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章)
흑천맹의 꼬리가 완전히 밝혀질 때까지, 밀궁에 은거한 채 유유자적 생활을 즐기려던 마현이 몸을 일으켰다. 소수린을 닮은 백서향의 얼굴, 그녀의 두 눈에 담긴 절박함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게끔 한 것이다.
‘게다가…….’
아닌 척하지만, 백서향의 시선은 방 밖으로 나온 이후 계속해서 밀궁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다.
소수린을 찾고 있는 것이다.
‘역시 무언가 사연이 있음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절박함도 그렇고, 소수린을 찾을 때 느껴지던 두 눈의 모정(母情)까지.
백서향에게도 나름의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무료로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으니.’
그 속내를 능히 짐작한 마현은, 완연한 중독 증상을 보이는 대공녀가 누운 침상 앞에 서 입가로 미소를 지었다.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 간결한 대답에,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던 백서향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하나……!”
“하나……?”
곧 이어진 뒷말에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을 드러내며 빠르게 되묻는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꼈지만 냉정 속에 감춰진 열정을 가진 여인이다. 가만히 보자면, 소수린 역시 백서향의 이러한 점조차 닮아 있는 듯했다.
“저 역시 각주님께 조건이 하나 아니,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천빙각주의 이름을 걸고 무엇이든 들어 드리겠습니다.”
백서향이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대공녀만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랴?
설령 마현이 천금(千金)을 달라고 한들 문제없었다.
빙궁의 미녀를 안고자 하여도 괜찮았다.
백서향은 자신 있었다.
사내가 원하는 바야 불 보듯 뻔했으니 말이다.
“기회가 될 때,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있든 수린이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설령 그것이 변명밖에 되지 못할지라도 좋습니다. 저는 제 제자가,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부탁이다.
덕분에 백서향은 할 말을 잃은 채, 묵묵히 마현의 얼굴만을 바라보아야 했다. 마현은 그러한 백서향의 대답을 굳이 기다리지 않았다.
곧바로 손을 들어, 백결의 기운을 뽑아내어 대공녀의 몸 내부로 흘려보냈을 뿐이다. 동시에 곧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던 대공녀의 안색이 차차 제 색을 찾기 시작했다. 죽어가던 피부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으며, 보랏빛으로 떠올랐던 입술은 붉은 꽃잎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아름답게 변한다.
‘이럴 수가…….’
그 놀라운 광경에, 황여진의 턱이 떡 하니 벌어졌다.
‘상상은 했지만…….’
처음 마현을 보았을 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단순한 손짓과 자세, 눈빛만으로 상대를 알아볼 수 있다고 자부하는 황여진으로서도 그 무엇도 알아낼 수가 없던 사람이다. 혹여 감정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마저 했을 정도였다.
약 보름간의 관찰 끝에.
그때야 황여진이 보게 된 것은 마현의 일부였다.
그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듯 기겁하고 말았다.
마치 안갯속에 웅크린 거대한 용.
그야말로 와룡(臥龍)이라는 별호가 조금도 아깝지 않은 인물이 눈앞의 마현이었다.
함께 북해로 들어온 이후, 빙마벽에서 있었던 사건을 들은 이후로는 얼마나 큰 전율이 흘렀던가?
‘내가 잘못 보지 않았어.’
와룡서원의 제자들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잠룡(潛龍)이라 불린다더니, 그 말이 옳았다. 사자는 사자의 새끼를 낳고 범의 자식은 범이 된다.
하면 용의 자식은 어떻겠는가?
하다못해 이무기.
흡수를 잘해낸다면 하늘을 누비는 천룡(天龍)이 될 터다. 그러한 천룡마저도 길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가 마현이다. 그가 마음먹고 강호의 전면에 나선다면, 천하 제일인도 꿈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그조차도 과소평가였다.
부르르.
어느덧, 완벽히 제 모습을 찾은 대공녀의 모습을 보며 황여진의 몸이 더욱 격렬하게 떨렸다.
‘천하(天下)를 논하는 것조차 가볍구나.’
눈앞의 사내에게 있어 천하란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부처님이 태어나던 순간 외쳤다는 탄생게(誕生偈)를 입에 담는다 한들 그 누가 부정할 수 있으랴?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현재 정의맹 내에서는 최근 눈에 띄는 활동을 보이는 와룡서원을 향해 두 가지 공론이 오가는 중이었다. 첫째는 강호의 신흥 세력으로 인정해주며 품에 안자는 것. 둘째는 그깟 서원이 무엇이 문제냐며 무시하자는 의견이다. 만약, 눈에 밟힐 경우에는 언제든 싹을 잘라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둘 다 틀렸다.’
황여진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와룡서원은 그대로 두어야만 한다.
그 어떠한 강요도 옳지 않다. 그저 장강의 물이 흐르는 길을 따라 그 뒤를 쫓듯, 지켜보아야만 한다.
‘만약 그가 몸을 일으켜 천하에 발을 딛는다면…….’
태풍우가 몰아치고, 지진이 일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대기가 비명을 토할 터다.
무서운 심계와, 대단한 책략도 의미가 없다.
‘압도적이란 건…… 와룡을 향해 하는 말이던가.’
아무래도 마현이 살아있는 이상,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이 천하의 주인임을 자처할 수 없을 듯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세상을 뒤엎을 수 있는 존재가 대지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끝…… 난 건가요?”
그 사이,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 백서향이 마현을 향해 물었다.
“중독 상태가 오래되어, 바로 눈을 뜨지는 못할 것입니다. 길면 삼, 사일…… 짧다면 내일 당장에라도 쾌차하시겠지만 말이죠.”
“그렇…… 군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백서향의 두 눈에는 더 이상 어디에도 의심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눈앞에서 목격해버리고 말았다.
공력 하나 느껴지지 않는 마현의 손에서, 새하얀 기운이 넘실거리며 일어났다. 그것이 대공녀의 몸에 흡수되자 눈으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안색이 좋아졌다.
부정할 도리가 없다.
숨결마저 가지런해진 대공녀는 분명 완벽히 회복되고 있다.
마현의 말대로 근시일 내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폐월수화(閉月羞花)의 미모와 빙궁의 차기 후계자다운 위엄을 떨칠 수 있으리라.
‘다행이다.’
그야말로 악몽과 같은 나날이었다.
눈 붙이는 것조차 할 수 없어, 묵묵히 속만 태웠었다.
한데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편으로는 허망하기도 했다.
그토록 속을 썩이던 일이, 이리도 간단하게 해결될 줄이야.
‘어찌 됐으니 잘된 일 아닌가.’
그리 생각하고 나서야, 백서향은 입가로 웃음을 그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마현이 없었다면 이대로 모든 게 끝나고, 무너질 수도 있던 노릇이니 말이다.
“뭘요, 서로 부탁이 오고 간 일인데…….”
마현의 능청스러운 말에는, 다시금 백서향의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지독한 독에 당했군요.”
하나 이어진 말에 백서향과 황여진,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번뜩였다.
“혹여 독의 종류에 대해 알 수 있겠습니까?”
황여진 역시, 만약을 대비해 독에 대해서는 꽤나 공부를 해둔 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녀를 중독시킨 독의 종류는 알 수가 없었다.
“짐(酖)의 독입니다.”
“짐?”
마현의 말에, 백서향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처음 들어보시는 이름이겠지요. 저도 설마하니 이 먼 북해에서 짐독(酖毒)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
반면 황여진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무당산에만 살아간다는 독조(毒鳥)……. 단순한 전설이 아니었던 겁니까?”
황여진의 말대로였다.
짐은 독조이며, 그 깃털은 무엇으로도 해독할 수 없는 지독한 맹독을 품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또한, 이제는 존재치 않는 전설상의 맹금이기도 했다.
“희귀하긴 하지만 아직도 중원에 남아 있는 짐이 몇 마리 있기는 합니다.”
마현은 짧게 말을 자른 후, 나오려던 뒷말을 삼켰다.
‘문제는…… 그 누가 있어 짐을 잡았냐는 것이지.’
짐은 전설 속에서나 화자(話者) 될 정도의 영물이다.
그 몸뚱이가 수리보다 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나는 그 어떤 새보다도 날렵하며, 온몸에 솟은 수천, 수만 개의 깃에는 닿기만 해도 사람 하나쯤 간단히 녹여 버릴 수 있는 극독을 품고 있다.
어지간한 초고수가 아니고서야 얼씬도 할 수 없는 새가 바로 짐일진대…….
‘역시 백천악이 살아있는 것인가?’
마현은 이 일이 단순한 빙궁 내의 음모라고 생각지 않았다. 강호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진 세외에 사는 이들이, 중원의 깊숙이까지 진입해 짐을 잡아 독을 뽑아 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으니 말이다.
“한데 어찌하여 무당산에서나 볼 수 있다는 짐의 독이 이곳에…….”
백서향의 눈초리가, 자연스레 황여진을 향했다.
짐의 독을 구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협력자가 있어야만 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탓이리라.
“절대로 아닙니다.”
황여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자, 백서향은 보내던 의심의 눈초리를 곧바로 거두었다. 애초에 황여진 역시 짐이 존재했던 것조차 모르는 태도를 보였다.
‘설령 그것이 거짓이라 하여도…….’
정말 이공녀 측의 협력자가 황여진이라면, 이미 대공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야만 했다.
마현을 소개받는 일 따위는 상상도 못 했으리라.
‘결국 그 두 능구렁이의 짓이란 말인데…….’
설마하니 자신의 눈을 벗어난 외부의 협력자가 존재했단 말인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수많은 상념과 의문, 그리고 가정이 스쳐 지나간 후의 답은 간단했다.
‘설령 그렇다 한들…….’
해독에 성공하였으며, 독의 정체를 알게 된 이상 주도권은 이제 그들의 것이었다.
‘증거만 잡으면…….’
앞으로 대공녀가 깨어나기까지 길면 삼일.
마지막 생각을 정리한 백서향은 얼굴을 굳힌 채, 곧바로 방문을 열어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부터 대공녀가 계신 방에 그 누구의 접근도 불허하라!”
“옛!”
대공녀의 방문 앞을 지키던 천빙검단의 무인들이 고개를 크게 숙여 답한다.
“조만간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안내는 무해가 담당하도록.”
“네.”
직후 곧바로 마현과 황여진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백서향이 무해에게 명을 내린 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 길고도 지겨웠던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다가왔다. 검 손잡이를 쓰다듬는 백서향의 두 눈에는 결전의 결의가 가득 차올랐다.
* * *
작은 방이었다.
침상과 책장, 촛농을 놓아두고 세 사람이 마주 앉으니 꽉 차 보일 정도의 아주 작은 방 말이다.
책상 앞에 앉아, 섬섬옥수(纖纖玉手)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고운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여인은 말이 없었다. 딱히 시선을 옮기지도 않았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 빨려들 것 같은 검은 눈동자는 일각이 지나고, 반 시진이 지나도록 여전히 책을 훑을 뿐이었다.
그런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
“커흠.”
자리를 잡고 앉은 채 마냥 기다리기만 하던 오른 측의 노인, 빙왕각주 태마응이 작은 헛기침을 흘렸다. 그제야 책장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춘 여인이 시선을 들어 올린다.
“허…….”
그 무엇이든 빨아들일 것 같은 검은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흘릴 뻔한 것을 간신히 삼킨 태마응이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언제나 느끼지만 이공녀의 눈은 마치 심연(深淵)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이 빙궁뿐만이 아니라 중원, 더 넓게는 천하라도 집어삼킬 것 같은 거대한 구멍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애초부터 두 노인이 정통 후계자인 대공녀 대신 그녀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공녀라면…….’
흑천맹을 등에 업은 심연을 가진 여인이라면, 이 추운 북해에서만 갇혀 있어야만 하는 그들의 설움을 풀어주지 않겠는가? 두 노인은 오랜 삶 끝에, 지쳐있었다. 자신들에 이어 후대, 뒤를 이어 먼 자손까지 이 추운 북해에서 근근이 삶을 연명해야 한다는 사실에 질려 있었다.
그렇기에 안정을 바라는 대공녀 대신, 이공녀를 택했다.
무엇이든 집어삼킬 듯한 눈을 가진 그녀라면 다 늙은 둘을 대신할 후대에, 훨씬 더 기름지고 비옥한 땅을 선물할 수 있을 테니까!
공포에 잠식돼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지금이라 하여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두 사람은 북해빙궁을 중원 강호의 중심에 우뚝 서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정통성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그를 방해하는 대공녀와 백서향을 증오했다.
‘진정한 빙궁의 주인이라면 모두를 위해야 함이 아닌가.’
안정은 일시적인 평화를 부르지만 끝내 이 추위를 견디지 못해, 혹은 얼어붙은 땅에 부족한 식량 탓에 죽어가는 어린 소년 소녀들의 고혈(膏血)을 지독히도 빨아갈 터다.
빙궁이라는 이름의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업보(業報).
두 노인은 언제까지나 그러한 업보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저 북해에서 태어난 것이 죄라면…….’
죄인으로 태어난 만큼 그 어떤 악독한 짓도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다. 설령 그것이 마귀와 손을 잡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그들이 흑천맹이라는 괴이한 집단과 손을 잡은 데에는 이러한 속내가 담겨 있었다.
“…….”
“…….”
이공녀의 시선이 움직였지만, 여전히 작은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기껏 헛기침까지 한 태마응의 입장에서야 속이 불편한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애초에 이 자리로 두 사람을 호출한 이가 이공녀다.
한데 정작 사람을 초대한 사람이 말이 없으니, 두 사람의 입장에서야 난감한 일이었다. 딱히 할 말도 없고, 눈치는 보이고. 방의 무거운 분위기는 어깨를 짓누르고.
‘이거 참…….’
그야말로 곤란할 따름이다.
두 노인의 심경이 더욱 복잡하게 얽혀 들어갈 때쯤.
닫혀 있던 이공녀의 붉은 입술이 아주 느릿하게 달싹였다.
“대공녀의 방에 외인이 들었다 들었습니다.”
“…….”
서로 상반되게 앉아 있던 두 노인의 시선이 빠르게 오갔다. 아직 두 사람에게는 전달되지 않은 정보였기 때문이다. 하나 그리 놀라운 일만도 아니다. 흑천맹이라는 괴이한 집단의 지원을 받는 이공녀의 능력은 그야말로 무서울 정도다. 눈과 귀는 빙궁 내, 아니 바깥에도 존재하며 가끔은 외부의 힘을 끌어 궁을 흔들기도 한다.
지금 대공녀를 중독시킨 짐의 독만 하여도 그러했다.
‘대체 어디서 그런 독을 구해오시는 건지…….’
도움을 청하러 찾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짐의 깃털이 담긴 상자를 내민 이공녀다.
두 사람은 그를 이용해 음모를 짰고, 훌륭하게 대공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후 감정 하나 보이지 않던 이공녀의 표정에 처음으로 웃음이 감도는 것을 본 게, 고작 며칠 전이다.
한데 오늘은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외인…… 의 꼬리를 잡았다면 그를 빌미로 명분을 세우심은…….”
그 무거운 분위기 속, 상구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천빙무후, 백서향이 외인을 숨겨 두고 있다는 사실쯤이야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한데 그러한 외인이 본궁 내로 드나들며 대공녀의 방에까지 들어섰다니! 그만한 꼬리를 잡았다면 대공녀까지 중독된 이 마당에, 그야말로 벼랑 아래로 밀어버릴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흔적을 놓쳤습니다. 천빙각의 밀궁으로 들어서는 것까지 목격하였다 하여 추적자를 보냈지만…….”
이공녀의 양미간이, 보기 드물게 크게 찌푸려진다.
“……?”
“……실패했습니다.”
자연스레 상구청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공녀가 말하는 추적자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개인 세력. 쉽게 말해 흑천맹의 인물들이다. 여태껏 그들이 움직여 실패한 사건은 몇 없다. 기껏해야 천빙무후의 암살 실패 정도? 여인의 몸이라 보기엔 워낙 괴물 같은 무력을 가진 백서향이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혼자서도 두 각주를 모두 상대하고도 남을 정도의 경지를 이룩한 화경의 고수였으니 말이다.
한데 직접 백서향을 노린 것도 아니고, 밀궁을 조사하려다 모두 당해?
이런 일은 분명 처음이었다.
‘내부에 무엇이 있는 건 분명하군.’
하나 정확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움직이는 건 여전히 위험하다.
이제야 이공녀의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외인이 다녀간 이후, 천빙무후가 대공녀의 방에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였답니다. 어쩌면…….”
이공녀가 흘린 짧은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설마…….’
‘해독되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의 경우는 언제든지 생각해두어야 한다. 또한 그 만약의 경우에 최악의 가정을 더해…….
“독의 종류까지…… 알아낸 겁니까?”
상구청의 떨리는 음성에, 이공녀의 고개가 가볍게 끄덕여진다.
“어쩌면.”
동시에 두 노인의 눈이 빠르게 서로를 오갔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아차!’
전설상의 영물이라 불리는 짐의 깃털은 귀물(貴物)이다. 그렇기에 독기를 뽑아낸 후 평범해진 깃을 보관하기로 결심하였는데…….
“설마 두 분…… 짐의 깃털을 가지고 계셨던 겁니까?”
그 모습에 쌍심지를 돋은 이공녀가 차갑게 묻는다.
“지금 즉시 처분하도록 하겠습니다.”
놀란 표정의 상구청이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나며 답했다.
정말 상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난 덕에, 크게 당황한 것이다.
“이미 늦었을 테죠.”
“아직…….”
이공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천빙무후는 영리한 여자입니다. 두 각주께서 귀물을 보관했다면, 이미 알고 있었겠죠. 그러한 상태에서 기회가 왔다면 놓칠 리 없고……, 마침 저 역시 그녀를 도운 꼴이 되어버렸군요.”
“이럴…… 수가…….”
이공녀의 입가로 씁쓸한 웃음이 깃들었다.
‘야욕을 가지고 있는 힘껏 움직였거늘…….’
설마하니 믿고 있던 두 각주가 이런 큰 실수를 할 줄이야.
‘미리 경고했어야 하나.’
지금에 와서 후회한다 한들, 이미 지나간 일.
그녀는 한 가지, 안타까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렇게 돼버렸군요. 두 분, 도와주실 거죠?”
이공녀, 천화향(泉華響)의 질문에 상구청과 태마응 두 각주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이었다.
“당연한 말.”
“크흐흐…… 오히려 기다리던 때인걸?”
작은 방 안, 그 누구도 들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공간에 어둠을 감싼 두 개의 인기척이 더 들어섰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상구청과 태마응이 느낀 감정은 동일했다.
‘우린 정녕…….’
지옥의 마귀와 손잡은 것이란 말인가?
* * *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와 같은 긴장감이 흐르던 빙궁의 분위기 속.
먼저 검을 뽑아 든 이는 천빙무후, 백서향이었다.
그녀는 외인이라 불릴 수 있는 정의맹, 황금세가의 인물들을 앞세워 핍박하여 자신을 암살하려 하였던 사실. 또한 그것이 실패하자 지독한 극독을 이용해 대공녀를 암살하려던 진실까지 모두 밝히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빙퇴각주 상구청의 집무실에서 발견된 물건, 짐의 깃털은 빼도 박도 못할 완벽한 증거품이었다.
당연하다시피, 이공녀 천화향을 위시한 상구청과 태마응은 그러한 진실을 부인했다.
하나 소문을 옭아매는 솜씨는 백서향이 한 수 위. 수많은 바깥 활동을 통해 쌓아온 신뢰도 높은 그녀의 위신 역시 한몫을 거들었다.
정통성과, 빙궁의 신의를 한 몸에 업었다.
거기에 더해 명확한 물증마저 잡았다.
얼마 전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는 대공녀는 더 이상 빙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인(惡人)들을 두고 볼 수 없다며 반역자의 처단을 선포했다.
대전(對戰)이 시작되었다.
북해가 격동하는 순간이었다.
제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