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章)
‘강해…….’
천화향이 검을 뽑아 들었다.
아직 몸 상태가 완전치 않은, 또한 실력으로도 부족한 냉설하는 위기에 빠졌다. 어째서인지 우위를 점하고 있던 전황은 조금씩 팽팽해져 간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불리해지고 있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저 둘…….’
칠 척이 넘는 장신에 검은 의복, 입가를 제외한 얼굴이 보이지 않게 둥근 삿갓을 길게 눌러쓴 두 마인은 웃고 있었다. 웃으며, 제 자리에 선 채 계속해서 손을 써 대공녀 측에 속한 무인들을 베어 넘기고 있다.
일반 무인들은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검을 놀리는 두 사람의 손을 막을 수 있는 무인은 지금 이 전장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나서면…….’
백서향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선다면, 막을 수 있다.
하나 그 순간 그녀의 목도 함께 달아날 터였다.
적들의 검은 하나가 아닌 둘.
반면 그녀는 혼자였다.
‘처음부터 그걸 알고…….’
마인들과 백서향의 실력 차이는 거의 존재치 않았다.
그렇기에 놈들은 오히려 도발하고 있는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백서향에게, 더 이상 피를 보기 싫다면 목숨을 걸고 도박하라며 끌어들이고 있는 셈.
‘함정이야.’
알고 있다.
밟는 순간 목, 심장, 운이 좋다면 팔 한 짝 정도는 날아갈 큰 함정이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틀거리는 발목을 참는 게 힘들었다.
‘벌써 열.’
두 마인은 제자리에 서 사정거리 내로 다가오는 무인들만을 철저히 베어 넘기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희생자의 수는 늘어만 간다.
‘어떻게 해서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냉설하 역시 천화향의 손에서부터 오래 버티기는 힘들 터였다.
“……어디서 온 누구냐?”
생각을 정리하며, 차가운 목소리를 흘린다.
“대화를 통해 빈틈을 유도해 보고 싶은 건가? 어린아이만큼 유치한 발상이로군. 천빙무후라는 별호가 아까워.”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돌아온 답은 실소가 섞인 비아냥거림이었다.
‘단숨에 간파된 건가…….’
이 정도 술수에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이길 바란 것 자체가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결국 기회는 없었다. 빈틈을 만들 여유는 더욱 없다.
‘쫓기고 있는 건 저쪽이 아니라 나…….’
시간이 지날수록 여유를 잃는 것은 분명한 백서향의 입장이다.
‘알면서도 뛰어들어야 하는가.’
대답 이후, 또 한마디 말도 없이 서 있는 둘에게서는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따지자면 전혀 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찌르고 들어갈 여유는 있다. 하나 그것이 함정일 것은 불 보듯 뻔한바.
‘육참골단(肉斬骨斷)의 수밖에 없겠어.’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틀린 말이다.
사실 이대도강(李代桃僵)의 수라고 말하기도 우스웠다. 솔직히 따지자면, 동귀어진(同歸於盡)이다. 기껏해야 그 정도가 최선. 목을 주고 다른 하나의 목을 취한다.
‘하나 그리하면 안 돼.’
북해의 여인으로 태어나, 천빙무후라는 별호를 얻기까지.
한 명의 무인으로서 살아온 일생, 당연히 목숨이 아깝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여기서 백서향 본인이 쓰러지면 또 하나 남은 흑의 무인을 상대할 자가 없다. 천화향을 막을 사람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무력은 우리가 훨씬 압도라 생각하였는데…….’
천화향도 그 나름대로 수를 숨겨 두고 있던 것이다.
‘하필이면 그 수가 마인이란 게 어이가 없기는 하군.’
감추려야 감출 수가 없다.
아니, 눈앞의 두 무인은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몸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끈적한 마기를 있는 대로 뿜어내며 주변을 압박하고 있다.
‘벤다.’
백서향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 끈적함에 이어, 눈앞에 보이는 적까지 깔끔하게 베어낸다.
단 일격에, 하나의 목숨을 앗아간다.
그러기 위해서 팔 하나쯤 내어주는 일이야 어려울 것도 없었다.
‘지금……!’
결심이 서고, 마음에 세운 칼이 날카로운 예기를 흩뿌린다. 몸이 차가운 지면을 박차는 것 역시 함께다.
슈아악-!
바람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벼락처럼 휘둘러진 백서향의 검이 우측에 선 장신 마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다.
‘웃어?’
빠르게 쏘아진 검.
분명히 보이는 빈틈을 향해 휘둘렀다.
한데 사내의 입가에 맺힌 것은 미소다.
펄럭.
동시에 사내의 흑의 무복이 크게 펄럭였다.
‘옷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
그저 멀리서 볼 때는 활동하기 편한 평범한 무복 같았는데, 이제 와 보니 도포라고 착각해도 될 만큼 커다란 여유 공간이 남는다.
‘하나 고작 시야를 뺏는다고 하여…….’
이미 갈 방향을 알고 나아간 검이 멈출 이유는 없다.
펄럭-!
왼 측에 선 무인의 팔이 다시 한 번 펄럭인다 한들 다를 것은 없었다.
‘찌른다!’
어깨 위로 내려오는 무거운 중압감은 분명 상대의 검.
하나 이 위치라면 심장이 꿰뚫리지는 않을 터였다.
‘팔 하나면…….’
상대의 목도 벨 수 있다.
푸욱-!
검이, 시야를 뒤덮은 검은 장막을 뚫고 지나간다.
‘없어……!’
하나 없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본래 있어야 할 사람의 피부를 꿰뚫고 지나가는 감각이 손끝에 남지 않는다. 당혹감은 짧았다.
‘쉽게 당해주지만은 않겠지.’
어딘가에 박히지 않았다면, 굳이 뽑아낼 필요도 없다.
몸을 휘청이며 반동을 이용해 어깨로 내려오는 검에 반격을 가한다.
카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허공으로 튀긴다.
동시에 시야를 가리던 검은 옷자락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서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때에는, 백서향마저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없어야 했다.
아니, 없었다.
한데 어째서 눈앞에…… 옷자락을 내리며 잔인한 미소를 짓는 사내의 눈이 보인단 말인가?
“생각보다 싱거웠어. 천빙무후.”
차가운 말과 함께, 도포 자락이 펄럭이며 검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튕겨 나갔던 좌측 마인의 검은 반대편에서 갈지(之)자를 그리며 날아든다.
‘위와 아래…….’
동시에 막을 순 없다.
피할 수도 없다.
입술을 질끈 깨문 백서향은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틀었다. 한 자루의 검이, 바로 코앞을 스쳐 지나가며 붉은 핏물을 허공으로 수 놓는다.
‘다른 검은……!?’
푸욱-!
“커억!”
찾으려 한순간에는 이미 또 다른 검이 어깨를 관통하여 지나간다.
순식간에 어깨를 감싼 화끈한 열기에, 아찔해지는 정신을 붙잡은 백서향은 양다리에 굳게 힘을 주었다.
‘균형을 잡아야 해.’
하나, 한 번 흐트러진 몸이 제 자리를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휘청-!
자연스럽게 자세가 흐트러지며, 몸이 옆으로 기운다.
시선을 돌리자 빈틈을 놓치지 않고 떨어지는 한 자루 검이 보인다.
솔직히 말하자면, 눈앞이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끝이군.’
첫 함정은 어찌어찌 몸을 틀어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하나 지금은 균형도 무너졌으며, 어깨에 부상이 생기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양다리를 잡아줄 힘이라도 있다면 최대한 몸을 틀어보겠지만…….
‘늦었어.’
두 눈이 질끈, 감긴다. 앞서 말한 바 있듯 무인으로 살아오며 언제나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또한 그 모습이 생각보다 훨씬 허무할 것이라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다 여겼다.
‘착각이었나.’
눈앞에 다가오는 죽음을 보니 그 허망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이토록 쉽게, 또한 허무하게 내줄 목이었던가. 대체 무엇을 이루고자 그리 각박히 살아왔던가.
마지막에 떠오르는 것은, 분투를 하고 있을 대공녀 냉설하의 얼굴은 아니었다. 북해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친우라 부를 수 있는 소비의 얼굴도 아니다. 남은 천빙각의 식솔들 또한 아니다.
‘내 가족…….’
태어난 순간부터, 북해를 위해 사는 삶을 강요받아온 백서향이었다. 그러한 삶은 수많은 희생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할머니, 그 위 선조들이 모두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제 발로 떠나간 남편 따위, 아쉽지도 않았다.
‘얼굴이나마,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나 하나 남은 자신의 딸.
‘내 아가…….’
소수린.
그 아이는 어찌한단 말인가?
이제야 만났다.
어려운 재회였다.
비록 서투른 감정 표현으로 많은 실수를 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언제든 보고자 할 때 만날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스승이란 인물이 워낙 사람이 좋아 보였으니 큰 고생이야 안 하겠지만…….
‘그래도 지켜보고 싶구나.’
소수린이 성장해서, 어여쁜 아가씨가 되고,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귀여운 손주를 낳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속에, 그 틈새에 늙은 자신이 소수린의 어깨에 손을 얹고 웃고 있다.
꿈속에 그리는 이상향이다.
다가올 수 없는 미래다.
“하…….”
볼가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태어나서 몇 번 느껴본 적 없는 그 뜨거운 감촉에, 정신이 퍼뜩 깨어나는 것만 같았다.
‘죽을 수 없어.’
누군가 그랬던가?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맞는 말이었다.
소수린을 떠올리니, 도저히 이 상태로는 죽을 수 없었다.
‘살 거야.’
무인으로서 죽음을 각오했다고?
헛소리다.
살아남을 것이다.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미움을 받는다 한들, 욕을 듣는다 한들 소수린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내 아이가…….’
자신의 딸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행복하게 사는 모습.
끝까지 지켜볼 예정이다.
“크으…….”
온 힘을 다해 떨어지는 검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머리, 혹은 심장만 아니면 돼.’
우선 살아남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심을 세워 공중에서 바닥을 구르듯 몸을 회전시킨다.
누군가는 실제로 바닥을 구르는 이 수법을 보고 뇌려타곤이라고 하였던가? 삼류 무인이나 하는 하찮고 비루한 꼬락서니라 하였던가?
‘그러면 어때.’
일단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그 진실한 발악이 허용된 것일까?
서걱.
옷자락이 베이고, 핏물이 허공으로 튄다.
여성으로서 보이기 싫을 수밖에 없는 가슴 자락이 노출되며 그 틈새로 긴 상처가 베인다.
“멋진 그림이로군!”
마치 화가가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듯, 검은 눈을 번뜩인 마인이 감탄을 토한다. 비록 목을 치는 데는 실패했지만, 꽤나 만족한 느낌이다.
‘치졸한 녀석.’
하면 어떠한가?
그렇게 바닥을 굴러.
새하얀 대지에 붉은 물감으로 기다란 선을 남긴 백서향은 웃었다.
“후후…….”
우선 살았다.
비록 어깨 한쪽이 덜렁일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지만.
옷자락이 벌어지며 가슴 두 덩이가 크게 노출되었으나, 일단은 살아남았다. 기회가 생긴 것이다.
‘다음번에는…….’
똑같은 수에 당하지는 않는다.
눈을 빛내며, 검을 뽑아 든다.
그녀는 북해의 무후였다.
“고작 이 정도로 날 쓰러트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발정 난 이리여.”
고개를 높이 들며, 조금의 부끄럼 없이 시선을 정면으로 향한다. 검을 들어 적에게 겨누는 모습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다.
“과연…….”
이것이 북해의 무후인가.
장난스레 음흉한 눈빛을 흘리던 두 마인의 눈빛이 바뀌었다. 비록 지향하는 바는 다르지만, 백서향의 두 눈에 보이는 패기(覇氣)는 무인으로서 감탄을 감출 수 없는 종류다. 자연스럽게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진지해진다.
또한 그에 동조하여…….
“최선의 일격으로 베어주지.”
파앗-!
온몸에 잠든 공력을 모두 일깨워 최고의 일격을 가한다.
두 사람이 동시에 뛰어나가며 휘두르는 검에는 고도로 응축된 강기가 넘실거리며 백서향의 몸과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백서향은 또 한 번 웃었다.
‘죽지 않을 거야.’
또한 이길 것이다.
각오를 한 순간, 눈앞에 펄럭이는 검은 무복이 시야를 감춘다.
‘한 번 당했던 바에 또 당할 것 같으냐……!’
이번에는 속지 않겠다.
적의 위치를 명확히 보고, 기로 느낀다.
하나 그조차도 쉽지가 않았다.
검은 무복 뒤편,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째서…….’
자연과 조화를 이룬 그녀가 느끼지 못할 정도의 기운이란 어디에도 존재치 않는다. 특히 눈앞의 두 적과 같은 강대하고 끈적한 마인의 기운은 보지 않으려야 안 볼 수가 없다.
당황이 찾아왔지만, 그래도 물러서지는 않았다.
‘어차피 베일 것.’
그렇다면 나아간다. 그리 생각하며 검에 기운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스윽-!
하나의 인영이 백서향의 시야를 뒤덮는다.
그리 크지도 않고, 듬직하지만도 않은 그 모습에 백서향의 입이 절로 크게 벌어졌다.
“아가……!”
경악과도 같은 목소리를 흘리며 두 눈을 부릅뜬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을 등지고, 웃음 짓고 있는 소수린의 모습에 정신이 흐트러진다. 맞서려던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하여 양팔을 들어 소수린의 몸을 감싸고, 또다시 위치를 바꾸려 한다.
‘내가 죽는다 한들……!’
그토록 살고자 하던 마음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죽어도 좋다.
그러니 제발…….
‘이 아이만은 살 수 있도록 해줘.’
바라고 바란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쏟아내어 원한다.
하늘이 그 간절함을 들었음인가?
카강-!
날아들던 두 개의 검이 커다란 반동과 함께 동시에 허공으로 치솟는다.
“……!?”
그 엄청난 충격에 손목을 부여잡은 두 마인이 눈을 부릅뜬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먼저 등을 내밀려는 모녀에게 들려온 것은 따뜻한 목소리였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 몸에 힘이 되돌아오는 것 같은, 신비한 음성이기도 했다.
“네놈은 누구냐……?”
그 목소리에 화답한 것은 모녀가 아닌, 온 힘을 담은 일격이 실패한 두 마인이었다.
목소리의 주인.
마현의 대답은 간단했다.
“스승.”
“……?”
“네놈들이 목을 베려 했던 여인의 딸이 내 제자다.”
“그 무슨 개소……!”
서걱-!
어이가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던 마인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는다. 보이지도 않았다. 들리지도 않았다. 그 어떠한 기의 유동도 없었다. 공력이 치솟아 오르는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순식간에 베였다.
“그러고 보니 내 제자도 베려 했었지.”
혼자 남은 마인은, 눈을 부릅뜨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목표는 공격이 아닌 방어.
펼쳐진 것은 조화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만이 선보일 수 있다는 기막(氣膜)이다. 단순한 기도 아닌, 응축된 강기로 형성된 무너지지 않는 방어막!
‘어떻게 오는지 느끼지조차 못했다.’
마치 거북이 집에 숨은 것과 같이, 몸을 웅크린 마인의 두 눈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도포에 새겨진 주술의 힘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백서향에게 하였듯, 주술로 시야와 정신을 어지럽히고 틈을 노려 상대를 당황하게 하여 빈틈을 만든다. 조화에 이른 초인의 무위에 이 힘이 합쳐지면 그야말로 무서울 것이 없다.
아무리 대단한 무인이라 하여도 싸울 수 있다고 여겼다.
‘일단 놈의 힘이 어떠한 종류인지 정체를 알아내기만 하면……!’
그런 장신 마인을 향해, 입가로 웃음을 그려 보인 마현이 천천히 손날을 들어 올린다. 마치 한번 봐보라는 듯한 느릿한 동작.
꿀꺽.
침을 삼킨 마인은 두 눈을 부릅뜨며 그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 여유가 네 목을 앗아갈 것이다.’
두 눈에는 결전의 각오가 담긴다.
마현의 손이 아주 느릿하게 세로로 그어질 때도 그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꿈에도 몰랐을 터다. 그러한 두 눈을 한 채, 그대로 목이 달아난 지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은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일 터였다.
툭.
하얀 대지 위로.
두 마인의 목이 나란히 놓인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북해의 무후라 불리던 백서향을 고생시키던 두 마인을 처단한 마현은 가볍게 손을 털어내며 등을 돌린 후,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목소리에는 여유가 가득 담겨 있는 채였다.
* * *
백서향은 할 말이 없었다.
‘대체 이 자…… 정체가 뭐지?’
서원의 선생이다.
또한 소수린, 딸의 스승이다.
그리고, 대공녀 냉설하의 독을 단숨에 치료한 명의다.
여기까지만 해도 쉽게 알기 힘든 사람이라 여겼다. 하나 차라리 그 정도가 전부였으면 편했으리라.
‘저 둘을 이렇게 쉽게 쓰러트렸다고?’
마치 절정고수가 삼류 무인 둘을 베는 것과 같았다.
아니, 그 정도 차이 또한 우습다.
초인의 경지에 오른 자신이, 일반인을 상대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압도(壓倒).
조화경에 이른 데다, 기묘한 능력까지 갖춘 두 마인이 반응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목이 날아갔다. 그렇다고 마현의 분위기가 전력을 다하여 싸운 것 같지도 않다. 마치 고요한 산길에서 산보를 노닐고 있는 듯, 편안한 모습.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러한 마현을 향해, 소수린이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인다.
딱히 어색한 모습은 아니었다.
마치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한 그 태도에 백서향은 또 한 번 질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던 강호가 천지개벽처럼 뒤바뀌기라도 했단 말인가?’
물론, 그럴 리야 없었다.
현재 강호에서 이름을 떨친다는 황금세가의 대공자, 황여진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분명 나이에 비해 엄청난 인재이긴 하지만.’
그 황여진이 마현의 나이가 된다 한들 저러한 모습을 보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른 의미에서라면 더욱 무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괴물이로군.’
북해의 괴물이라 불리던 백서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사내야말로 진짜 괴물이다.
아니, 굳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미친 듯 싸움을 이어가던 북해의 무인들 모두의 몸이 제자리에 멈추어져 있었다. 마현의 등장 이후, 그에게 압도당한 탓이다.
하나 좌중의 몸을 짓누른 것은 단순히 그가 보여준 무위 탓이 아니었다.
분위기.
모습을 나타낸 것만으로 주변의 공기 자체를 바꾸어 버렸다. 어깨가 너무나 묵직하여, 굳이 억제하지도 않았음에도 한 걸음을 떼기가 어렵다. 손에 들린 검은 또 어찌나 무거운지…….
주변으로 흩뿌려진 붉은 피는 또 얼마나 끔찍한지.
광기에 취해있던 정신이 돌아오며, 주변의 시야가 트인다. 단지 나타난 것만으로 좌중을 압도했을 뿐 아니라 상황 자체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정말이지……, 진즉에 나서주셨으면 훨씬 편했을 것을.”
함께 싸움에 뛰어들어 냉정한 눈으로 적을 쓰러트려 가던 황여진이 헛웃음을 흘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의 싸움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느낀 탓이었다.
‘그가 온 이상 모두 부처님 손바닥 안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지.’
아무리 무공을 갈고 닦는다 한들, 하늘이 노하여 내리는 신벌을 비껴갈 수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황여진이 마음속에 메긴 마현의 존재란 그런 종류였다. 일종의 자연재해와 같은 것.
‘피해 갈 수 없는 재앙이라…….’
황여진은 입가로 웃음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싸움은 끝났다.
멀리서 숨어 지켜보던 그의 제자, 소수린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날린 순간 이미 그 무엇도 의미가 없어졌다.
대공녀? 이공녀?
북해빙궁의 세 기둥이라는 각주들?
‘이거 참…….’
입가로 나오는 것은 헛웃음뿐이다.
여태껏 미친 듯이 싸운 사실 자체가 허망해질 정도.
‘그래도 저쪽보단 낫겠지.’
황여진의 시선이, 표정을 굳히고 있는 천화향에게로 향했다.
굳어진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모른다.
떨리는 양손은 휘두르고 싶은 검을 애써 붙잡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두 마인은 흑천맹에서 보내 준 초고수였다.
자그마치 화경, 그에 이어 흑천맹주가 직접 선물한 흑운무복(黑雲武服)을 걸쳐 북해의 괴물이라 불리는 천빙무후라 한들 하나를 감당할 수 없다 여겼다. 그리고 그러한 측정은 사실이었다. 힘들긴 하겠지만, 두 마인은 백서향을 혼자서도 능히 상대할 무서운 인물들이었다.
그러한 두 마인이.
‘맹의 인물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목이 잘려나갔다.
꿈이라 한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 말이나 된단 말인가?
대체 그 누가 있어 저 어마어마한 초고수들을 제 자리에서 꿈쩍도 안 한 채 목을 벨 수 있을까? 현 천하제일 고수라 불리는 인물을 데려와도 그리할 수는 없을 게 분명했다.
하나, 눈앞에 일어난 기현상은 분명한 현실이다.
그녀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사용하고 싶지 않던, 하나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했던 비장의 수까지 허무하게 꺾이고 말았다.
현실을 인정하고 나니, 허무한 감정 뒤에 숨겨져 있던 격정이 찾아온다.
“푸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리니, 눈앞에서 마찬가지로 허탈한 표정을 보이던 냉설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천화향은 더욱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하!”
모두가 놀라 그녀를 쳐다볼 때까지 계속해서 웃었다.
꿈? 야망?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심연?
‘헛소리!’
모두 끝났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무엇도 없었다.
양손에 쥐어진 것은 이 좁은 전장에서도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검 한 자루뿐.
촤르륵-!
대지에 펼쳐져 있던 천화향의 연검이 꿈틀거리며 뱀처럼 솟아난다.
자연스레 정면에 서 있던 냉설하가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큭큭.”
천화향은 그런 냉설하를 보지도 않은 채 웃었다.
이후, 너무나 허무하게 자신의 계획을 망가트린 마현을 보며 작게 욕지기를 내뱉는다.
“빌어먹을.”
촤르륵- 푸욱-!
“……!”
이후로는 냉설하가 막을 틈도 없었다.
뱀처럼 말려 올라간 연검은 날카로운 머리채를 비틀어 제 주인의 목에 단숨에 어금니를 박아 넣어 버린 후였다.
“화향……!”
언제부터였던가?
아마 서로에게 검을 겨눈 이후로 불러 본 적 없던 이름을 읊은 냉설하가 그런 천화향에게로 빠르게 달려갔다. 하나 천화향의 두 눈은 더 이상 냉설하를 직시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 무엇도 보지 않고 있었다.
드넓은 하늘.
차가운 북해의 대지에 누운 천화향은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는 하늘을 보며 웃음을 흘린다.
“후후…….”
그렇게 죽어간다.
냉설하가 양팔을 들어 싸늘히 식어가는 천화향의 몸을 감쌌을 때는, 이미 숨이 멎은 뒤였다.
‘너는 정말로 끝까지…….’
그 속내를 알 수 없던 여인이었다.
죽어버린 천화향의 시신을 품에 안은 냉설하는 굳건한 두 다리로 지면 위로 올곧이 섰다. 어찌 되었든 싸움은 끝났다. 쏘아진 화살은 끝내 수많은 식솔들을 피로 물들인 후, 천화향의 심장을 꿰뚫었다. 남은 것은 본인, 대공녀 냉설하다.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이공녀 천화향은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반역의 무리에 가담했던 이들은, 당장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목숨은 보장해주도록 하겠다.”
낮고도 차가운 목소리는, 비록 작았지만 힘이 있었다.
지존만이 담을 수 있는 위엄과 웅장함이 엿보였다.
그에…….
덜그럭, 덜그럭.
이공녀의 세력에 붙어 싸움을 이어가던 북해의 무인들이 하나, 둘씩 검을 버리기 시작했다.
태마응과 상구청.
힘든 싸움에 지쳐있던 두 각주 역시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무기를 버리고 기를 거두며 얌전히 포박을 받는다.
격동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제십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