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그야말로 소란스러운 하루가 지나간 후.
빙궁 내의 분위기는 더욱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특히 사로잡았던 물고기마저 모두 놓치게 된 상구청과 태마응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정말 단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황여진이 자신들의 협상을 거절하고, 사로잡아 이용하는 길을 택했다. 일은 쉽게 진행되는 듯했으나, 서원의 제자들과 선생을 잡으러 나섰던 수하들이 모두 당했다. 깜짝 놀라 정예 병력을 이끌고 그들을 찾으러 나선 사이, 오히려 내각이 털려 포로 모두가 풀려나 달아났다.
이후 추격대를 풀었으나 그 종적을 끝내 쫓지 못했다.
“다시 중원으로 돌아갔을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네.”
“불가능한 일이지.”
한참, 서로를 바라본 채 고민에만 빠져 있던 두 각주의 의견은 일치했다.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지녔다 한들.
그 수많은 사람을 데리고 북해를 소리 소문도 없이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그들은 아직 중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또한.
“내부에 협력자가 있어.”
“누군지는 알아볼 필요도 없겠지.”
으득.
이를 간 상구청이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포로들이 탈출한 밤, 천빙각에 머물러 있던 천빙무후와 천빙검단이 바깥으로 나섰다. 대외적인 명분은 사냥이었으나, 실제로까지 그러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천빙각과 대공녀, 그리고 정의맹이 손을 잡았다.
멍청하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제대로 한 방 먹은 것이다.
‘그 애송이 녀석…….’
황여진.
자신을 황금세가의 대공자라 소개한 얼굴을 떠올린 태마응 역시 묵묵히 이를 갈았다.
확실히 우습게 봤다.
놈이 설마 천빙각에까지 줄을 대고 움직이고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진짜로 예상치 못한 일을 뽑자면 일개 서원의 제자들과 선생을 사로잡지 못해 그 수많은 빙궁의 무인들이 당했다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그야말로 정신이 없군!”
절로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런 태마응의 눈치를 살피던 상구청이,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한데 빙왕무위대 사건 말일세.”
자연스레, 태마응의 얼굴이 굳어졌다.
빙왕무위대는 그 나름대로 아끼던 빙왕각의 무력 집단이었다. 특히 대주 여봉위 같은 경우는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갖춘 데다, 입도 묵직하여 크게 아끼던 수하였다.
그러한 빙왕무위대 모두를 한꺼번에 잃었다.
몇 번을 이야기해도 속이 쓰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여 대주의 시신 외에는 모두 자결하였다고 들었네만…….”
“……사실일세.”
믿기지 않지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거짓이 아니었다.
빙왕무위대가 모두 당했단 소식에 얼마나 놀라 뛰쳐나갔던가. 그곳에서 본 풍경에 또 어찌나 경악했던가.
잊을 수 없다.
스스로 심장과 목에 자신의 검을 꽂은 채 새하얀 대지를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던 수하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어쩌면 이 일, 우리의 능력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를 넘어섰는지도 모르겠어.”
상구청의 말에, 태마응의 고개가 묵직이 끄덕여졌다.
고작 하루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또한 대다수의 일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사건들뿐이었다.
외인들이 들어선 이후부터다.
그들이 이용하기 위해 불러들인 인물들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흩트려 놓고 있었다.
“맹…… 에 도움을 요청해야겠군.”
어렵게, 또한 무겁게 열린 상구청의 말에 태마응의 몸이 크게 떨렸다.
맹은 그들을 진심으로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아주 무서운 집단이었다. 욕심에 의해 가입하였으나, 이제는 공포에 잠식돼 벗어날 수 없다. 실제로 그들이 타고 있는 폭주마차를 몰고 있는 이들이 바로 흑천맹 아니던가?
“이공녀를 뵐 셈인가?”
“다른 수가 없지 않나?”
“어쩌면…… 결단이 내려질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말일세.”
무거운 음성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누구 하나 먼저랄 것 없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심한 이상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고작 하루 사이에도 그 많은 일이 일어났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 * *
천빙각 밀실.
서로를 마주하고 앉은 두 남녀는 각자 현재, 북해빙궁과 정의맹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천빙무후와 황금세가 대공자, 금룡.
백서향과 황여진.
소란스러웠던 밤이 지난 후, 회담을 가진 두 사람의 의견은 분명히 일치했다. 대공녀를 빙궁주의 위(位)에 올려놓은 후, 서로 간에 우애를 더욱 돈독히 다지며 문호(門戶)를 개방한다.
세세한 내용은 우선 대공녀를 빙궁주의 자리에 올려놓은 뒤다.
문제는 딱히 이렇다 할 명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저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백서향의 냉정한 말에, 황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증거도, 정황도 없다.
황금세가의 식솔들 모두가 증인이 될 수는 있지만 빙궁의 특성상 외인의 말이 큰 명분이 되기란 힘들었다. 상대를 공격하더라도, 정당성을 얻은 뒤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 전에 움직여 힘을 이용해 억지로 대공녀를 궁주 위에 올려놓는다 한들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대공녀가 정당성을 빌미로 움직이고 있는 세력이란 점이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결국 움직일 만한 명분이 필요하다.
천빙각 혼자일 때라면 모를까.
황금세가와 힘을 합친 상태라면 빙퇴각과 빙왕각의 연합도 충분히 깨부술 수 있다.
준비된 힘은 모자라지 않으나, 결국 대의(大義)라고도 말하는 그것이 필요한 상황.
백서향의 걱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반면 황여진은 여유로웠다.
웃는 표정으로, 가볍게 볼을 긁적일 뿐이다.
“때가 되면 다 기회가 오지 않겠습니까.”
“……그게 언제가 될지가 문제겠죠.”
“음…….”
황여진이 짧은 신음을 흘린 후,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사실 바랐던 가장 최상의 상황이 있기는 한데, 적들의 운이 너무 좋은 바람에…… 하하.”
“……?”
“아니, 뭐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냥…… 마음만 먹으면 이런 고민 정도야 우습게 해결해 버릴 사람이 떠올라서요. 하하.”
“……없던 명분도 만들어 낼 정도의 책략가인 겁니까?”
“그런 성향은 아닙니다만……. 명분처럼 중요한 일조차 의미 없게 만들 정도로 무지막지한 인물이죠. 아, 부탁할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닙니다만…….”
“어려운 사람인가 보군요.”
“어렵죠, 아주 많이.”
황여진의 입가로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지나갔다.
“어찌 됐든 한동안은 마땅한 수가 없을 듯하니 만남도 조금 자제하도록 하죠. 서로 좋은 수가 생기면 따로 연락을 하고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백서향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설령 그런 인물이 있다고 한들, 직접 나서주지 않는다면 큰 의미가 없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사람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난감한 상황을 그리 쉽게 타개할 인물이라니…….
‘생각 외로 과장이 심한 성격인 건가.’
절로 그런 생각이 차올랐다.
“뭐, 그러도록 하죠.”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 황여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서로 만나 잡담이나 나눌 정도의 사이는 아니고, 이 정도가 딱 좋다. 잦은 만남은 주변의 이목을 끌고, 그러다 보면 천빙각 어딘가에 심겨 있을 세작들의 눈에 띄게 된다.
그 순간, 오히려 명분은 적측으로 넘어가게 된다.
어찌 됐든 빙궁의 무인들을 살해하고, 도주한 황금세가와 와룡서원 일행들이다.
그런 이들을 몰래 비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천빙각 입장에서도 곤란할 수밖에 없는 노릇인 것이다.
“참, 궁금한 게 있는데…….”
서로 자리를 파하고 일어나려던 차, 등을 돌린 백서향이 지나가는 말투로 말을 걸었다.
“말씀하세요.”
“……그 서원의 제자들 말이죠.”
“……?”
보이지 않게, 한숨을 짧게 내쉰 백서향이 굳은 결심이 선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여자아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둘이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한데 그건 왜……? 혹여 빙궁의 제자로 삼으실 생각인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목소리에 절로 난처함이 깃든다.
평소에 느껴지던 냉정함과는 거리가 먼 그 모습에, 황여진조차도 의문을 느낄 무렵.
“뭐, 뭐. 중요한 일은 아니니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죠.”
말을 더듬으며, 헛기침을 한 백서향이 빠른 걸음으로 밀실 바깥을 향했다.
‘둘이었어? 하나가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그것뿐.
아무래도 질문의 방향을 잘못 정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그렇게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넘쳐흐르는 며칠이 흐른 뒤였다. 사건은 정말, 예상외의 곳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대공녀께서…… 독에 당하셨다고?”
충격적인 소식에 천빙각으로 올라오는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백서향의 음성이 가파르게 떨렸다.
“예, 삼 년째 차를 내오던 시비가 하독했다고 하더군요.”
보고를 올리는 무해의 음성에는 난감함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자그마치 대공녀가 독살당할 위기다.
여태껏 천빙각이 해 온 모든 일이 단숨에 무너질 상황이라는 뜻이다.
“대체 대공녀를 호위하는 이들을 무얼 했단 말인가!”
불같이 화를 낸 백서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에 앉아 업무나 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다급한 걸음을 옮겨 대공녀가 머물고 있는 본궁(本宮)으로 향해야만 했다.
‘늙은 능구렁이들이 정녕……!’
흉수야 말할 것도 없을 터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다른 각을 맡고 있는 두 각주.
그리고 요사스러운 눈빛을 빛내는 이공녀다.
“사로잡은 시녀는 어떻게 됐지?”
“그게…… 고문 중에 자결했다고 합니다.”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던 백서향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양미간은 다시 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찌푸려진 상태였다.
“지금 농담하는 건가?”
“입안에 재갈도 물리고 혈도 모두 짚어 놓은 상태였다고 들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자결했는지는…….”
“해독(解毒), 해독은……?”
“우선 의원을 불러 시도 중이라고는 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심각한 상황이다.
백서향은 아찔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독의 종류는 밝혀졌나?”
“완전히 처음 보는 독이라고 합니다. 북해에서는 물론, 초원과 중원 지역까지 조사를 하라 일렀지만…….”
그야말로 갈수록 태산이다.
‘어떻게든 움직이리라고는 생각했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어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탈출한 황금세가의 식솔들이 천빙각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쯤은 두 각주도 충분히 짐작할 터였다. 하나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마음대로 움직이기도 모호한 상황. 하면 무언가 수를 써 이쪽 진영을 흔들려고 할 터다.
그렇기에 감시의 눈길을 예민하게 세우고 있던 중이었는데…….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초강수다.
어지간한 자신감이 없고서는 펼칠 수 없는 일을 벌였다.
이번 일이 잘못 빌미로 잡혔다가는 그야말로 모든 명분조차 넘겨주게 될 테니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를 간 백서향의 걸음이 점점 더 다급해져만 갔다.
* * *
대공녀가 중독된 지 삼 일째.
여전히 차도는 없었다. 북해에서 용하다는 의원들을 모두 불러 모아도 한결같이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칠 주야가 흘렀다.
대공녀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걷고 있었다. 새하얗지만 생기 있던 피부는 마치 죽은 사람의 그것과 같이 창백하게 변해갔으며, 두 입술은 보랏빛으로 떠올랐다.
보름이 흘렀다.
초원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명의(名醫)를 데려왔다.
천빙검단주 무해가 두 발로 뛰어가, 그야말로 업어서 모셔온 인물이었다. 그런 명의조차도 대공녀의 맥을 짚고는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가망이 없다.
백서향의 두 눈에 절망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흘러갔다.
이제 빙궁 내 전체에 대공녀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떠돌고 있었다. 막을 도리도 없고, 그럴 명분도 없었다. 대공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북해와, 초원의 두 명의 모두 앞으로 보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말하였다.
백서향은 멍하니 천빙각의 창문 밖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때쯤, 황여진이 백서향을 찾았다.
“소식이 늦어, 이제야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백서향도 바쁜 데다, 숨을 죽이고 사느라 바깥의 정보와는 거의 단절 되었다시피 숨어 있던 그는 굳이 자신의 갑갑한 심정을 토로하며 따지고 들지도 않았다.
단지 한마디만을 건넸을 뿐이었다.
“이 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작은 목소리에, 음울한 빛을 띠던 백서향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 * *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을 감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현이 천빙각에 남기로 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소수린과 백서향.
딸과 어머니, 모녀 사이를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붙여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나 천빙각에 머문다 한들 그들이 외부로 활동할 수 있는 틈은 거의 없었다. 일단은 감춰져야 하는 존재. 황여진과 백서향이 함께 펼치고 있는 정치적인 활동상 그들은 현재 북해에 있어선 안 될 사람들이었다.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는 참아야겠지.’
마현은 더 이상 굳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을 벌인 인물은 황여진이다.
생각보다 훨씬 머리가 잘 굴러가는 듯한 그라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이번 문제를 깔끔히 처리해 낼 터였다.
괜히 정의맹에서 젊은 그를 선두에 세워 북해에까지 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이미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던가?
천빙각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밀궁(謐宮)은 분명 불편한 점이 많았다. 공간은 넓지만 주변에 가득 찬 빙목(氷木)들로 인해 시야가 가려져 답답하다. 또한 여태껏 머무른 사람이 없어서인지, 오가는 사람이 존재치 않은 덕인지,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늘 주변을 맴돌았다.
게다가 혹시나 있을 주변 시선을 신경 써 조용히 살아가야 하니 더욱 분위기가 묘해지기 마련.
그러한 환경이지만 마현은 딱히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와룡서원의 제자들이라 하여 다를 것은 없었다.
오랜만에 야외 수업에 나온 기분으로, 새로운 풍경에서 조용히 글공부에 매진한다. 머리에 잡념이 들끓을 때면 조금 식힐 겸 무공을 연습해도 된다. 비록 여건상 요란스러운 무공을 갈고 닦을 수는 없지만, 얼마 전 마현에게 전수받은 암왕잠형술과 같은 은신술을 갈고 닦기에는 나쁘지 않은 아니, 아주 좋은 환경이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변할 것은 없지만 마현이나, 제자들이나 서로에게 충분히 알찬 시간이라 할 수 있는 기간.
그 끝에 황여진이 마현을 찾았다.
같은 밀궁에 있다고는 하나 서로 간의 거리가 꽤나 떨어진 데다 사정이 달라 낯을 볼일이 적은 터라, 꽤나 오랜만의 방문이라 볼 수 있는 셈이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천빙각주, 백서향이라고 합니다.”
정중히 포권을 하는 차가운 얼굴의 여인.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가로 미소를 그린 마현 역시 마주하여 포권을 취한다.
‘수린이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나.’
천빙각 내에 숨어들어 거리를 두고 지켜볼 때보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면하니 더욱 확실히 느껴진다. 소수린의 신장이 조금 더 크고, 얼굴에 세월에 배길 때쯤이 된다면 더욱 그녀를 닮으리라.
그리 생각하니 입가에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거지?’
백서향은 마현의 표정이 딱히 마음에 들지만은 않았다.
하나 도움을 요청해야 할 상황에서 그러한 감정을 내색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애초부터로 따지자면, 극히 일부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편에 속하지만 말이다.
“마현입니다.”
“와룡서원의 대사부(大師父)이기도 하시지요.”
“……와룡서원?”
마현의 인사와 덧붙여진 황여진의 소개에,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음성을 흘린 백서향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마현이 기거하는 좁은 방 안에는 서책 몇 권과 붓, 그리고 벼루가 한구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채였다.
‘의원이 아니라…… 학사였던 건가.’
그것도 평범한 학사가 아니다.
자그마치 와룡서원, 그러니까 소수린의 스승인 셈이다.
마현을 바라보는 백서향의 시선이 자연스레 가늘어진다.
“이 분이 제가 말한 분입니다.”
황여진의 번복된 소개에, 두 눈이 더욱 게슴츠레하게 좁혀든다.
‘이 사람이…….’
현재 독에 중독되어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대공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솔직히 말해, 마현은 백서향의 눈에 제법 사내답게 생긴 외모치고는 그리 볼 것이 없어 보이는 존재였다. 공력이 심후해 보이는 편도, 눈빛이 황여진과 같이 총명하여 깜짝 놀랄 정도도 아니다.
그럼 무언가 다른 특출한 면모가 있나?
라고 묻는다면 또한 보이지 않는다.
방 안 아니, 몸 전체에서부터 먹물 향이 물씬 풍기는 전형적인 학사라는 인상이었다.
‘점잖은 표정부터 말이지.’
개인적으로 따져, 단순히 소수린의 글공부 스승으로선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한데 이런 인물이 무공도 가르치고, 별 잡기(雜技)도 일러준다 한다.
믿음이 안 간다.
‘이런 사람한테…….’
당장 위급한 대공녀마저 맡겨도 될까?
생각을 할수록 의심이 깊어져만 간다.
“혹시 독공(毒功)을 익힌 적이 있으십니까?”
하여 질문을 던졌다.
비록 몸 어디에도 독인(毒人)으로 보이는 흔적이 보이지 않으나,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이다. 의외로 먹물 향 속에 지독한 독을 감추어 두었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음…… 짧은 시간 내에 배운 잡기일 뿐이지요.”
마현은 턱을 쓰다듬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자연스레 백서향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독공의 대가인가 했더니, 잡기 익히듯 배웠다고 한다.
정말 믿을 구석이 어디 하나 보이질 않는 셈이다.
“무명와룡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일이 있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여진의 행동은 처음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총명한 두 눈을 아래로 깔며, 마현을 향해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정말 알 수가 없구나.’
눈앞의 사내에게 무엇이 있어 이 젊은 천재(天才)를 이리도 공손하게 만든단 말인가?
백서향은 정말, 몇 번을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요청이라…….”
마현은 짧게 말을 흘리며 황여진을 바라보았다.
아주 머리가 좋은 인물이다.
웬만한 사건이라면 스스로 타개하려 하였을 터다. 실상 마현이 빙궁의 일도, 정의맹의 사연도, 심지어 세상사마저도 크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 역시 잘 알 터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 숙여 도움을 청한다.
‘이미 한 번 목숨을 구해준바.’
더 이상 황여진을 도울 의리는 없다.
정의맹의 일을 돕고자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거절을 하려던 차, 옆에서 계속해서 의심의 눈초리만을 보내던 백서향이 함께 입을 열며 고개를 숙인다.
솔직히 그녀는 아직까지도 마현의 능력을 신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불안하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이러하던가…….’
혹시나 만약.
아주 만약에.
눈앞의 마현이 정녕 황여진이 말한 그런 사람이라면.
그 지극히 적은 확률이 백서향에게 머리를 숙이게끔 했다.
당장 대공녀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그녀가 여태껏 지키려 했던 것들.
또한 그렇기에 포기해야만 했었던 모든 것들이 의미를 잃는다.
마현은 백서향의 뒷모습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더욱 없다.’
굳이 치자면, 백서향이 소수린의 어머니라는 점?
오로지 그 사실만이 마현과 백서향 간의 연결고리였다. 외로는 무엇도 없다. 의리도, 서로 간에 쌓아온 정도, 신뢰는 어디에도 존재치 않는다.
‘문제는 그 한 가지 연결고리가 작지 않다는 것인가.’
마현의 입가로 작은 웃음이 떠오른다.
두 눈은 소수린을 너무나 닮은 백서향의 얼굴을 직시한다.
이윽고…….
“한번 들어보도록 하죠.”
작은 목소리와 함께 고개가 끄덕여졌다.
제팔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