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귀환-43화 (44/83)

(第三章)

뛰쳐나오듯 천빙각을 나선 직후,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소수린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만큼이나 많은 생각도 오간다.

‘어째서…….’

왜 그랬을까?

잊는다, 지운다 생각했는데 어째서.

‘화를 냈지 분명.’

그야 어쩔 수 없었다.

첫 마주침부터, 그런 불쾌한 표정을 지어 버리니 어떻게 참으란 말인가?

‘하나 그래도…….’

별 의미 없이 넘길 수도 있었다.

어차피 진심으로 남이라고 생각한다면 별일도 아니다.

타인이 보내는 불쾌함 따위, 딱히 거리낄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한데 맞서 화를 내고 말았다. 쏟아 내다보니 감정이 격동되어 할 말 못 할 말까지 다 해버렸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또 다른 상념이 차오른다.

‘할 말 못 할 말이 어디 있어?’

어차피 남인데.

생각의 변화가 시시각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결론은 없었다.

그저 가슴 한편이 답답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나.’

아이들과 어울려 놀며, 혼자 걸으며 짐을 다 떨쳐낼 수 있다고 믿었다. 언젠가 마주 보고 말을 섞어도 아무렇지 않겠지 라고도 믿었었다.

착각이었다.

너무 오만했다.

말 몇 마디 나눈 거로, 애써 덜어낸 짐이 다시 쌓인다.

‘내가 어리기 때문일까…….’

조금 더 감정 조절에 능숙한 어른이었다면.

‘……다르지, 않으려나?’

변한 것 하나 없는, 백서향의 모습을 떠올린 소수린의 입가로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알고 있다. 세상이 그렇다. 어른이라 하여 모두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똑같은 한 명의 사람일 뿐이니까.

하나 그래도.

만약 누군가에게, ‘어른’이란 단어를 붙이라고 한다면 분명 그리할 수는 있었다.

‘스승님…….’

마현의 얼굴이 떠오른다.

힘들고 지칠 때면, 언제든지 기댈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제는 정말 실체처럼…….’

혼자서 속으로 읊조리다, 깜짝 놀랄 정도의 존재감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눈앞에 있었다.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었다.

부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마현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어머니를 만났느냐?”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묻는 그 목소리에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터져 나오려 한다. 입술을 깨물고, 양손을 꽉 쥐어 참으려 해도 코가 너무 시큰하게 아려와 버티기 힘들 정도였나.

“네, 네…….”

대답을 한 이후로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왈칵 쏟아져 나왔다.

마치 폭포수가 내려오듯, 볼가로 뜨거운 감촉이 쉴새 없이 흐른다.

“만났…… 어요. 만났…… 는데…….”

왜 어째서 그렇게까지 변하지 않은 건지.

난 또 왜 어째서 그렇게밖에 말 못했는지…….

밉기도 하고 후회도 든다.

잊었다 생각했다.

천빙각에서 나올 때는 밉고, 원망스럽다 여겼다.

한데 후회가 남는다.

어째설까.

그렇게 울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양팔을 벌린 마현이 묵묵히 안아주었다.

“괜찮다. 마음 편히 울거라. 그 누구도 너를 보지 못할 터니, 혹여 본다 한들 너에게 손가락질하지 않을 테니까. 편히 울면 된다.”

어설픈 위로는 없었다.

또한 이해한다는 오만한 말도 없었다.

그저 울라고 하였다.

남이 보지 못하게 가려주며.

그 누구의 손가락질도 없으니 편히 울라 하였다.

“흐아앙…… 스승님!”

그래서 정말 펑펑 울었다.

넓은 품에 안겨 가슴속에 담긴 온 감정을 가리지 않고 쏟아냈다.

마현은 묵묵히, 추운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어리고 작은 제자를 감싸 그 등을 토닥여 줄 뿐이었다.

* * *

정말 땅이 무너지라 울었다.

마현의 넓은 가슴이 얼굴 전체에서 흘린 물기로 범벅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고 나서야 조금쯤 속이 편해졌다.

“죄, 죄송해요.”

곧바로 부끄러운 감정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펑펑 운 덕에 얼굴 꼴도 엉망, 마현의 옷 가슴팍 주변은 더욱 엉망으로 물들어 있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 소수린의 황급한 사과에 마현은 작은 웃음을 흘렸다.

“괜찮다.”

뭐 달리 할 말이 있으랴.

애초부터 마음이 많이 상했을 제자를 달래기 위해 나선 자리였다. 펑펑 울고, 마음껏 감정을 쏟아내 그 속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마현은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딱히 더 바라는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원망스럽더냐?”

대신해서 묻는 것은 그녀의 속마음이다.

더욱 편히 털어놓기를 바라는 마음일 터다.

그에 얼굴을 붉히고만 있던 소수린이, 망설이며 조금씩 입술을 달싹거렸다.

“네.”

밉다.

마음속 차오르는 분노는 거짓이 아닐 터다.

“그리하여, 잊을 수 있겠더냐?”

“……아니요.”

이번 대답은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잊을 수 있다. 믿었다.

자신했다. 그 모든 것이 오만이었단 사실쯤은 조금 전 충분히 느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지울 수는 없다. 마음속에 커다란 흉터로 남아 존재한다 하여도, 부모란 존재를 완벽히 지워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면, 어머니는 어떠한 것 같더냐?”

“……예?”

“너를 지울 수 있을 것 같냐는 말이다.”

“그야…….”

손쉽게 답하려다, 또다시 말문이 막힌다.

자식인 자신의 입장에서, 부모란 존재를 지워내는 게 이렇게 어렵다. 하면 반대되는 입장이라면? 소수린은 잠시 상념에 빠졌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 터다.

‘사랑하는 정인(情人)을 만나…….’

있으려나, 입가로 실소가 지나간다.

하나 어찌 됐든, 그러한 인물과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된다.

만약 그때의 소수린이라면.

‘나라면…….’

아무리 자식이 밉고 싫다 한들 지울 수 있을까?

잊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다.

가슴에 큰 흉으로 남아 평생 상처를 찢어놓는다 한들 지워낼 수 없다. 그 상처가 너무 아파 견딜 수 없다 하여도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

같다.

부모의 마음을 모두 이해한다고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자식이 낳아준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과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무거울 수도 있다.

잘은 모르지만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만나보니 어떻더냐?”

마현의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소수린은 또다시 생각에 빠져들어야 했다.

‘어떻더냐고 물으신다면…….’

끝에 남은 감정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변한 것 하나 없는 그 모습에 화가 났다.

중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소식조차 전혀 모른단 사실에 이를 갈았다. 하나 그 조금 더 앞으로 가면…….

‘눈살을 찌푸리셨지.’

보자마자 좋지 않은 표정을 짓는 어머니가 야속했다.

어찌하여 그런 눈빛을 보내는지 섭섭했다.

‘섭섭…… 했구나.’

하면 그 전은?

처음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는?

천빙각 내부로 들어가면서의 마음은?

들떴었다.

아닌 척, 냉정한 척하지만 분명 기대했었다.

어쩌면…….

혹시나…….

결국 그런 셈이다.

기대를 했고, 배신당했다.

그 사실에 섭섭하고 화가 나 감정을 폭발시켰다.

두 사람의 감정은 마치 불이 붙은 화약 줄처럼 가속도를 더해 서로의 가슴에 불꽃을 던졌다.

상황을 정리하고 나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 사람도…… 제가 보고 싶었을까요?”

보고 싶었다.

아닌 척하여도 분명 그러했다.

언젠가 한 번쯤은 꼭 만나보고 싶다며 떠올리곤 했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어머니도, 백서향도 그랬을 터다.

마현의 확신 가득한 대답에 소수린의 입가로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자신도 그렇고,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참 서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른 탓이었다.

“다시 한 번 만나볼 테냐?”

마현의 질문에, 소수린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요.”

“음……?”

“지금 당장 만나면, 또 할 말은 못하고 싸우고 불만 붙을 것 같거든요.”

“네 마음이 그러하다면야…….”

“며칠만 있어도 괜찮아질 거예요. 저도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듬는다면…….”

좋은 결심을 내린 소수린의 말에, 마현의 입가로 작은 웃음이 떠오른다.

‘많이 서툴렀지만…….’

결코 나쁘지 않은 만남이었다.

* * *

“미쳤지, 미쳤어.”

“맞아요, 미쳤죠.”

“도대체 정신이 있긴 한 걸까?”

“당연히 없죠.”

“……소비.”

“지금 좋은 말이 나오길 바라시는 거예요?”

천빙각 각주실 내부, 백서향의 혼잣말에 웃는 얼굴로 또박또박 답해준 소비가 되묻는다.

“후우…….”

결국 한숨을 내쉬는 쪽은 백서향이었다.

소비 말이 맞았다. 자신의 딸, 소수린과의 대면. 정말 꼴 보기 싫게 끝나 버렸지만, 당연하게도 그러려고 만든 자리가 아니었다.

기껏 불러와서 싸우고, 화를 내고, 서로를 미워하게만 됐다.

아니, 정확하게 따지자면 백서향은 소수린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

소수린은 어떨지 몰라도, 자신은 그래선 안 된다.

속에서 폭발하는 감정도 참지 못해 자식한테 막말을 한 주제에, 어디 고개를 들 자격이 있을까. 그냥 미안했다. 마냥 미안하고, 또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정말…… 애도 아니고.”

또다시 입가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러게 평소에 참고 살지 말라고 했잖아요. 매일 참고 있다 보니까 이런 데서 터지지.”

“소비……!”

“아가씨는 다 좋은 데 이게 문제야. 꼭 진심으로 말해야 될 때만 되면 화부터 내더라. 본인 말대로 애도 아니고. 어머니로서 딸자식 보고 그러면 안 되죠.”

“알고 있다고…….”

백서향은 묵묵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소수린과 싸운 후, 중원에 남겨 두었던 시비 연아의 사망 소식에 정신이 나갔었다. 덕분에 밖으로 빠져나가는 소수린을 잡지도 못했고 아니, 설령 정신이 똑바로 있었다 한들 그 자리에서는 붙잡지 않았을 터지만 말이다.

그렇게 연아가 죽었단 사실에 충격에 빠져 있던 것도 잠시.

하면 그 뒤 소수린이 어떻게 지냈을지 궁금해졌다.

자신을 대신해 딸아이를 돌봐주다 죽게 된 연아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어쩔 수 없는 부모 마음인 듯했다.

따로 돌봐주는 어른 하나 없는 상황.

어린 소수린은 대체 어떻게 살아왔을까?

어떤 끔찍한 꼴로, 얼마나 힘든 삶을 이겨냈을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말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몇 번이나 훔쳐낸 후에 든 생각은 역시나 후회였다.

미쳤다.

정말 몇 번을 생각해도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공녀께서 무사히 궁주 자리에 안착하면, 중원에 한 번 나가봐야겠어.”

“당연히 그러셔야겠죠.”

“가서 다시 수린이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 연아…… 무덤에도 찾아가 봐야겠지.”

자식 걱정에, 믿어지지 않는 충격적인 소식까지.

정말이지, 오늘 하루는 백서향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충격적인 일이 많이도 일어난 날이었다.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직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

“……주군, 큰일이 생겼습니다.”

밖에 서 있던 무해의 묵직하고 낮은 음성이 방 내부를 울렸다.

들려온 말은, 복잡하기만 한 하루의 종지부를 제대로 찍어낼 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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