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章)
당겨져 있던 활시위는 궁수의 손을 떠나 큰 떨림을 일으킨다. 쏘아진 화살은 그 끝을 모른 채 쏘아져 나가, 빙궁 전체가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서늘함으로 가득 메웠다. 거리를 뛰놀던 아이들이 종적을 감췄으며, 매일 같이 길거리에 나와 목소리를 높이던 상인들 역시 몸을 움츠렸다.
척, 척.
묵직한 걸음으로, 대열을 맞춰 나아가기 시작한 이른바 대공녀 파(派)의 분위기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끝내 피를 볼 작정인가.’
검을 뽑아 들었다고는 하지만, 기왕이면 서로 간에 유혈사태는 없기를 바라는 것이 백서향의 생각이었다. 아니,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다.
북해빙궁의 대공녀.
냉설하(冷雪河) 역시 같았다.
‘끝내 같은 빙궁의 식구끼리 서로에게 검을 겨눠야 한단 말인가…… 화향아, 화향아. 대체 너는 무슨 생각인 것이냐.’
냉설하의 나이 어느덧 이립.
이공녀 천화향은 그녀가 소아(小兒)이던 시절부터 함께 무공을 수련해 온 동료이자, 친우였다. 천화향은 처음부터 무언가 남다른 아이였다.
검은 두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들 정도로 깊었으며,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사람을 흔드는 마력(魔力)이 있었다.
냉설하는 그런 천화향이 싫지 않았다.
특별한 사람.
어린 시절, 혹독한 무공 수련에 지쳐있던 그녀에게 천화향은 특별하면서도 신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언제나 함께하기를 바랐다. 평생, 마치 친자매와 같이 함께 빙궁을 지켜나가고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럴 줄로만 알았다.
‘모두 내 꿈이었던 것이냐…….’
빙궁주가 쓰러지고, 천화향이 냉설하가 궁주 지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을 때. 처음에는 의문을 느꼈다. 이윽고 분노, 뒤를 이어서는 체념하고 납득하였다. 함께 빙궁을 지켜나갈 수만 있다면, 궁주의 자리는 큰 문제가 아니다. 천화향이 정녕 원한다면 그 자리마저 비켜주리라.
그리 생각했었다.
목숨을 걸고 천화향을 찾으러 가던 길, 그때 보았던 풍경이 아니었다면 분명 순순히 자리를 내주었을 터다.
‘어째서…….’
검게 일렁이던 운무(雲霧).
그 속에서 느껴지던 지독한 마기(魔氣).
아직 백서향에게도 말하지 못한 천화향의 이면을 당시의 냉설하는 보았다. 이후 생각을 바꾸었다. 냉설하가 바라는 것은 현재의 북해빙궁을 지키는 것이다. 조금 힘들고, 부족하지만 모두가 힘을 합쳐 삶의 터전을 지켜나가는 것.
애초부터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땅이었다.
중원 내에서는 북해빙궁 역시 세외의 사도로 취급받는다지만, 결코 마인들로 이루어진 악마 같은 집단은 아닌 것이다.
와룡서원의 제자들.
아이들이 보고 느낀 그대로다.
그저 사람이 살아가는 땅이며, 조금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외지에 떨어져 살기에 순박한 면이 많기도 했다.
천화향은 그러한 사람들을 이용해 강호전복을 꿈꾸고 있었다. 지금 이 빙궁에 흐를 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엄청난 혈해(血海)를 만들려는 것이다.
‘그럴 순 없어.’
빙궁이 마인들과 손을 잡고 중원에 나선다면 그야말로 강호와 영원히 풀지 못할 척을 지게 된다. 다시는 변방에조차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며, 영원히 마도(魔道)로 취급받아 배척될 것이다.
후대에 그러한 짐을 안겨줄 수는 없다.
‘하니……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나 역시 양보할 수가 없다.’
냉설하 역시 나름의 신념을 지닌 채 앞으로 나아갔다.
설령 빙궁의 무인들끼리 피를 보아야 하더라도, 천화향이 권력을 잡고 일으킬 일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설령 천화향이 빙궁을 위한 계획으로 중원진출을 바란다 하여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
말이야 좋다. 하나 대를 위해 흘려야 할 피 역시 적다 말할 수는 없다. 냉설하가 지키고 싶은 것은, 지금의 북해빙궁이었다.
‘비록 비옥한 땅을 가지지 못했어도, 모두의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터다.’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다.
자신의 신념을 다지며, 정면을 바라본 냉설하의 두 눈에는 강한 의지가 섰다.
저 멀리,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내는 이공녀 파의 무인들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질서정연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들의 얼굴에도 깊은 결의가 서 있다.
서로 형제자매나 마찬가지인 사이에 검을 겨눠야 할 때다. 그런 결의마저 없다면 광기(狂氣)에라도 몸을 실어야 하리라.
“천인 무도할 짓을 저지르고도 뻔뻔이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다니. 이공녀, 그대가 정녕 반역(反逆)을 일으킨 것을 시인할 셈인 거요?”
전면에 나선 이는 냉설하가 아닌 백서향이었다.
시린 기운이 펄펄 날리는 기세로 검에 손을 가져다 댄 백서향은 언제라도 검을 뽑을 준비를 한 채 공력을 일으켰다. 이미 초절정을 넘어, 초인이라 불리는 화경의 경지에 진입한 백서향이다. 그저 기운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북해의 대지가 울음을 토하며 주변의 대기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전면에 나섰던 이공녀 파에 속한 무인들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의도적으로 발산하니,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준이 달라.’
화경.
초인이라 부르는 그 경지에 오른 지도 벌써 팔 년이 넘게 흐른 백서향이다. 그간 백서향이 무공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은 단 하나였다.
벽은 무수히 많다는 것.
조화를 이루었다 하여 모두가 같은 조화경에 이른 것이 아니다. 무공의 어떤 경지가 그렇지 않겠냐만은 일류, 절정, 초절정에서 그러했듯 조화경 내에서도 엄연히 수준의 차이는 존재했다.
북해를 대표하는 천빙무후.
백서향은 그러한 조화경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있는 무인이었다. 수많은 벽을 마주했으며, 그를 부수거나, 넘어섰다. 애초부터 천지 만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또한 세상이 그녀를 받아들이는 태도 자체가 다르다. 공력을 끌어올리는 것만으로 세상이 그녀의 의지에 동의하듯 적들의 몸을 옭아맨다.
단순한 기세만으로도 사람의 무릎을 굽히게끔 하는 지고(至高)의 힘이다.
“반역이라니요. 천빙각주께서는 말을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역천(逆天)을 논한다면, 외인까지 끌어들여 빙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대공녀께 먼저 물어야 하는 것 아니오?”
그러한 백서향의 말에 치고 나온 이들은 바로 상구청과 태마응이었다. 실상 두 사람의 무공은 이제야 조화경의 입구를 보는 수준이었다. 아직 닿지조차 못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공력을 일으켜 버티어도 백서향 일인이 일으키는 기세에 양다리가 떨리는 것을 간신히 감추어야 할 정도다.
‘역시 이공녀는 나서지 않는군.’
평소 능구렁이라 생각하던 두 노인의 태평을 가장한 등장에, 한참 뒤편에 있는 천화향을 바라본 백서향의 눈가에 투기(鬪氣)가 솟았다.
‘이미 삼 년 전에 조화의 벽을 넘었다지?’
백서향의 나이가 곧 지천명(知.天命).
북해 내에서 무공의 천재라 불리던 그녀조차도 불혹이 되어서야 조화의 입구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반면 이공녀 천화향은 이제 기껏해야 이립을 넘어 선 어린 무인이다. 그런 그녀가 벌써 삼 년 전 조화의 벽을 뛰어넘었었다.
그런 그녀가 전면에 나섰다면, 두 노인이 무리하게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하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대공녀 냉설하가 나서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 이공녀 파의 수장인 천화향이 전면에 나서 입을 열 수는 없다.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격전이 벌어지기 전 기세를 살리기 위한 포석.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이끌고 있는 군(軍)의 균형이 흔들린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백서향 역시 처음부터 전면으로 나서 강하게 기세를 뿌리는 것이다.
“두 각주께서, 치졸하게 독까지 이용하여 대공녀를 암살하려 들고, 외인을 부려 함정을 파려 했던 주제에 감히…… 역천을 논한단 말이지요?”
백서향의 옷자락이 펄럭이며, 기세가 더욱 끌어올려 지기 시작했다. 말을 내뱉는 혀야 멀쩡히 붙어 있으니 입을 놀리지 못할 바야 없다. 하나 그 역시 상대를 골라가며 해야 할 일이었다.
검을 뽑기 전 백서향은 천빙무후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차가운 여인이었다. 뜨거운 감정보다는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움직여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하나 검을 뽑은 이상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들 진실을 감출 수는 없을진대…… 두 분께서는 목 위의 물건이 달아나 보아야 진실을 외면치 않고 직시하시려나 보군요.”
스르릉-!
싸늘한 시선을 흘린 백서향의 손이 천천히 검을 뽑아 올린다.
대기 중에 퍼져 있던 날카로운 기세는, 하나의 날카로운 송곳과 같이 벼려져 상구청과 태마응을 향해 쏘아졌다.
“음…….”
“크흠…….”
두 사람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머리 위로는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사방에 퍼져 있는 기세에 맞설 때와 정확한 목표를 가진 기운이 피부에 맞닿을 때 오는 확연한 느낌의 차이 탓이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두 가지뿐.
‘역시…… 괴물이로군.’
또한, 그래도 반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밀리면 기세에서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하나, 그조차도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백서향의 압도적인 공력에 말문을 열기조차 어렵다.
자칫 입을 여는 순간 핏물이라도 토한다면, 오히려 손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한 두 각주의 고심을 보다 못한 것일까?
“천빙각주께서는 아무래도 저를 파렴무치(破廉無恥)의 요녀(妖女)로 몰고 싶으신가 봅니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천화향이 느린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동시에 두 각주에게 쏟아지던 기운이 허공으로 흩어져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딱히 무슨 행동을 보일 필요도 없이, 그저 앞을 막아서는 것만으로 기운을 흩어버린 것이다.
‘……제법이로군.’
덕분에 놀란 것은 백서향이었다.
딱히 공력과 공력이 부딪치는 느낌도 없이, 기운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만큼이나 내기를 다루는 능력이 특출하다는 것이다.
‘혹은…….’
설마하니, 백서향의 공력을 월등히 앞섰거나 말이다.
‘그럴 가능성은 작지만…….’
무공의 경지는 무공을 익힌 세월에서 나뉘는 것이 아니다. 흔히들 오성이라 말하는 재능과 피나는 노력, 거기에 더해 주변 환경의 요인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나 내공의 양만큼은 분명히 더 많은 세월을 살아온 이가 앞서나가기에 유리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온갖 영약을 먹고 자랐다고 한들…….’
백서향 역시 다음 대 천빙각주로 내정되며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보신과 보기(補氣)에 좋다는 약은 모두 흡수했다. 환경도 비슷하고, 익힌 무공도 같은 빙궁의 것일진대 큰 차이가 나기란 어려운 법이었다.
‘어지간한 기연이 없다면 말이지.’
천화향의 속내를 꿰뚫어보기라도 하려는 듯, 백서향의 눈이 가늘어질 때였다.
“설령 달기가 된다 한들 세인(世人)들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다. 오래전 사매가 했던 말이야. 기억해?”
마찬가지로 어느덧 앞으로 나선 냉설하가, 천화향을 타박하듯 말했다. 백서향은 묵묵히 뒤로 걸음을 옮겼다. 냉설하가 나선 이상, 대화의 주도는 두 사람의 몫이었다.
“사저는 기억력도 좋으시네요.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철없던 시절의 농담거리였죠. 호호.”
“내가 보기엔 아직도 진행 중인 농담 같은데…….”
“뭐, 지금도 농담으로라면야…….”
“…….”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만 같았다. 북해빙궁의 지존이라는 자리를 놓아두고 피를 부르며 다투는 사이가 아닌, 먼 과거, 이제는 십 년도 넘은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게끔 만든다.
조금은 어색했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검을 겨누지는 않아도 되었던 그때에는 분명, 행복했었다.
천화향의 경우야 모르지만, 당시의 냉설하는 분명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조금 지치고 힘들지만, 함께 무공을 익혀 나가는 친우가 있어 즐거웠다.
감정적인 것은 모두 털어내고자 했지만, 막상 천화향의 얼굴을 보자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이게 내 약점이겠지.’
예로부터 빙궁의 궁주는 빙녀(氷女)라 불릴 정도로 감정이 메마른 여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멋모르는 이들은 차가운 북해의 땅에서 자라 그 음기(陰氣)를 받은 탓이라지만, 아니다. 선대로부터 빙궁의 궁주는 여인이 되어야만 했던 역사가 있었다.
이는 빙궁 궁주의 독문무공인 빙백신공(氷白神功)의 특성 탓이었다.
절대의 음기를 갖춘 무공인 빙백신공은, 오로지 여인만이 익힐 수 있다. 빙궁을 상징하는 무공이자, 빙궁을 이루는 근간이 빙백신공이니, 결국 북해빙궁 지존의 자리에는 여인이 오를 수밖에 없는 역사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여인의 몸으로, 하나의 거대한 세력을 책임지고 일구어 나간다.
나 하나만을 바라보는 수많은 빙궁의 식솔들과 무인들, 수많은 제자와 빙궁 외곽에 사는 일반인들까지.
그 모든 것을 어깨에 떠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강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어쩌면, 외침(外侵)이 일어나, 간신히 일군 이 터전마저 빼앗길지도 모른다. 강해져야만 했다. 냉정하고, 무심해야만 했다. 그러한 수많은 무게감이 역대 빙궁주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직 대공녀라는 직위에 있는지라, 실제 북해빙궁의 지존이 하는 일을 경험해 보지 못한 터라 말하여도 어쩔 수 없었다. 역대 빙궁의 주인들과 다르게, 냉설하 그녀는 분명 꽤나 감정적인 편이었다.
그렇기에 냉정한 척하는, 실제로는 뜨거운 백서향과도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낼 수 있던 것이리라.
‘하기에 더…….’
이 싸움은 양보할 수 없다.
백서향 역시 원한다면 빙궁을 떠나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살아갈 수 있던 몸이었다. 한데 돌아왔다. 단 하나, 어린 시절 유독 그녀를 잘 따랐던 대공녀라는 직책을 가진 자신을 보필하기 위해 말이다.
이공녀, 천화향 역시 다르지 않았다.
‘빙궁은 시작일 뿐이다.’
백서향이 알고 있는 대로다.
아니, 모두가 그녀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있다.
천화향은 포부가 넓은 여인이었다. 사내가 아닌, 여인으로 태어난 것에 한이 맺힐 정도로 야욕이 컸다. 그야말로 빙궁은 발판일 뿐이다. 기반을 다지고, 뼈대를 쌓아 올려 천화향만의 천하(天下)를 구축한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꿈이었다.
물론, 이루지 못할 꿈에 크게 좌절한 적도 많았다.
자신은 힘이 미약한 여인이었으며, 천하에서 동떨어진 세외의 무인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속한 빙궁마저 손에 넣을 수 없는 위치였다.
차라리 다음 대 후계자인 대공녀가 못났다면 조금 더 꿈을 꾸어볼 수 있었으리라.
하나 정식 후계자인 대공녀는, 다음 대 빙궁주를 맡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이였다. 감성이 앞서기는 하나 영민하며 오성 역시 뛰어나다.
또한 사리분별과 사람 보는 눈 또한 뛰어나니, 먼 훗날까지 빙궁의 성세를 이어갈 수 있으리라. 모두의 판단이 그런 만큼, 이공녀인 그녀가 옹립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던 중, 그들이 찾아왔다.
‘흑천맹.’
정확하게는 한 남성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찾아왔던 사내. 그는 자신을 백천악이라 소개하며 흑천맹주라는 신분을 밝혔다. 이후 새로운 천하에 대해 논하며 천화향의 꿈에 불을 지폈다. 또한 그만한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며, 단숨에 천화향의 위치마저 끌어올려 주었다.
대공녀와 대립할 수 있는 관계.
이공녀라는 위치에서도 꿈을 펼칠 수 있다.
그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눈먼 아귀가 되어, 매혹적이게 차려진 밥상을 망설임 없이 삼켰다.
‘아마 당신은 모르겠지.’
천화향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냉설하를 직시했다.
이 싸움이 지나서, 누가 승자가 된들.
평생의 시간이 흘러도 냉설하는 모를 터다.
싸워보지도 않고 승복하여, 자신을 찾아온 냉설하에게 일부러 보여주었던 그 모습을, 자신의 꿈을.
‘편하게 얻을 생각은 없어요.’
쉽게 얻은 것은, 그만큼 가치를 느끼기 어려운 법이다.
비록 작다고 볼 수 있지만, 북해 내에서는 감히 지존임을 자부하는 북해빙궁의 주인 자리를 겨루는 싸움이다. 그를 우습게 여기고, 가볍게 마음에 둘 생각은 없었다. 천하를 먹어야 한다면, 응당 북해빙궁 정도는 자신의 손으로 쥘 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보여주었다.
한번 최선을 다해 맞붙으려 했다.
‘멍청한 대공녀께서 워낙 얌전한 술수만 쓰신 덕에…….’
눈으로 본 것조차 어디 바깥으로 내뱉지 않고, 마음속에 묻어버린 탓에 그리 어려운 싸움은 아니게 되었지만 뭐 어떠랴.
‘끝내 이 자리까지 왔거늘.’
천화향의 입장에서도 이 자리는 최악이었다.
싸움의 끝을 보기 위해 세운 독아(毒牙)가 꺾이고 검날이 섰다. 최악이지만, 차라리 마음에 든다.
‘그래요, 끝까지 버티셔야죠.’
애당초 말했듯, 쉽게 가지고 싶지 않았다.
얻어야 한다면 그 끝에서 손에 쥐리라.
신념을 품은 채, 냉설하를 향해 웃음 짓는다.
차앙-!
동시에 묵묵히 서 있던 백서향의 검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하늘 높이 뽑아 올려졌다.
많은 감정이 오갔지만 말을 길게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든, 끝에 남을 것은 결국 결정되어 있다.
“역천의 무리를 처단하라.”
적의(敵意)와.
“반역도는 대공녀다! 북해의 검에 자비가 없음을 알려주도록!”
거짓.
“죽어버려!”
분노.
파앗-!
“크아악!”
흐르는 피와 검.
신념이란 이름의 광기가 맞부딪치는 순간이었다.
* * *
털썩.
북해의 하얀 대지가 붉은 장식으로 물든다.
그 위를 오가는 것은 번뜩이는 검광(劍光)과 괴성.
개중 가장 돋보이는 존재를 뽑자면 단연코 괴물이라 불리는 천빙무후 백서향, 바로 그녀였다.
한 마리 고고한 학처럼 지면을 딛고서 천천히, 또한 무심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크아앗!”
“컥…….”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하나의 목숨이 달아나며, 얇은 은빛이 번쩍이며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었다. 자연스레 백서향의 주변으로는 넓은 원이 형성되었다.
다가가면 베인다. 접근을 허락하여도 죽는다. 뒷걸음질 치는 무인들을 향해 다시 한 걸음 옮긴 백서향의 손이 움찔거릴 때였다.
“하앗!”
카앙-!
만들어진 원형 공간의 중심으로 뛰어나간 상구청의 쌍장에서 강기가 형성되며 번뜩이는 검광을 막아낸다. 처음으로, 백서향의 검이 허공에 멈추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틈을 놓치지 않은 것은 태마응이었다.
“죽어라!”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뒤에서부터 튀어나온 그는, 강력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검을 백서향의 머리 위로 벼락처럼 내리쳤다.
“……후우.”
동시에 백서향의 입이 벌어지며 한기(寒氣)가 쏟아져 나왔다. 안 그래도 추운 북해에서는, 숨을 내뱉기만 하여도 입가로 김이 번져나간다. 그러한 상황에서 날숨에 한기가 섞이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치 운무(雲霧)와 같은 김이 백서향의 온몸을 뒤덮더니, 매와 같이 날아들던 태마응의 시야를 빼앗아 버린다. 눈앞이 잠시 흐려지는가 싶은 직후에는…….
“태 각주, 위험하네!”
퍼엉-!
상구청의 비명 섞인 경고와 함께 번뜩이는 강기가 태마응의 검을 날려버린다.
경고를 듣기 이전, 몸을 뒤덮는 검광에 깜짝 놀라 몸을 비튼 태마응은 간신히 목을 부지한 채 지면으로 내려서 떨어진 검을 빠르게 뽑아 들어 전면을 노려보았다.
연격(連擊)은 없었다.
백서향은 제자리에 서 지면을 향해 검을 내뻗은 채, 오연한 시선으로 두 각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든지 자신 있다는 건가…….’
속에서부터 엉킨 기혈을 간신히 진정시킨 태마응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러나온다. 상구청이라고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작 일격이었다.
심지어 틈을 노린 기습이었으며, 합공이었다.
한데 오히려 밀려 내상을 입은 것은 태마응 측이다.
다음 공격이 언제 이어지든, 길어야 삼십 합을 버티지 못하리라.
“두 분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닙니다.”
실의에 빠진 두 사람의 귓가로, 백서향의 목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오래전부터 북해빙궁의 원로로서 일해 오시며, 많은 것을 경험하셨겠죠. 한도 많으실 터입니다. 후대에 그 짐을 떠넘기기 싫으실 테지요.”
“…….”
“모르지 않습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정통(正統)을 무시하는 처사는 옳지 않습니다. 역천이라 불리는 반역행위로 지존에 올라선다 한들, 과연 지금의 북해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설득하고 있다.
암중(暗中), 오랜 시간 싸워온 세 사람이지만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같았다.
바로 북해의 미래.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많은 싸움을 했고, 서로를 욕보였으며, 때론 피눈물을 흘리며 쓴 물을 삼키기도 하였다. 하나 그렇다 하여도 그들 모두는 한 식구다.
‘북해에서 나고 자란…….’
백서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깐의 시간 동안도, 무수히 많은 피가 흐르고 있다.
서로의 눈에 광기와 적의를 담은 채 끝없이 혈세를 탐한다. 백서향의 눈에 자신,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혈족상잔을 하며 피눈물을 흘리는 형제들이나 다름이 없었다. 외인으로서 참가하여 식구 간의 싸움에 함께 피를 묻히는 황금세가의 인물들의 애(哀) 역시 가볍지만은 않다.
백서향 역시 이러한 풍경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아니, 북해에 속한 이라면 모두 이러한 모습을 원치 않을 터다. 막을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막아야 한다.
“승복하세요. 더 이상 형제자매들의 피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두 분이 항복하신다면 다른 제자들도 전의를 잃고 검을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빙궁의 가족들끼리 피를 볼 이유는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이 자리 내에서는, 가장 정점에 있는 자의 권고다. 주변을 돌아보면 눈에 띄는 활약을 하는 무인은 많았다. 외인인 황여진이 그러했으며, 천빙검단의 대주인 무해 역시 엄청난 무용을 뽐냈다.
모두 대공녀 파의 무인들이다.
‘이공녀께서는 대체…….’
상구청의 두 눈이 빠르게 흔들렸다.
대공녀 냉설하 역시 빠르게 움직이며 전황을 휘어잡고 있었다.
짧은 격돌.
그사이에만 해도 죽거나 피를 토한 수많은 무인들 대다수가 이공녀 파의 제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공녀 파의 최대전력이라 할 수 있는 천화향은 팔짱을 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남의 일인 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심하게 시선을 흘릴 뿐이다.
이대로 가다간 필패(必敗)다.
허무하게 무너질 바라면 차라리…….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게 나을지도…….’
백서향의 말대로 더 이상 피를 보는 일 자체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초에 처음부터 대전은 힘이 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자리에 나온 이유.
‘그들은 대체 언제 온단 말이오?’
상구청의 절박한 시선이 천화향에게로 향했다.
그와 동시였다.
영원히 잠겨 있을 것 같던 천화향의 팔짱이 풀렸다.
허리춤에서부터 풀려 나온 검은 화려하게 춤을 추며 종횡무진하고 있는 냉설하의 목줄을 노리고 날아든다.
“어딜……!”
촤르륵, 카앙-!
하나 냉설하 역시 화경의 초입에 든 고수.
날아드는 천화향의 연검(蓮劍)을 어렵지 않게 쳐내며 일갈을 내지른 냉설하가 천화향을 노려보았다. 기다란 연검을 지면까지 늘어트린 그녀는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서겠다는 건가?’
냉설하의 눈매가 자연스레 가늘어졌다.
일격은 막았지만 계속해서 싸운다면 자신의 필패(必敗)다.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변명 측에도 끼지 않았다.
그저 일격만으로 알 수 있었다.
‘아직 손이…….’
아무리 기습이었다지만, 공격을 막아낸 손이 아직까지 옅게 떨리고 있다. 이런 천화향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은 대공녀 파 전체를 통틀어서도 단 한 명뿐이었다.
‘서향…….’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본인의 손으로 직접 천화향의 검을 꺾기에는 무리가 많았으니 말이다.
“무슨……!?”
그리 생각하며 시선을 돌린 순간에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였던 것인가? 혼자서 두 각주를 압도하고 있던 백서향의 바로 앞, 북해의 무인들과는 전혀 다른 기질을 보이는 두 무인이 대치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중심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냉설하 본인조차도, 직접 목격하기 전까지 두 사람의 등장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저들은 북해의 무인이 아니야.’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순백의 대지와는 전혀 반대되는, 눈에 띄는 흑의 무복.
북해의 내공이라 보기 힘든 끈적한 공력.
거기에 이어 두 눈에 담긴 살심까지.
굳이 상대가 누구인지는 더 따질 필요도 없었다.
‘마인…….’
천화향이 부른 것이다.
혼란의 한가운데, 모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전장의 중심에 북해에 있어선 안 될 진정한 외적(外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도록 하죠.”
그 말도 안 되는 사실에.
분노에 빠져 몸을 떠는 냉설하의 귓가로 차가운 천화향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앙-!
검이 날아드는 기척에 몸이 절로 반응하며 방어에 나선다.
“크읏…….”
하나 이번에는 이전보다 상태가 더욱 안 좋았다.
손바닥 안쪽이 찢어지며 핏물이 검의 손잡이에 베여 버린다. 두 번이나 기습을 허용한 대가였다.
“방심하면 단숨에 목이 달아날지도 몰라요.”
천화향은 냉정했다.
싸움의 끝.
그녀는 냉설하를 상대로 조금도 여유를 둘 생각이 없었다.
‘우선…… 버텨야 하는가.’
냉설하의 입장에서는 단 하나의 선택지밖에 없었다.
버텨야 한다.
‘서향이 저 마인들을 쓰러트리고 올 때까지만……!’
싸움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제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