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결과만 말해, 빙충은 그야말로 평범한 하수인이었다.
자신의 주인인 빙퇴각주가 외부세력인 흑천맹에 속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짐작조차 못 한, 하나 빙퇴각주가 처리하려는 빙궁 내의 일들은 대부분 도맡아 하던 이.
덕분에 마현이 원하던 정보는 건질 것조차 없었다.
‘전혀 수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현재 빙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쯤은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대립(對立)인가…….’
현 빙궁주의 건강이 악화되며, 차기 궁주 자리를 놓고 대공녀와 이공녀가 다투고 있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빙궁 내에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많은 암투들이 오가고 있는 채였다.
어느 쪽으로도 추가 크게 기울지 않은 모호한 상황.
‘그야말로 폭풍전야(暴風前夜)로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탄이라는 말도 틀리지 않을 터다.
이런 일촉즉발 속 상황에서도 마현이 선택할 수 있는 수는 꽤나 많았다.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흑천맹이 간섭하고 있단 것도, 빙궁이 소리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하면 나는…….’
마현은 생각을 조금 바꾸어 보았다.
사실 빙궁 내의 집안싸움 따위는 크게 관심 없었다.
아직까지는 마현 본인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고, 딱히 제자들이나 가족들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하나 흑천맹은 다르다.
마현은 말한 바 있듯, 한번 뽑은 칼은 끝까지 휘두르는 성격이었다. 중간에 멈추지는 않는다. 그야말로 집요하게 따라붙어 적의 목줄을 끊어놓는 것이야말로 실제 마현이 가진 가장 무서운 부분이었다.
‘내가 만약 흑천맹이라면…….’
백천악이 된다면?
혹은 그의 전인(全人)쯤 된다면?
생각한다.
계속해서 상념하여 머릿속 조각을 맞춘다.
‘우선 첫 번째…….’
흑천맹의 목표다.
어렵게 떠올릴 것도 없었다.
빙궁의 장악.
세력을 암중에 키워나가는 것을 즐기는 놈들이 세외에 속한 빙궁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큰 힘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하면 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현재로써 가장 간단한 방법이 곧바로 눈앞에 보였다.
‘빙궁주가 되려 하겠군.’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목적을 알자 모든 그림이 명확하게 맞춰진다.
‘대공녀 측에는 접근하지도 않았을 거야.’
이미 정통성이란 것을 무기로 갖춘 대공녀에게, 흑천맹이 내미는 조건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나 반대되는 이의 입장이라면?
‘지켜보아야 할 곳이 확실해졌군.’
소수린의 어머니를 찾으러 왔다가, 예상외의 꼬리를 잡게 되었다. 어이없는 상황이지만 이도 운명이라면 분명 운명일 터다.
그리 생각한 마현이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어?’
지나쳐가는 사람들 속, 관심 있게 보지 않으려 해도 그러지 못할 인물이 스쳐 지나간다.
‘수린이?’
처음 보는 사내의 뒤를 따르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쯤 불안정해 보였다.
‘설마……?’
마현의 머릿속으로 또 다른 가설이 빠르게 세워졌다.
몸은 어느새 중인(衆人)들 사이로 그림자처럼 녹아든 채였다.
* * *
백서향(白曙香).
세간에서 그녀를 부르는 명칭은 많았다.
하나, 최근 들어 가장 많이 불린 이름을 불리자면 딱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터였다.
괴물.
혹은 천빙무후.
천빙각주라는 직위보다, 백서향이라는 이름보다도 더욱 많이 언급되는 단어들이다.
‘아, 하나 더 있었나?’
피가 얼어붙은 냉혈(冷血)의 마녀라던가…….
입가로 실소가 흘러나온다.
‘냉혈, 냉혈이라니…….’
크게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평소였다면, 이런 말이 우습다고조차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나 오늘은 우습다.
별별 잡생각도 많이 든다.
그만큼 감상적이 되었다는 뜻이리라.
“괜찮으십니까?”
작은 방 안, 조용히 주전자를 들어 올려 찻잔을 채워주던 시녀 소비(小飛)가 물었다. 그녀는 시비이지만 백서향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충신이자, 믿을 수 있는 친우였다. 언젠가 중원으로 떠났다 북해로 돌아온 이후, 백서향이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있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괜찮다고 대답해야겠지.”
그런 소비의 앞이라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대답 역시 꽤나 감정적이게 흘러나온다.
“억지로 차가운 척하실 필요 없어요. 사실 속이 끓고 있죠? 북해의 바람조차 식힐 정도로 뜨거운 열탕…… 아니, 활화산이라고 해야 할까? 호호. 서향 아가씨를 본 지가 몇 년째인데 모를까요.”
“놀리지는 마.”
백서향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눈앞의 소비를 직시했다.
아름답다. 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하나 굉장히 귀여운 인상이었다. 두 눈은 크고 말똥말똥한데 살짝 처져 있으며, 웃음을 지을 때는 절로 초승달 형태의 눈웃음을 그린다. 코는 오뚝하고 높진 않지만 올망졸망하게 제 자리를 잡고 있다.
작은 얼굴에 어울리는 앙증맞은 입술은 또 어떠한가? 농담 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백서향 그녀가 사내였다면 이십오 년 전, 첫 만남 때 소비를 유혹했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매력 있는 여인이다.
물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소비를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단순히 오래된 친구라거나, 친근한 인상 탓이 아니다. 소비는 이 드넓은 북해에 있어 몇 안 되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였다.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떠한 사람인지 잊지 않게 해주는 존재.
그런 인물이 바로 소비였다.
“아아…… 벌써 그리워요. 서향 아가씨가 언젠가 말했었죠? 너는 정말 멋진 여자다. 라고. 풋, 무슨 사내가 고백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때가 십오 년 전이었던가?”
“……소비.”
“연인이 생긴 이후로는 분이 제대로 발리지 않았는지, 혹시 그가 너무 작은 가슴을 싫어하지는 않을지…….”
“소비……!”
백서향의 인생에 있어, 그만큼 가슴을 설레게 했던 여인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뻔히 말하다니. 조금은 심통이 나려던 차, 입가로 실실거리는 미소를 그린 소비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더 놀리면 북해를 녹일 만한 커다란 화산이 터질지도 모르니까 본론으로 넘어가서…… 시키신 대로 외인들에 대해 간단히 조사를 해보았어요. 아시겠지만 그들은 다른 이 각의 각주들이 서향 아가씨를 견제하기 위해 빙궁 내부로 들인 인물들이에요.”
“흥, 속에 능구렁이만 잔뜩 키우고 있는 영감탱이들.”
“호호…… 그래 봐야 구렁이 이상은 못 될 존재들이죠.”
“……그 외는?”
그쯤은 이미, 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다.
빙궁 전체에 그녀의 눈과 귀가 심겨 있었다.
조금이라도 변동이 있을 법한 사항이면 진즉에 이야기가 들어오는 게 당연했다. 지금 백서향이 궁금해하고 있는 이야기는 그런 뻔한 내용들이 아니었다.
“모두 중원 정의맹 소속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계속해봐.”
“정의맹 소속으로 온 이들은 중원 제일상단이자 천하 오대세가에 꼽히는 황금세가의 인물들뿐이에요. 그 외로도 대 여섯의 인원이 포함되어 들어왔는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왜 말을 쉬어. 어서 빨리 말해봐.”
소비가 놀린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재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입술을 살짝 내민 백서향의 질문에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깔깔 웃어 보인 소비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췄다.
“중원 광동성에 있는 와룡서원의 선생과 제자 일행이라던데요?”
“……광동성?”
가장 먼저 들린 말은 북해에서 정 반대 지역이라 말해도 될 법한 중원 남단의 지명이었다.
광동에서 북해까지.
그 거리는 말할 것도 없이 어마어마하다.
말을 타고 달린다 한들 몇 개월은 족히 걸릴 거리.
‘너는 그러한 먼 길을…….’
머릿속으로, 낮에 잠시 우연처럼 스쳐 지나갔던 한 여아(女兒)의 얼굴이 지나갔다.
‘아니, 이제는 아이라고 할 수도 없으려나…….’
많이 예뻐졌다.
생각했던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성숙한 여인이 되어 나타났더라.
낮의 만남을 생각하자 다시금 몸이 떨려왔다.
꽉 쥔 두 주먹에는 감출 수 없는 땀이 배어 나왔다.
얼마나 놀랐던가?
진짜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감정이 얼마 만이던가!
우연히 스쳐 지나가듯 본 얼굴에 믿기지 않아 걸음을 멈췄고, 관심 없는 듯 눈빛이 마주쳤을 때는 눈물이라도 왈칵 쏟아낼 뻔했다.
하나 참아 냈다.
모른 척 지나쳤다.
그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
그녀는 북해의 무후이자 대공녀의 유일한 후원자이다.
약점은 되도록 감추고 강한 모습으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그녀의 적들을 위협할 수 있었다.
하나 끝까지 모른 척할 수만은 없어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이렇게 소비를 재촉하고 있었다.
알고 싶었다.
듣고 싶었다.
그 작은 여아가 아니.
‘내 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떻게 지내왔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듣자 하니 무공도 가르치고…… 현재 중원 내에서 가장 이름을 날리는 서원이라던데요?”
“그 외로는?”
“저도 더 이상은…….”
아쉽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인 소비가 어깨를 으쓱한다.
“스승, 스승이란 자는 어떤 사람이고?”
“아, 꽤나 나이가 많다고 들었어요. 이제 불혹에 가깝다고 했던가? 불혹이라던가? 하여튼 그에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젊은 외모를 하고 있다던데요. 잘생겼고, 묵직하고. 이야기하다 보니 한 번쯤 보고 싶은데요?”
“……내가 궁금한 건 그자의 외모가 아니야.”
백서향의 독촉에, 소비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내저었다.
“아쉽게도 정말 아는 건 그게 다예요. 굉장히 신비로운 사람이라 들었어요. 못하는 게 없어 보이고, 모르는 게 없는 듯한…… 글공부도 엄청난데 무공도 제법 한다고 들었고요.”
“사람 됨됨이는 어떻대?”
“……무슨 사윗감 골라요?”
“사윗감은 아니라도 스승이라고, 내……!”
‘딸’이라는 단어를 말하려던 백서향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말할 수 없다.
어찌 말할 자격이나 있을까?
속으로 그 이름을 불러본다 한들 함부로 입밖에 내뱉을 수는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린다.
소비는 그러한 백서향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채 입술을 열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어하셨잖아요. 오늘 보면, 조금 터놓고 속내를 이야기해봐요. 또 쓸데없는 고집 부리시지 말고.”
백서향은 느릿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은 해볼게.”
자신은 없지만 힘은 내 볼 생각이었다.
장장 팔 년 만의 대면이다.
그녀도 이 만남을 허무하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상념이 오갔던가?
“……오고 있어.”
멀리서부터 자신의 방을 향해 다가오는 두 개의 기척이 느껴졌다. 첫 번째는 소비만큼은 아니지만 굳게 믿고 있는 천빙검단주 무해(武解)의 것. 두 번째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수린아…….’
마음속으로, 지난 팔 년간 수천 아니, 수만 번도 모자라게 떠올렸던 이름을 되뇐다. 굳은 마음을 먹고, 양 주먹을 쥔다.
꼬옥.
그런 백서향의 손을, 옆에 앉아 있던 소비가 강하게 잡아주었다. 떨리던 몸이 진정되며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즈음.
“모셔왔습니다.”
바깥에서부터 무해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여보내.”
대답을 차갑게 흘릴 즈음에는, 어느새 손을 놓은 소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나 있는 채였다.
직후, 문이 열렸다.
천빙무후라는 거창한 별호에 맞지 않게 작은 문 뒤로 나타난 이는, 낮에 보았던 소수린이 분명했다.
순간적으로 또 가슴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차올랐다.
‘잘 자라주었구나.’
보고 싶었다.
미안하고, 고맙다.
수많은 상념이 스쳐 지나간다.
그 끝에 떠오른 것은 은은한 분노였다.
‘하나 이곳은…….’
현재 북해빙궁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이 설치된 화고(火庫)다. 어린 소수린이 감당하기에는 끔찍하고 무서운 음모와 암계가 난무하며, 더러운 피가 흐른다. 위험한 땅이다. 그런 곳에, 겁도 없이. 무얼 믿고 들어왔단 말인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아직까지도 타파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분노한다.
그 감정이, 저도 모르게 눈빛에 서렸나 보다.
“어지간히도 제가 싫으신가 보군요.”
방으로 들어선 소수린이, 싸늘하게 묻는다.
이곳까지 불려온 이상 의심할 바는 없었다.
무관심한 척했을 뿐.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 천빙무후 백서향 역시 소수린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내가 누군지 알아.’
하나 그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지운다 결심했기에.
없어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라 생각했기에 냉정하게 잘라 낸다.
그 서늘한 목소리에 미간을 가볍게 찌푸린 백서향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닫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빨리해 주세요. 저한테는 이 자리가 꽤나 불편하거든요.”
말을 해놓고 나니, 소수린 본인도 놀랐다.
‘지운다고 해놓고…….’
태평하게 돌아서려 한 주제에 불편하다니.
이쯤 되면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라 하여도 할 말이 없다.
“나도 네가 편해서 이 자리까지 부른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상심하던 차, 백서향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소수린의 입장에서는 웃음이 나올 일이었다.
“하……, 하긴 본래부터 그런 분이셨죠. 상대방의 입장 따위는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당신이 떠난 이후, 유모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나요?”
“…….”
반박하려던 백서향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모른다.
알 수가 없었다.
저 먼 타지 중원.
어떻게 해서든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딸의 소식을 접하려 했지만 그럴 틈조차 없었다. 적은 잔인하고 교활했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였다면 당장 목을 옥죄고 들어와 숨을 앗아간다. 조금이라도 눈을 돌렸다면,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천빙무후는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이리 답할 수밖에 없다.
그 말에, 눈살을 강하게 찌푸린 소수린이 두 주먹을 강하게 쥔 채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요? 그러시겠죠. 변명이라면 뭔들 못할까요. 그런 당신을 믿고! 당신 따위를 믿고…….”
입술을 깨문 소수린이 고개를 떨어트린다.
“따위…… 라.”
백서향의 입가로는 쓴웃음이 맺혔다.
“너에게 난 그런 존재였구나.”
사실 따로 묻고 싶은 말은 많았다.
어째서 이곳까지, 이 먼 북해까지 왔느냐?
힘들지는 않았느냐?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잘…… 지냈지?
하나 그 무엇도 묻지 못했다.
대신해서 다른 생각들이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너는 그러기 위해 북해까지 왔구나.’
이런 차가운 비수와 같은 말들을 심장에 꽂기 위해서.
또 다른 말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구나.
아픈 가슴이 화끈하고 타오르며, 백서향의 가슴에 잠든 화산을 마구잡이로 일깨운다.
“그래도 딸이라고 이곳까지 왔으니 얼굴이나 보자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군. 꺼져라. 그리고 다시는, 이 북해에 얼굴을 들이밀지 마라.”
“……서향 아가씨.”
소비의 작은 목소리가 백서향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하나 이미 막힌 귀였다.
아니, 흘러들어왔다 한들 다시 흘려보낸다.
함께 눈을 붉힌 두 모녀는 서로를 노려보며 분노를 불태웠다. 터지는 감정을 마구잡이로 분출시키고 있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사라질 거예요. 저도 다시는 당신 같은 사람 꼴도 보기 싫으니까요.”
입구에 선 채 할 말을 끝낸 소수린이 등을 돌려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
그러던 차,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다시 등을 돌린다.
이후로는 한참을 고민하듯 망설이다, 결심에 찬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인다.
“저를 미워하시고, 원망하셔도 좋아요. 버리신다 한들 처음도 아니니 어색할 것도 없죠. 하나……! 하나는 잊지 마세요. 유모는, 유모는 죽는 순간까지도 당신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어요. 끝까지, 당신을…… 원망하지 말라더군요. 평생, 유모를 기억하고 살아주시길 바랄게요.”
자신의 할 말만을 남긴 소수린이 걸음을 터벅터벅 옮겨 천빙각 바깥을 향해 나아갔다.
“……붙잡을까요?”
입구에 선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해가 백서향을 향해 묻는다. 하나 돌아온 대답은 예도, 아니오도 아닌 다른 말이었다.
“연아(淵阿)가…… 죽었어?”
두 눈빛은 다시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크게 흔들린다.
언제까지나 위풍당당할 것 같던 두 다리는 마치 북해의 바람을 맞은 사시나무와 같이 떨린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무해는 잠시 소비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내젓는 그녀의 모습에 묵묵히 문을 닫는다.
덜컥.
문이 닫히는 순간.
철퍽.
백서향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연아가 죽었어, 연아가 죽었어…….”
이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되뇌었다.
“연아가…… 죽었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 * *
“빙충이 죽었어.”
빙퇴각주, 상구청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빠르게 밀실의 대담(對談)자리를 마련한 빙왕각주, 태마응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빙충이라면 자네의 집무실에 머물지 않나?”
“그렇지.”
“…….”
절로 침이 꿀꺽 삼켜진다.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아니, 실상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각주의 집무실은, 각 내(內)에서도 가장 심처에 위치한 장소다. 그러한 곳에 누군가가 몰래 들어섰다. 그것도 모자라 절정의 고수인 빙충의 목까지 베어갔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원한다면 나 역시…….’
긴장감으로 땀이 가득 쥐어진 태마응의 오른손이 자신의 목덜미를 천천히 훑었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단 사실에, 저도 모르게 목이 붙어 있나 확인하게 된 것이다.
‘언제부터 빙궁이 이렇게…….’
험악하고 무서운 장소가 되었는지.
이 모든 게 빠르게 다음 대 궁주를 뽑지 못해서다.
달리 말하자면 자신들이 이공녀를 밀어붙이며 대공녀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하나 이제 와서 멈출 수도 없지…….’
태마응의 입가로는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들은 이미 마차에 탑승한 채였다.
그것도 마부는 없고, 고삐가 풀린 말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폭주마차다.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가 없다. 폭주하는 마차 위에서 뛰어내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이제는 정말 죽기 전엔 멈출 수 없는 게지.”
비슷한 생각을 했음인가?
상구청이 입가로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연다.
“흉수는 알아냈나?”
“……전혀.”
하긴, 흉수를 알아냈다면 상구청의 안색이 이토록 사색이 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 늦은 밤에 갑작스럽게 면담을 청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테고 말이다.
“그 외에 없어진 물건이나…….”
말을 길게 늘이는 태마응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들이 이 멈출 수 없는 폭주마차에 탑승하게 된 계기.
혹시나 그것이 드러난다면…….
“다행히 패(貝)는 무사하네.”
“불행 중 다행인가.”
“그리 말할 수밖에 없겠군.”
이제 그들은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걱정을 해야만 되는 처지에 처했다. 하나 당장 목이 날아갈 상황만은 분명히 막았다. 만약 패가 사라졌고, 그러한 사실이 이공녀의 귀에 들어갔다가는…….
‘당장 이 목이 없어졌겠지.’
상구청 역시 자신의 목을 쓰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서늘하다.
그야말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공기가 빙궁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북해빙궁의 수뇌라 볼 수 있는 삼각의 각주라 불리는 인물들이 긴장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험난한 한기였다.
“우선 경비 인원을 늘리고, 조금 더 신중해지는 것이 유일한 답이겠지.”
“……가능하다면 계획도 앞당겨야 할 테고 말이야.”
상구청의 말을, 태마응이 받는다.
서로 다른 주제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원하는 바는 분명 하나였다.
빙궁 장악.
다음 대 빙궁주에 어떻게 해서든 이공녀를 올려놓는다.
그러려면 명분을 잡고 괴물, 천빙각주를 먼저 끌어내려야 한다. 남은 대공녀는 그리 어렵지만도 않았다.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덕에, 대부분의 실권은 이공녀에게 넘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받쳐주는 세력이 없다면 대공녀는 알아서 무너진다.
결국 해야할 일은 하나뿐. 그러한 대공녀를 감싸고 있는 천빙무후 백서향만 잡아내면 된다.
워낙 큰 돌인지라 치우기조차 쉽지 않지만 말이다.
“문제는 중원의 애송이 녀석이 꽤나 뜸을 들인단 말이지.”
“만만하게 보이기 싫은 것뿐 아니겠나?”
답을 하는 태마응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어린 나이가 신경 쓰이는 건가. 정의맹에도 어지간히 인물이 없긴 없나 보군. 큭큭.”
“아니면…… 정의맹이 그만큼 우리 빙궁을 우습게 본다거나?”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랴.
“이러한 일이 일어난 만큼 계획은 무조건 성사시켜야 하네. 애송이와 정의맹의 세력을 이용해 천빙각주의 목을 베야 해.”
“그 직후로는…….”
“팽이지. 다 쓴 사냥개는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지 않나?”
상구청의 입가로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지. 크흐흐.”
“큭큭.”
어차피 죽는 것 아니면, 죽여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암계가 어떻고 비겁이 어떠하랴?
역사가 기억하는 것은 남아 있는 승자뿐일지니.
“……황금세가의 대공자가 근시일 내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서로를 마주 보며 닮은 웃음을 그리는 두 노인의 귓가에,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온다. 결정은 어려울 것 없었다. 늦은 밤이고, 어두운 시간이지만 뭐 어떠랴.
“본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는 법이지. 당장에라도 좋다고 전하여라.”
“……알겠습니다.”
그렇게 보고를 올린 수하가 사라진 자리.
“아무래도……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리려나 보네.”
“그러게 말이지. 크흐흐.”
두 노인의 웃음은 밤이 늦어질수록 짙어지는 어둠만큼이나 깊어져만 갔다.
제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