잘하지도 못해놓고, 이제야 노력해보겠다니. 민망할 따름이다. 그런 백서향을 보며, 입가로 살짝 미소를 그린 소수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요?”

“응?”

“어머니란 분이 워낙 믿음직하지 못한 걸, 어쩌겠어요.”

“그 무슨…….”

“북해의 무후라면서, 고작 두 명한테 발목이 잡혀 쩔쩔매고 있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어요.”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 마인들은 자그마치 조화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었다. 게다가 무슨 사술을 쓰는지…….”

“듣자 하니 어머니가 북해 제일 고수라던데…….”

“네, 네가 정녕……!”

백서향이 언성을 드높인다.

소수린은 그런 백서향을 놀리듯 계속해서 가벼운 말을 이어간다. 모녀지간이라기보다는, 자매지간이라는 단어가 더 울릴 법한 둘의 모습에, 멀리서 숨어 지켜만 보던 소비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괜히 걱정하고 따라왔잖아?’

나름대로 잘 풀어나가고, 이제는 투덕투덕 싸우기까지 한다. 비록 조금은 모자라고 어색한 어머니일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것으로 되었다.

백서향도 아마 그리 생각할 터였다.

‘모자라니까 더 노력해야지.’

지금은 믿음직한 어머니가 못 되지만, 언젠가는 소수린이 마음 놓고 의지할 수 있는 모습이 되도록.

그러기 위해…….

“네가 인정할 수 있는 어미가 되도록, 노력하마.”

“……네?”

언성을 높이던 중, 돌아온 동문서답에 소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백서향은 그런 그녀를 보며 밝게 웃어주었다.

“너는 내…… 하나뿐인 자식이지 않느냐.”

그 부드럽고 따뜻한 음색에 소수린의 머릿속으로, 먼 과거의 기억이 다시 한 번 스쳐 지나간다.

‘아가, 내 하나뿐인 아가…….’

먼 옛날, 이제는 잊기로 했던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온 날이었다.

제십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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