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공서하의 일이 있고, 봄이 온 지도 어느덧 시간이 제법 흐른 때였다. 마현은 자신의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편지를 읽은 후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무명와룡 은사(恩師)께…….
강추웅(鋼推雄)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선생님의 이야기는 저희 명휼(銘恤)이를 통해 많이 전해 듣고 있습니다. 학문 외로도 건강에 대한 부분이나,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서까지 모두 숙고해주신다니. 참으로 감사한 마음만 깊어질 따름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으나, 배운 글이 많지 않은 무뢰배인지라 긴 이야기를 쓰지는 못할 듯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이제 서율이에게 선생님의 품에서부터 벗어나 세상과 마주하는 법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저희 강씨세가에서는 대대로…….
할 줄 아는 말이 별로 없다는 것과 다르게, 꽤나 장문으로 온 서신은 딱히 어려울 것도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짧게 줄이자면…….
‘이제 명휼이를 보내달라는 것이겠지.’
강명휼.
와룡서원에 속한 십인의 제자 중 한 명으로서, 딱히 특출난 재능을 가진 아이는 아니었다. 또한 무나, 문 어느 측에도 뜻이 서지 않아 자신의 길을 방황하고 있는 제자이기도 했다.
‘문제는 없겠지.’
아직 뜻을 정하지는 못했지만, 고민은 깊다.
또한 선천적으로 성격이 밝고 붙임성도 좋은 편이니 금방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굳이 와룡서원 내부에서만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더욱 고민이다.
보내 주어야 한다.
부모가 바라고 있으며, 본인도 문에 따로 뜻이 없으니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테두리로 하는 와룡서원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때가 된 거겠죠.”
마현의 고민을 지켜보던 구혜린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그렇지.”
마현도 알고 있었다.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올해 봄 초입에 들어선 순간 느꼈었다. 스스로 길을 찾아가고, 노력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조만간 이런 날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와룡서원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원(學園)이다.
아이들이 언제까지나 머무는 가정이 아니다.
결국은 언젠가 이리 되었어야 할 일이었다.
“명휼이는 시작일 뿐이야.”
또한, 앞으로 계속해서 일어날 일이기도 했다.
“어찌하시게요?”
구혜린의 질문에 마현은 또다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명휼은 처음일 뿐이다.
어느덧 사 년.
마현과 아이들이 함께한 시간이다.
그동안 크게 성장한 아이들은 몸도, 정신도 어느 정도 성숙에 다다랐다. 하고자 한다면 성인(成人)으로서 자신의 몫을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보내야 한다.
명휼 하나뿐만이 아니다.
더 이상 학문에 뜻이 없다면, 혹은 와룡서원이 아닌 바깥세상을 겪고 싶다면. 이제 놓아주어야 한다. 와룡서원은 아이들이 평생을 몸담고 함께 일구어 가야 할 문파(門派)나 세가가 아닌 것이다.
“보낸다, 보낸다라…….”
상상만 했을 뿐인데, 절로 탄식이 흘러나온다.
하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스승 된 입장으로서 언제까지 미련에 얽매일 수만은 없는 법.
마현은 힘들지만 하나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졸업…… 이네요.”
구혜린의 말대로였다.
* * *
소룡원.
와룡서원의 첫 제자들이 사 년이나 머문 공간은, 조금 전 다녀간 마현의 말과 함께 술렁임으로 가득 찼다. 분위기는 격동하듯 출렁이고 있었지만, 어느 하나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저마다 각기 생각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라는 말이 옳을 듯했다.
“졸업…… 이라고?”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정순욱이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비틀어진 목소리를 낸 그는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티 내기 위함인지, 곧 소룡원의 문을 크게 박차고 바깥으로 나섰다.
백산의 표정은 오묘했다.
‘나는…….’
마현이 졸업이라는 말을 남겼지만, 아직 크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또한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짐도 무겁지만은 않았다. 와룡서원은 졸업하지만, 그는 여전히 마현의 제자다.
함께 의료봉사활동에 나설 것이며, 성류의문의 무공을 전수받는다. 변한 점이 있다면 학문과 무공을 모두와 함께 갈고 닦던 공간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어……?’
생각이 꼬리를 물듯 이어지다, 마지막에 떨어진 생각에 갑자기 온몸에 오한이 돋아난다. 어색했다. 여전히 마현의 밑에서 배우고 있지만 다른 아이들이 없다. 굉장히 허전한 느낌이다. 여기서 마현까지 빠진다고 생각하면……?
‘저 녀석의 마음도 이해가 가네.’
입가로 씁쓸한 웃음이 감돈다.
정순욱은 표현이 서툰 만큼, 감정이 풍부한 친구였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다.
비교적 싫은 기분을 더 잘 표현하기는 하지만, 좋은 게 없는 것은 아니다. 백산은 알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와룡서원의 제자들이라면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정순욱은 와룡서원을 좋아한다.
그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하며, 스승인 마현을 존경하고 따른다.
‘소수린은…….’
그녀는 어떨까?
이는 백산밖에 모르는 일일 터지만, 소수린 그녀는 분명 이 와룡서원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마현에게 의지하고 있는 인물일 터였다.
그런 만큼 조금 전 마현의 졸업 소식은 충격이 클 터인데…….
생각을 하며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여제자들이 머무는 방에 가 그녀를 불러볼 생각이었다.
“……어라?”
한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침 복도 반대편의 여제자 방으로부터 소수린이 바깥으로 나오고 있었다. 백산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멀쩡하잖아?’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평소와 다름이 없을 정도였다. 백산을 보고도 그리 의아해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냥 따로 볼일이 있다는 듯 옆을 스쳐 지나갈 뿐.
“혹시 스승님으로부터 이야기 못 들었어?”
지나가는 소수린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그녀의 반응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은 탓이었다.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가던 소수린이 걸음을 멈춘다.
“졸업?”
돌아오는 이야기는 꽤나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어.”
“들었어.”
“……괜찮나 보네?”
“응.”
백산의 질문에 소수린은 별일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수린마저 떠난 소룡원 안.
혼자 남은 백산은 가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거야 원…….’
뭐가 뭔지 알 수가 있나.
차라리 속내를 알기 쉬운 정순욱이 상대하기 편할 판이었다.
* * *
마현과 구혜린은 방 안에서 서로를 묵묵히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오가는 이야기는 없다. 마치 공서하와 함께 있는 자리 같았다. 하나 그 속내는 전혀 달랐다. 오가는 눈빛은 분명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급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질질 끌 것도 없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아이들의 마음도 생각하면서…….’
‘이별이란 건 아무리 시간을 둬도 괴로운 법이야. 어차피 해야 한다면 이쯤이 딱 좋아.’
‘그렇기야 하지만…….’
이미 마현이 소룡원을 향하기 전에도 몇 번이나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쉰 구혜린이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아이들은 어때요?”
엎질러진 물에 미련을 두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이미 마현과 생활하면서 몸서리치게 배운 사실이었다.
“놀랐지.”
“……졸업식 일정은 언제로 잡았는데요?”
“보름 후.”
“마 가가…….”
“같은 말 또 반복하게 될 것 같네.”
어차피 해야 할 이별이라면 빠르게.
서신을 받고 깊은 고민에 빠졌던 마현은, 행동에 나서자 그 누구보다도 속전속결로 행동했다. 와룡서원에 정을 붙인 아이들의 입장에서야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또한 그런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현의 마음 역시…….
‘이러니 미워하거나 타박할 수만도 없고.’
차라리 모른다면 눈 딱 감고 잔소리라도 쏟아내 볼 텐데, 마현의 심정을 알기에 함부로 그럴 수도 없었다. 제자들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 한편이 아픈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
하면 마현은 어떠할까?
자신이 처음으로 연 서원에, 직접 골라, 가장 먼저 받아들여 함께 생활해 온 제자들이다.
그런 아이들을 보내는 마음은…….
‘진짜 힘드시겠지.’
끝내 한숨이 나온다.
또한 양팔은 어느덧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현의 목을 감싼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해도 돼요.”
“나와 아이들. 모두를 위해서야.”
“……내일부터는 아이들과 공부보다, 다른 대화를 많이 하시고요.”
“평소와 같은 모습이 더 편안하지 않을까?”
“다를 바 없이 공부하고, 무공을 익히면서 대화하는 틈을 더 많이 넓히면 돼요. 아이들이 좋은 기분으로 떠날 수 있게. 함께 노력해요. 저도 도울 테니까요.”
그제야, 내내 딱딱하게만 굳어 있던 마현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입가로도 흐리지만 미소가 머물렀다. 이러니 어찌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마워.”
작은 목소리를 건네는 입가로는, 진심이 담긴 감사가 흘러나왔다.
* * *
칠 주야가 흘렀다.
그동안 분위기는 제법 안정되었다.
마현이 평소처럼 행동하려 한 것도 있겠지만, 중간에 끼어든 구혜린이 완화제 작용을 해 분위기를 편안하게 풀어준 덕이 클 터였다.
제자들과는 평소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졸업 후에 하고 싶은 일, 미래의 방향성 같은 스승과 제자다운 대화에서부터. 어렸을 때 겪었던 재미있던 사건, 부모에 대한 마음, 서원 내의 아이들 중 한 명에게 몰래 연심(聯心)을 품고 있던 자잘한 대화까지.
즐거웠다.
딱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거나,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밝은 시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막바지에 더 가까워져 왔기에 그리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한 녀석만 빼놓고서…….’
정순욱.
처음 졸업식 선언을 한 날 이후로, 삼 일간이나 서원의 수업에 참석하지 않았던 불량학생은 돌아온 뒤로도 뚱하고,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현이 말을 걸어도 퉁명스러웠으며, 구혜린이 조심스럽게 다가가도 반응은 다를 것이 없었다.
도저히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
하나 정순욱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현도 알고 있었다.
그가 와룡서원을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하기에 저런 행동을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 그렇기에 더 마지막을 즐겼으면 하는 바람도 컸다.
아끼는 만큼 마지막을 좋은 추억으로 장식하기를.
밤마다 하는 의술 수업에서 백산을 통해 설득을 해보라고 부탁도 해보았지만, 바뀔 것은 없었다.
그나마 그 덕에 불량스러운 태도로나마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여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속을 참 많이도 썩이는 제자다.
또한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아이이기도 했다.
‘어찌해야 하나…….’
남은 시간은 이제 반절 정도.
매일 밤 구혜린과도 대화를 나누지만 이렇다 할 명답은 딱히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렇게, 마현의 고민이 깊어만 가는 시간이 며칠이나 더 흘러갔다.
* * *
어느덧 와룡서원 첫 번째 기수 제자들의 수업도 삼일 밤낮밖에 남지 않았다. 제자들은 그동안 나름대로 마음을 정리하고, 생각을 다듬었다. 마지막 졸업식 날 마현과 구혜린에게 전해주기 위해 서신을 쓰는 아이들도 몇몇 보였다.
그 와중에도 태도가 변함없는 이를 뽑자면 역시 정순욱이었다.
그는 초지일관(初志一貫), 수업에만 참석할 뿐 아무런 호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름대로 졸업을 기대하기 시작하며, 하하 호호 떠드는 아이들을 보고는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좋냐? 그렇게 시시덕거릴 정도로?”
“엄청나게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까.”
퉁명스럽게 나오는 말투에 적응한 아이들은, 그를 무난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어차피 정순욱 역시 안타까운 마음에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걸 잘 알기에 받아들이기 훨씬 수월한 탓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쳇.”
혀를 찬 정순욱은 곧, 평소와 같이 방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향했다.
‘이거 참…….’
그를 지켜보는 백산의 입장이야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마현의 부탁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마당인데, 정순욱도 워낙 고집불통인지라 말을 들어 먹지를 않는다. 기왕이면 좋게 끝내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이야기에는 그저 콧바람을 차며, ‘흥, 기왕이면 이라는 편한 단어가 네 입에서 쓰일 줄은 몰랐군.’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흘기며 답할 뿐이었다.
‘난감하다…….’
하나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지켜보기만 할 수도 없는 것 역시 사실. 마현의 부탁을 생각하면 진짜 뭐라도 해야 할 때다. 그리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멀어져가는 정순욱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늦은 밤길을 걸은 것 같았다.
정순욱이 도착한 곳은 무명현 남측을 조금 더 벗어나면 있는 바닷가였다. 바다는 넓다. 심지어 봄의 바다라면, 그 평안함이 마음 깊숙이까지 물들 정도다. 따뜻하다.
그 풍취에 취한 듯, 서원에 있을 때에 비해 조금은 풀린 표정이 된 정순욱의 입가로 씁쓸한 미소가 감돌 때였다.
‘지금…….’
며칠간 밤에 나설 때마다 뒤를 쫓아 보았지만, 이리 멀리까지 나와 저러한 표정을 지은 적은 처음이다. 기회가 있다면 지금뿐. 그리 생각한 백산이 숨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보기 좋네.”
그보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가 있었다.
낮고 차가운 목소리.
하나 현재 와룡서원 남자 제자들의 반수 이상의 마음을 쥐고 흔들고 있는 서원의 꽃, 소수린이었다. 그녀는 냉담한 표정으로 정순욱의 뒤로 다가가고 있었다.
잔잔하게 부는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소수린에게 연심을 느낀다는 다른 아이들의 마음도 모를 수만은 없을 정도였다.
섬섬옥수(纖纖玉手)라는 말이 어울리는 새하얗고 가냘픈 손.
커다란 눈망울…… 남자 제자들 몇몇 표현을 따르자면 밤하늘의 별빛을 담은 눈이라던가?
어찌 됐든 그러한 눈빛에, 고운 피부, 선명한 아미와 오뚝 솟은 코. 열여섯의 소수린은 분명 아름다운 여인에 가까워져 가는 모습이었다. 밤바다라는 배경에, 달빛이라는 조명 아래에 선 탓뿐만이 아니었다.
‘진짜 예쁘네…….’
백산으로서도 그리 느낄 수밖에 없을 만큼.
소수린은 아름다웠다.
그러고 나니 또 다른 의문도 들었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아니면 지금 막 도착한 걸까?
하나 당장 그를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또한 궁금증 거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소수린이 먼저 정순욱에게 말을 걸었다.
전혀 없는 경우는 아니지만, 흔치 않은 일이기도 했다.
“흥…….”
정순욱의 반응은 냉담했다.
입가로 감돌던 알 수 없는 미소도 완전히 감춰진 뒤였으며,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진다. 둘 다 얼굴에 큰 표정이 없지만, 차이점은 분명했다. 소수린의 얼굴이 정말 감정하나 느끼기 힘든 냉안(冷顔)이라면 정순욱의 표정은 열기를 감춘 가면에 불과하다.
“어린아이 같기는.”
그런 정순욱을 향해, 이토록 당당히도 애 같다고 말할 수 있는 제자는 분명 소수린뿐이리라.
“…….”
발끈한 표정이 된 정순욱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몇 번이고 오므리고, 폈다를 반복하다 곧 고개를 홱, 하니 돌려버렸다.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삼 일밖에 남지 않았어.”
“…….”
“네가 그러니까 아직까지 백산을 못 이기는 거야.”
“그게 무슨 헛소……!”
소수린의 도발적인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제자리로 돌리며 목소리를 높였던 정순욱이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그럴 수밖에. 내용은 도발적이었지만,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딱히 표정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굳이 변화라고 친다면.
‘역시 이 말이면 돌아볼 줄 알았지.’
정도랄까.
덕분에 화를 내던 것도 허무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착각하지 마. 주변 녀석들이 예쁘다고 거들어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나 본데…….”
“그런 마음 없어.”
소수린의 대답은 냉정했다.
또한 굳이 따질 것도 없었다.
정순욱은 장담하고 말할 수 있었다.
서원 내에서, 뛰어나면서도 가장 말이 없는 그녀는 누군가에게 으스댄 적이 없다. 자신을 스스로 알리지 않는다. 자랑이란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거들먹거린단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백산의 이야기에 욱해서 던진 말에는 설득력이 조금도 없었다.
“쳇……!”
역시,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놈의 와룡서원이라는 곳은 어느 것 하나 다를 바 없이, 모두 똑같아. 기분 나빠. 짜증 나. 황당하고, 제멋대로지! 남의 마음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물처럼 다 알아서 흘러갈 것 같나 보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 좋지. 천하의 무명와룡 선생께서 못하시는 게 어딨겠어. 도대체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뭐……?”
“황당하고, 제멋대로, 남의 마음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것. 네 전문 아니야?”
“……그, 그건…….”
“너 편한 대로만 사는 것도 같아.”
부르르.
정순욱의 온몸이 떨렸다.
별로 길게 하는 말도 없는데, 정말 정곡만 잘 짚어 낸다.
정순욱도 바보는 아니니 알고 있었다.
본인이 내뱉은 말이, 정작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는 사실도 말이다.
“크으…….”
그렇다 보니 반박은 못 하고 쓴소리밖에 내뱉지 못한다.
예전부터 그랬다.
따질 거 다 따지고, 건방진 주제에 옳은 말 앞에서는 알게 모르게 작아졌다. 그런 정순욱을 보며, 입가로 피식하는 미소를 지은 소수린이 말문을 이었다.
“딱히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용인해줄게.”
“……또 무슨 헛소리야.”
“네 편한 대로 하라고. 해보잔 거지.”
“너……?”
소수린의 목소리가 은근하다.
장담컨대, 와룡서원에서 생활한 지 사 년 차인 지금까지 소수린의 이러한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분명 무언가 속셈이 있는 게 분명했다.
“방법이 있는데, 궁금해?”
“…….”
“듣고 싶지 않나 보네?”
“드, 듣고 싶다.”
“조금 더 간절히 부탁해봐.”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었던가?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정순욱은 당황의 연속이었다.
하나 어쩔 수가 있겠는가?
‘궁금한 건…….’
사실이다.
“드, 듣고 싶어. 무슨 방법인데?”
왠지 모르게 휘둘리는 것 같은 기분도 드는 것 같았지만…….
“조건이 있어.”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했으면 편했잖아!”
“나 그냥 가도 되지?”
“…….”
“첫째. 앞으로 스승님을 비꼬는 듯한 그런 말투 하지 마. 정말로 불쾌해졌었으니까.”
소수린의 말투는 칼날보다도, 빙궁이 존재한다는 북해의 얼음보다도 차가웠다.
그녀가 정말로 화를 낸다면 이런 기분일까?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지는 느낌에, 입가로 기다란 미소를 걸친 정순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뭐, 어차피 욱해서 한 말이었으니까.”
“다음부턴 욱해서도 용인 안 해.”
“여차하면 한번 붙어볼 기세네?”
“못할 것 같아?”
소수린의 눈빛이 변했다.
투기(鬪氣).
해보자면, 정말로 싸움도 불사하겠다는 모습이다.
그에 어깨를 으쓱한 정순욱이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됐다. 계집이랑 무슨…….”
“둘째, 졸업식 전까진 스승님 말에 따라. 수업에도 적극적으로 참관하고. 웃기도 좀 하고.”
“네 욕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거냐?”
“응, 아니. 둘 중 하나로만 대답해.”
“나랑 말하면 피곤하단 그 표정은 뭐냐?”
“……제법 눈치가 빠르네.”
역시, 생각 외로 사람을 발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정순욱은 입가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하지.”
이제는 궁금증보다는, 소수린의 기세에 밀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입장이었다. 하나 나쁘지만은 않다. 천하의 정순욱이 누군가의 말에 휘둘린다는 건 영 내키지 않지만…….
‘이 녀석은 묘하게 그런 분위기를 잘 만드는 것 같단 말이지.’
소수린 정도라면 인정할 수 있을 지도…….
그런 생각이 들이차려는 찰나, 재빨리 고개를 내젓는다.
말도 안 된다.
그는 정순욱이었다.
그야말로 천하의 정순욱!
“좋아. 방법을 이야기해줄게. 답은 간단해. 바로…….”
소수린의 말이 이어지고, 그녀의 기세에 밀린 것을 부정하려던 정순욱의 눈이 크게 뜨인다.
“뭐어……!?”
숨어서 지켜보고만 있던 백산이 커다란 덩치를 벌떡 일으킨 것도 그 순간이었다.
“이로써 공범자는 셋이네.”
소수린의 입가로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그야말로, 도저히 불복을 떠올릴 수 없게끔 하는 여왕의 웃음이었다.
제육장